김용의 선교사 저서 분석 (1) 『다시 복음으로』에 대한 북리뷰
김용의 선교사 저서 분석 (1) 『다시 복음으로』에 대한 북리뷰
  • 박진기 기자
  • 승인 2018.08.23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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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복음으로 결론짓는 삶
▲지난 6월 8일 예장합신 총회 이단대책위원회가 주최한 순회선교단 김용의 선교사에 대한 공청회에서
▲지난 6월 7일 예장합신 총회 이단대책위원회가 주최한 순회선교단 김용의 선교사에 대한 공청회에서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 순회선교단 대표였던 김용의 선교사와 복음학교에 대한 공청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총회(총회장:박삼열)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위원장 유영권 목사) 주관으로 지난 6월 7일 오후 2시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그레이스홀에서 개최됐다.


예장합신 총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는 김용의 선교사와 복음학교에 대해 △2014년 4월=합신 수원노회에서 김용의 선교사에 대하여 조사를 청원, △2014년 9월 총회=신학위원회로 보내어 조사하기로 결의, △2014년 9월 총회=신학위원회 보고를 참고로 받기로 하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에 보내어 연구 보고하기로 함, △2016년 9월 총회=판단을 1년간 유예하기로 함, △2017년 9월 총회=김용의 선교사에 대한 공청회를 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진행됐다.

이에 성경과삶이야기 <울림>은 당시 발제자 였던 예장합신 이대위의 김성한 목사, 박형택 목사, 순회선교단의 박종진 선교사의 발제물과 총신대신대원 박재은 강사의 신학적 자문 글을 차례로 게재한 바 있다. 또한 관련 내용들은 오는 9월 11~14일 천안 고려신학대학원 대강당에서 열릴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총회장:김상석) 제68회 정기총회에 상정돼 안건으로 다뤄질 예정으로, <울림>에서는 김용의 선교사의 저서들의 내용을 분석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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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잃어버린 인생은 마치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예루살렘처럼 폐허 같고 상하고 척박해진 소망 없는 땅과 같습니다. 무엇으로 그 땅을 치유하며, 에덴의 아름다움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고,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키며,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하겠습니까? 누가 이런 희망을 줄 수 있습니까?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바 된 복음 그 자체이신 분, 바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는 책의 부제 아래 조그맣게 적혀 있는 글귀이다.

『다시 복음으로』라는 제목 역시 저자가 무엇을 강조하고자 하는지 독자인 필자로 하여금 짐작 가능토록 인도한다. 따라서 필자는 본 책 안에 저자가 서술한 예수와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복음에 관한 이야기가 무엇을 향하여 서술되고 있는지 이해하고자한다. 이것은 절대 믿음과 이로부터 수반되어지는 헌신에 관한 이야기이며 궁극적으로 예수 안에서 조건 없이 연합함으로써 타인을 위하여 섬기는 선교의 완성을 향해간다. 만약 필자의 이러한 이해가 잘못 된 이해라면 이건 필히 필자의 부족함 때문일 것이다.

 

김용의, 『다시 복음으로』 (예수전도단, 2013)
김용의, 『다시 복음으로』 (예수전도단, 2013)

 

김용의가 말하는 절대 믿음에 대한 이해

저자는 처음 서두의 글에서 “하나님의 거룩은 죄와 공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의 몸에 그냥 거룩한 성령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불로 소멸해 버릴 수 밖에 없다.”는 말을 한다. 이러한 원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이 필요하고 말한다. 그래야만 내 안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거룩한 하나님이 내 몸을 성전 삼아서 오셔도 괜찮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서 8장 1-2절의 말씀을 인용하며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한 것임을 서술한다. 그는 죄의 문제를 해결한 비밀을 ‘십자가의 도’라 말한다. 또한 복음의 내용을 믿는 것은 진리를 믿는 것이며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일이 무슨 일인지, 도대체 무엇을 갚아 주셨는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복음에서 내 안에 허락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믿어야 온전한 믿음이라 말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줄 곧 십자가가 실제가 되어있는지를 회중으로 하여금 확인한다. 자칫 잘못하면 십자가를 형상화하여 우상으로 삼는 것은 아닌지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이야기를 쭈욱 들어보게 될 때 그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회중의 삶 가운데 어떤 영향을 미쳐왔으며 이로 인해 어떠한 변화를 맛보았는지 그러한 경험을 묻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를 너무나 당연하게도 ‘구원자’로 표현하고 있으며 구원이란 우리를 죄와 사탄에게서 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하는 능력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난이나 질병 등 어떠한 상황에서 구원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서 구원받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으려면 정확한 복음을 들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야기가 아닌 성경이 말하는 복음 즉, 하나님이 나에게 주고자 하시는 예수를 만나야 함을 말한다. 만약 이러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복음을 믿는다고 생각할 때, 그는 나를 움직일 수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복음을 믿는 것은 지식적 동의로만 믿는 것이 아닌 전 존재적인 믿음으로 화합하여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나의 실제가 되는 것으로써 ‘믿음’을 말한다.

필자는 저자의 이러한 이해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생각한다. 또한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신자의 삶 가운데 어떠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지적하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그가 줄 곧 인용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을 따라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했고, 주님의 부활에 연합한 것임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단지 그가 우리로 하여금 경고하며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자기 확신에 의한 것이 아님에 대한 강조이며 오로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성도와 아직 교회 밖에 있는 사람 모두에게는 공통적으로 주님 없이 가는 길 곧 ‘믿지 않는 것’에 대한 죄가 가장 큰 위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어떠한 선택을 하든지 마땅한 책임을 면제받을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올바른 믿음을 간구해야 한다. 이 ‘믿음’에 대한 근거는 체험이 근거 되지 않으며 오히려 주님의 약속 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성경에 기록 된 “내가 너와 함께하느니라.”는 약속 곧 임마누엘에 관한 이야기가 주님의 완전한 십자가 공로 곧 변함없는 약속에 있는 것임을 말한다. 올바른 믿음으로 복음을 듣게 될 때 세상이 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의 모습이 아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안에 있는 완전한 연합으로 한 운명이 된 모습이다.

이러한 믿음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며 저자의 표현대로 “믿음이 결론되고, 진리가 결론되게 하십시오.”라는 뜻은 현실적인 상황 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며 어떠한 상황 속에 있더라도 감당하며 주님 앞에 우리의 믿음을 100%드릴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믿음인 것이다.

 

전적 헌신은 무엇을 말하는가

전적 헌신에 대한 동기부여를 저자는 초대교회 시절 에베소 교회로부터 찾는다. 에베소 교회의 선한 행위를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에 잃어버린 그들의 사랑을 회복하라 명하셨다는 것이다. 수 많은 사람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을 것이라 저자는 판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에 주님이 찾아오신 날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주님을 만난 첫사랑의 감격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메시지는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켜야 함을 말한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결코 주님의 마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잘못 된 것으로부터의 돌이킴 곧 회개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가능하다. 성령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로 안내한다는 것이다. 예수에 관한 기록 된 복음을 저자는 총체적인 복음이라 말한다. 이러한 복음은 신학 교리나 훈련을 통해서 실제 된 것이 아닌 오로지 성령 안에서 경험 된 것을 말한다.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소욕에 사로잡힌 우리의 죄 된 모습이 죽음에 넘겨지고 새로 거듭나는 영광이다.

“신학 교리나 훈련을 통해서 실제가 된 것이 아니다.”는 저자의 말은 자칫 잘못하면 신학무용론으로 들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의 논리를 따라 가다보면 이러한 지적은 과거 1세기 바리새인들의 지적인 교만으로 예수의 영광을 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풍자임을 알 수 있다. 저자의 이러한 풍자에 그 나름대로 귀를 기울일 이유가 있다. 사소한 논쟁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본질이 가리워질 위험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헌신에 대한 필요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 곧 구원에 관한 은혜로부터 온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하나님께 은혜 받은 자로서 성도가 해야 할 감사는 받은 은혜에 대한 기억이라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가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헌신에 대한 예로 요셉과 오병이어의 사건을 비유한다.

이러한 예는 이어서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사람을 준비시키신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요셉이 창고문을 열어 고향의 백성들에게 양식을 베풀었던 것과 예수의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 빈 들에 앉아 있는 수 많은 무리에게 양식이 채워졌던 것 모두 하나님이 준비하셨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논리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가 나의 인생에 무엇을 바꾸셨는지를 묵상해야 한다. 저자도 이러한 점에서 정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개인이 추구하던 방향과 전혀 다른 변화가 있었을 것임을 말한다. 실제로 저자의 말대로 한국교회는 지난 역사 동안 수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그러나 예배당 건물의 화려함과 교회의 부흥 안에 침투한 소비주의와 같은 문제가 숱한 것은 어찌함인가!

이러한 사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저자는 복음이 복음되게 하기 위해 교회가 헌신해야 할 일이 있음을 지적한다. “성경 읽기, 기도, 순종”이다. 이 모든 것은 복음 안에 세분화 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에 순종해야 함이 마땅한 것이다. 물론 성도 스스로 신앙이 성장하도록 교회는 도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 그 발걸음을 떼기 전, 우리에게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 염려와 두려움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조건에 따르면 어느 하나 떳떳 할 수 없는 사람이 허다할 것이다. 그러나 유독 이러한 사람들이 많았던 곳 역시 교회이다. 하지만 작금의 교회의 모습은 점점 엘리트주의를 지향하며 교회 안에 시시비비하게 차별을 하는 모습을 본다. 이러한 연유에서 사람이 갖는 염려와 두려움이 하나님의 영광의 손바닥을 가리 우고 있음은 분명하다.

저자는 교회의 가장 큰 위기가 거룩함을 잃어버리는 것이며 2013년도 당시 교회의 모습을 이와 같은 모습으로 진단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한 선교전략이 지금도 무수한 가운데 그 내막을 들여다본다면 그 어느 하나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다. ‘화려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흥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교회는 부흥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재정의해보아야 한다. 어쩌면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부흥은 거룩의 회복일지 모른다.

절대 믿음이 수반 된 사람에게 헌신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이루심이 분명하다. 교회 안에 부흥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이러한 부흥을 이루어가는 주역들을 꿈꾸는 자들이라 말하며 이들에 신앙고백이 주님이면 충분하다는 사랑의 고백일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임을 표현한다. 따라서 절대 믿음과 전적 헌신은 분리 될 수 없으나 구분 가능하다 말 할 수 있다. 이 말은 곧 믿음 없이 헌신 할 수 없으며 헌신 없이 믿음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조건 없는 연합과 섬김이 어떻게 가능한가.

성부로부터 받은 한량 없는 은혜, 우리는 이 은혜에 대하여 자격 없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그리고 이 은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그렇지만 과연 이러한 사실이 우리의 삶 속에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는지 살펴볼 때, 저자의 진단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는 절망이 있을 때 비로소 조건 없는 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절망을 깊이 깨달을 때 비로소 나는 온전히 죽고 예수가 내 안에 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금 지나친 표현과 말일 수 있으나 앞 전에 저자가 주장해왔던 대로 ‘자기절망’은 복음을 경험하기 위한 통로이다. 그러나 자기절망에 모습과 종류는 다양하다. 그렇지만 복음을 경험하는 것 곧 예수를 믿음으로 중생하는 것은 우리에게 분명히 조건 없이 주어진 은혜임은 분명하다. 적어도 조건 없는 연합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만 큼은 조건이 없는 것이다. 다만 사람의 관점에서는 조건이 따른다고 생각된다. 예수께 나아오는 것 곧 복음을 들음으로써 중생한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을 저자는 주의 말씀대로 형제를 사랑함으로 나를 사랑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말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항해하며 복음을 전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저자는 줄 곧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명은 하나님을 사랑함이 있는 자에게 가능한 것임을 말한다.

저자에 이러한 표현과 강조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 ‘선교’임을 일깨워준다. 선교의 모습은 외향적으로 먼 타국으로 나아가는 것일 수 있으나 교회 안의 선교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에 대한 해석은 성도의 자유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교회 안의 선교와 교회 밖의 선교를 총칭하여 선교만을 설명함은 자칫 잘못하면 순교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모습으로 비출 수 있다는 점에서 염려가 된다.

 

선교 완성에 대한 재고 

절대 믿음과 전적 헌신에 대한 설명이 된 후 저자는 조건 없는 연합과 섬김으로 선교완성을 이어간다. 이 네 가지 틀이 어쩌면 김용의 선교사가 생각하며 이해하는 복음에 대한 원리이지 않나 생각된다. 믿음의 대상과 헌신에 당위성 이 두 가지는 조건 없는 연합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어야 할 선교완성이 성도의 사명인 것이다.

이러한 성도의 사명에는 주님의 동행이 반드시 있는 것이며 선교에 대한 애절한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선교파송 2위의 명예를 누리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 다시 선교의 본질을 생각해보아야한다. 교회를 향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말이다.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자기 확신에 따른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선교는 또 다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절망을 맛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교회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애절하다 표현하였다. 선교를 하기 위해서 성도의 강하고 담대함 그리고 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저자의 말처럼 필요하다. 복음을 통해 주를 사랑하는 열정이 다시 뜨거워지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갈무리하며

요즘 부쩍 김용의 선교사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가 정말로 ‘나의 복음’이라는 것을 통해 공개 죄 자백을 말하며 강압적으로 강요하는 분위기를 띠고 있는지와 완전성화 곧 완전주의를 말하고 있는지에 관해 이의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필자가 설교문을 옮김으로써 편집한 이 책을 보았을 때에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나의 복음과 완전성화에 대한 이해는 정확하게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원형’이라는 표현과 절대적인 것과 전적인 것에 대한 이해로써 줄 곧 믿음과 헌신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성화로 이해했나?’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을 쭉 읽어 나가다보면 그는 여전히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오죽하면 존재론적으로 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겠는가.

'나의 복음'이라는 표현 역시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에 대한 문제로 제기 될 수는 있으나 가장 큰 문제점은 ‘나의 복음’이라는 표현을 실질적인 용어로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러한 용어 사용에 결코 악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복음에 대해 이해하기를 “십자가에 못 박히사 다시 부활하신 예수를 경험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경험이 실제 된 것을 강조하고 있음으로 이로부터 파생 되어 사용하는 용어가 나의 복음인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경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에게 자칫 잘못하면 ‘거듭나야 한다.’는 중생의 원리가 ‘복음’이라는 단어 하나에 환원될 위험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위 책에서 ‘나의 복음’이라는 것에 관한 설명이 있는 것은 아니나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것에 대한 표현이 나온다는 점에서 저자의 의도는 이해하겠으나 ‘신앙의 성숙’이 미진한 교회 안에 성도들에게는 ‘환원주의’로부터 오는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으니 나의 복음이라는 용어에 대한 표현은 수정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크다.

「다시 복음으로」라는 책의 제목과 내용은 교회에 존재목적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교회를 섬기는 목적과 세상을 향한 헌신으로써의 성도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우리 모두의 모습에 저자가 던지는 엄중한 질문임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이 정화되지 못한 채 거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모두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만 한 논리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통일 된 것이 있다면 예수에 대한 열정과 사랑 그리고 헌신이 저자에게서 묻어나온 다는 것이다. ‘다시 복음으로’라는 슬로건을 따라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만을 두려워하는 삶으로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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