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봄”(visio Dei)으로 종말론 읽기
“하나님 봄”(visio Dei)으로 종말론 읽기
  • 정홍렬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 승인 2018.11.1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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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정홍렬 교수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정홍렬 교수

 

I. 시작하는 말

성경은 마지막 일들에 대해서 다양한 사건들과 상징들 및 은유들 그리고 선후관계를 자리매김하기 어려운 복잡한 순서로 묘사하고 있다. 더욱이 마지막 일들이라 함은 인생의 마지막 사건들과 역사와 우주의 마지막 일들까지 한 묶음으로 다루어져야 하기에 종말론 안에서의 양자의 관계를 밝혀내는 일은 종말론을 더욱 어렵고도 난해하게 만든다. 일찍이 현대 종말론의 대가 파울 알트하우스도 종말론에 관한 평생의 논의를 정리한 그의 역작 “마지막 일들”(Die letzten Dinge)에서도 개인의 종말과 우주의 종말의 관계를 밝혀 낼 수 없다는 어려움을 토로한 바 있다.

그래서 대다수의 종말론 책들은 아예 종말론을 개인의 종말과 우주의 종말로 구분하여 별개로 취급하기까지 한다. 그러다 보니 두 영역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나 접촉점이 없이 동떨어진 설명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종말론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는 일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자들에게는 종말론을 설명해 줄 책임과 과제가 주어져 있다. 종말론은 글자 그대로 모든 그리스도교 교리의 결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 수 없지만 해야만 하는 신학자들의 책임이 종말론에서는 더욱 절실하고도 힘겹게 다가온다. 베드로 사도도 한편으로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 :15)라고 권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라고 경계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종말론 논의의 현 상황이라 하겠다.

현재 한국 교회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종말론 논의는 극단적인 두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 세대주의에 기반을 둔 지나친 종말론적 왜곡이 횡행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종말론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과 무지의 두 흐름이 공존하고 있다. 세대주의 및 이를 기반으로 한 사이비 종말론은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일반신자들 사이에 무분별하게 유포되어 있어서, 이미 지난 시기에 시한부 종말론 광풍을 몰고 왔던 문제점들이 여전히 잠재해 있는 상황이다. 그와 반대로 기성교회에는 또한 종말론에 대한 의도적 외면과 무지와 무시가 지배하고 있어서 정작 교인들을 바른 종말론으로 지도해 주어야 할 목회자나 신학자들마저도 종말론적 무관심과 무지를 벗어버리지 못한 채 목회사역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종말론 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신자들은 이단들의 선동에 쉽게 넘어가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 한국교회와 신학계는 기성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종말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시급히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혼돈의 원인에는 무엇보다도 종말론 자체가 안고 있는 언어의 상징성과 은유들 그리고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죽음 이후의 주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음으로 인한 제한성이 가장 큰 원인이라 하겠으나, 그 내면을 살펴보면 종말론을 해석해 나가는 틀의 부재와 왜곡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을 보게 된다.1)

이러한 종말론의 문제점에 직면하여, 종말에 관한 성경의 진술들을 살펴보면, 그 안에 전체 종말론의 사건들을 관통해 나가는 하나의 주도적인 사건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개인의 종말이나 우주의 종말에 있어서 그 종말을 결정짓는 사건들인, 죽음, 심판, 부활, 영생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천년왕국 혹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 등은 하나의 주도적인 사건에 따라 각자의 위치가 정해지는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적어도 성경은 최후의 심판과 부활 그리고 천년왕국 혹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 등에 있어서만큼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목적은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모두 심판하기 위한 최후의 심판이고(마 25:31-33), 이때에 죽은 자들이 모두 부활하게 되고(살전 4:16),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이 땅에 천년왕국이 시작된다고 고대하며(계 20:1-3) 나아가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야말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결정적인 결과가 된다(벧후 3:10-13).

종말론 안에서의 이러한 기준점이 확고하게 설정된다면 우리는 이 관점으로부터 종말론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들의 의미와 순서를 정리할 수 있게 된다. 이 글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준으로 삼아 해결되는 종말론의 문제점들과 또 그로 인해 새롭게 파생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를 전개해 나갈 것이다.

 

II.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읽는 종말론

현재 한국교회 안에 왜곡된 형태로 유행하고 있는 사이비성 종말론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잘못된 종말론 자체를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그 문제점과 왜곡된 주장들을 교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대응방법에는 종말론 자체에 대한 건전한 이해가 요구되며 이 방법이 곧 한국교회 안에 건강한 성경적 종말론을 정착시킬 수 있는 길이다.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종말론적 교리와 그것에 기초해서 또 나름대로 극단적으로 왜곡시킨 사이비 이단들의 종말론은 문자주의적 성경관에 자의적인 성경해석이 덧붙여진 매우 복잡한 교리체계를 이루고 있다. 더욱이 그들의 주장에는 학문의 기본형식인 논리성과 일관성이 결여됨으로 인해 외부인이 그들의 교리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기독교교리에 대한 본격적인 훈련의 경험이 없는 일반 신자들은 이단과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난해한 주장에 대해 합리적인 판단을 포기하고 쉽사리 그들의 주장에 동조해 버린다. 이 글에서는 세대주의자들 및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주장하는 종말론적 교설의 몇 가지 주요 특징들을 소개하고 비판하고자 한다.

세대주의자들과 그에 기초한 사이비 종말론자들은 성경의 종말론적 진술들을 극단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각기 다른 용어와 표현으로 등장하는 동일하다고 여겨지는 사건들을 서로 다른 사건으로 규정하여 해석한다. 그리하여 이들의 종말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은 종말론적 시간표의 배열이다.

어떤 사건이 다른 사건 전후에 위치해야 하는 지를 구분하고 배열하는 것이야말로 종말론의 주된 임무에 해당된다. 이렇게 각 사건들은 다른 사건들과 시간 상 선후관계로 연결되어 전체 종말론을 구성해 나간다. 당연히 여기서 종말론은 단어의 차이에 따라 세분화된 스케줄로 표현된다.

이런 관점에서 먼저 세대주의자들의 심판을 살펴보자. 성경에는 심판을 묘사하는 다양한 본문과 장면들이 소개되어 있다. 적어도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심판의 장면만 소개하더라도 무수히 많은 장면과 본문들이 소개될 것이다. 심판이란 주제가 그리스도교 구원론과 종말론의 핵심주제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심판에 대한 언급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성경이 소개하는 심판은 그 주체가 하나님 아버지(롬 14:10)로 소개될 뿐만 아니라 아들(요 5:22, 딤후 4:8)로도 소개되고 심판의 기준이 믿음(요 3:18)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때로는 행위(고후 5:10)로도 소개된다.

심판의 대상도 모든 민족(마 25:31-32), 믿는 자들(고후 5:10)로서의 우리들, 모든 죽은 자들(계 20:12) 등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에 따라 심판의 장면을 소개하는 문자의 차이에 따라 단순하게 구분하는 일은 성급하고 자의적인 해석이 될 위험성이 높다. 그렇다고 세대주의자들이 모든 심판의 장면을 각각 다른 문자에 상응하여 각각 다른 사건으로 취급하는 것도 아니기에 무슨 기준으로 심판의 사건을 구분하는가라는 비판도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

세대주의자들에 따르면 심판은 4회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재림시 혹은 휴거시에 있을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심판과 천년기 바로 직전에 있을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마 25:31-46), 천년기 전에 있을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마 25:1-30) 그리고 천년기 후에 있을 이미 죽은 악인들에 대한 심판(계 20:11-15 백보좌심판)이다.2) 이에 대해 후크마는 그 표현은 다양해도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성경은 분명하게 선포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성경구절도 심판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행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마25:31-32) 하셨다.“3)

후크마는 비록 우리가 종말론의 시간표상에서 어느 위치에 최후의 심판의 자리를 정확하게 설정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최후의 심판이 현세대의 종말에 일어날 것이라는 점은 분명히 했다.4)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영광을 받게 하실 것이라"(살후 1:7-12).

요한도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우리가 받게 될 심판으로부터의 위로와 안심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2:28). 두 인용문에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가 곧 심판의 때임이 분명하다.

과연 성경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몇 차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는가? 우리는 단순하게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천사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때, 그 때 죽은 자들이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살전 4:16). 그러나 부활 주제 역시 세대주의자들 및 사이비 종말론자들에게는 수 차례에 걸쳐서 일어나는 복잡한 사건으로 재해석 된다.

역사적 전천년론자들 두 번의 부활을 주장하지만 세대주의자들 모두 네 번의 부활을 주장한다. 전천년론자들은 계 20:4-6을 근거로 두 번의 별도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부활은 천년기가 시작할 때의 신자들의 부활(살전 4:16)과 천년기가 끝날 때의 불신자들의 부활(계 20:5, 11-14) 이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은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위의 두 번의 부활에 7년 대환난 끝 무렵의 환난기 성도들의 부활(계 20:3-5)과 구약시대 성도들의 부활(단 12:2, 사 26:19)을 말함으로 도합 4회의 부활이 있다고 주장한다.5)

기본적으로 의인(생명)과 악인(심판)의 부활을 구분하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성경은 불신자와 신자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다니엘서 12:2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은 요 5:28-29에서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 사이에 어떠한 시간적 간극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주의자들은 25절에 언급된 “때“를 천년 기간으로 분리된 두 개의 부활을 포함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세대주의자들은 의인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 사건이고 악인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사건으로 이 두 부활 사이에 천년의 기간이 놓여 진다고 주장한다.6)

그러나 신자와 불신자의 부활을 함께 언급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주장을 확인해 보면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그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행 24:15). 특히 여기에 사용된 부활이란 단어는 단수를 사용함으로 바울이 단회의 부활사건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세대주의자들과 전천년주의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본문은 계 20:4-6의 ”첫째 부활“이란 단어이다. 여기에는 실제적으로 두 개의 부활이 등장한다. 의인의 부활(첫째 부활)과 천년 후에 일어날 악인의 부활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단 한 본문으로 인해 수많은 본문들을 희생시켜서 두 번의 부활 사건으로 주장할 이유가 없다.

같은 책인 요한계시록 20: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말씀한다. 여기에서도 부활은 모두에게 동시적 사건임이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부활사건을 여러 번에 걸쳐 따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주장하는 세대주의 및 전천년주의자들의 주장은 지지받을 수 없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는 마지막 날이 곧 부활의 날이라고 일관되게 가르친다(요 6:40, 요 11:24, 고전 15:23, 빌 3:20-21, 살전 4:16).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주제로 넘어가 보자. 그리스도의 재림을 여러 차례로 설명하는 주장을 듣게 되는 일반 신자들은 분명히 매우 당황해 할 것이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그와 같은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은 휴거라는 이름 하에 그리스도의 두 번의 재림을 가르쳐 왔다.

소위 그리스도의 비밀스런 공중재림과 가시적 재림이다. 여기에는 세대주의자들은 물론 대다수의 사이비 이단 종말론자들이 열광적으로 선호하는 휴거론이 자리잡고 있다. 세대주의자들 및 종말론적 사이비 이단들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비밀스런 재림이다.7) 세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두 번의 사건으로 간주하려는 이유는 신약성경에서 재림을 가리키는 단어들 가운데 특정 단어를 특정한 목적에만 사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신약성경에는 재림을 가리키는 단어로, 현존(parousia), 계시(apokalypsis) 그리고 출현(epiphaneia) 등이 있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은 파루시아를 비밀스런 공중재림시에만 휴거와 관련지어 사용하고 가시적 재림에는 계시(apokalypsis)를 사용한다.8) 그러나 성경은 동일한 재림을 위해 위의 각 단어들을 상호교환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하고 심지어는 동시에 사용하기도 한다.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 8:9).“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두 인용문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의 나타내심과 강림은 병행구절로 동일한 재림사건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결국 세대주의의 극단적인 문자적 해석은 단어의 차이에만 집착함으로 오히려 자신들의 교리를 합리화시키려는 유혹에 빠져들게 되었다. 성경은 위의 세 단어뿐만 아니라 “주의 날”(살전 5:2, 살후 2:2), “하나님의 날”(벧후 3:10-12)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주의 재림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동일한 사건을 가리키는 단어의 차이에 집착하여 사건(시간)의 차이까지 몰고 가는 세대주의적 해석은 공감을 얻기 어렵다.

지금까지 소개한 종말론의 논의들을 두 개의 표로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종말론적 시간표 모델(표1)과 재림 중심으로 종말론을 구성한 종말론 읽기의 표(표2)는 아래와 같다. 두 표의 가장 결정적 차이는 종말론적 사건들을 순차적으로 서술하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중심으로 통시적(diachronic)으로 서술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표1
▲표1

 

III. 재림을 중심으로 종말론을 읽음으로 인해 등장하게 되는 문제점

우리는 방금 난해하고 복잡한 종말론적 사건들을 성경이 지시하는 종말론적 기준사건인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읽게 될 때, 많은 문제들이 균형있게 해결되는 것을 보았다. 이는 분명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종말론의 해석원리의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로 인한 또 다른 문제점이 종말론 안에 등장했으며 사실 이 문제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리스도교 종말론 안에서 매우 혼돈스런 문제점을 초래해 왔음을 보게 된다.

모든 종말론적 사건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연결되고 이를 통해 해석됨으로 인해 많은 사건들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설명되는 놀라운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개인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시(우주적 종말)까지 죽은 자의 운명이 해결되지 않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는 결국 중간상태라는 특정한 교리가 등장하게 된 이유가 된다. 죽은 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궁극적인 결정 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을 종말론에서는 전통적으로 중간상태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궁극적인 심판도 없고 부활도 없고 하늘나라의 도래도 말할 수 없기에 죽은 자는 지상에서의 삶이 종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천국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여전히 심판과 부활을 기다려야 하고 주님을 보면서도 주님을 만날 것을 기다려야 하는 어색한 상황 속에 놓여졌다.

이런 문제로 인해 구약에서는 죽은 자를 산 자도 아니고 죽은 자도 아닌 스올에 있는 잠자는 것과 같은 비활동적 존재로 묘사했고9) 루터교에서는 차라리 죽은 자의 영혼이 잠을 자는 상태라고 간주했던 것이다.10) 그러나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루터교의 영혼수면설을 처음부터 강하게 반대했기에 무엇인가 분명한 대답을 제시했어야만 했다. 이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어떻게 답변하는지 들어보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32장 “죽음 이후의 인간의 상태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1번은 “사람의 몸은 죽음 이후에 흙으로 돌아가 썩어진다. 그러나 (죽거나 자지 아니하는) 영혼은 불멸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즉시로 왔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의인의 영혼은 완전히 거룩해져서 지극히 높은 하늘로 열납되고 그곳에서 빛과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몸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린다. 그러나 악인의 영혼은 지옥으로 쫓겨나서, 그곳에서 고통과 극심한 어둠 속에 갇혀서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지낸다. 성경은 육체를 떠난 영혼을 위한 장소로 이 두 곳 이외에는 인정을 하지 않는다.”11)

여기서 보듯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강조하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영혼멸절설과 영혼수면설을 반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 직후 천국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빛과 영광 중에 있는 가운데 몸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하거나 영원한 지옥에 처해진 운명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주목되는 점은 이미 천국에서 빛과 영광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보는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몸의 완전한 구속, 즉 부활을 기다린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아직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세상의 종말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의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죽은 자는 이미 천국에 들어와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 중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는 상태이다. 이것이 소위 중간상태 교리의 실상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이외에 모든 것이 이루어진 성도가 천국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부활을 기다린다는 점은 어딘가 불완전하게 보이고 어색해 보인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금 재림으로 인한 심판에 주목하게 된다. 과연 심판의 절차 없이 죽은 자는 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가? 그리고 악인은 심판의 절차 없이 지옥으로 갈 수 있었는가?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러한 주장은 눅 16:19-31에 등장하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와도 일치하지 않는 설명이다. 이들은 각각 아브라함의 품으로 불리는 천국과 음부로 불리는 지옥에 처해지는 심판을 받은 이후의 상황 안에서 등장한다.

또한 죽음 이후의 심판을 말하는 히 9:27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과도 배치되는 상황이다. 우리는 앞에서 심판은 오직 재림시에 일어날 최후의 심판 하나만 존재한다고 강조했고 확인했다. 그렇다면 아직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산 자와 죽은 자들에 대한 심판도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 죽은 자가 이미 천국 혹은 지옥에 들어가 있는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다고 죽은 자가 멸절되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서 잠을 자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재림 없이 최후의 심판이 실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천국과 지옥에 간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오직 재림만을 강조했던 종말론 읽기가 새로운 문제점에 봉착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살펴보자. 칼빈은 사람의 최고선이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 가르치면서 그 연합이 완전한 열매를 맺을 때에 우리는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되며 오직 부활에 대하여 마음을 쏟는 자들만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열매를 얻는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신자들에게 이 푯대를 지향하라고 말했다(빌 3:8)는 것이다.12)

칼빈도 중간상태의 곤란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자, 우리의 영혼의 중간상태에 대하여 지나치게 호기심을 갖고서 탐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도 않을뿐더러 유익하지도 않은 일이다. 영혼이 어디에 있는가, 아니면 영혼이 과연 하늘의 영광을 이미 누리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따위의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논란을 벌이느라 수많은 사람들이 쓸데없이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알려져 있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계를 넘어서 더 깊게 알려고 탐구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또한 경솔한 짓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과, 그가 그들을 낙원에 받아들이셔서(참조. 요 12:32) 그들로 하여금 위로를 받게 하신다는 것과, 또한 반대로 버림받은 자들의 영혼은 그들에게 합당한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 외에는 더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감추신 사실을 과연 어떤 선생이나 스승이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단 말인가? ...(중략)...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정해 놓으신 한계로 만족하자. 곧, 경건한 자들의 영혼이 이 세상의 싸움의 수고를 마치면 복된 안식에 들어가고, 거기서 약속된 영광을 누리기를 기쁨으로 기대하며 기다리고, 그리하여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까지 모든 것들이 미결상태에 있다는 사실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13)

여기에서 칼빈도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가 계신 낙원에 가 있되,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몸의 완전한 부활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은 앞서 신자의 최고선이 하나님과의 연합이라 말하면서 이 연합이 부활의 계기가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결국 그리스도교 종말론의 절정은 다시 오시는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신자들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짐으로 인해 심판과 부활의 성취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천국에서 함께 존재하는 이 상황과 재림을 통해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되는 상황 사이에 어떤 구분이 존재하는가? 이것이 논의의 핵심인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한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다시 연합할 재림을 기다림으로 인해 아무런 종말론적 성취를 얻지 못하고 단지 부분적인 성취 속에서 완전한 구속을 기다려야 한다는 설정이 애매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문제점의 돌출은 궁극적으로 알트하우스가 고민했던 바와 같이 개인의 종말과 우주의 종말 사이의 간극의 문제를 해결하기 곤란함으로부터 기인된 결과이다.

중간상태교리가 안고 있는 신학적 갈등은 후크마의 중간상태교리 설명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후크마는 그의 뛰어난 종말론 저서인 『개혁주의 종말론』(The Bible and The Future)에서 중간상태 교리를 집중적으로 연구한다. 그는 탁월한 학문적 역량으로 부활의 시점을 알려주는 신약성서의 본문들을 면밀하게 분석해 나간다.

누가복음 23:42-43의 십자가상에서 구원받은 강도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 “오늘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를 분석하면서 이는 중간상태가 아니라 최종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하늘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지만 그는 결국 칼빈의 중간상태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이 연구한 결론과는 상이한 결론, 즉 중간상태를 인정하는 결론을 내고 만다.14)

다음 본문도 마찬가지다 빌립보서 1:21-23의 사도 바울의 말, “나의 소망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됨이니”에서 떠나다(analysai)의 부정과거 부정사와 있게 되다(einai) 사이를 하나의 관사가 연결시킴으로 이 두 동사 사이에 시차가 없는 동시적 사건임을 바울이 주장한다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중간상태의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 죽는 순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순간이 된다.

세 번째 입증본문은 고후 5:1과 고후 5:6-8이다. 후크마는 이 본문도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위의 장막이 파괴되어 사라질 때(katalythe의 부정과거시제는 죽음이 일어나는 순간을 의미한다) 즉시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집을 소유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육체의 죽음을 맛보는 순간 우리는 현재의 존재처럼 일시적이 아닌 영원무궁한 영광스런 하늘의 존재로 변화하게 된다.”15) 이제 중간상태를 가리키고 있다는 본문들을 연구한 후, 후크마가 내리는 결론을 주목해 보자.

“죽음이 발생하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주님과 함께 집에 있게 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롭게 됨은 육체의 부활이 일어나는 순간까지는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간상태 동안 우리 믿는 자들의 상태는 칼빈이 가르쳤던 것처럼 불완성의 상태이며 기대의 상태이며 잠정적 축복의 상태인 것이다.”16)

실제로 후크마가 성경에서 확인한 사실은 중간상태의 사라짐이었으나 결국 칼빈의 지적에 따라 중간상태를 허용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중간상태와 부활은 이중적 기대가 아니라 하나의 단일한 기대의 두 측면으로서 생각되어야 할 것이라고 정리한다.17)

후크마도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부활이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막히면서 죽음 이후 즉시 영광스러운 변화를 증거하는 본문들 앞에서 중간상태교리를 인정하고 만다. 후크마가 최대한 언급할 수 있었던 내용은 중간상태와 부활의 단일한 사건 혹은 한 사건의 두 측면이라는 표현이었다. 어쩌면 이는 말로는 중간상태를 인정하지만 내용상으로는 거부하고 마는 표현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정말 없는 것일까?

우리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재림의 장면 중 그 안에 담겨있는 종말론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21절부터 26절까지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 그리고 아들과 우리의 하나됨을 연결시키시면서 결국 하나님과의 연합 안에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다는 것이 곧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일 2:28-3:2까지 이어지는 말씀도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리스도를 봄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결과를 소개해 준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나신 줄을 알리라.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 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강림 그리고 보게 됨은 하나로 엮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심판을 담대하게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게 되는 그리스도의 참모습과 같이 우리도 영광 가운데 변화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변화가 곧 우리 몸의 부활을 말하는 것 아닌가? 필자는 구원론에서의 영화가 종말론에서의 부활과 영생에 일치한다고 본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직접 보게 되는 것과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것을 일치 시키고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여기서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은 단지 감각적으로 본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연합하여 참여하게 되는 축복된 보기(beatific vision)를 의미하는 종말론적 은사이다.18)

동시에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악인들에게는 멸망의 심판이 될 것이라고 요한은 선포한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마지막으로 주의 날의 도래는 곧 우주적 종말 사건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알리는 날이 될 것이라고 베드로는 선포한다(벧후 3:10-13).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이 단순한 하나의 감각적 행동이 아니라 종말론적 완성의 사건을 대표하는 중심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기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풀리지 못했던 개인의 죽음과 우주적 종말 사이의 간극을 그리스도를 봄의 주제로 해결하고자 한다.

▲표2

 

IV. 재림으로부터 “하나님 봄”(Visio Dei)으로의 종말론 읽기의 제안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성경 안에서도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더욱이 종말론에서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가장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본다는 사건의 종말론적 의의를 인식하지 못한 데에는 종말론 전체에서 이것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종말론적 사건으로서의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다양하게 그리고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성경에서 재림을 표현하는 다양한 용어들과 그 용어가 담고 있는 사건적 의미를 살펴 보면, 그 안에 모두 공통적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사실, 혹은 그리스도를 본다는 사실이 담겨져 있다. 출현(parousia), 계시(apokalypsis), 출현(epiphaneia)등은 모두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다시 지상으로 재림하심으로 그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그리스도를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사건을 가리킨다.

이제 그리스도를 보게 됨으로 그 동안 종말론적으로 유보되었던 약속들이 모두 성취된다. 그 결과 우리는 먼저 주님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됨으로 그를 온전히 알고 그와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나아가서 우리는 그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재림을 통한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는 사실은 재림 이전에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게는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다.

이 땅에서 살아있는 동안 볼 수 없던 그리스도를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됨으로 죽음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종말론적 사건들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된다. 죽은 자에게는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이 심판이요 부활이요 그리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론과 종말론에서 널리 사용되는 신학형식인 “이미와 아직 아닌”(already and not yet)을 죽은 자에게는 이미 임한 종말론적 성취로 살아 있는 자에게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론적 유보를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죽은 자에게는 심판과 부활과 영생이 임했지만 아직 살아있는 자에게는 여전히 미래로 남아 있는 심판과 부활과 영생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중간상태에서 죽은 자에게도 적용되었던 지상의 시간과 같은 기다림의 시간이 사라지고 산 자에게만 기다림의 지상의 시간을 적용하는 합리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 아래의 표는 지금까지 논의했던 내용을 표로 정리한 것이다. 재림 중심의 종말론 읽기로부터 하나님을 봄으로의 종말론 다시 읽기를 표로 비교한 내용이다.

표2.

V. 맺는 말

그리스도교 종말론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여러 종말 사건 중의 하나인 사건이 아니라 여러 사건이 그로부터 모아지고 흩어지는 중심이 되는 사건이다. 이제 비로소 모든 종말론적 사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본연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닌 실질적 의미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고 이는 곧,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오시고 모든 사람이 오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오시는 그리스도를 보면서 임하는 영광을 보기도 하지만 보는 자에게는 보는 그대로 영광스럽게 변화되기도 한다(살후 1:12, 요일 3:2).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그리스도를 보는 것으로 이해함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부활과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런 도래를 모두 통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아무리 통시적 해석이라 하여도 죽은 자가 하나님을 보게 되는 시간과 역사의 종말의 시간은 분명 통시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중간상태 교리의 마지막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일찍이 몰트만은 “죽음 안에서 부활”을 주장하는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제시한 바가 있다.

한편 정홍렬 교수는 성균관대학교 금속공학과 졸업(B. Eng.)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석사(Th.M. M. Div.)를 거쳐 독일 에어랑엔 대학교 신학박사(Dr. theol.)를 받았으며 현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학위논문은 「기독교 부활소망과 종말론에 있어서의 전인」(Totus homo in der christlichen Auferstehungshoffnung und Eschatologie)가 있으며, 저서로는  『사도신경 연구』(2005, 대한기독교서회), 역서로는 『평신도를 위한 종말론』(발 J. 사우어 저, 나눔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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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이러한 종말론의 해석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의 논문 “기독교 종말론을 위한 해석학적 원리의 제안”을 참고할 것. 한국 기독교 신학논총 제 17집, 2000년, 6월, 157-190 

2) 드와이트 펜테코스트, 『세대주의 종말론』, 임병일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555-574. 드와이트 펜테코스트는 4개의 심판 중, 신자들에 대한 심판 대신 천사들에 대한 심판을 포함시킨다.

3)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종말론』,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8, 360 

4) 안토니 후크마, 359-360 

5) 드와이트 펜테코스트,  554 

6) 드와이트 펜테코스트,  541 

7) 여호와의 증인들도 1914년 그리스도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재림했다고 주장한다.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종말론』, 247 

8) 안토니 후크마, 239 

9) Eberhard Juengel, Tod, Stuttgart, Kreuz Verlag, 1985, 89 

10) 파울 알트하우스, 『루터의 신학』, 이형기역, 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1, 446 

11) 박일민 편, 『개혁교회의 신조』, 서울, 성광문화사, 1998, 534-535 

12) 존 칼빈, 『기독교강요』, III.25.2 

13) 존 칼빈, 『기독교강요』, III.25.6 

14) 안토니 후크마, 149 

15) 안토니 후크마, 153 

16) 안토니 후크마, 155 

17) 안토니 후크마, 156 

18) G.C.Berkouwer, Return of Christ, 367 

 

[종말론 추천도서]

정홍열, “기독교 종말론을 위한 해석학적 원리의 제안”, 한국기독교 신학논총 제 17집, 2000. 6.

드와이트 펜테코스트, 『세대주의 종말론』, 임병일 옮김, 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98.

마틴 로이드 존스, 『영광스러운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 교리강좌 시리즈 3, 임범진 옮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7.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종말론』,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1998.

위르겐 몰트만, 『오시는 하나님』, 김균진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G. C. Berkouwer, Return of Christ. Wm. B. Eerdmanns,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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