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진영의 천년왕국론 논쟁과 세대주의 종말론의 변천(2)
복음주의 진영의 천년왕국론 논쟁과 세대주의 종말론의 변천(2)
  • 이수근 목사(아신대신대원, 조식신학 Ph.D 과정/의학박사/미인피부과원장)
  • 승인 2018.12.0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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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본론

  3. 후천년설의 주장과 쟁점

  4. 무천년설의 주장과 쟁점

 

이수근 목사(아신대신대원, 조식신학 Ph.D 과정)
▲이수근 목사(아신대신대원, 조식신학 Ph.D 과정)

Ⅱ. 본론

3.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의 주장과 쟁점

3.1. 천년왕국과 관련된 종말의 사건들

후천년설의 기본 개념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천년왕국이 있을 것이고 따라서 세계는 점점 기독교화될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서 신자의 수는 증가할 것이며 죄는 완전제거의 수준은 아니지만 점점 최소한으로 축소될 것이다. 인류의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모든 분야는 점점 향상되고 부는 널리 공유되며 국가 간에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적 원리가 예외가 아니라 기준과 규칙으로 된 기독교화된 세계로 재림하실 것이다.47)

그런데 각론으로 들어가면 후천년설 내에 여러 이견들이 존재하는 것에 당황하게 된다. 우선 청교도들이나 19세기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속했던 ‘고전적인 후천년주의자’들은 (계 20:1-6)에 언급된 ‘천년’을 문자적인 기간으로 보는 반면 ‘현대의 후천년주의자’들은 천년을 상징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고전적인 후천년주의자들은 천년이 시작되는 시기가 현재가 아닌 가까운 미래이며 세상을 주님께로 돌리는 교회의 사명이 곧 완성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후천년주의자들은 우리가 이미 그 천년의 시기에 살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더 강한 낙관론을 보이고 있다.48)

천년왕국이 하늘의 왕국인지 지상의 왕국인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즉 천년왕국이 교회시대 동안 사탄은 결박되고 하늘에서는 신자들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개념이라는 벤자민 워필드와 로레인 뵈트너의 주장과는 달리 마셀러스 킥은 교회시대 동안의 사탄 결박은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할 사람들은 현재 지상에 살고 있는 신자들이라고 주장한다. 킥의 이런 주장은 요한계시록 20장 6절의 ‘첫째 부활’을 지상에서 신자들이 거듭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되었다.49) 사탄의 결박 시기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노먼 셰퍼드의 경우 첫째 부활을 신자들의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존재는 지상에서의 신자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킥과 같지만 사탄의 결박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이라고 주장하였다.50)

마태복음 24장의 대환난과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배교는 이미 지나갔다고 보는 것이 후천년설의 일반적 입장이다. 하지만 뵈트너는 요한계시록 20장 7-10절 말씀대로 주님의 재림 전에 ‘사탄의 놓임’ 즉 교회를 공격하는 제한된 악의 출현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그 기간은 짧을 것이고 결국 교회에 해악을 끼치지는 못할 것이다.51)

롬 11:25-26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의 독립적인 왕국적 회복으로 이해하지는 않지만 미래에 유대 민족의 대대적인 대규모 회심이 있을 것으로는 생각한다. (마 28:18-20)의 지상명령은 단순한 명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림하기 전까지 모든 민족에게 효과적으로 전도가 이루어질 것임에 대한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이해한다. (마 16:18)에 언급된 지옥의 문들도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교회의 공격적이고 지속적인 선교를 세상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아울러 메시아의 보편적인 승리적 통치에 대한 구약의 예언들은 아직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도 아니면서 그리스도 재림 이후의 통치를 말하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민 14:21; 시 2:8; 22:27-29, 72; 사 2:2-4; 11:6-9, 65, 66; 렘 31:31-34; 슥 9:9이하; 13:1, 14:9). 따라서 이 본문들은 주님의 재림보다 앞서는 미래의 사건(천년왕국)으로 이해한다.52)

눅 17:20-21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대격변적이고 비연속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말하는 전천년설에 대한 반대증거로 취한다. 이 말씀은 ‘지금’ 자라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때에’ 온전하게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강한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 13:33)의 천국에 대한 누룩 비유도 하나님 나라의 지속적이고 우주적인 확장을 말한다고 본다. 따라서 세상의 타락과 악의 물결은 거스를 수 없다고 하는 전천년설의 패배주의적이고 비관적인 세계관은 지극히 비성경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성경의 위대한 약속들은 간혹 좌절을 겪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도 있겠지만 교회는 결국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명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53)

3.2. 주요 쟁점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여러 공통점이 있다. 첫째, 천년왕국을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보좌에 앉으셔서 지상을 가시적으로 통치하시는 기간으로 보지 않고 둘째, ‘천년’을 문자적으로 정확히 1,000년으로 보지 않으며 셋째,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이후에 이루어질 사건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후천년설이 가지는 쟁점은 다음과 같다.54)

첫째, 메시아의 ‘땅 위에서의’ 승리적 통치를 예언하는 구약성경 본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을 가리킨다는 후천년설의 주장에 대해서 전천년주의자들은 이 본문들이 재림 이후의 통치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천년주의자들은 우리의 최종 상태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고려한다면 구약 예언들은 과도기적인 지상왕국이 아니라 충분히 새 땅 위에서의 영광스러운 통치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55)

둘째, 일부 후천년주의자들이 대환난(마 24장)과 배교(살후 2장)를 과거에 이미 지나간 일로 취급하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마태복음 24장의 감람산강화는 예루살렘 파괴와 세상 끝의 사건들을 모두 다루는 것이고, 특히 그리스도가 강조한 환난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마 24:21)을 엄청난 규모의 환난인데 과연 그런 환난이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언제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후천년주의자들은, 마태복음 24장은 ‘성전이 언제 파괴될 것인가’하는 질문(마 24:1-2)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진 것이었고 따라서 마태복음 24장의 예언은 66-70년에 있었던 유대-로마 전쟁으로 다 끝났다고 말한다. 이 전쟁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마 24:34)는 약속으로 마무리되는 것도 그들에게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일부 후천년주의자들은 마태복음 24장의 예언이 과거가 아닌 미래의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세상이 지속적으로 더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않지는 않다.57)

셋째, (계 20:1-6)은 후천년설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워필드와 뵈트너는 교회시대 동안 사탄이 결박되고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고 있다는 무천년설의 해석을 수용하면서도 굳이 미래의 지상에서의 천년 황금기를 따로 상정하는데 그 근거가 미약하다. 마셀러스 킥이 지상의 성도들이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자들이라고 말한 주장은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계 20:4)”과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5절)”는 구절과 모순된다. 사탄의 결박이 아직 미래의 일이라는 셰퍼드 교수의 주장도 영혼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천년과 또 다른 기간으로서의 천년을 상정하는 것이므로 모순된다. 본문에 네 번 나오는 ‘천년’ 중 두 번이 “그 천년(ta cilia eth)”인 것은 이들이 동일한 기간을 나타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58)

넷째,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 그들이 재림 전에 천년이라는 평화와 번영의 시간을 기대했다는 건 모순된다.59)

다섯째, 경험적으로 보면 세계사는 결코 기독교의 일방적인 득세와 결박 수준의 사탄 세력의 극적인 약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와 악의 세력 간에는 언제나 긴장이 존재해 왔다. 재림 이전에 악이 ‘무시할 만한 비율로 줄어들’ 것이라는 후천년주의자들의 가정은 역사에 대한 지나치게 낭만적인 단순화에 불과하다.60) 이전 세기에는 기독교가 전진하고 있고 성장하고 있다는 분명한 조짐이 있었고 따라서 당시의 복음주의자들이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졌던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 관점을 유지할 수는 없다.

이런 공격에 대해 후천년주의자들은 기독교가 20세기에 일련의 퇴보를 겪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세계 기독교화에 대한 낙관론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 근거는 첫째, 겨자씨의 지속적인 성장은 주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지 인간의 능력이나 세상의 현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기독교의 퇴보로 보이는 현상들은 부분적인 것이고 일시적인 것이며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면 기독교는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20세기에 있었던 수많은 전쟁과 기근, 기아, 질병의 창궐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인류는 이전 어느 때보다도 인권과 평화와 건강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61) 수십 년 이내에 미전도종족의 전도는 완성될 것이며, 이슬람의 도전이 거세다고 하지만 기독교는 과거에 이방 종교의 영향력이 거대했던 ‘2/3세계’ 지역에서 분명히 큰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62)

 

4. 무천년설 (amillennialism)의 주장과 쟁점

4.1. 천년왕국과 관련된 종말의 사건들

무천년설63)은 문자적인 지상의 천년왕국을 부인하며 한 차례의 부활과 한 번의 재림을 주장한다. 따라서 가장 단순한 형태의 천년왕국설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계 20:1-6)에 나오는 ‘천년’과 여러 종말 사건들을 문자가 아닌 상징으로 이해한다. 천년 동안의 사탄의 결박에 대해서도 미래에 그런 문자적인 시간이 따로 온다고 믿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기간 동안 즉 현재 그 효력이 발생하고 있다고 본다. 천년왕국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지금 죽어있는 성도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현재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고 있는, 즉 현재 실현 중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임할 영광스러운 완전한 나라를 고대하면서도, 현재 승리하신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령으로 친히 자기 백성을 이 땅에서 다스리고 계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이 땅에 현존한다고 믿는다. 즉 시작된 종말론과 미래 종말론을 모두 취한다.64)

‘시대의 표적’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계속 있어왔고 재림이 가까울수록 더욱 강화될 것이며 인격적인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점점 심해지는 환난과 배교가 예상된다.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회심하는 일은 재림 전에 완성될 것으로 본다. 주님의 재림 시에 신자-불신자의 부활이 한 번에 일어날 것이며, 아직 살아있는 신자들의 몸은 변화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고, 죽었다가 부활한 신자와 살아있다가 영화롭게 된 신자들은 모두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 이 ‘휴거’ 사건이 있은 뒤 그리스도는 땅으로 강림하시고 최후의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그 후 신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복을, 불신자들은 영벌에 처해질 것이다.65)

부활사건에 있어서 전천년설이 성도의 부활과 불신자의 부활을 무려 천년의 시간간격을 두고 벌려놓은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 이는 요한계시록 20장 이외의 본문에서 시간적으로 구별되는 두 개의 부활을 암시하는 본문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요 5:28-29)이나 바울의 언급(행 24:15)에서는 의인과 악인을 포함하는 미래의 한 사건으로서의 부활을 말한다. 바울은 종말의 시간에 보상과 처벌이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고(살후 1:5-10) 종말에 대한 베드로의 글에도 천년의 시간은 언급되지 않는다(벧후 3:10).66)

4.2. 주요 쟁점

첫째, 무천년설은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문자적인 해석은 거의 취하지 않고 상징으로만 해석하는데 이는 성경을 영해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위험성은 요한계시록 20장뿐만 아니라 구약의 많은 예언들에도 적용된다. 이에 대해 무천년주의자들은 어차피 누구나 성경에서 문자로 취할 부분과 상징으로 취할 부분을 구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문자와 상징을 구분할 정당한 권위와 이유는 누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67)

둘째, 무천년설이 취하는 상징적 해석의 태도는 실재에 대한 이해나 믿음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된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도 지나치게 하나님의 통치 측면만 강조하다가 그 시간성, 장소성에 대해 상징성만 강조하면서 초자연적 세계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질 가능성이 있다. 장소 없는 통치가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소위 “천국기억상실증”은 비단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대한 경고만이 아니다. 무천년설의 상징적 해석 태도도 너무 지나치면 성경의 분명한 문자적인 의미마저 무시해버리게 될 위험성이 있다.68)

셋째, 무천년설의 내용이 주로 전천년설이나 후천년설에 대한 논박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점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자기 주장이 없이 다른 주장들을 부정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일리 있는 지적이기는 하지만, 전쳔년설과 후천년설이 문자적 천년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상징적 천년을 주장하는 무천년설로서는 앞의 두 주장을 논박하는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사실이다.69)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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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47) Anthony A. Hoekema, 248-249.

48)  Gregory A. Boyd, 487.

49) J. Marcellus Kik, Revelation Twenty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55), 33-37, 54-55, Anthony A. Hoekema, 249-250에서 재인용.

50) Norman Shepherd, “The Resurrections of Revelation 20,” in The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XXXVII, 1 (Fall, 1974), 34-43.

51)  Loraine Boettner, The Millennium (Grand Rapids: Baker, 1958), 14, Anthony A. Hoekema, 249에서 재인용.

52) Anthony A. Hoekema, 250-251.

53) Gregory A. 489-491.

54) Anthony A. Hoekema, 247-248. 후크마의 이러한 견해로 보아 그가 취하는 후천년설의 전형적인 주장들이 주로 현대의 후천년주의 주장들인 것을 알 수 있다. 

55) Ibid., 251-252.

56) Ibid., 252.

57) Gregory A. 497-498.

58)  Anthony A. Hoekema, 252-4. 요한계시록 20장 1-7절까지 나오는 여섯 번의 “천년”의 원어를 보면, 2,4,6절은 “천년(a thousand years, auton cilia eth)”, 3,5,7절은 “그 천년(the thousand years, ta cilia eth)”이다. 따라서 7절에 나오는 사탄의 놓임은 “그 천년” 즉 6절에 나오는 천년왕국의 천년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59) Gregory A. Boyd, 503.

60) Anthony A. Hoekema, 254.

61) Gregory A. Boyd, 495-496.

62) 이전에 사용하던 ‘제3세계’라는 말이 지닌 차별적인 요소 때문에 지금은 세계 인구와 영토의 2/3를 차지하는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2/3세계’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고 있다. Gregory A. Boyd, 496.

63) 무천년설이라는 용어는 자칫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말하는 ‘천년’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실현된 천년왕국설(realized millennialism)로 대체해서 부르는 것이 좋다는 주장도 있다. Jay E. Adams, The Time is at Hand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70), 7-11, Anthony A. Hoekema, 246에서 재인용.

64) Anthony A. Hoekema, 245-247. 

65) Ibid., 247.

66) Gregory A. Boyd, 499-501.

67) Ibid., 505.

68) 김추성, 「요한계시록 새롭게 읽기 -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서울: 이레서원, 2015), 60-67.

69) Gregory A. Boyd, 505-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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