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닮는 삶(엡 5:1-21)_김병년 목사
하나님을 닮는 삶(엡 5:1-21)_김병년 목사
  • 김병년 목사(다드림교회)
  • 승인 2018.11.19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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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상처 없이 하나님을 닮을 수 없다.

예수를 믿고 일곱 번째 교회가 다드림이다. 첫 번째 교회는 중학교 때 다닌 시골교회이다. 둘째는 고등학교 시절에 다닌 대구 명덕교회이다. 세 번째 교회는 대학생이 되어서 다녔던 동서울교회, 서울영동교회, 대길교회, 그리고 사역자가 되어서 다닌 교회는 동안교회였다. 다드림교회는 개척을 한 교회다. 이 일곱 번 중에서 단 한번 상처 받지 않은 교회는 없다. 다만 가장 처음 다녔던 시골교회에서는 상처받은 기억이 없다. 아니 상처 정도가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교회에 깊숙이 들어가면서 깊은 아픔을 받았다. 목사가 되어서는 더 그 상처가 깊다.  

“무엇이든지 사랑하려면 위험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무엇이든지 사랑하려면 마음이 괴롭고 심하면 찢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상처 하나 없이 안전하게 지키고 싶다면 아무한테도 마음을 주지마라. 심지어 동물한테도 마음 한조각도 허락하지 말아라. 누구와도 얽히지 말라. 그저 마음을 이기주의의 관에 넣고 꼭 잠그라.

하지만 안전하고 어둡고 아무 움직임도 없고 공기도 통하지 않는 그 관안에서 마음은 변할 것이다. 상처를 입지는 않지만 부수고 뚫어서 바로 잡을 수 없게 단단히 굳어 버린다. 사랑하는 것은 고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일이다”(C.S. Lewis 『 헤아려본 슬픔』 중에서). 교회는 사랑하다 아파하는 곳이다. 그것이 교회를 세운 이유이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아픔이 떠올랐다. 십자가의 고통이 그것이다. 

 

1.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Be imitator's of God).

솔직히 이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나는 나 자신의 모순덩어리임을 안다. 나에게는 두 마음이 다 있다. 하나님을 본받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게 가당키나 하냐는 듯이 말한다. 
“나는 믿는 동시에 의심한다. 소망을 품는 동시에 낙심한다.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한다. 나를 평가하는 말을 들으면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지만 속으로는 분노가 일어난다. 신뢰하는 동시에 의심한다. 정직한 동시에 속임수를 쓴다”(브레넌 매닝)

본받는다는 말은 모방한다는 말이다. 모방이라도 어느 정도 가늠할 만해야지 하지 하나님을 따라갈 수가 없다. 나의 인간성이 보이는데 어찌 내가 가능할까는 좌절과 불신이 먼저 찾아온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4;32).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 모방해야 할 것이 바로 용서이다. 


용서하는 일에  하나님을 흉내내라! 용서하게 해달라는 우리의 기도를 보면 자녀들이 많다. 말 안 듣는 자녀들을 두고 한다. 상처 준 가족들이 대부분이다. ‘말이 거슬리는 사람’을 용서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은 원수였다. 대적자였다. 원수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삶을 살라! 2절은 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드렸다. 사랑의 핵심은 자기 버림이다. ‘사랑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드리는 희생이다. 하나님을 본받을 때 우리들 자신을 내어준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바울은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할 때 그분의 능력을 말하지 않고 그분의 성품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성품보다 능력을 더 좋아한다. 하나님의 능력보다 성품을 더 구하고 본받으라고 하면 우리들은 무기력해진다. 

예수님 앞에 간음하다 한 여자가 잡혀왔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말라”. 지금 방금 술집에서 나온 여자이다. 성적인 문란함을 가진 여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도 저를 정죄하지 아노니’. 이것이 복음이다.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복음은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한다. 이것ㄹ 복음이다. 그러나 ‘네가 다시는 죄를 짓지말라 그러면 내가 너를 용서하마’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이것은 율법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법이 엄격해지는 방향으로 시대가 변하고 있다. 좋다. 법은 변해야 한다. 그러나 법의 근본은 긍휼이 여기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면 법은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2.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God's possession)처럼 살아라.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3절), 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4절),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기업(5절). 이것은 다 성도를 의미한다. 성도는 그리스를 기업으로 소유한 자이다. 하나님을 기업으로 소유한 자이다. 즉 하나님의 기업에 속한 자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소유된 백성이다. 


성도들이 속한 기업은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 약속은 있지만 우리자신에게는 어우러지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추구하도록 한다. 이 추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약속의 성취를 본다. 이것이 기업이다. 사람은 예배자하는 자를 닮는다. 예배는 예배하는 대상을 닮는다. 우상숭배자들은 그들의 마음에 음행; 불법적인 성관계,  탐욕 ; 온갖 욕망, 온갖 더러운 것; 무절제한 성행위를 말한다.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성도들의 삶에 적당한 것이 아니다. 

누추한 말은 ‘음탕한 말이다. 어리석은 말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말들’이다. 불법을 행하여도 잘만 산다는 말은 거짓이다. 망한다. 심판받는다. 희롱의 말은 재치 있는 성적인 유희를 일으키는 말들이다.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이다. 
말이라는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된 행동들은 그 사람의 인격이 된다. 인격화된 탐욕은 우상숭배자가 된다. 


가끔 술 한 잔이 매일 한 잔이 되고, 매일 한 잔이 알콜중독이 된다. 알콜 중독이 되면 인사불성하고 욕만 한다. 대화가 불가능하다. 술에 중독된 사람의 특징이다. 여기서 누구에게 감사하라는 말이 없다. 하나님에게 감사하라. 하나님의 계획하신 구원의 경륜을 보고, 삼위하나님의 놀라운 헌신을 보며 감사하라.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면 감사가 없다. 먹어도 부족함만 이야기한다. 같은 상황인데도 감사하는 이가 있는 가하면 불평한다.

 
큰 애가 대학생이다. 이 녀석은 옷이 있어도 분명히 "없다."고 한다. 아들 녀석은 좋은 먹었어도 "하나도 안 먹었다."고 한다. 그동안 먹여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라. 결핍의 모든 순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채우시는 그분을 신뢰하라.

 

3. 빛의 자녀로 행하라(God's Children of light). 

불순종의 자녀들과 순종의 자녀들을 대조한다. 바울은 불순종의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이다. 즉 불순종의 열매는 진노이다. 그러나 순종하는 빛의 자녀들에게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가 맺는다. 불순종은 어둠이다. 주님은 빛이시다. 우리를 빛의 자녀들이다. “너희가 빛의 자녀들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가 빛의 자녀들이다.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으로 고백해야 한다. ‘나는 빛의 자녀이다’. 우리가 새 성전이다. 우리들의 행동이 변해서 빛의 자녀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주안에 있는 우리들이 빛이다. 이것은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으로 주안에서 우리가 빛이라는 것을 확신하다.  

빛의 자녀로서 우리들이 먼저 해야 할 일들은 우리 자신들이 유혹에 속지 않는 것이다. 사단은 거짓의 아버지로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유혹한다. 바울 사도는 우리를 향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유혹당하지 말하고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사단에게 직접적으로 속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속아서 유혹을 받기도 하지만 사실 가장 많은 사기는 자신이 욕심에 이끌리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욕심으로 인하여 자주 속는다. 사단보다, 다른 사람의 유혹보다, 나 자신의 욕심이 더 나를 속인다. 


속임의 대부분은 나의 욕심이다. 퇴근하여 집에 들어갈 때까지는 섬기는 마음으로 간다. 그러나 현관문을 여는 순간 피곤함이 몰려오며 자신의 피곤함을 이유로 섬김을 잊는다. 속는 것이다. 자신의 욕구로 인하여 자기 중심성을 키운다. 이것이 속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빛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 우리들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시험해 봐야 한다. 시험은 분별해야 한다. 배우는 것이다. 둘째는 책망하라이다. 이것은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로의 직접적인 권면보다 먼저 책망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책망은 빛에 드러난 나의 삶이 그들에게 책망을 준다. “너만 양심적이다”. 직장에서 관습적인 어떤 것을 거부할 때 양심이 찔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이다. 넷째는 그들의 일에 동참하지 말라이다. 같은 편이 되지말라. 

빛은 어둠을 드러낼 뿐 아니라 죄를 범한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것은 주안에서 우리가 빛이라고 할 때 먼저 우리 자신들안에 있는 어둠이 물려가고  우리들이 변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빛가운데서 빛이 된다.  "주 안에서 빛이라"는 말씀처럼 우리들은 주님안에 머물러야 한다.

회사에 출근할 때 먼저 성경을 일고 시작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무실에 조금 일찍 출근하면 바로 업무에 들어간다. 주차장에서 자동차안에서 주님을 묵상하라. 라디오만 듣지 말고 그분의 말씀을 펴서 읽으라. 기도하라. 자동찬 안을 성소로 만들어라. 

 

4. 어떻게 행 할지를 자세히 주의 하여보라. 

"하나님의 자녀로 본받으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빛의 자녀로 살아라", "하나님의 나라 기업을 받은 성도로 감사하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5장 후반부를 연결하는 단락으로 이 15-21절을 단락구분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본문은 세 가지로 규정한다. "~을 하지말고, ~을 하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첫째는 지혜없는 자가되지 말고 지혜있는 자가 되라이다.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구속의 섭리, 성도들의 기업됨과 같은 것들을 아는 통찰력이다. 삶을 살아가는 지혜가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통찰이다. 지혜로운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고 그 구속이 지니가는 시간을 아까워한다. 아깝다는 것은 보물을 주고 사는 행위를 말한다. 

시간이 얼마나 짧은가? 나는 신임투표를 4년정도 남겨 두고 있다. 얼마 시간이 안 남았다. 여러분 저를 신임해주실거죠? 물론 그렇겠죠. 그러나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은 여러분들이 신임을 하셔도 제가 "노"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년의 시간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할지 정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둘째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말고 주의 뜻을 이해하라 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주의 뜻에 관심이 없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이끌린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은 주의 뜻을 따르고 우리들의 욕심을 버린다. 이해하라는 것은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냥 머리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삶을 추구하는 열심을 말한다. 


기도는 우리를 주의 뜻에 사로잡히게 한다. 기도는 주의 뜻을 갈망하고 그것을 추구하도록 한다. 주기도문은 성도들의 열망을 나타낸다. 기도하라. 기도함으로 성도로, 빛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열망하게 하라. 한주간을 살다가 보면 기도가 부족하다 여길 때 금요기도회를 찾아오셔요. 직장에서는 회식을 하면 다 사장님 허락받고 퇴근하는데 교회 오면 금요기도회 끝나지 않아도 그냥 사라져요. 담임목사님 허락받고 사라져요. 그래야지 기도를 하지요. 그만큼 기도하는 일에 열심히 내라는 소리여요. 

세 번째는 술취하지 말고 성령충만을 받으라 이다. 성령충만한 상태가 바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서로 복종하는 것이다. 공 예배에서 온마음을 다해서 찬양한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는데 온 마음을 쏱는다. 같이 노래하고 찬양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관계에서 복종이다. 성령충만은 성도들과 관계에서 우리로 복종하게 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평등을 강조한다. 인간의 동등함을 의미한다. 맞다 그것은 인권의 차원에서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은 평등보다 복종을 더욱 강조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빛의 자녀로서, 성도로서 받은 사랑위에서 나오는 겸손을 말한다. 이것은 더 큰 사랑을 받은 자의 희생이다. 사랑받지 못한 자의 복종은 굴종이 되지만 사랑받은 자의 복종은 성령충만이다. 성령충만은 성도의 삶에 드러난다.  


나가며 - 우리 동네 목사님-기형도

기형도 선생님의 <우리동네 목사님>이란 시가 있다. 벌써 몇 번 인용했다.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폐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나는 이 시에서 대장간 옆에서 머무는 목사님은 대장장이가 쇠를 벼루는 모습을 보며 무엇을 벼루었을까를 상상한다. 자신의 마음이다. 마을에서 들리는 자신에 관한 소문에서도, 자식이 죽은 뒤에 보이는 아픔 속에서도, 또 성도들의 수군거리는 말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벼루었다. 그래서 그가 자전거를 타고 동네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동네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니다. 


교회로부터 상처 받았지만 하나님을 본받으려고 하는 모든 이들의 모습이다. 사랑하는 일에 아픔이 없을 수 없다. 사랑함으로 아팠던 과거를 분명하게 인정하고 다시 불같은 사랑으로 돌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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