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종말론을 위한 해석학적 원리의 제안(2)
기독교 종말론을 위한 해석학적 원리의 제안(2)
  • 정홍렬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 승인 2018.11.27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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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성서해석학의 문제: 단선적인 문자적 해석에 근거한 종말론

V. 시간의 논리 안에 갇힌 종말론: 연장된 시간으로서의 영원 이해

VI. 나가는 말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정홍렬 교수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정홍렬 교수


기독교 종말론을 위한 해석학적 원리의 제안(2)
 

IV. 성서해석학의 문제: 단선적인 문자적 해석에 근거한 종말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완성하실 종말의 실체들을 인간의 언어로 말한다는 행위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이 현실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여러 모양으로 묵시와 비유와 상징 등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이러한 성서의 진술들을 가지고 어떻게 기독교의 종말론을 체계적으로 구성하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 안에서 죽음에 관한 수많은 다양한 성격과 내용을 담은 진술들을 만난다.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창 2:17)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입구(빌 1:23)로도 표현되고 잠으로 묘사(요 11:11)되는가 하면 죄와 연결된 권세(롬 5:12)로도 서술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성격 규정과 함께 죽음은 두 가지의 사건으로도 설명된다. 요한계시록 2장 11절과 20장 6절에서는 둘째 사망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상응하는 첫째 사망이라는 단어가 성서에 등장하지는 않으나 둘째 사망을 통해 죽음을 두 번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이는 다시 앞 장에서 다루었던 영혼과 몸의 이원론 및 죄에 대한 심판과 연결되어서, 첫째 사망은 몸의 죽음이며, 이는 원죄로 인한 사망으로서 모든 인간이 당연히 경험하는 사건이고, 둘째 사망은 영혼의 죽음으로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함으로 맞게 도는 영원한 심판으로 이해한다. 첫째 사망은 인간의 지상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고 둘째 사망은 최후의 심판 이후에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한 번 죽을 수도 있고 두 번 죽을 수도 있게 된다.

성서는 죽음이 하나님께 불순중한 인간이 맞게 되는 심판의 운명으로 선포한다. 성서가 몸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구분하는 듯한 표현(마 10:28)을 하는 것이 사실이나, 전체적으로 보아서 죽음 자체를 나누고 있지는 않는다. 죽음은 곧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한다.

죽음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왜 하나님은 인간의 몸에 대해서 심판하시고 난 후에 또다시 영혼에 대해서 심판을 하셔야 할까?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함으로 영혼의 심판의 저주로부터 벗어났다면 왜 몸은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것일까? 역시 몸이 죄의 원인자이어서 몸이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려없이 기존의 종말론은 두 번의 죽음을 성서의 표현대로 단순히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둘째 사망이 지니고 있는 심판적 요소를 퇴색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죽음이 두 번에 걸쳐서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죽음을 두 번의 사건으로 단선적으로 배열하기보다는 성서의 전체적 의도에 따라, “한 번의 죽음이 가진 두 가지 심판의 결과”를 주장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죄인에 대한 죽음의 운명은 전인인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심판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게 됨으로 영원한 죽음인 둘째 사망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나 죄인들에게는 첫 번째의 사망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경험하게 됨으로 이것이 곧 둘째 사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째 사망을 두 번의 죽음의 배열이 아닌 한 번의 죽음 안에 동시적(simul)으로 나타나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의 두 가지 현실로 인식하자는 것이다.

부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서는 두 종류의 부활을 소개하고 있다. 즉 악인과 의인의 부활(단 12:2; 요 5:28-29: 행 24:15)을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부활이 영생에 이르는 계기가 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부활이 심판의 전제가 된다. 여기에 요한계시록 20장 5-6절에서는 “첫째 부활”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역시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이 구분되는 두 번의 사건인가? 판넨베르그는 이에 대해 부활은 언제나 기독교 신앙에서 소망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심판의 부활을 제외한 영새의 부활을 우선적으로 부활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4)

부활사건의 의미를 그리스도인의 영생에 이르는 소망의 관점 하에서 봄으로, 심판의 전제로서의 부활을 일방적으로 부인하는 판넨베르그의 시도는 성서의 의도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이번에도 우리는 두 번, 혹은 두 종류의 부활을 한 번의 부활 사건이 지닌 두 가지 동시적 의미로 해석하고자 한다. 몸이 다시 사는 부활은 분명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소망의 대상이다.

의인이 맞이하게 되는 부활은 영생에 이르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러나 죄인이 맞이하는 부활은 소망의 대상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영원한 심판의 전단계가 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부활이라는 종말론적 완성행위를 통해 영생과 영벌의 심판이라는 두 종류의 가능성을 한 전인에게 내리신다고 우리는 이해한다. 이것이 의인에게는 소망이 될 것이고 죄인에게는 심판이 될 것이다.

이제 성서 안에서 소개되는 심판에 대해 살펴보자. 당연한 말이지만 구약에서는 일관되게 심판의 주체를 하나님(여호와)으로 고백한다(욥 8:3; 시 7:8).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성부께서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신 것으로 소개된다(요 5:22).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재림 주”로 고백된다. 이것을 최후의 심판이라한다.

그렇다고 우리는 성부의 심판이 성자의 최후의 심판 이후에 있다거나 이전에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성자의 심판은 그 최종적 성격에서 성부의 심판을 대신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에서 맞이하는 심판과 최후의 심판과의 관계이다.

최후의 심판을 죽음에서 맞는 심판과 구분하기 위해 “최후”라는 수식어가 부가되었는지, 아니면,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게 경험되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분해서 죽음을 통해 맞이하는 심판을 최후의 심판으로 명명했는지 구분이 모호하다. 만일 죽음 이후에 또 하나의 마지막 날의 심판, 즉 주님의 재림시의 심판이 있다면, 죽은 자는 두 번에 걸쳐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서 개혁교회의 대표적 신앙고백문들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문57“ 몸의 부활이 당신에게 주는 위로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다. 이에 대한 답은 “이 세상에서의 육체의 생명이 끝난 후에 나의 영혼은 그것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올리워질 것이고, 이 나의 육체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 부활함으로 나의 영혼과 다시 연합해서 그리스도의 영화롭게 된 몸을 닮게 될 것입니다”라고 진술된다.

또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 제26장은 “몸이 떠난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우리는 신자들이 육체적인 죽음 이후에 직접 그리스도에게로 간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산 자들이 즉은 자들을 위하여 찬양과 기도와 예배를 올릴 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은 직접 지옥으로 던지움을 받아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들을 위하여 어떠한 예배를 올려도 이들은 이 지옥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라고 선언한다. 마지막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2장 “사람의 죽음 이후의 상태와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사람의 육체는 사후에 티끌로 돌아가서 썩어버린다(창 3;19; 행 13:36). 그러나 불멸의 생존을 누리는 사람의 영혼(죽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는다)은 그것은 주신 하나님께로 곧장 되돌아간다(눅 23:43; 전 2:7). 이신칭의를 얻고 완전히 성화된 영혼들은 가장 높은 하늘에 올라간다. 이들은 여기에서 광채와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그들의 유신이 완전히 구속되기를 기다린다(히 12:23; 고후 5:1,5,8; 빌 1:23; 행 3:21; 엡 4:10; 요일 3:2).

사악한 불신자의 영혼은 지옥에 던지어지며 이들은 여기에서 큰 고통과 흑암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눅 16:23,24; 행 1:25; 유 6,7; 벧전 3:19).성경은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이 가야 된 곳은 바로 이 두 장소 이외에는 없다고 가르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문들이 죽은 자들을 향해 최후의 심판을 말로는 하고 있지만 이들은 이미 사후에 곧장 심판의 결과를 맞이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 결과는 다시 번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최종적 결과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사후에 이미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해 있고,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의 경우에도 죽은 자들이 죽음 이후에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졌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아무런 예배와 기도가 무의미함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경우도, 말로는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사후에 곧장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지는 운명을 선언하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죽음 직후에 이미 모든 죽은 자들이 최후의 심판을 맞이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 최후의 심판의 의의는 이 땅에 살아 있는 자들에게 유효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죽음에서의 심판과 최후의 심판을 두 번의 심판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은 죽음에서 최후의 심판을 맞이하나 산 자들은 아직 죽음에서 맞이할 최후의 심판이 임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쓰여지는 “이미와 아직 아님”(already not yet)을 “죽은 자들에게는 이미 임한 최후의 심판으로, 그러나 산 자들에게는 아직 임하지 않은 최후의 심판으로” 적용하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부의 심판과 성자의 심판을 각기 다른 두 번의 심판으로 판단하지 않듯이, 죽음에서 맞이하는 심판과 최후의 심판을 두 번의 심판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성서가 말씀하는 최후의 심판은 우리가 죽음에서 주님 앞에 설 때 맞이하는 최후의 심판을 가리킨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를 서술방법에 따라 죽음 이후에 맞이하는 심판으로 표현할 수 있다(히9:27). 죽음 이후의 심판이 죽음에서의 심판과 분리된 또 하나의 심판이 아닌 한에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천년왕국론의 견해들을 분석해 보자.

천년왕국론에 대한 성서적 전거는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 동안”의 그리스도의 통치에 근거한다. 그런데 사실은 전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이나 천년왕국을 독립적인 시간으로 보는 견해들은 요한계시록 20장7-10절까지의 천년 후에 사탄이 잠시 놓임받는 장면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본문을 제외한 성서 전체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는 본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면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와 구분된 천년왕국론을 주장할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 이후에 또다시 사탄의 놓임을 강조하면서, 그 이후에야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는 것은 성서의 전체적 맥락과 어긋나는 사실이다. 성서 그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재림이 궁극적인 완성 이전의 것으로 언급되는 예가 없기 때문이다. 성서에 대한 문자적 해석은 지양되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문자적 천년왕국론 이전에 하나님 나라 자체에 대해서 소망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죽음’과 ‘부활’, ‘심판’ 그리고 ‘천년왕국’을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일관된 원리가 작용되고 있었다. 그것은 성서를 단순히 문자적으로 반복함으로 종말의 사건들을 병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의도된 목적과 원리들을 성서의 전체 맥락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기존의 종말론은 단순히 “마지막 일들에 관한 교리”로 정의되어 왔다. 이러한 이해의 근원에는 종말론을 마지막 일들(eschata)로 보려는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종말론적 진술을 일방적으로 연속적인 사건들의 관련성 속에서 전개시키게끔 만든 결정적 원인제공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종말론의 진술의 대상은 이러한 구성적인 종말론적 장면들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위로와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말 완성행동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은 단순히 “마지막 일들에 관한 교리”만이 아니라 “인간과 세상의 역사를 성취시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완성행위”가 되어야 하며 우리는 그 근거를 “궁극적인 것”(eschaton)이라는 용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은 먼저 “궁극적인 하나님의 완성행동”(eschaton)의 시각에서 “마지막일들”(eschata)의 진술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25) 성서가 일관되게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말적 완성행동은 그로 인해 파생되는 수많은, 다양한 종말의 사건들을 일관되게 해석하는 틀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전체적 종말의 빛에서 개별적인 사건들의 의미와 연관성이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가 있다. 

신약성경이 선포하는 종말론적 사건들인 부활, 영생, 심판,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 등에는 반드시 하나의 결정적인 요인을 통해 서술되는 특징이 있다는 점이다. 마치 신약성경 전체를 하나의 음악으로 표현한다면 모든 종말론적 노래들 안에 고정된 멜로디(cantus firmus)가 자리잡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없이 진술되는 법이 없다. 모든 죽은 자의 부활이나 심판, 그리고 이미 초림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궁극적 완성(때로는 이를 천년왕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모든 사건의 시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자리잡고 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소망으로 받아들여졌다.26)

 

V. 시간의 논리 안에 갇힌 종말론: 연장된 시간으로서의 영원 이해

사실 앞 장에서 다루었던 종말사건의 병렬식 전개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해석학적 오류가 숨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종말론을 연장된 시간의 논리 안에서 다룬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재 종말론에서 취급되고 있는 모든 개별적인 주제들은 한결같이 연대기적 시간의 흐름 안에서 순차적으로 배열되어 이해되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대한 마르쿠바르트의 비판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서 종말론은 죽음과 심판, 부활 및 영생등 하나님에 의해 전개되는 엄청난 사건이라는 사실보다 단순히 먼저 일어나는 것과 그것을 뒤따라 일어나는 시간 속에서의 순서와의 관련성이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 이로써 종말론은 세계 역사과저의 종착점을 향해 진행되고 있는 운행시간표처럼 취급되고 있다.27)

우리는 이미 앞 장에서 두 번의 죽음 대신 한 번의 죽음 안에 있는 죽음의 동시적 두 성격으로, 두 번의 부활 대신 한 번의 부활 안에 있는 부활의 동시적 두 결과로, 두 번의 심판 대신 한 번의 심판의 궁극적 성격으로, 하나님 나라와 시간적으로 구분되는 천년왕국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주장하면서 시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두 번의 사건 대신 하나의 사건이 지닌 동시적 성격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한 편으로는 시간의 연장선상에서 배열된 종말론을 극복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이제 다른 한편으로는 더 힘든 과제를 맞이하고 있다. 죽음과 부활과 심판과 영생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및 하나님 나라의 실현 등, 서로 다른 종말론적 개별적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학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느냐는 중대한 과제에 당면해 있다. 이는 기존의 종말론이 단순히 개인의 종말론과 우주적 종말론으로 구분하여 양자의 연결을 포기한 채로 남겨 두었던 영역일 뿐만 아니라, 각각의 영역 안에서는 단순히 시간적 선후관계로 배열해 놓고 만 주제들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죽음, 부활, 심판, 영생, 그리스도의 재림 혹은 죽음, 심판, 부활, 영생, 그리스도의 재림의 순서는 논리적 귀결로 형성된 순서이지 시간적 순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부활이 죽음보다 앞서서 올 수 없다는 점에서 논리적인 순서이다. 그러나 부활과 심판과 영생이 모두 죽음의 순간에 집약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죽음 이후에 지배하는 시간은 이 세상의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으로서의 영원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시간적 선후관계로 얽혀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일 먼저 문제점으로 등장하는 것이 “중간상태”에 관한 종말론의 진술이다. 중간상태라 함은 개인의 죽음 이후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시간까지의 미완서의 상태를 말하며, 이 기간 중 이미 죽은 자들은 중간상태에서 종말의 완성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중간상태는 칼빈이 말한 바대로 불완전의 상태, 기대의 상태, 잠정적 축복의 상태인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본 개혁교회 신앙고백문들을 분석해 보면 죽은 자들의 운명은 부활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됨을 볼 수 있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 그들의 천국과 지옥의 운명은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은 죽은 자의 부활의 문제이다. 이미 그들이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는 성서의 증거가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과 일반적 의미에서 그리고 특별히 산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필자의 견해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주는 의미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그동안 간접적으로 만났던 그리스도의 임재의 경험이 재림을 통해 완전히 직접적으로 성취되는 데에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그때에는” 이미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와의 결정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주는 의미는 한가지로 모두 그리스도와의 결정적 만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죽은 자들이 이미 그리스도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기까지 부활을 기다려야만 한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어 보이고 죽음 이후의 시간에 과연 세상에서와 같은 의미에서의 “기다림”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있는지가 의문스러운 것이다. 오히려 기다림이란 지상에서 주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죽은 자들의 자아가 무덤 속에 있지 않고 주님께 이르렀다면 그들은 더 이상 기다려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성서의 선포대로 죽은 자의 부활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동의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부활과 주의 재림의 의미는 그 근본적 의미에 있어서 주님과의 만남없이, 즉 주님의 결정적 간섭없이 부활이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은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으로 실현된다고 이해하여도 성서의 근본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28)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상상력 넘치는 종말의 예언적 진술로부터 다시 한번 확인해 보자. 로핑크는 그의 논문 “죽음”이후에 무엇이 일어나는가?”에서 다음의 7가지 주제를 소개한다:

1. 죽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결정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만나게 된다.

2. 이 만남은 우리에게 심판이 될 것이다.

3. 이 만남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심판주로서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체험 하게 된다.

4. 몸과 영혼의 전인이 죽음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자신의 전 삶과 인격적 세계 그리고 바꿀 수 없 는 그의 삶의 전역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5. 이 세상의 남겨진 세계와 전체 역사는 우리(죽은 자들)의 고유한 역사와 함께 연결된다. 그러 므로 죽음 안에서 우리 자신과 함께 남아 있던 전체 역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6. 죽음에서 모든 시간은 침몰한다. 그 때문에 인간은 죽음을 통과하는 순간 자신의 고유한 성취 뿐만 아니라 세계의 완성을 경험한다.

7. 우리와 하나님의 결정적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29)

이상과 같은 로핑크의 종말론적 진술에 한 가지 부언하고자 하는 것은, 종말론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고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죽은 자들에 관한 종말론적 진술이 산 자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가를 규명하고자 한다.

이미 죽은 자들에게는 로핑크의 진술대로 모든 것이 죽음 안에서 (혹은 죽음 이후에) 완성되었지만, 산 자들에게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로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열려져 있는 상태이다. 성서의 진술대로 그들에게는 아직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 유효하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과 산 자들에게 함께 적용될 수 있는 시간의 논리는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와 주의 재림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우리는 종말론에서 “이미와 아직 아닌”으로 표현한다.

이를 단순히 시간의 역사에만 단선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복합적으로 적용하여서, 죽은 자들에게 이미 이루어진 종말의 완성과 산 자들에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로 설명한다면, 산 자들을 중심으로 이해되었던 시간의 논리를 죽은 자들에게 까지 강제로 적용하여서, 죽음 이후의 기다림의 시간을 설정하였던 논리적 결함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죽은 자와 아직 산 자들에게는 다른 시간이 적용되고 있는 다른 현실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종말론은 산자들이 경험하는 시간을 일방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적용하여서 죽은 자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지상의 산 자들이 기다리는 마지막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모순이 있었으나 “이미와 아직 아닌”의 시간을 죽은 자들과 산 자들에게 함께 적용한다면, 시간의 논리에 갇힌 종말론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종말론에 적용될 시간의 논리를 “영원”(죽은 자들)과 함께 “미래”(산 자들)를 적절히 사용함으로 종말론을 시간의 연장으로만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극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종말의 모든 사건을 영원으로 설명함으로 이 땅의 역사와 아직 남은 인간의 미래를 함몰시키는 잘못30)을 극복할 수 있다.

 

VI. 나가는 말

어느 한 신학자가 말했듯이, 기독교의 종말론 전체를 논한다는 일은 주제넘는 일이고 지난하기 그지없는 작업이고 절대로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말처럼, 우리는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여야만 한다. 종말론이 우리의 구원의 결론이며 우리의 소망의 내용이 된다면, 우리는 종말론을 미지의 영역에 가두어만 둘 수는 없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기존의 종말론이 지닌 해석학적 문제점들을 소개하면서, 이를 극복할 틀로서: 1. 이원론적 인간론의 극복으로서의 전인적 인간이해, 2. 자연신학에 근거한 영혼불멸론 대신에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을 강조하는 부활신앙, 3.문자적 해석에 기초한 병렬식 종말론 전개 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종말론적 완성행위의 시각에 기초한 포괄적 성서해석, 4. 시간의 연장으로 해석된 종말 이해 대신, 시간과 영원의 적절한 적용을 통한 종말론 등을 제안했다.

필자가 제안한 종말론적 해석의 내용들이 이미 한국의 몇몇 신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줄로 안다. 필자도 신학교 시절 이 같은 내용을 처음 접하고 충격과 함께 황홀함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종말론은 필자의 신학적 관심에서 항상 중심을 차지해 왔다.

그러나 아직 한국 교회의 현실은, 이러한 신학교에서의 종말론과 교회에서의 종말론에는 엄청난 차이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이 졸고가 한국교회와 신학교 사이의 종말론에서의 거리를 좁히는 일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졸고를 통해 종말론에 관한 본격적인 많은 논쟁들이 계속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한편, 정홍렬 교수는 성균관대학교 금속공학과 졸업(B. Eng.)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석사(Th.M. M. Div.)를 거쳐 독일 에어랑엔 대학교 신학박사(Dr. theol.)를 받았으며 현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학위논문은 「기독교 부활소망과 종말론에 있어서의 전인」(Totus homo in der christlichen Auferstehungshoffnung und Eschatologie)가 있으며, 저서로는 『사도신경 연구』(2005, 대한기독교서회), 역서로는 『평신도를 위한 종말론』(발 J. 사우어 저, 나눔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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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24) Wolfhart Pannenberg, Systematische Theologie, Bd. 3, 1993, 612

25) 이에 관하여는 Sigurd Hjelde의 방대한 박사학위 논문이 “Das Eschaton und die Eschata"를 참조하시오(BEvTh, 102,1987,특히 24-26)

26)  정홍열,“소망에 대한 조직신학적 접근-인류의 참소망이신 그리스도‘, 인류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 편, 1999),277.

27) F. W. Marquardt, Was dürfen wir hoffen, wenn wir hoffen dürfen?, I, 1993, 21.

28)  필자는 여기에서 요11:23 이하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주님의 사역을 소개하고자 한다. 마르다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에 다시 살 줄을 믿나이다”(24절)라고 이해했으나 주님의 행동은 사실상 이를 부정하신 것이다. 주님의 의도는 마지막 날만이 아닌, 지금 에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안에서 부활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즉 마지막 날데 주님이 오심으로 부활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날(주님을 만나는 날)이 마지막 날이 되는 것이며 그때가 부활의 때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에수 그리스도는 “시간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29) Gerhard Lohfink, "Was kommt nach dem Tod?”, Naherwartung Auferstehung Unsterblichkeit, QD71, 1986, 208-223.

30)  이 점에 관해 판넨베르그는, 최근에 발달된 “개인의 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사상”으로 인해 역사의 종말을 강조하는 종말론(endgeschichtliche Eschatologie)이 무시된 채 개인의 운명과 인류 전체의 운명을 마지막 날의 부활에서 함께 인식했던 기독교 종말론의 중요한 특징이 상실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Die Aufgabe christicher Eschatologie",ZThK 92, 1995,79-80). 이러한 비판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영원과 함께 미래를 동시에 종말론의 해서의 틀로 사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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