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진영의 천년왕국론 논쟁과 세대주의 종말론의 변천(3)
복음주의 진영의 천년왕국론 논쟁과 세대주의 종말론의 변천(3)
  • 이수근 목사(아신대신대원, 조식신학 Ph.D 과정/의학박사/미인피부과원장)
  • 승인 2018.12.0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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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본론

5. 천년왕국론의 역사적 흐름

  6. 천년왕국론의 근본적인 쟁점과 실천적 함의 

Ⅲ. 결론

 

이수근 목사(아신대신대원, 조식신학 Ph.D 과정)
▲이수근 목사(아신대신대원, 조식신학 Ph.D 과정)

5. 천년왕국론의 역사적 흐름

초기의 속사도 시대의 교부들이 어떤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레고리 보이드는 비록 교회의 휴거에 대한 이해가 불분명하기는 했지만 이들이 일반적으로 전천년설을 주장했다고 이해하며 여기에는 저스틴 마터, 터툴리안, 이레니우스, 락탄티우스(240~320) 등이 포함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1세기 사도들의 입장도 전천년설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해준다.70) 하지만 후천년주의자인 케네스 젠트리 주니어는 전천년설은 초대교회 내에서 매우 미약한 이론이었으며 오히려 후천년설이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260~340)나 심지어 오리게네스(185~254) 등 많은 초기 교부들의 주요한 이론이었다고 주장한다.71)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 속에는 두 개의 부활이나 두 번의 재림을 지지하는 표현이 없으므로 전천년설보다는 무천년설이나 후천년설에 좀 더 가까운 것이라고 이해되기도 한다.72) 그리고 초대교회에도 무천년설은 존재했으며 특히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가장 간단한 종말 시나리오를 제공하는 무천년설이 교회 역사 전체를 통해 가장 일반적으로 주장된 입장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무천년설이라는 용어는 매우 최근인 1930년대 정도부터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73)

후천년설은 중세 시대에도 지속적 관심을 받았으나74) 종교개혁 이후 17~19세기 청교도들에 의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특히 토마스 브라이트만(1562~1607)이 쓴 『계시 중의 계시』(A Revelation of the Revelation)는 아우구스티누스 천년왕국론의 영국적 해석으로도 평가되는 중요한 서적이었으며 그는 후천년설의 현대적 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적인 후천년주의자들로는 사무엘 러더포드, 존 오웬, 필립 스패너, 웨슬리 형제들, 조나단 에드워즈 등이 거론되며, 존 칼빈도 초기 후천년주의자로 볼 수 있다고 케네스는 주장한다.75) 청교도들의 후천년설과는 달리 19~20세기의 “일반적인 후천년설”에선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주장을 포기하고 현재 교회시대가 곧 비문자적인 의미에서의 후천년 상태라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여기엔 윌리엄 케리, B. 워필드, J. 메이첸, 존 머리, 로레인 뵈트너 등이 포함된다.76) 한편 1960년 이후로는 “신율”이 강조된 “기독교 재건주의(Christian Reconstructionism)”가 발흥하게 되고 특히 그 일종인 “신율적 후천년설(theocracy millennialism)”은 청교도들의 사회정치적 관심과 현대의 진보적 점진주의가 합쳐진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복음전파와 사회정의 모두에 열중하였다. 하지만 신율적 후천년주의자들이 심지어 기독교 판사들이 모세의 시민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선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77)

그런데 교회사의 초기를 제외하고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전천년주의는 무천년주의와 후천년주의의 인기를 뚫고 19세기 이후 다시 ‘재등장’한다. 실제로 미국 개신교 신학자들 중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각각 60% 이상과 20%에 이른다고 최근에 보고된 바 있다.78) 여기에 대한 설명으로 세대주의자 크레이그 블레이싱은 첫째, 서구 기독교 국가들이 곧 천년왕국이었다는 주장들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둘째, 성경 종말론 특히 요한계시록 20장에 대한 문자적 이해의 가능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79) 앞의 내용은 후천년설에 대한 반성이고 뒤의 내용은 무천년설에 대한 반성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블레이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의 문자적의미를 강조하게 된 것이 전천년설의 재발견을 위한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무천년주의자 로버트 스트림플은 이는 근거없는 말이라고 잘라 말한다. 루터나 칼빈은 전천년주의자들이 아니었고 특히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3권 25장 5절에서 “천년왕국론자들의 오류”에 대해 말하면서 그들의 논리는 너무 유치하고 반박의 필요성도 못 느낀다고 비판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세대주의자들같은 ‘문자주의자’가 아니었고 성경 본문 속에서 그 참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스트림플의 주장이다.80)

 

6. 천년왕국론의 근본적인 쟁점과 실천적 함의

천년왕국론 논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연원을 따지기는 어렵다. 다만 19세기의 다비 이후 20세기 중반 들어 세대주의와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면서 이 논쟁이 뜨거워졌던 것으로 추측하는 것은 가능하다. 어쨌든 각 천년왕국론들은 좁히기 힘든 여러 쟁점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쟁점들을 정리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계 20:1-6)에 대한 해석학적 문제이다. 여기에는 ‘천년’을 문자로 볼 것인지 상징으로 볼 것인지, ‘ezhsan’을 죽은 자의 부활로 볼 것인지 영적인 거듭남으로 볼 것인지, 천년왕국을 지상의 왕국으로 볼 것인지 천상의 통치로 볼 것인지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전체구조를 ‘반복’으로 볼 것인지 ‘순서’로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 같은 것들이 있다.81) 일반적으로 무천년주의자들은 ‘반복’의 입장인데 대표적인 예는 윌리엄 헨드릭슨이 제안한 점진적 평행법(progressive parallelism)이다. 이는 요한계시록이 서로 평행관계에 있는 일곱 단락으로 이루어지며 각 단락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묘사하면서 조금씩 종말론적 진전을 보인다는 주장으로 후크마 등의 강한 지지를 받고 있다.82) 

하지만 블레이싱 등의 전천년주의자들은 전체를 하나의 통합된 순서로 이해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19장이 미래에 일어날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한 것이라면 당연히 20장은 재림 이후의 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해석의 대표주자는 반 우닉(W. C. van Unnik)으로 그는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계 1:19)는 구절을 근거로 요한계시록을 과거(1:9-16), 현재(2-3장), 미래(4-22장)의 연대기적인 책으로 이해하였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후반부에도 현재와 미래의 사건들이 뒤섞여있음이 사실이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힘을 잃었다는 반론이 제기된다.83)

둘째,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문제이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상정하는 천년왕국은 사실상 이스라엘을 위한 것인지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들에겐 하나님 앞에서 육적 이스라엘이 주연이고 영적 이스라엘은 조연에 불과하다. 역사적 전천년설도 그리스도의 재림 때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구별되는 그룹을 형성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후천년과 무천년설에도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회개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강조되고 있지는 않다. 특히 고전적인 청교도 후천년주의자들에 비해 근래의 일반적인 후천년주의자들은 아예 유대인들의 회개를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에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단서들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만큼, 앞으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과 관련되어 비(非) 세대주의적 접근을 통한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각 천년왕국론들의 주석학적 논의도 중요하지만 복음주의 진영에서 더 실제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각 주장들이 담고 있는 역사관과 그에 연결된 실천적 함의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후천년설은 낙관주의, 전천년설은 비관주의 그리고 무천년설은 현실주의로 귀결된다.

첫째, 후천년설은 교회가 계속 확장되며 세상은 점점 기독교화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확장의 주된 도구로 쓰임받을 것이므로 각 성도들과 교회들은 전천년설이나 무천년설에서 제공하지 못하는 방식의 동기를 부여받게 된다. 즉 개인전도에만 드려지지 않고 19세기 후천년주의자들처럼 사회구조변혁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여기에는 인종차별, 남성우월주의, 기아와 무주택 문제 등 모든 형태의 사회구조적 문제들이 포함된다.

선교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후천년설은 전천년설에 비해 나름의 장점을 가진다. 즉 전천년설은 불신자들에 대한 복음전도에 있어서 어느 정도 선에서 ‘만족’하고 더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어차피 성도들만 휴거되고 불신자들은 뒤에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살전 4:17에 대한 극단적인 이기적 해석이다. 따라서 개인전도나 사회전도의 측면 모두에서 후천년설적인 종말론이 좀 더 복음적이고 실천적인 함의를 갖는다고 볼 수도 있다.84)

실제로 현대의 기독교 사회참여 같은 이슈들은 청교도들과 같이 후천년설에 깊이 경도된 교단들에 의해 많이 촉발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후천년설은 또한 우리가 승리적 교회(church triumphant)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 더욱 열심히 전투적 교회(church militant)로 살아야 함을 일깨워준다. 아울러 우리의 확신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역사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우주적 전투에서 결국 승리를 얻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85)

둘째, 전천년주의자들은 오늘날의 시대상황이 점점 기독교의 이상에서 멀어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이슬람의 교세는 세계 주요 종교들 중에 가장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고 미국을 비롯해 기독교 문화가 꽃피웠던 많은 서방국가들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어가고 다원주의가 새로운 복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이런 풍조는 현재 우리가 천년왕국에 살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후천년주의자들에게는 특히 불리한 것이다.

‘고삐 풀린’ 후천년설의 낙관주의는 맹목적인 유토피아 사상으로 변질될 수 있는 위험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협동한다고는 하지만 역사를 만들어가고 결정해가는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다는 착각을 가져올 위험성도 있다. 전천년주의자들은 이에 강한 제동을 걸고 있다. 이들은 현재의 세계 질서와 미래의 하나님 나라 간에 근본적인 불연속성과 상호대립성이 있음을 강조한다.86)

따라서 전천년주의자들에게는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마지막 때에 한 명이라도 더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한다는 믿음이 있었고, 한국에 온 1세대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전도도 이들 대부분이 스코필드-무디의 영향을 받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87) 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올수록 세상은 점점 어두워가고 악이 세력을 넓혀갈 것이라는 전천년설의 사상은 전천년설이 재발견되고 힘을 얻어가던 20세기 복음주의권이 개인전도에는 열심을 내었지만 사회를 변혁하는 데는 무관심했던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는 지적도 있다.88)

셋째, 무천년설은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의 입장들이 지닌 정신에는 동의하면서도 결국 둘 다 거부하면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 결과는 현실주의적 세계관이다. 방종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는 후천년설의 낙관주의나 절망과 포기로 이어질 수도 있는 전천년설의 비관주의를 모두 배격한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속으로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행위로서 주어지지만 동시에 인간의 협력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따라서 무천년설 하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속에서 지상의 왕국으로 도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언제나 현실적인 기대 속에 머물러 있게 된다.89) 하지만 문자주의에 치중한 전천년설와 문자와 상징을 모두 취한 후천년설에 비해 묵시록의 예언들을 상징으로만 이해하는 무천년설은 자칫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성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Ⅲ. 결 론

종말론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세부 주제들에 대한 충분한 신학적 결론이 내려져 있지 않으며 여러 해석학적 시각에 따라 각 종말론적 사건들이 시간 순서에 따라 단선적으로 배열된 수준에 머물러 있다.91) 그것은 그만큼 종말의 사건들에 대해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많은 학자들, 예를 들어 G. E. 래드와 같은 학자는 왜 자신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래드는 천년왕국 이론에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들이 있고 신학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 답을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들 위에 복음주의적 신학(evangelical theology)을 정립해야만 한다는 당위적 차원에서 자신이 전천년주의자라고 밝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래드는 신약주석학자로서 자신의 주석학적인 결론이 전천년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말을 살아가는 신학자가 성경의 ‘충분한’ 주석을 바탕으로 래드처럼 천년왕국론과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꼭 분명히 밝혀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모호한 부분은 모호한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반드시 비겁한 신학은 아니기 때문이다.

천년왕국론이 지금 당장 교회나 신학계의 중요한 이슈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는 신학적인 최종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첫째, 시한부 종말론을 비롯한 많은 비성경적인 종말론이 일으켰던 부정적인 여파로 인해 종말의 사건들을 논하는 일 자체에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고 둘째, 더 이상 거리를 좁힐 수 없는 교리 싸움 때문에 각 진영에서 서로 지쳐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자신들의 교단이나 자라온 전통에 근거를 두고 자기 주장에서 거의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서로에 대해 비성경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는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 열린 마음으로 성경 해석학에 노력을 기울이고 상대의 말에 더 열린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조잡하고 오류가 많다는 지적을 들어왔던 세대주의 진영에서 보이는 종말론적 변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대주의 신학은, 현재의 교회 시대(세대)를 이전 세대와 천년왕국 세대 사이에 ‘삽입’된 것으로 보았던 고전적(classical) 세대주의에서 1950년대부터 시작된 수정(revised) 세대주의를 거쳐 1980년대 이후엔 교회 시대가 그 앞뒤 시대의 ‘vital link’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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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70) Ibid., 484-485. 그런데 같은 책 p.485에서 “불행하게도 (초기 속사도 시대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전천년설적인 견해를 어리석게도 물질적인 방향으로 밀고 나가서 천년왕국설이라 불리는 것을 만들어 내었다(Unfortunately, some pushed this premillennial perspective in a crassly materialistic direction, creating a version that came to be called chiliasm.)”고 했는데 이는 부정확한 기술로 생각된다. 헬라어 chilia는 숫자 1,000을 의미하며 따라서 chiliasm은 millennialism 또는 millenarianism 과 같이 천년기설, 천년왕국설, 천년지복설 등의 뜻을 가진다. 어원적으로 분석해보면 millennialism은 ‘천’을 뜻하는 라틴어 miile와 ‘년’을 뜻하는 라틴어 annus가 합쳐진 millennium에서 온 말이고 millenarianism은 ‘천을 포함하는 or 천 단위’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millenarius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millenarianism은 좀 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millennialism은 기독교적인 특별한 형태의 millenarianism (a specific type of Christian millenarianism)으로 보기도 하고 이 경우 chiliasm과 동의어로 보기도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 Millenarianism, 2015년 10월 1일 검색. 따라서 본문은 chiliasm을 특별한 형태의 (전)천년왕국설인 것처럼 오해할 여지를 남겨두었다. 

71) Kenneth L. Gentry Jr. et al, 17-20. 케네스는 무천년설의 중요한 시조로 평가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미숙하나마 후천년설을 가르쳤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미숙한 후천년설’이 아니라 무천년설로 보는 것이 좀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72) Ibid., 17-18. 

73) Ibid., 115.

74) 예를 들어 피오레의 요아킴(1145~1202)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Ibid., 20.

75) Ibid, 20-21. 

76) 하지만 상식과는 다르게 자유주의적 후천년설은 존재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정의상, 후천년설은 천년 후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자유주의자들이 종말에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을 믿을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Ibid., 63.

77)  Ibid., 22-25.

78) 이한수, “박형룡과 이광복의 역사적 전천년주의 종말론 신학에 대한 비교 연구”, 「총신대논총」, 제33권 (2014): 30의 3번 각주.

79) Kenneth L. Gentry Jr. et al, 252.

80) Ibid., 332.

81) 정홍열은 (계 20:1-10)에서 1-3절과 4-10절이 동일한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서술한 동일내용의 반복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전자는 하나님의 사자(천사)가 본 관점에서 그리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다. 또한 “천년왕국”의 실체에 대해서는 이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보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기독론적 표현”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천년왕국을 상징적으로만 이해할 경우 “그(천년) 후에” 사탄이 잠시 풀려난다는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후에”라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가 아닌 단순한 연결사의 의미로만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영원히(천년이라는 상징적인 문자로 표기된) 이루어지는 것과 대비되어 사탄의 활동이 잠간에 불과한 것이라는 함의를 내포한다. 그리고 이런 해석의 근거로, (계 19:11-21)에만 “그리고”라는 단어가 35번이 등장하는데 이를 모두 시간적 순서로만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하고 반문한다. 정홍열, 「요한계시록과 함께 하는 말씀묵상」 (양평: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출판부, 2018), 216-220.

82)  William Hendriksen, More than Conquerors, 2nd ed. (Grand Rapids: Baker, 1940), 22-64, 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종말론」, 이용중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309에서 재인용.

83) 김추성, 「요한계시록 새롭게 읽기 -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서울: 이레서원, 2015), 54-55.

84) Gregory A. Boyd, 493-494.

85) Stanley J. Grenz, 「조직신학: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 신옥수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870-871. 

86) Stanley J. Grenz, 871.

87) 서보명, “미국의 묵시록 8. 미국의 세대주의 신학”, 「제3시대」 제94권 (2016):6-7.

88) Gregory A. Boyd, 488-489.

89) Stanley J. Grenz, 871-872.

90) 이런 불편한 현실은 종말론 전체를 관통하는 해석학적 원리의 부재 또는 그 미숙성에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하나님의 전체적인 종말론적 완성행동(eschaton)의 빛으로 각 종말론적 사건들(eschata)을 해석해야 한다. 모든 종말론적 사건들의 해석학적 원리의 중심은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없이 신약성경의 종말론적 사건들이 기술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정홍열, “기독교 종말론을 위한 해석학적 원리의 제안”, 159, 179.

91) G. E. Ladd, “Historic Premillennialism,” in The Meaning of the Millennium, ed. Robert G. Clouse, 40.

92) Kenneth L. Gentry Jr. et al, 260-285.

93) Reinhold Niebuhr, An Interpretation of Christian Ethics, Living Age edition (New York: Meridian, 1956), 9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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