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가?(눅 18:15-34)
누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가?(눅 18:15-34)
  • 김상학 목사
  • 승인 2018.10.2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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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학 목사와 이진옥 사모 그리고 성경제일교회 교인들과 함께
▲김상학 목사와 이진옥 사모 그리고 성경제일교회 교인들과 함께

 

들어가는 말

제가 살던 동네에 시커먼 큰 개가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가나안 농장에 있는 ‘케인 크루소’라는 맹견 종류가 아닌가 싶습니다. 초등학생이었던 제 막내 동생은 개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작은 개는 안아주고, 큰 개는 목덜미를 끌어안고 올라타고 놉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개가 동네에 풀려 있으면 무서워서 그 길을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는 무섭게 짖는 이 개가 제 동생한테는 순한 양입니다. 동생을 등에 업고 겅중겅중 뛰면서 장난합니다. 서로가 통하는 모양 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죠? 여기에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개가 좋은 겁니다. 개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하얘지는 겁니다. 그냥 개를 안아 주는 것, 개의 목덜미를 안고 뽀뽀를 하고 올라타고 뛰어 노는 것, 맛있는 것이 있으면 나눠주는 겁니다.

이 정도 되면 서로 눈 맞은 거죠. 얼마나 만나기를 학수고대하겠습니까? 저는 그 개만 보면 저 개 누가 안 잡아가나? 그러니 저 만 보면 짖어댈 수밖에요. 더구나 동생이 좋아하니 늘 우리 집 앞을 어슬렁거립니다. 그 개로 인해서 저는 공포, 동생은 천국입니다.

공을 가지고 놀던 아이가 공이 찻길로 나가면 차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공만 보이는 겁니다. 위험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운전자들이 기겁을 하지만 아이는 아무 관심 없습니다. 공만 보고 뛰쳐나갑니다. 정말 단순합니다. 계산이 없습니다. 자신이 믿는 대로 그 행함이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김상학 목사
▲김상학 목사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의 이와 같은 속성을 보시고 어린 아이처럼 되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본문을 볼까요?

 

1. 예수님께로 향하는 아이들

15절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본문 15절에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오는 ‘어린아기’가 나타나고, 16절에서는 예수님이 그 아기를 ‘어린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의 품에 안겨서 온 아기들, 그리고 손에 이끌리어 온 아이들이 있었겠지요? 부모님으로부터 예수님을 전해들었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던 아이들은 신바람이 나서 예수님께로 오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꾸짖는 것을 보면 아이들이 시끄럽게 하였던 모양입니다. 여기에 아이들도 오직 예수님만 보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꾸짖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강조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책망하셨을까요? 제자들의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 다시 말해서 어른스러운 생각들을 책망하신 게지요. 예수님께나 자기들에게 아이들은 거추장스런 존재요, 득이 안 된다고 본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결단코!”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제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받아들이라는 거죠.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예가 모든 복음서에 다 나타나는 오병이어 기적의 씨앗이 된 어린 소년입니다(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 6:1-15).

그 소년은 장정만 5,000명이 되는 예수님의 집회에서 모두가 주리고 있을 때에 자기의 도시락,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선뜻 내어놓았습니다. 어린아이가 먹을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을 감안한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지요. 더구나 아무도 내놓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을 선뜻 내놓는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계산이 없는 믿음의 행함이었던 게지요. 그 소년은 주의 말씀에 순종했고, 뱃세다 광야에서 펼쳐지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아이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 어린아이 외에 수많은 군중들이 이런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졌을까요?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도 살펴보아야겠지요?

 

2.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 근심하는 사람들

본문 18절에 나타나는 익명의 부자 관리를 통해서 우리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18절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본문은 이 익명의 관리가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관리의 질문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이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의기양양이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의기양양함을 일언지하에 묵살하셨습니다. 자신이 선하기 때문에 영생,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잘라 버리신 겁니다.

정말 이 사람은 선한 사람이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계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지켰노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기준으로 다 지켰겠지요. 예수님의 기준이라면 어림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이 계명을 자기 기준으로 지켰다는 것을 아시지만, 그에게 있어서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재물의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는 큰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다 같이 2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관원은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면서도 자기 재물은 놓지 못했습니다. 그는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였다는 것입니다. 막 10:27절에서는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겁니다. 하나님을 등진 겁니다. 영생을 포기한 겁니다.

자신만만했고, 의기양양했던 이 관원의 문제는 간단치 않은 겁니다. 영생의 문제를 앞에 두고 재물 때문에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는가? 재물 우상, 맘몬을 섬기는가? 의 문제입니다.

사실상 이 사람은 자신의 기준으로는 계명을 지켰지만, 예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이 재물을 모으기 위해 간음한 자요, 살인한 자요, 도둑질한 자요, 거짓증언한 자요, 부모까지도 공경치 않은 자였을 겁니다. 그렇게 그는 돈을 모았을 것입니다. 마치 바로 앞 문맥의 세리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으로 나와 회개했는데 이 사람은 많은 근심으로 돌아선 겁니다.

아무리 재물이 좋아도 천국 앞에서는 놔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래야 어린아이와 같은 것 아닙니까? 하지만 무리도 아닙니다. 한평생 존경받던 목사도 이것을 놓지 못해 하나님 영광 가리고 수많은 어린 성도들을 실족시켜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려 지옥에 들어가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게지요. 그러니 자기 계산이 복잡하게 깔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앞에서 오직 하나님 나라만 보여야 하고 예수님 앞에서 오직 예수님만 보여야 하는데 자기 재물, 자기 보화가 눈앞에서 아롱 거리니 어느 것이 더 좋은가 재다가 그만 재물을 바라보고 돌아선 겁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부자라면 차라리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 한다고 선언하신 겁니다.

그런데 남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큰 부자는 없어도 재물 때문에 주의 뜻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큰 지식은 없을지라도 세상 지식이 주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일도 있을 것이고, 때론 자식이, 때론 부모가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하나님 나라를 앞에 두고 손익을 계산하게 한다는 사실이지요. 지극히 어른스러운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로 그 부자 관원과 같은 것 아닙니까?

달라야 합니다. 절대 같아서는 안 됩니다. 부자관원은 돌아섰지만 우리는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본문 26절에 나타나는 질문이 우리의 질문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26절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미 답을 가지고 계시고 천국을 누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천국은 미래에 가는 것이고 현재는 십자가 고생만 해야 하는 것인지 의아해하면서 믿는 분도 계십니다.

본문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을 들어볼까요?

27절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 외에 선한 자가 없기에, 계명을 다 지킨 것 같지만 하나님의 기준에는 어림도 없기에, 큰 부자 관원처럼 가진 것이 재물 외에도 너무나도 많기에, 어린아이와 같은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기에, 도무지 구원 받을 길이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다는 것이죠?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계산이 없는 단순한 믿음과 그 믿음의 행함”으로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실제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께서 내게 역사하실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하얗게 되는 겁니다. 오직 한 가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만 보입니다. 그리고 나를 대속하신 주님만 보이는 것이지요.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가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요.

고후 10:4-5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많은 재물, 많은 지식, 하나님 나라 앞에서 똥 아닙니까?

빌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예수님 앞에서 무얼 근심하냐는 말입니다. 어린아이의 찬양처럼 ♪집 팔고, 땅 팔고, 냉장고 팔아 기어이 그 밭을 사고 말거야~♬ 하나님 나라를 사야죠.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겁니다.

 

3.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의 제자 중에 베드로에게 제법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입니다. 

28절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

정말 그랬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베드로로서는 부자 관원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자기의 생업, 자기의 가정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쫓은 것이지요.

예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29-30절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에 버렸다는 의미가 뭘까요?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걸까요? 가정을 팽개친 걸까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우선으로 할 때, 가정이 하나님 나라가 되고, 모두가 다 살게 되는 것이지요. 이전에는 살벌했는데 지옥 같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사실이지요.

예수님의 가정도, 베드로의 가정도, 목사의 가정도, 장로의 가정도, 안수집사의 가정도, 모두의 가정이 그렇게 변했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현재에 누리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후 영원한 하나님 나라,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성도가 되길 축복합니다.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베드로에게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였다고 해도 완전한 것은 아니지요. 지극히 어른스러운 속셈이 깔려 있었던 겁니다. 정치적 메시야를 통한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계산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몸소 어린아이의 계산 없는 믿음과 행함을 십자가로 보여주실 것이라 예고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제 그 십자가로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정말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말씀에 기록된 대로 그대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어떤 인간적 계산이 깔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믿음임을 보여 주신 겁니다.

이방인의 희롱과 능욕, 침 뱉음, 채찍질, 죽음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십자가 사역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와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어울리려야 어울릴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보이신 것이지요. 그것이 곧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의 결정판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믿음이라고 보여주신 게지요. 우리의 믿음을 가로막는 부자의 재물, 세상 지식, 부모나 자식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 뒤로 미루고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그리고 그 행위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여러 배의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확장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나가는 말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어린아이와 부자 관원, 그리고 제자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까지 보여주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어야 한다고 했지요? 하나님 나라를 받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손익계산으로 분주한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의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 듯이 말입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하나님을 받들 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몸소 십자가를 짊어지심 같이 말입니다.

혹시 근심이 되시나요? 모든 것을 다 팔아 사야할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믿음으로 나아가면, 그 믿음이 어설퍼 보여도 하나님은 그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십니다. 믿음의 도전이 있는 주의 성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돈에 매인 사람들에게, 자기 지식에 매인 사람들에게, 세상의 위협과 능욕에 매인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심고 보여주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어린 아이의 믿음으로 도전합시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목회”

선배 목사님이 전도하는 사진을 보내왔다. 항상 고정된 자리,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정장차림에 어깨띠를 두르고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전도하신다. 언제나 변함없는 그 모습이 믿음직스럽다.

강릉 산속에서 약초를 캐며 목회하시는 안 목사님 역시 외골수 전도인이다. 아무리 전도해도 교회를 찾는 이가 없다고 하면서도 주신 사명이기에 전도한다면서 길거리에서 찬송과 기도, 그리고 천국복음을 전파 하신다. 온전한 ‘일인 예배’를 드리고 것이다. 내가 아플 때 그는 전화기에 대고 찬송가 406장,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풍랑 일어도 안전한 포구…”를 4절까지 불러 주었다. 투박하지만 정성스럽게 부르는 그의 찬송에 치유의 은혜가 있었다.

드디어 나의 전도가 시작되었다. 과거 교회 성장을 위한 상업적 전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심장으로 한 사람을 제자로 세우는 전도가 시작된 것이다.

베트남 현지의 봉제회사에서 ‘바이어(buyer)’를 관리하는 매니저인 박(朴)씨를 산에서 만났다. 휴가차 한국에 왔다가 산을 찾았다고 자기를 소개했는데, 알고 보니 그 부모가 열혈 불교신자이다. 박씨는 딸을 위해 항상 불공을 드리는 부모님을 거역할 수 없노라고 했다. 그녀의 산행을 도우면서 함께 한 시간은 우리 부부의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어제는 팬티 바람에 전도했다.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수영장에서 전도했다는 말이다. 옷을 벗고 있기에 목사 신분을 감추고 수영을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모든 이에게 다 알려지고 말았다. 이젠 제법 물속에서 신앙상담을 하며 전도하는 목사가 되어 버렸다. 가끔 주책없는 이들이 있어서 물속에서 안수기도 해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가 없잖아 있다. 어쨌든 나를 따르고 좋아하는 이가 있어 전도를 했는데, 그는 자기의 궁금한 점을 나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와 복음의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물속에 고기가 참 많다.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했을 때, 그 깊은 곳이란 바로 저들의 삶 속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온다. 팬티바람에 들어가는 곳만큼 깊은 곳이 어디 있을까?

어떤 목사님은 믿지 않는 이들의 맥주 파티에서 그들의 전도를 위하여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고 했다. 목사가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자기 벽을 허물었다는 사실이 교회를 향한 그들의 벽을 허문 계기가 되었다고 간증했다. 정말 깊은 곳의 전도이다.

전도는 그들의 깊은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요원한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카멜레온 전도법이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되어 전도하는 것이다(고전 9:19-23).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모양으로 성육신 하신 것처럼, 내가 그들과 같이 되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지, 변하지 않는다면 어림도 없다는 말이다.

이제 교회 성장을 목적으로 한 상업성 전도는 저만큼 던져 버렸다. 이제 나의 전도는 개인 구원과 성장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양육은 가정을 교회로 세우는데 있다. 이제 은퇴하기까지 남아있는 나의 생명 10년, 드디어 이 밑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후반기 목회에 시동을 걸었다. 이 시작이 끝까지 변함없기를 소원하면서 교회의 기도를 요청한다.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에 위치한 성경제일교회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에 위치한 성경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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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학 목사는 백석신학교와 백석신학연구원을 졸업하고 안산 성경제일교회를 개척하여 23년째 섬기고 있다. 목회 10년차에 안산전도학교를 설립하였고 미자립교회 네트워크를 통해 안산시 복음화에 힘썼다. 목회 15년차, 교회 분열의 시련기를 거치면서 "암 발병과 함께 모든 사역을 내려놓고 기도하던 중, 한국교회의 교회성장운동의 폐단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서 성경강해설교학(MA) 과정을 거쳐 현재 일반대학원 신약신학(Th.M)을 전공하며 후반기 목회의 사역에 기쁨으로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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