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회 총회의 역사신학적 의미
제103회 총회의 역사신학적 의미
  • 임희국 교수 (장로회신학대학, 교회사)
  • 승인 2018.10.16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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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국 교수 (장로회신학대학, 교회사)
▲임희국 교수 (장로회신학대학, 교회사)

제103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통합교단, 2018.9.10.-13, 이리신광교회)는 목회지 대물림(세습) 금지에 관한 교회의 시급한 현안과 사회적 관심에 신실하게 응답했다고 본다. 명성교회 부자(父子)세습을 용인한 총회 재판국의 보고(“결의무효소송 기각 판결”)가 잘못되었음이 인정되고 재판국원 전원이 교체되었다. 이로써 총회는 제103회기 총회 재판국으로 하여금 이 건을 재심(再審)케 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2017년의 11월 12일(주일)에 실시된 명성교회의 부자세습은 그 이후로 1년 동안 우리에게 ‘교회가 무엇이며 또 한국 장로교회의 체제는 어떤 것인가?’ 진지하게 물어보도록 촉구했다. 이 질문은 2천년 그리스도교의 신앙유산과 전통으로 내려오는 ‘공(公)교회’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매 주일 예배마다 신앙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공(公)교회를 믿사오며”이다.

 

I.

사도신경 신앙고백은 -그리스도교의 교회들이 주후 3세기 지중해를 둘러싼 3개 대륙(남유럽, 북아프리카, 소아시아)에 널리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다양한 민족 다양한 언어의 그 교회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주님으로 고백하며 하나(일치)되게 했다. 이것이 공(公)교회였다. 공교회는 전 세계의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one)인 동시에 보편(catholic) 교회로서 사도의(apostolic) 전통을 잇는 거룩한(holy) 교회였다.

이때의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법적 공인을 받은 ‘밀라노칙령’(주후 313년) 이전 시대였기에, 물론 아직 국가교회가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의-보편적-사도적-거룩한 공(公)교회는 주후 3세기이래로 그리스도교의 표징이자 전통이며, 지금도 매 주일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교회이다.

사도신경의 공(公)교회는 사도시대 부터 교회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도는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신앙고백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참고, 요 2: 19-22; 고전 12:27).

만일 오늘 21세기 한국 교회에서 세습이 감행될 경우엔, 세습한/하는 교회는 2천년 그리스도교의 신앙 유산으로부터 단절될 뿐만이 아니라 이 교회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사적(私的) 집단이 될 것이다. 세습한/하는 교회는 이에 따라 공(公)교회가 아니므로 예배 중에 사도신경 신앙고백을 할 수 없게 된다. 교회 세습은 공교회의 표징을 해치는 행위이다.(현요한) 더욱 심각한 일은, 교회 세습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부인하는 행위이다.

그리스도교가 국가교회체제를 가진 중세시대에는 공(公)교회성이 변질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국가의 기관이 되었고 또 교회자체는 거대한 기구와 체제로 바뀌면서 공동체성을 잃어버렸다. 단지 기구로서 존재하는 교회였다.(홍지훈) 중세시대 초반에는 정치권력을 쥔 영주와 황제가 교회를 지배했고 중반 이후에는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을 함께 쥔 교황이 교회를 지배했다. 이때의 그리스도교는 교황이 정점에 있는 피라미드 형태였다.

중세시대 전체가 흑암의 역사로 평가될 수는 없겠으나, 14세기 영국의 위클리프(John Wiclif)는 교황이 지배하는 교회를 암흑시대 “적(敵)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공격했다. 교황이 그리스도의 적(敵)라는 뜻이다. 오늘 21세기에 세습한/하는 교회를 위클리프의 비판에 대입해 본다면, 세습한/하는 교회를 지배하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위클리프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거하여- 교회를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의 공동체(communio praedestinatorum)라고 보았다. 국가교회체제를 정면으로 거부했던 것이다. 위클리프의 현실 교회비판은 15세기 체코의 종교개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또한 체코 후스(J. Hus)의 종교개혁은 그 다음 세대에 서부 유럽으로 파급되었다.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 교회의 사면(赦免) 제도를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비판의 동기는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 1503-13)가 베드로대성당의 건축을 위하여 발행한 소위 “베드로사면부”에서 비롯되었다. 사면부를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이 오직 교황에게만 있었다.

이 사면부를 교황 레오 10세(Leo X, 1513-21)가 1515년 막데부르크와 마인츠지역 대주교 교구에 판매하도록 대주교 알브레히트(Albrecht)에게 넘겼다. 레오 10세는 사치한 교황으로 이름을 날렸고 성직 매매와 사면부 판매로 재산을 모았다. 1517년에 신부 테첼(Johannes Tetzel)이 독일 비텐베르그에서 사면부(연옥에 있는 죽은 영혼을 위한 죄사면)를 판매했다. 그런데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대주교직을 돈으로 샀는데(성직매매), 그때 그는 자금 마련을 위해 푸거가문의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그러한 그에게 사면부 판매는 은행 빚을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알브레히트는 사면부 판매 대금의 일부를 사전 계약에 따라 자기 주머니로 가져갔다.

이리해서, 사면 제도에 대한 루터의 비판은 한편 로마 교황청-알브레히트 대주교- 푸거가문의 은행이 서로서로 검은 돈의 고리로 엮여있는 구조를 공격한 것이기도 했다. 이것이 1517년 10월 31일95개 논제(‘사면부 효력의 선언에 대한 논제'(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이었다. 방금 언급한 성직 매매는 그 당시 교회의 오랜 관행이었다.

스위스 취리히 종교개혁자 츠빙글리(H. Zwingli)에 따르면(1524년, 『츠빙글리 저작 선집』 1, 440-441쪽): 교황과 세속 영주(제후)들이 주교좌 성당의 주교 자리와 수도원 원장 자리에 귀족집안(백작, 남작 등) 출신을 앉히기로 합의했는데, 그 이후로 영주와 귀족이 이곳저곳에 주교좌 성당과 수도원을 신설하는데 동의했다.

이유인즉 장차 그들의 자녀가 주교좌 성당의 주교와 수도원의 원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교직과 원장직은 부와 재산증식이 보장된 자리였다. 이런 식으로, 성직 매매는 교회의 세습과 재산축적이 결부되어 있는 구조적 문제였다. 한국 교회들의 세습 또한 종종 그 이면에는 드물지 않게 돈과 권력의 세습일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II.

한국 장로교회는 그 출발부터 공(公)교회였다. 1893년 3개국(미국, 호주, 캐나다) 장로교회에서 각각 한국(대한제국)으로 파송된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공의회(Council)를 조직하면서 공(公)교회가 시작되었다. 이 선교사공의회가 1901년 한국인 총대도 참여하는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로 발전했고, 이것이 1907년 9월 17일 ‘조선전국독(립)노회’(이하, 독노회)의 창립으로 발전했다. 이로써 한국 장로교회가 공(公)교회로서 본궤도에 올라섰고, 5년 뒤 1912년에 총회가 창립되었다.

장로교회의 치리구조는 당회, 노회, 총회로 이어지는 체제로 완성되었다. 총회는 독노회의 신경 소요리문답 정치규칙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그리고 총회의 헌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1922년의 총회는 웨스트민스트 정치원리를 채택하여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는데, 여기에 담긴 정치원리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다.

(서원모): 1. 대의(代議)제도(투표로 선출된 직원에 의해 교회가 운영된다. 교인이 항존직 직원을 선거로 선출하는 권리를 갖는다. 상급 회의에 총대파송), 2. 집단지도체제(교회가 목사나 장로 혹은 어느 개인의 결정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치리회의 집단 지도체제로 운영. 노회가 임직한 목사와 개 교회 교인 대표인 치리 장로가 함께 치리회를 조직), 3. 입헌주의(장로교회는 헌법에 따라 다스려진다. 1922년 제정된 헌법에는 신앙고백서(신경, 소요리문답)와 규례서(예배모범, 권징 조례, 교회정치)로 구성되었다), 4. 관계주의(장로교회는 홀로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온 세계의 장로교회가 마치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엡 4: 5-6)).

이렇게, 한국 장로교회가 공(公)교회로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내려 왔다. 한국 장로교회의 이러한 전통을 성찰하면, 교회 세습은 공(公)교회의 유산을 훼손시키고 교단의 질서를 와해시키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특정 명성교회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산업화시대 이후에 한국 개신교에서 확산된 개(個)교회 중심주의가 공(公)교회를 파편화 시켰고 또 양적으로 급성장한 대형교회의 물리적(재정) 힘이 공(公)교회의 질서를 훼손시켜 왔다는 점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번 제103회 장로교회 교단(예장통합) 총회가 임박하자, 정확히 80년 전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총회에 대한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당시(1938) 제27회 총회가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 했는데, 금번에는 다른 형태의 신사참배인 돈과 권력의 교회 세습을 용인하는 총회가 될까봐 우려되었다. 총회가 맘몬의 우상에게 굴복하는 “제2의 신사참배”를 결의하지 않도록 기도했다.(최삼경)

1938년 일제의 전시(戰時) 군국주의에 굴복한 총회의 신사참배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무너뜨렸다. 첫째로는 예배가 무너졌다. 신사참배 이후 장로교회 총회는 먼저 궁성요배와 황국신 민서사를 제송하고, 그러고 나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유지되었으나 그것은 형체뿐이 었고 신앙은 무너졌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1계명의 신앙이 무너졌다. 둘째로는 헌금이 무너졌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제27회 총회는 국방헌금을 걷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500원을 걷었다. 그 헌금은 일제의 전쟁비용으로 바쳐졌고, 이제부터 교회는 전쟁에 동원되었다.

심지어는 장로교회 총회가 일제 해군에 전투기(“조선 장로호”)를 헌납했다(1942년 9월). 각 가정의 부엌 살림도구인 유기(놋그릇)도 교회가 거두어서 당국에 갖다 바쳤다. 교회 종각의 종도 떼어서 당국에 갖다 바쳤다. 이처럼 신사참배 이후의 교회는 전쟁의 도구가 되었다. 교회는 일제의 전쟁승리를 위해 기원해야 했다.

마지막에는, 일제가 전쟁물자 수급을 위해 전국 교회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일제는 전국의 면 단위로 1개 교회만을 남겨놓기로 하고 교회합병을 강제로 추진했다. 교회의 통폐합으로 비게 된 예배당건물 등의 부동산이 매각 처분되었고, 그 판매 대금은 국방헌금으로 바쳐졌다. 그 바람에 적지 않은 교회들이 사라졌고 또 통폐합된 노회들도 있었다. 교인의 수도 크게 줄었고 또 교세도 위축되었다.

이런 식으로, 신사참배는 신사(神社)에 가서 허리 굽혀 절하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예배당까지 매각 처분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교회 총회는 살아남지 못했다. 1945년 7월 19일 장로교회를 비롯한 개신교 교파들이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으로 완전 통합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광복)과 더불어 한국 장로교회와 총회가 다시 살아난 것은 신사참배에 끝까지 저항한 순교자들, 출옥성도들, 그리고 여성들(여전도회) 덕택이었다.

오늘, 새로운 형태의 신사참배가 한국 교회의 신앙 정신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현대판 신사참배, 그것은 맘몬 곧 돈의 힘 앞에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것이다. 우상 숭배인 맘몬은 번영신학, 물신주의와 연계되어 있다.

한국 장로교회는 지금 당장 성령의 역사 속에서 근원으로(Ad fontes)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 근원은 하나님 말씀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요한복음 2장 13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타락 현실을 지적하셨다.

제물을 팔아서 이득을 남기는 장사꾼, 돈을 바꾸어주고 환차이득을 챙기는 환전상, 그들에게 자릿세를 받는 제사장, 이들 모두가 돈을 주고받는 가운데 맘몬의 권력에 지배되었다. 그 권력을 예수님이 지적하셨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예수님은 맘몬의 권력이 지배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밖으로 내쫓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셨다. 이로써 맘몬을 성전 밖으로 쫓아내셨다. 그 다음, 예수님은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셨는데, 십자가에 달려서 3일 만에 부활한 예수님 자신의 몸이다. 새로운 성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엡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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