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자녀를 데려가라(왕하 4:32-37)
네 자녀를 데려가라(왕하 4:32-37)
  • 김병년 목사(다드림교회)
  • 승인 2019.01.14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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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13일 주일설교

-우상은 일상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하나님은 고통스러운 일상을 회복하신다.

열왕기하 4장

32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36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이르되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하니라

37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다드림교회 담임 김병년 목사
▲다드림교회 담임 김병년 목사

성도들 중에 눈썰미가 있는 분들이 많아요. 주보에 실린 오타들을 기막히게 발견해요. "그냥 보인다."고 하지요. 아마도 그런 분들은 오늘 설교제목이 지난주와 같음을 이미 발견했을 것입니다. 이미 발견한 분들 눈썰미가 좋은 분들입니다. 눈썰미가 좋을 뿐 아니라 설교를 집중해서 듣는다고 인정합니다. 설교에 집중하는 태도를 설교 제목이 지난주와 같은지 다른 지를 구분하는데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제목은 오타가 아닙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두 번째로 ‘네 자녀를 데려가라’는 제목으로 하는 설교입니다. 지난주는 "죽은 적이 없는 아들을 데려가라."고 했습니다만 오늘 설교는 "죽은 아들을 데려가라."고 하십니다.

 

들어가며 – 조용필 씨의 꿈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조용필씨의 <꿈>이라는 이 노래를 좋아합니다. 이 노래 가사의 첫마디가 도시문화의 두 측면을 잘 보여줍니다. 도시는 꿈을 찾아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곳이기도 하지만 꿈을 찾기 전에 자기 눈물을 먹어야 하는 차가운 곳이기도 합니다. 화려한 도시지만 춥고도 험한 도시입니다.

 

1. 자녀를 얻기 위해서 다산의 신 바알을 섬기지 않는데도 자녀가 없다.

솔로몬의 사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200년 동안 7번의 쿠데타가 발생해 여로보암에서 호세아까지 19명의 왕들이 역사에 등장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왕조가 오므리 왕가입니다. 북이스라엘을 연 여로보암 왕가(여로보암-나답-바아사-엘라)는 시므리의 쿠데타(7일천하)로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므리 왕가(오므리-아합-아하시야-여호람)가 쿠데타로 탈취해 오므리 왕 때 세멜에게서 은 두달란트에 사마리아를 사서, 수도를 세겜에서 사마리아로 이전합니다. 수도 이전은 정치적 지지 기반을 확립하고, 해안과 무역로를 따라서 있는 경제적인 번성을 위함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남북을 관통하는 대로상에 있는 교통 요충지이면서, 이세벨의 고향인 페니키아와도 쉽게 교류할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였습니다. 그 도시는 언덕위에 있어 고대 군사 전법으로도 함락하기 어려웠습니다. 국제적인 무역을 통해 오므리 왕가는 북이스라엘을 물질적으로 번영시켜 부국강병을 이뤘습니다.

 

북이스라엘 7번째 왕인 아합은 바알 신을 숭배하는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두로 시돈 왕 엣바알의 딸)과 국제결혼을 합니다. 아합 왕 때에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에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문제는 유일신 여호와를 섬기던 이스라엘에 이세벨이 왕비로 들어오면서,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숭배를 하게 된 시초가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아합 왕은 이세벨과의 통혼을 통하여 우상을 섬길 수 있도록 종교적인 관용 정책을 베풀었습니다. 이세벨이 신봉하는 바알종교는 비를 내려서 풍요를 약속합니다. 성행위를 통하여 다산을 약속합니다. 당시 농경문화에서 살 던 사람들은 바알 신이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준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수넴 여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정책적으로 다산을 위해 온갖 산당을 다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그런데도 이 여인은 자식을 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가 "아들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해 주어도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16절)라고 겸손하게 거부합니다. 자녀를 갖는 것이 전혀 그녀의 관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와 수넴여인에 대한 기사가 시작되는 8절부터 보면, 본문에서 이 여인에 대해 ‘귀한 여인’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아이가 아플 때, 아이를 안을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없는 늙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4:14, 19). 즉 이들 부부는 불임은 있어도 경제적으로 부요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녀가 없어도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자녀가 없어도 얼마든지 아름답게 살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만들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두사이다. 그가 우리에게 이르면 그기에 머물리이다 하였더라” 엘리사가 먼저 그 여인에가 거할 처소를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그곳을 지나가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알아보고 대접했습니다. 얼마나 경건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배려하고 그들을 위하여 잠자리를 마련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무시하던 시대에서도 사람을 섬길 줄 압니다. 모두가 다산을 위해서 바알을 섬기고, 바알신전에 가서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절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여호와만 섬길 뿐이었습니다. 또한 상속자를 얻기 위해 경제력을 활용하지 않습니다. 돈으로도 아들을 얻을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녀가 없어도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자녀가 없어도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남을 살필 수 있습니다. 유산을 물려줄 자식이 없어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분깃입니다. 유산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자식이 없어도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가 아닙니다. 이 경건한 귀부인은 자식이 없어도 선지자를 선대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을 선대하고 그를 섬기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결핍 속에서도 언제나 주님만으로 자족하시기 바랍니다. 결핍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2. 아들이 죽었을 때 이 여인은 오직 하나님의 사람을 찾습니다.

엘리사의 예언대로 이들 부부는 이듬해에 아이를 갖게 됩니다(17절). 그녀는 아이를 달라고 구한 적이 없습니다. 기대하지도 않은 아이를 선지자를 통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유 없이 아이가 아파서 “내 머리야, 내 머리야” 소리치다 그녀의 무릎에서 죽습니다(19, 20절). 아이가 엄마 품에서 죽습니다. 이런 슬픈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겪는 삶의 애환들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한가를 보여줍니다. 오늘의 즐거움이 내일의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이 여인의 경우는 불임으로 행복하게 살았던 시간보다 아이를 얻고 죽은 아이를 보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의 이 여인의 행동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인은 아이를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위에 다 눕히고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갑니다. “사환 한명과 나귀 한 마리를 나에게 주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22절) 그녀는 멈추지 않고 갈멜산으로 달려갑니다.

이 여인이 사는 수넴은 갈멜산까지는 무려 50km입니다. 그녀는 쉬지 않고 나귀를 몰아 엘리사를 만나서는 “하나님의 사람의 발을 안았습니다.”(27절) 엘리사는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사환인 게하시를 보내어 “내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으라.”(29절)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엘리사가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이에 엘리사가 일어나 여인을 따라가니라”(30절).

이 여인이 하는 말들은 엘리사가 그의 스승이었던 엘리야에게 했던 말입니다. 그는 승천하려는 엘리야를 향하여 말합니다.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당신(엘리야)의 영혼이 살아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엘리사)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2:4). 즉,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달라.”는 간구였습니다.

혼합적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간절함이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죽은 아이를 두고 가는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것처럼 이 여인도 엘리사에게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단호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찾으라. 그러면 산다. 산다! 여러분, 이 여인이 지팡이가 아니라 엘리사를 붙잡은 것처럼 우리도 능력 없는 지팡이를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난 사람입니다. 그분에게로 가십시다. 누구를 거치지도 마시고 오직 예수님에게 달려갑시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표적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갑시다.

이 여인의 단호함을 보십시오. 아이가 없을 때, 아이를 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얻고 난 뒤에, 이 여인은 엘리사가 반드시 아들을 살려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주신 것을 붙잡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처음부터 지팡이가 아니라 엘리사를 데려가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그리스도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고통의 시대일수록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실제적인 삶에서 투자에는 담대하면서 하나님에게는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주식을 투자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확실한 것이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이든지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3. 번영의 시대일수록 고통이 일상화됩니다.

열왕기하 4장에는 4종류의 기적이 나옵니다. 4장 1절에서 7절의 첫 번째 가정은 선지자였던 남편이 죽었습니다. 이 과부의 궁핍함은 너무도 절망적입니다. 빚 때문에 자녀를 노예로 팔아야 하는 비정한 사회였습니다. 빚에 쪼들리는 삶을 살아본 사람은 압니다. 빚을 져본 사람들은 빚이 얼마나 무서운지 압니다.

선지자의 아내였던 그녀의 아이들을 이제 사람들이 빚 대신에 노예로 삼으려고 데려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 가정에 기름을 팔아서 살 수 있도록 빚을 청산합니다. 엘리사가 그 가정을 살립니다.

두 번째 가정은 8절부터 37절까지 오늘 본문의 수넴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두 가정의 이야기에서 선지자가 하는 모든 일을 보십시오. 빚을 청산해 주어서 팔려갈 뻔한 아이들을 구해주고, 아들이 없는 집에 아들을 주고 죽은 아들을 살립니다.

세 번째는 38절부터 41절까지 길갈에서 선지자의 제자들이 먹을 음식에 독이 있어서 먹지 못할 때, 먹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합니다.

네 번째는 42절부터 44절까지 어떤 사람이 엘리사에게 준 보리떡 이십개와 자루에 담긴 채소로 무리 100명을 먹입니다. 자신에게 준 먹을 몫을 다른 사람들과 나눕니다.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논하기보다 선지자가 한 행동을 보시기 바랍니다. 빈부 격차가 심한 사회에서 빚을 갚을 능력을 주었습니다. 자녀가 없는 가정에 아들을 출산하고 죽은 아들을 살립니다. 굶주리는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자신 몫의 먹을 것을 나누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상은 경제적으로 착취하여 누군가 가난하게 만들고, 자신은 부자가 됩니다. 우상은 죽음 안에 우리를 가둬 둡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십니다. 우상은 자신만 먹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나눕니다.

오므리 왕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왕상 21:1-29)이 바로 그런 전형적인 부정입니다. 나봇은 끝까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인 포도원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은 이세벨의 부추김으로 나봇의 포도원이 채소밭으로 왕궁 가까이에 있다는 편리성 때문에, 권력자들의 식욕을 위해, 자신이 갖고 싶다고 땅 주인을 살해까지 하면서 그 땅을 빼앗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예후를 통해 오므리 왕조의 문을 닫게 합니다.

경제가 발전하고 국력이 커지면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입니다. 빈부의 격차는 커지면 커질수록 사회적으로 큰 위험요소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회가 그러합니다. 최근 프랑스에서 일어난 노란조끼의 시위대가 바로 그러한 이유입니다. 오므리 왕조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병 들었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컸습니다. 경제적인 착취가 일상화되었습니다. 부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더 많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회는 샬롬이 없습니다.

왜 우리 사회에 혐오가 넘칩니까? 너무 빨리 부를 얻기 때문입니다. 재산을 축적하는 과정이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리와 부정으로, 부동산 투기, 주식 투자 등과 같은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한 가난한 자들은 부자에 대하여 혐오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멸시합니다. 정당한 수고와 노력을 비웃습니다. 정당하게 천천히 재산을 축적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입니다. 혐오를 부추기는 사회가 아니라 우상을 버림으로 일상을 샬롬으로 만듭니다.

 

나가며 -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광화문에 있는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전문의인 염세원 선생님은 자신이 치료하던 환자의 의하여 며칠 전, 병원에서 살해당했습니다. 그분이 쓴 책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알키, 2016.5.)에서 말합니다. “죽음이야말로 고통을 없애주는 가장 좋은 대안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즉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결코 죽음 그 자체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울증이 걸리면 판에 박은 루틴한 일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변함없는 고통을 사는 게 삶입니다. 고통의 시대에는 이 루틴한 삶을 견디어야 합니다. 고통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이 혐오가 넘치고, 죽음이 넘치는 사회에서 낙심하지 말고, 일상에서 묵묵히 루틴하게 삶을 살아갑시다.

사람들이 죽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피하기 우해서 선택하는 죽음이라면 고통을 양산하는 삶의 태도를, 죽음을 부추기는 빈부 차이를 없애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네 자녀를 데려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은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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