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종말론을 위한 해석학적 원리의 제안(1)
기독교 종말론을 위한 해석학적 원리의 제안(1)
  • 정홍렬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 승인 2018.11.2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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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II. 인간론적 전제: 이원론적 인간 이해에 근거한 종말론

III . 영혼불멸론의 문제: 칭의론적 동기가 결여된 종말론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정홍렬 교수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정홍렬 교수

I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의 기독교 교리사를 보면 조직신학의 다른 주제들에 비해서 종말론은 치열한 논쟁의 역사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상 기독교 신학은 논쟁을 통해 발전되고 정립되었다.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하여 5세기까지 진행된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논쟁은 바로 그러한 논쟁의 역사 없이 성서의 진리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반증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운동은 당시의 기독교 신학의 왜곡을 자행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와 이에 맞서 복음의 순수함을 되찾고자 했던 개신교와의 싸움으로 그 핵심에는 비단 이신칭의의 구원론만이 아니라 참교회의 모습을 밝히려는 교회론과 성례전에 관한 논쟁까지 포함되었다.

이 논쟁의 결과로 기독교 신학은 구원론뿐만 아니라 교회론과 성례론에 있어서 결정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기독교 신학의 수많은 교리와 주제들은 이처럼 교회 밖의 세속사상 및 이단들, 그리고 교회 내의 이견들과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오늘날 그 최종적 형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신학형성에 수많은 논쟁들이 동반된다는 것은 성서의 말씀이 지닌, 그리고 신학적 진술에서 각각의 용어와 설명이 지닌 여러 가능성들 중에서 성서의 의도에 맞는 가장 정확한 의미를 엄격하게 찾고 선별해내는 작업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논의의 과정없이 쓰여지는 단어들은 각자의 주관적 의도 하에 사용되므로 읽는 이로 하여금 사용자의 의도와 달리 자신의 전제하에 그 의미가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종말론에 등장하는 ‘영혼불멸’ 이란 단어이다. 이 말은 쓰는 이가 플라톤의 영혼불멸론으로부터 일반종교에 등장하는 보편적 내세신앙은 물론 기독교의 부활신앙까지 그 의미가 지극히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결코 기독교만이 사용하는 배타적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용어의 의미에 대한 그 쓰임새를 엄격하고 정확하게 분석하는 신학적 논의의 과정이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종말론의 주제들은 거의 교리적 논쟁의 전면에 등장한 유례가 없고 언제나 무관심과 무지의 영역에 갇혀 왔다. 오히려 종말론에 대한 관심은 열광주의적 천년왕국운동가들과 이단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어졌다. 그러나 최근 20세기에 들어와 요한네스 바이스와 알버트 슈바이처에 의해 종말론은 “예수의 선포의 중심 메시지”로 알려지게 되면서 성서를 해석하는 중요한 틀로 회복되었다.

그 이후 신학계 안에서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논쟁 “종말론과 역사해석” 등을 통해 종말론이 20세기 신학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말론의 각 주제들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미미한 실정이다. 따라서 아직도 종말론은 일반 평신도는 물론 목회자와 신학자들에게까지 접근하기 힘든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머물러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종말론에 관한 논의의 과정이 빈약했던 까닭에 그 결과물들이 우리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종말표상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구약성서의 이해로만 접근한다거나 문자적 애해에 얽매여서 전체적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종말론의 수준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성서 안의 종말론적 진술에 대해 그 의미를 적극적으로 밝히고 전체 종말사건들 안에서의 연관성을 해명해 주는 신학적 안내가 필요한 때에 이르렀다.

종말론이란 그 내용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주시는 하나님의 완성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의 의의는 창조론과 구원론은 물론 하나님의 모든 역사의 완성과 결과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완성행위의 라스트 신에 해당된다. 우리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주는 감동과 그 무게를 고려한다면, 종말로 없는 창조와 구원은 마지막 장면이 없는 영화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조의 종말론이 지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종말론을 구성하는 해석학적 틀의 부재 내지는 그 미숙성이라고 판단한다.

성서를 신학의 자료로 삼고 교리의 내용과 지침을 성서로부터 발견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고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일이나, 그렇다고 기독교의 교리가 성서의 전체적 맬락을 추구하는 해석이 배제된 성서 구절의 단선적 나열은 아닐 것이다. 이는 종말론의 경우 더욱 절실한 문제이다.

종말사건을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완성행위의 전체적 시각에서 각각의 종말론적 사건들이 가지는 의미를 규명하기보다는 단지 성서에 소개된 단편적 사실들을 순서에 따라 단선적으로 배열해 놓는다고 해서 종말론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나열은 종말론이 아니라 종말의 단편적 사건들의 전시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종말의 사건들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틀의 부재는 곧 종말론에 있어서 일관성의 결여로 나타나게 된다.1)

비록 우리가 종말사건들의 모든 관계를 명확하게 밝힐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한 신학자의 종말론의 체계 안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종말에 대한 진술이 그 신학적 의미와 현상적 의미 그리고 그 사건이 전체적 종말과의 관련성 안에서 하나님의 종말적 완성 역사의 시각 안에서 일관된 체계 안에 위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종말론적 진술들은 단지 개별적 사건이 지니는 의미만이 고립적으로 설명된다.

그 설명의 결과는 더 이상 다른 종말론적 사건들과 관결해서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당면한 종말론의 과제는 각 사건의 의미를 밝혀줄 뿐 아니라 전체적 종말론의 무대에서 상호간의 연관성을 일관되게 설명해줄 종말론의 해석학적 패러다임을 정립하는 일이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한 편으로는 기존의 종말론적 문제점을 분석해 나가면서 다른 한 편, 성서가 말씀하는 종말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기존의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해석학적 틀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II. 인간론적 전제: 이원론적 인간 이해에 근거한 종말론

인류는 원래 죽음에 직면하여 이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두 가지 상상체계(신앙)를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가 중심이 된 부활신앙과 헬레니즘 및 그 이전의 힌두교에서 볼 수 있는 영혼불멸론이 그것이다. 기독교가 서구에 선교되기 이전에 이미 헬레니즘의 영향 하에 있던 사람들은 영혼불멸론을 통해 자신들의 죽음을 초월하는 소망을 지니고 살았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장면을 전달해 주고 있는 플라톤의 “파이돈”의 내용처럼, 이미 헬라인들은 영혼불멸 신앙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는 나름대로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죽은 자의 부활을 주장하는 기독교의 복음이 낯설고 무모하게까지 들려졌을 것이다(비교: 고전 15:12)

그런데 그들의 영혼불멸혼은 단지 죽음만을 이기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그 안에는 인간론과 우주론이 다 포괄되는 통일된 존재론뿐만 아니라 인식론까지도 함께 용해되어 있는 총체적 패러다임인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구서되었고(파이돈, 79), 죽음은 영혼이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파이돈, 64), 그에게 있어서 철학의 모든 수고는 몸으로부터 영혼의 분리에 집중된다(파이돈, 65).

왜냐하면 육체는 영혼이 진리를 인식하는 고정에서 장애로 등장하기 때문에(파이돈, 66) 진리에 이르기 위해 영혼은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파이돈 62). 그 결과 인간의 영혼은 몸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히 불멸하는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며 이것이 바로 인간(영혼)의 구원을 말하는 영혼불멸론이다(파이돈, 80, 105, 106.) 이러한 플라톤주의의 인간과 죽음과 내세에 관한 패러다임은 기독교 신학에 대해서도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2) 플라톤 연구의 대가인 하인리히 되리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원 후 약 300년이 지나면서 플라톤주의는 유일한 철학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성행하던 모든 종교의 정신적 현상까지도 포괄해 버리는 체계가 되었다. ... 모든 종교활동은 오직 플라톤주의와의 유비적 관계 안에서만 파악될 수 있었다.3)

이 분석은 정확하여서 오늘날까지도 플라톤을 떠나서는 신학적 진술, 특히 인간론과 종말론을 설명하는 일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예를 들어 모든 신학진술들에서 언급되는 인간은 언제나 영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 추호도 의심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죽음은 예외 없이 영혼과 몸의 분리로 묘사된다.4)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곧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며 영혼불멸론은 기독교 종말신앙의 결론으로 등장하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진술들을 부인하는 사람은 곧 기독교 이단자로 간주될 정도이다.5)

기독교 신학은 종말론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플라톤주의의 뼈대에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학적 내용을 옷입히는 과정을 밟게 되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인간 창조의 기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몽에 영혼을 불어넣어 주심으로 인간이 된다고 이해하고(실제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코에 불어넣어 준 것은 생기이지 영혼이 아님!)플라톤에 의해 영혼이 순수한 인식에 이르는 일에 장애가 되었던 몸은, 바로 인간의 죄의 자리로 연결되고, 플라톤에 의해 영혼과 몸의 분리로 설명되었던 죽음은 죄의 심판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죄의 자리는 몸이 되고 그 몸이 심판을 받으므로 영혼으로부터 분리되게 된다는 완벽한 설명의 틀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또한 모든 종말론 교과서에 반드시 등장하는 중간상태에 관한 이론들도 결국은 몸으로부터 분리된 영혼을 위한 설명이며 이 분리된 영혼이 부활을 기다리는 기간에 속한다. 이에 해당되는 영혼수면설이라든지 로마 가톨릭의 연옥설 등은 모두 몸을 떠난 영혼을 중심으로 구축된 종말론의 한 단편인 것이다.

여기에 사도신경에서 고백해 왔던 가장 중요한 종말신앙인 부활은 죽음에서 몸으로부터 분리된 영혼이 마지막날 새 몸을 입는 것으로 완벽하게 설명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플라톤주의는 기독교 신학의 뼈대는 물론 그에 대한 해설의 기능까지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플라톤은 오히려 기독교 신학자들에게는 이방의 익명의 기독교의 선지자로 인정을 받게 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러한 기독교 종말론의 뼈대에 플라톤주의가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기독교 신학의 왜곡화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오히려 플라톤주의가 성서의 종말론적 진술들의 완전한 의미를 밝혀주는 충실한 보완자료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형편이며 나아가서 이러한 이해는 신자들로 하여금 성서를 해석하는 전제로 다시 계속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이다.6)

그 결과로 인간 창조기사를 플라톤주의의 이원론적 전제하에서 읽고, 성서에서 소개되는 죽음의 장면들이-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마 27:50),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아무런 주저없이 몸과 영혼의 분리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윙엘의 다음의 지적은 앞으로 기독교 신학, 특히 인간론과 종말론이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를 정확히 제시해 주고 있다.

죽음에 관한 플라톤적 설명은 고대 이후로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가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플라톤적 시도를 알지 못하는 신학, 혹은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모르거나 자신의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는 특별히 죽음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을 고려할 때 더욱 타당하다.7)

윙엘의 이러한 주장은 결코 플라톤주의가 기독교 신학에 공헌한 점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왜곡시킨 결과를 밝히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플라톤주의화된 기독교로부터 탈플라톤주의(Entplatonisierung)를 신학의 과제로 역설한다.8)

그렇다면 이제 플라톤주의로부터 벗어난 기독교 본래의 성서적 인간 이해와 죽음 이해는 어떤 내용을 가질 것인가? 우리는 이를 성서의 인간에 관한 진술에 주목함으로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구약성서에서 인간을 표현하는 명칭들은 주로 다음의 네 단어가 사용되었다: 네페쉬, 바사르, 루아흐, 렙 등이다. 이들 각각의 의미를 살펴보면, 네페쉬는 원래 식도나 목을 의미하는 단어로 인간의 생명을 중심으로 인간을 표현했고 주로 70인역의 헬라어에서 영혼으로 번역되었다.

바사르는 육체를 의미하는 단어로 헬라어로는 몸이나 신체로 번영되었다. 루아흐는 바람이나 영을 의미하는 단어로 인간의 의지를 나타내곤 하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들 인간에 관한 표현들이 언제니 단독적으로 인간 자신을 지칭했다는 데에 있다. 이들 단어가 서로 만남으로 합일체로 인간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을 서술하는 상황에 따라 네페쉬(생명을 중심으로 인간을 표현할 때), 바사르(인간의 육체성을 중심으로 표현할 때), 루아흐(인간의 초월성을 중심으로 표현할 때), (인간의 의지를 중심으로 표현할 때)등이 개별적으로 전인(whole man)을 의미했다는 사실이고 이점에 있어서 히브리적 인간 이해는 헬라의 인간관과 전혀 다른 전제와 특징을 가진다는 것이다.9)

신약성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약성서에서 인간을 표현하는 단어로는 주로 소마, 사르크스, 프뉴마, 프쉬케 등이 사용되었는데, 이들도 구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단어가 개별적으로 인간을 지칭했다는 점이다. 인간의 몸(소마), 육(사르크스), 영(프뉴마), 영혼(프쉬케) 등은 모두 제유법적(Synekdochisch)으로 전인(나)을 의미한다는 것이다.10) 그런 점에서 불트만은 “인간이 몸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몸이다”라고 주장한다.11)

따라서 성서의 인간론은 플라톤의 인간론과 달리 인간을 영혼과 몸이 만나서 구성하는 하나의 실체로 보지 않고 인간 자신을 때로는 영혼으로 보기도 하고 때로는 몸으로 보기도 하는 등 인간을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성서의 인간론은 인간을 몸과 영혼의 합일체로 보지 않고 인간을 몸이면서 동시에 영혼, 동시에 영 등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마치 루터의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규정이 인간을 그 구성에 있어서 구분함으로 “영혼은 의인이나 몸은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현재에 있어서는 “전인이 죄인이나 장래에 있어서 전인이 의인이다”(peccator in re, iustus in spe)라는 사실을 주장한 것처럼, 인간을 영혼과 몸으로 부분적으로 나누는 것은 성서의 인간 이해와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서의 인간론은 인간 안의 두 실체(이원론)나 세 실체(삼분설)를 인간의 구성 부분으로 말하지 않고 전인 안에서 다양한 실체를 다양한 관점에서 동시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죽음을 몸과 영혼의 분리로 이해했던 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성서적 죽음관을 순수하게 회복할 수 있는 결정적 전제를 마련하게 되었다.

성서는 죽음을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인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본다(창 2:17; 롬 3:23; 6:23). 그리고 그 심판의 내용을 생명의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말하는 성서의 죽음으로 이해한다(마 27:46).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말하는 성서의 죽음관과 몸으로부터의 분리를 말하는 플라톤의 죽음관은 유사한 듯 보이나 실상은 그 핵심에 있어서 정반대이다. 성서의 죽음관은 죽음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의 실체로서 인간에게 두렵고 원수가 되는 것이지만 플라톤의 죽음은 영혼에게는 자신의 감옥이었던 육체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구원의 순간인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다. 과연 플라톤의 주장대로 몸으로부터 영혼의 분리 안에서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의 심판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목도하게 되는가? 죄에 대한 심판을 죽음으로 보았는데 인간의 죄의 자리는 플라톤의 주장처럼 몸이란 말인가? 성경은 인간의 죄의 자리를 오히려 몸에 두지 않고 인간의 마음, 중심에 두고 있다(마 15:19; 시 14:1).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인 죽음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은 침해되지 않고 무조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여기에서 플라톤의 영혼불멸론을 부정한다고 해서, 곧바로 인간의 내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종말론적 사실들을 성서적 진술에 따라 재구성하고자 제안하는 것이다.

성서의 인간 이해에 의하면 인간은 다양한 차원과 관련맺는 유기체로서의 전인이다. 그 중에서 성서적 인간 이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의 형상”(창1:27)으로 표현되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이다. 인간을 영혼과 몸의 관계에서 보는 실체적 인간론이 아니라 성서는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는 관계적 인간론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전인으로 서 있다(Coram Deo)는 것이다.

이 현실은 결코 인간의 영혼만이 독단적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의 전인이 서 있게 된다. 따라서 죄에 해한 심판의 결과도 나 전인이 맞게 되고 죄로부터의 구원의 완성인 부활과 영생에 초대되는 것도 영혼이 아닌 나 자신으로서의 전인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로마서5장에서 “옛사람과 새사람”으로 표현한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아야 할 대상은 나의 몸이 아니라 옛사람으로 표현되는 죄에 갇힌 나의 전인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은 죽음에서 침해당하지 않는 나의 영혼이 아닌 새사람으로 표현되는 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전인이다. 이를 클라우스 베르거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죽음은 한 편으로는 하나의 정점이다. 지상의 삶의 종점, 이 세사의 삶과 이별하는 순간이다. ...다른 한 편 죽음은 또한 오랜 과정이다. 고린도후서 4장16절에서처럼, 겉사람, 보이는 사람은 나날이 후패해 가지만, 이와 함께 우리의 속사람, 보이지 않는 새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진다.12)

그러므로 죽음에서 나의 옛사람, 겉사람이 죽으면서 이 죽음은 또한 나의 새사람, 속사람이 살게 되는 순간이요 그러한 과정의 전환점이다. 이미 그리스도인의 세례에서 시작된 이 과정은 우리의 죽음에서 전환점을 맞이하고 그리고 죽음 이후의 부활에서 그 완성을 온전히 이루게 된다. 여기에서 겉사람과 속사람, 옛사람과 새사람은 단지 몸이나 영혼만을 언급하지 않고 전인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루터가[갈라디아서 주석](1519)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두 전인이 있고 또 한 전인이 있다”(Sunt duo toti homo et unus toutus homo)는 말은, 한 편으로는 옛사람과 새사람, 혹은 겉사람과 속사람의 두종류의 전인과 그러나 그러한 인간으로서의 한 전인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과 그의 죽음을 영혼과 몸이라는 용어가 아닌 성서적 용어와 사고에 따라 이해할 때, 플라톤주의에 근거한 이원론적 인간론의 틀을 극복하고 성서적 인간론과 죽음 이해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원론적 인간 이해에 근거한 기존의 종말론의 틀을 극복하는 길은 탈플라톤화를 통해 성서의 인간론을 회복하는 데에 있다.

 

III . 영혼불멸론의 문제: 칭의론적 동기가 결여된 종말론

종말론과 칭의론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마지막 일들과 우리의 구원을 설명하는 교리는 언뜻 보기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종말론이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설명하는 신학적 진술이라면 종말론은 구원론의 종결부에 해당된다. 따라서 구원론에서의 신학적 원리는 종말론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개신교 신학은 칭의론을 가장 중시하는 신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루터교에서는 칭의론은 “교회가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신앙의 조항”(articuc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으로 소중히 여기면서 신학의 모든 진술들을 칭의론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이는 단지 구원론뿐만 아니라 창조론과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 및 모든 기독교 교리의 영역을 칭의론적 동기인 “오직 하나님의 행동만”(Gottesshandeln allein)이라는 전제하에서 서술하려는 의지를 반영하며,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구원의 이유와 근거를 “인간 밖에서”(Extra nos) 찾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우리는 이미 앞 문장에서 영혼과 몸의 이원론적 인간론이 지닌 인간 및 죽음에 대한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본 장에서는 그러한 전제 위에서 형성되는 영혼불멸론 자체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기독교적으로 정착된 영혼불멸론은 글자 그대로 인간이 죽을 때 몸은 땅에 묻히므로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사람의 육체는 사후에 티끌로 돌아가서 썩어버린다. 그러나 불멸의 생존을 누리는 사람의 영혼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곧장 되돌아간다.”13)고 진술한다.

필자는 여기서 사람이 죽은 후에 하나님 앞으로 간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문제삼고 있는 점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서게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바로 영혼불멸론에 대한 모든 비판의 초점이 모아지다.

원래 플라톤주의에서는 영혼이 죽음을 넘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위심할 여지없는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 의심할 바 없는 진리인 것처럼 영혼불멸론도 진리이며, 따라서 영혼불멸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 속성으로 인정되었다. 이를 기독교 신학에서는 영혼불멸은 모든 인간이 창조에 의해 지니고 있는 본래적 속성으로 보았고 죽음 이후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처럼 헬레니즘에 근거한 영혼불멸론이 기독교 신학 안에 쉽게 자리를 잡게 된 이유는, 특별히 기독교 변증가들에 위해 기독교 안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 원인은, 영혼불멸론이 인간의 죽음 이후의 운명을 말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기독교 신학 안에 정착한 영혼불멸론은 죽음 이전의 인간과 죽음 이후의 인간의 정체성을 인간의 영혼으로 설명했고 이는 또다시 심판을 주장했던 기독교 종말론에 심판의 대상자를 설정해 줄 수 있는 근거를 영혼에서 발견하게 되었다.14)

그로 인해 인간의 영혼이 자연스레 죽음 이후의 인간의 실존을 대변하게 되었고, 영혼의 계속적인 실존은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의 필요성에 의해 의심없이 인정되게 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영혼이 불멸해야만 하는 필연성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언뜻 보기에 영혼불멸론의 근거를 심판에 두는 것처럼 들리므로 개신교 신학의 특징인 칭의론적 성격(extra nos)을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를 면밀히 살펴보면, 심판이 영혼불멸론의 근거가 아니라 영혼의 불멸성을 위해 심판이 보조적 기능을 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인간 안에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인 죽음에 침해당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는 사실은 개신교 신학에서는 낯선 것이다.

그러므로 20세기 중반에 개신교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영혼불멸론을 강하게 부정하는 소위 “전적 죽음이론”(Ganztod - Theorie)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인간의 운명이 죽음으로 완전히 종료된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인간의 본래적 성향인 영혼의 불멸성에 의해 확보되는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종말론적 완성행동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영혼불멸론은 개신교 신학자들보다 상대적으로 가톨릭 신학자들에 위해 더 많이 대변되어왔다. 최근 개신교 신학자들에의한 가톨릭교회의 영혼불멸론에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있는 추기경인 요셉 라칭어는 “대화적 영혼불멸론”(Dialogische Unsterblichkeitslehre)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가 앞에서 이르게 된 인식은, 고립적인 자기 자신이 인간을 불멸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관계, 하나님을 향한 관계의 능력이 그를 불멸적으로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이 존재의 개방성이 그것과 무관한 채로 존재하는 인간에게 부과된추가물이 아닌 인간의 심오한 본질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것이다.15)

라칭어의 주장에 전통적인 심판이라는 단어 대신에 관계라는 새로운 단어가 들어갔을뿐 영혼불멸론의 본래적 성격은 변화된 것이 없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영속성을 부인하는 기독교 신학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관계의 영속성이 과연 라칭어의 주장대로 영혼불멸이라는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영혼불멸이라 본래 인간의 소여성을 말하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는 용어가 아니가. 이 단어는 인간에 관계된 것이지 하나님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영혼불멸론의 계속적 주장을 위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의 “세계요리문답”(1993)을 보면 영혼불멸론의 근거를 사후에도 죽지 않고 남아 있는 불멸적 실체(주체)로 변함없이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교회는 가르치기를, 모든 영혼은 부모로부터 전달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직접 창조되며, 이 영혼은 불멸적이다. 죽음에서 영혼이 몸과 분리될 때, 영혼은 죽지 아니하고 부활시에 새로운 몸과 연합될 것이다(366번).16)

더욱이 1979년에 교황청에서 발표한 “종말론의 몇 가지 질문에 관한 신앙론을 위한 회중서신”의 내용을 보면 그들의 영혼관을 확인하게 된다. 

교회는 사후에 영적 요소를 지진, 의식과 의지를 갖춘 실체의 지속을 확고히 인정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아는 계속 존재하며 이는 중간상태에서 그의 완전한 신체성은 결여하고 있다. 이 요소를 표현하기 위해 교회는 성서와 전통의 용례에 의해 영혼이란 용어를 사용한다.17)

로마 카톨릭 내에서 한 편으로는 영혼을 대화적 성격으로 이해하나, 다른 한 편에서는 여전히 영혼의 본래적 실체적 성격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영혼의 불멸성의 근거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닌 영혼의 고유한 속성이라는 기존의 영혼불멸론에서 조금도 벗어난 점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영혼불멸론을 관계 안에서 설정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더 규명되어야 할 내용이 자리잡고 있다.

파울 알트하우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영혼불멸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불멸성이다.”18)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과의 불멸적 관계를 강조할 때,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대목은 이 관계를 하나님과 인간이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관계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상대자로 등장함으로 인간 편의 불멸성을 인정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에 대해 칭의론적 동기에 근거한 종할론은 철저하게 거부한다. 불멸적 관계의 처음과 끝은 오직 하나님 안에 (solus Deus)만, 인간에게는 전혀 없다(extra nos)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의 요르그 바우르의 주장은 영혼불멸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비판을 제공해 준다.

창조하시며 의롭게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은-롬 4:17과 롬 4:5-어떠한 방법으로도,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즉 일차적 주체로서 인간이 하나님께 종속된다는 의미에서, 인간과의 상호교환적이거나 동반자 관계에 서 계시지 않는다.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고 주시고 역사하시며, 더욱이 무(Nichts)에 대해서 그렇게 행하신다. 이 무는 하나님의 행동의 전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없는 자로부터:역자 주) 있는 자로 부름받을 것이며(롬 4:17), 경건치 않은 자로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것이며(롬 4:5) 종말론적으로 죽은 자들이 생명으로 옮겨질 것이다(롬 4:17).19)

우리는 기존의 기독교화된 영혼불멸론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동에 상관없이 불멸적 인간의 영혼이 전제됨을 보면서, 인간의 사후의 존재는 오직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동에 근거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의 사후의 존재는 인간의 본래적 속성이 아닌 하나님의 은사로 인식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몰트만은 “영혼불멸론을 인간 안의 불멸적인 것에 대한 자기 신뢰로, 그러나 부할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케 하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20)로 주장한다.

그렇다면 성서는 인간의 사후의 존재에 대해서 무엇으로 말씀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어떤 행동에 의해 사후의 존재로 부름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는가?

영혼불멸론과 달리, 즉 죽음을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분리로 보지 않고 , 전인이 맞게 되는 운명으로 볼 때, 죽음과 부활에서의 인간의 정체성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 정체성의 자리를 인간 안에 두지 않는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성서는 이에 대해 매우 독특한 언어를 제시해 오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억”을 형상화한 개념으로 우리에게 책이나 문서(말 2:16)와 생명책(계 20:12-15)으로 소개된다. “하나님의 기억”은 부활의 전제가 되기도 하고 (단 12:1-2), 심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계 20:12-15).

죽음은 죽은 자에게는 미래와 전망이 상실된 상태이며 계속 존재할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21) 바르트는 이런 상태의 죽은 자를 “존재했던 존재”(das gewesene Sein)로 표현한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존재했던 존재자가 되지만 그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존재하는 자가 되어 주신다. 이것이 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이 우리의 피안”22)이라는 말의 참 의미다.

바울이 로마서 8장 38-39절에서 찬송한 바처럼, 현재나 장래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히 기억하시면, 우리는 존재했던 존재자에서 존재하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억은 우리의 영원한 존재의 근거가 되신다.. 즉 하나님의 기억은 존재했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새로운 창조행위가 되신다(롬 4:17).23)

우리가 인간 사후의 존재의 근거를 인간 안에서(영혼) 찾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하나님의 기억행동) 찾는다면, 이는 정확하게 칭의론적 동기에 부합되는 종말론적 진술로 평가될 수 있다.

(계속)

 

정홍렬 교수는 성균관대학교 금속공학과 졸업(B. Eng.)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석사(Th.M. M. Div.)를 거쳐 독일 에어랑엔 대학교 신학박사(Dr. theol.)를 받았으며 현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학위논문은 「기독교 부활소망과 종말론에 있어서의 전인」(Totus homo in der christlichen Auferstehungshoffnung und Eschatologie)가 있으며, 저서로는  『사도신경 연구』(2005, 대한기독교서회), 역서로는 『평신도를 위한 종말론』(발 J. 사우어 저, 나눔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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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개인의 종말과 우주의 종말의 분리를 제시할 수 있다. 대부분의 종말론 교과서들은 이 두 영역을 논의의 편의상 구분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각각의 종말의 사건들에 대한 서술에 국한되어 각 사건들이 전체 종말론과 어떤 관련을 맺는지에 대한 언급은 제시되고 있지 않다. 예를 들러서 죽음에 대한 서술은 단지 그 주제에 국한될 뿐이어서 그 이후의 부활과 영생과 나아가서 이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전체 종말적 완성행위와의 관련없이 배타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또한 개인의 종말사건들이 전체 역사에 대한 종말사건과 어떠한 연관성 없이 단지 개별적인 서술들로 일관되어 있다(Vgl. Christofer Frey, Dogmatik, 1987, 80)

2)필자는 이 논문에서 플라톤주의가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 결코 성서 자체에 여향을 주었다고 보지 않는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플라톤주의는 우리의 성서를 읽는 전제에 영향을 줌으로 성서의 본래적 의도를 떠난 플라톤주의적 입장에서 성서를 읽도록 하는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인간과 종말에 관한 성서의 본래의 메시지를 찾는 것을 종말론의 해석학적 과제라고 주장한다.

3) Heinrich Doerrie, Art ."Platonismus" ,RGG3. 5, 414 

4)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제7장 “인간에 관하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 역시 인간의 한 인격 안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가 있음을 주장한다. 즉 하나는 불멸의 영으로서 육신으로부터 분리될 경우 자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다른 하나는 죽어야 할 육체로서 최후 심판 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니 살아 있는 때이든 죽어서든 간에 전인(全人)이 영원히 보존되는 것이다.”여기에서 말로는 전인이라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 내용은 성서의 전인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성서적 전인은 몸과 영혼의 두 실체가 만나서 이루는 전인이 아니라 인간은 한 인격이며 그 인격 안에 서로 대립하는 나, 바울의 용어를 빌면 속사람과 겉사람 혹은 옛사람과 새사람을 말하지 영혼과 몸을 말하지 않는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안고백서에서도 제32장 1항에서, “사람의 육체는 사후에 티끌로 돌아가서 썩어버린다”(창 3:19; 행 13:36)고 되어 있다. 그러나 불멸의 생존을 누리는 사람의 영혼(죽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는다)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곧장 되돌아간다(눅 23:43; 전 2:7). 여기에서도 인간이 영혼과 몸으로 구성되었으며 죽음에서 이들이 분리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내용상의 특징은 영혼 수면설과 영혼 멸절론을 부정하는 데에 치중되고 있다(참고 이형기 편저 세계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 ,1991)

5)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 Pietro Pomponazzi(1462-1525)의 “Tractatus de immortalitate"(영혼불멸에 관한 진술)에서 그가 영혼의 불멸성을 부인함으로 이 책이 출판된 1562년 이 책은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그는 이 책을 생전에 출판하지 못하고 사후에야 겨우 출판했다.

6) 이러한 점에서 니이체는 “기독교를 민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로 평가하였다(Friedrich Nietzsche, Jenseits von Gut und Böse, 1994,7)

7) Eberhard Juengel, Tod, 1985,60.

8) Eberhard Juengel, Tod, 73.

9) 이에 대하여 한스 발터 볼프,[구약성서 인간학](분도출판사, 1991), 28-116dmf 참조하시오.

10) 참조. Rudolf Bultmann,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2. Aufl., 1954, 188-205.

11) Rudolf Bultmann,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191.

12) Klaus Berger, Ist mit dem Tod Alles aus?, 1997,32

1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4장의 1

14) Hong-yul Chung, Totus homo in der christlichen Auferstehungshoffnung und Eschatologie, Erlangen, 1997,66

15) Joseph Ratzinger, Eschatologie, 130

16) Katechismus der Katholischen Kirche, 1993

17) Sekretriat der Deutschen Bischofskonferenz(Hrg.), Schreiben der Kongregation für die Glaubenslehre zu einigen Fragen der Eschatologie, 1979. 5

18)  Paul Althaus, Die Letzten Dinge, 1961, 110

19) Joerg, Baur, "Die Rechtfertigungslehre in der Spannung zwischen dem evangelischen 'Allein' und dem römisch-katholischen Amts- und Sakramentsverständnis", EvTh 58,Jg. 1998, 144

20) Jürgen Moltmann, Das Kommen Gottes, 1995,82

21) Karl Barth, KD III/2, 716

22) Karl Barth, KD III/2, 770

23) Hong-Yul Chung, totus homo, 117-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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