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여, 일어나 함께 가자(아 2:1-14)
사랑하는 자여, 일어나 함께 가자(아 2:1-14)
  • 김병년 목사
  • 승인 2019.01.01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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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019 송구영신 예배설교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2018년 마지막 하루, 그것도 한 시간을 남겨두었습니다. 한 해 동안 수고하였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분과 관계조차도 허둥대는 우리들을 항상 사랑하신 그분으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거의 매주 수요일마다 만나서 공부하고 교제하고 삶을 나눌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토요일과 목요일마다 리더들과 함께 모임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제 모든 감사제목에는 인격적인 존재들 뿐입니다. 

2019년도를 기대합니다. 여러분들과 같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사람이 우상을 섬기면 자라지 않지만 인격적인 존재를 섬기면 자라게 됩니다. 인격은 인격적인 존재로만 성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자랐는지를 살펴보는 방법은 내가 누구와 인격적인 교제를 하며 살아왔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2019년도에는 더욱 큰  성숙을 기대합니다.  

카운드다운 5, 4, 3, 2, 1, 0! "2019년 대망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카운드다운 5, 4, 3, 2, 1, 0! "2019년 대망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1. 권력과 욕망을 내려놓는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 

2019년도 교회 표어가 ‘사랑하는 자여 일어나 함께 가자이다’. 너무 애로틱한 표현처럼 보이지요. 주보의 색깔도 분홍색이어요. 아주 예쁘지요. 보는 사람에 따라서 주보를 이렇게 만들어도 되냐고 물을 것 같아요. ‘사랑하는 자여 일어나 함께 가자’고 꼬이는 장면은 마치 포르노 그라피을 연상하게 한다. 사실 아가서는 애로틱한 묘사로 인하여 성경에 끼지 못할 뻔한 책이었다. 또 이 책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당연히 아주 외설스러운 책으로 여겨졌다. “포르 노그라피는 근본적으로 성적인 흥의 유발에 있기 때문에 인간관계의 감정을 무시하고 관계를 비인격화시킨다”(수잔손택). 


아가서를 읽으면서 성적인 흥분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아가서는 애로틱하게 성적인 흥분을 유발하려고 만든 책이 아니다. 인간관계의 감정을 존중하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요. 아가서는 남자와 여자의 대화체이다. 대화를 한다는 것은 인격적인 존재로 서로를 비인격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읽은 구절은 남자가 여자를 그리워하는 모습이다. 남자가 여자를 찾는 모습이다. 이 구절은 놀랍도록 창세기3;16절을 뒤집어 놓는다. “넌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이것은 타락했을 때 일어난 일들이다. 그러나 아가서에서 다스리던 그 남자가 그리워하며 여자를 찾는다. 


남자가 욕망과 권력을 행해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동등한 관계로 회복을 보여준다. 2019년도에 힘과 욕망을 내려놓는 한해가 되길 바랍니다. 힘과 욕망에 사로잡히면 누군가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조정합니다. 그러면 섬김을 잃습니다. 누구든지 욕망과 힘을 내려놓는 한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2. 우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아가서는 주전 930-960년 대 사이에 기록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통치하던 시기이거나, 솔로몬이 죽은 바로 뒤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통치하던 시대이든지, 그가 죽은 뒤이든지 상관없이 이 아가서를 쓴 저자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솔로몬 통치시절에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아나가는 본격적인 기초를 쌓았습니다.


솔로몬의 지혜가 외교술에 잘 나타났고 무역이 성행하였습니다. 솔로몬은 결혼을 통하여 국가 간의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의 지혜는 무역을 성행하게 하여 재정이 풍부해졌습니다.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거래했습니다. 그 결과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결국에는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솔로몬의 아들의 시대에 이미 이스라엘은 두 개의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의 이름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여디디아)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혜와, 부와, 힘을 가지고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호세아나 이사야는 ‘성행위를 하는 헐떡거림’이 바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자들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대하여 정함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우상숭배의 시대 말입니다.
 
아가서를 해석할 때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지를 묘사합니다. 그러나 아가서가 너무 외설스러워서 성경에서 제외한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친밀한 관계를 묘사한 모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였다는 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친밀함이 사라지면 대상에 대한 헌신이 없습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이 남자와 여자는 밤에 일어나서 자신의 배우자가 찾지 못해서 온 성을 돌아다닙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질 때 그 하나님을 향하여 소리치고 간절하게 매달립니다. 우상숭배자들도 대단한 정성을 드립니다. 그들의 헌신을 무시하시면 안됩니다. 그러나 대상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하나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당신 사이에 지속적인 관계를 원하십니다. I believe Him 과 I believe in Him의 차이입니다. 전자는 객관적인 지식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지속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참된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자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것은 믿음의 내용입니다. 믿음의 관계가 되면 매일 그분의 공급하심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솔직히 삶은 비통함과 풍족함을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에 물 컵이 있습니다. 이 속에 물이 반 잔 쯤 있다고 해 봅시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물이 반잔이나 있다고 말합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물이 반이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디를 보는 것일까요? 물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누가 컵을 잡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 길이 우상을 이기는 길이 될 것입니다.

 

3.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 내 어여쁜 자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얼굴을 마주보고, 목소리를 들으며 그 사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핸드폰으로 많은 의사소통을 합니다. 카톡으로 말합니다. 어느 땐 단어만 나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나서 대화를 하면 단어보다 그 사람이 말을 할 때 표정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는 말보다 더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해가 적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만남이 중요하고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사람을 보며 기뻐하는 이 모습은 바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시던 그 모습과 같아요. 창세기 1, 2장에서 하나님은 피조물을 보시며 기뻐하십니다. 만드신 분이 만들어진 존재들을 보며 즐거워하십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가장 기뻐하던 때가 언제였을까요?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 이외에 유일하게 기뻐하는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만날 때입니다. 남자가 여자가 나타는 것을 보며 탄호성을 지릅니다.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다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르리라”. 얼마나 큰 감동인지 소리쳤습니다. "사람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다."
 
사랑하는 자가 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언어의 동질성, 언어의 동질감, 평등을 회복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보면 "자기야, 당신..." 등등등 소위 말하는 일상적인 위계질서의 언어를 파괴됩니다. 언어가 언어의 길고, 사람이 반 내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2019년도에 바로 이곳으로 돌아갑시다. 인간이 인간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세상으로 말입니다. 서로의 동질감을 회복하여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사람으로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기뻐하는 세상이 바로 하나님이 만든 세상의 원판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 기뻐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불신이 사라지고 기쁨으로 채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한병철 선생님이 쓴 <에로스의 멸망>은 우리에게 오늘날 왜 우울증이 많은지를 설명합니다. 나르시시즘은 타자, 곧 이웃이 없는 자기 사랑이기 때문에 우울증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에로스적인 사랑이 우울증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굉장히 중요한 지점을 말했습니다. 에로서의 사랑이 타자를 향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우리들은 타자를 향할 뿐 아니라 나의 욕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순전한 사랑으로 다가갈 때 사람이 회복됩니다. 

나가며 – 하나님과 친밀함을 회복하고 함게 공동체를 이루는 2019년이 되길 축복합니다. 

2019년도 표어를 보십시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이것이 우리들의 목표입니다. 자기 욕망을 다스리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공동체가 되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우리 다드림교회가 되길 축원합니다. 

송구영신 수화찬양, 특송, 성찬, 교우간 목회자 가족의 새해인사 그리고 찬양
▲송구영신 수화찬양, 특송, 성찬, 교우간·목회자 가족의 새해인사 그리고 새해 첫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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