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롬 8:31-39)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롬 8:31-39)
  • 김병년 목사(다드림교회)
  • 승인 2019.01.2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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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7일 주일설교

 

로마서 8장 31-39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골짜기를 걸어야 정상이 나온다.

등산을 갑니다. 높은 산을 올라가지요. 산봉우리에 오르기 위해서 계곡을 통과하고 지나갑니다. 산을 좋아해서 찾아가는 등산은 즐거운 일입니다. 등산과정에서 골짜기는 즐거움을 위한 과정으로 여깁니다. 누구도 골짜기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미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을 등산에 비유하곤 합니다. 특히 골짜기를 삶의 어려움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나 지금 골짜기를 지나는 중이야!”라고 표현합니다. 즐거움의 골짜기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의 골짜기라고 합니다.

성도의 삶도 같은 이치를 갖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5장의 팔복은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로부터 시작합니다. 매우 역설이죠. “원수를 사랑하라.”, “살인하지 말라.” 미워해도 살인이다. 미움과 살인은 너무 달라요 그러나 하나님은 같다고 하셔요. 하나님의 말씀은 없던 고난도 만들어서 누리게 해요. 하나님의 말씀이 원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지. 이런 말씀들은 세상과 깊은 골짜기를 이뤄요.

구원의 감격과 더불어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지만 십자가 없는 삶도 없습니다. 구원도 십자가요 삶도 십자가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8:17). 우리의 부르심은 골짜기를 지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성도는 산봉우리에 오르는 미래의 영광을 기대하며 동시에 현재의 골짜기를 걷는 고난도 지나야 합니다. 산봉우리에 오르려면 골짜기를 지나듯 성도의 삶은 거듭남과 동시에 영광과 고난을 함께 받습니다.

고난은 모든 피조물들이 다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현재에 모두가 탄식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다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8:22). 누구도, 어떤 피조물도 예외가 없습니다. 다 고난당하고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만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거짓 메시지입니다. 고난당할 때, 그 당시에 고난당하지 않는 대상과 비교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정작 비교해야 할 것은 우리가 현재 받는 고난과 앞으로 누릴 영광 뿐 입니다. 비교해야할 것은 바로 우리들의 성화와 영화의 과정일 뿐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8).

 

1. 중도탈락자가 없습니다.

현재의 고난을 매우 위협적인 사실입니다. 실제로 위협적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현재 당하는 고난을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해 보길 원합니다. 고난당할 때 미래를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8). 고난의 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가 완성되는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생각하건대 이 둘은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골짜기는 잠깐입니다. 영광은 영원합니다. 성도가 누릴 영원한 삶은 골짜기로 내려오는 삶이 아닙니다. 영원히 영광에 머무는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 인생의 여정을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 여정이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여정을 계획하시고 우리를 미리 아시고,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같이 걷고 계십니다. 구원의 여정은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삶입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누가 이것을 계획하셨습니까? 누가 우리를 아십니까? 하나님입니다. 누가 우리를 부르십니까? 하나님입니다. 누가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까? 하나님입니다. 누가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노후 연금 100만원을 받기 위해 1989년부터 가입해서 지금까지 납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용주 집사님이 “2년 치를 납입하면 7만을 더 받는다.”고 해서 25개월째 납입입니다. 이제 만기가 넉 달 남았습니다. 이제 안심이 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계획들은 다 불안정합니다.

감히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의롭다하시고, 하나님이 영화롭다 하시는데 누가 반대하시겠습니까? 결코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습니다. “중도에 그만 둘 수가 없는 것이 성도의 삶”(크리스토퍼 애쉬, 『티칭로마서』[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18.8], 344)입니다. 삶이 어려울수록 ‘부르신 이’를 기억 합시다.

 

2.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재판정에서 우리 편에 서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33절)

“누가 정죄하리요”(34절)

바울 사도는 이렇게 묻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즉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 계시는데 누가 대적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택하시기에 ‘능히’ 자격을 가진 이들을 누가 고발합니까?

“누가 감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들먹이며 그분께 시비를 걸겠습니까? 누가 감히,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겠습니까?”(유진 피터슨, 『메시지 성경』[복있는사람, 2017], 2086). 사단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대적과 고발과 정죄를 하나님은 받지 않습니다.

누가? 고자질합니까?

누가? 시비겁니까?

누가 손가락질 합니까?

사단이 교묘하게 우리들의 양심을 자극합니다. 바로 당신의 양심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양심에 걸려 넘어집니다. 누가 비난하지 않아도 성도가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단이 양심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정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있습니다. 두 가지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시고, 나머지 두 가지는 예수님이 하신 일들입니다.

바울사도는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묻고는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편에 서 계십니다. 누가 우리를 반대하겠습니까? 아이들이 게임을 하다가 보면 비교적 건강하고 게임을 잘 하는 애가 자기편이 되길 원합니다. 심한 경우는 게임에 이기기 위해서 약한 사람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기도 합니다.

죄와 싸우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허물 때문에 정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 편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할 때 군대장관을 만났습니다. 여호수아의 첫 질문은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적을 위하느냐?”(수 5:13). 우리는 삶에서 “내편인가, 상대편인가?”를 자주 묻습니다. 내게 유익할까, 불리할까를 따집니다. 여호수아의 질문에 군대장관이 답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땅이다. 네 신을 벗으라.”(수 5:15) “하나님은 네 편이다.”라는 말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33절). 의롭다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우리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미 판결하셨다. 우리들의 삶을 보고 판단하셨다. 의롭다는 분사는 현재능동입니다. 지속적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한 번의 변심도 없으십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이 판정을 보며 의아해 할 것입니다. 설마 설마하다가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너에 관한 재판은 끝났다’는 말씀을 듣고 놀랄 것입니다. 우리들을 의롭다 하십니다. “김병년, 의롭다”라고.

어떤 집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탈세하는 방법을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재판이 두려워서 안하지요.” 불의하게 재물을 모을 수 있는 방법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사업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재판장이시고, 우리가 언제는 우리가 그 재판장 앞에 서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재판정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재판장이 되셔서 우리 편에 서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재판은 아주 불공평한 재판입니다. 역사상 가장 불공평해요.

 

3. 재판정에 우리의 변호인이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가 정죄하리요”(34절). 정죄는 심판을 말합니다. 우리들이 범하는 죄에 대한 심판이 죽음입니다. 이것이 정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를 정죄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죽으시고 사신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 심판을 이미 받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여기에 구체적인 실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서신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며 것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이 내어주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변론자입니다. 31절은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로 시작한다. 바울 사도가 논증하다가 격해지면 이 논법을 사용한다(6:1, 15, 7:7).

우리 사회에는 질문이 없습니다. 질문하면 매장당합니다. 질문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존재를 드러낼 방법이 없습니다. 자기를 거부하며 살아갑니다. 자기를 정죄하며 자기를 고발하며 살아갑니다.

최근에 스포츠 계의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를 보며 느끼는 고통이 있습니다. 어린 선수들이 겪은 훈련의 고통보다 자신이 당한 성폭행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그 수치를 당하고도 금메달을 땄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들이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자로 어린선수들을 훈련시켰다는 말입니다.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영혼 없는 신체’를 가진 이들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이런 야만적인 사회는 끊임없이 자기를 고발하게 합니다. “내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말입니다. 금메달이 선수를 행복하게 하겠습니까?. 유령의 삶을 강요받는 사회는 끊임없이 수치를 양산해서 자기 고발을 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열광하던 경기 뒤에 숨겨진 이 고통을 어찌 갚겠습니까?

피해자가 자신을 정죄하도록 하는 사회는 야만적인 사회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손가락질을 받아내고 그들을 위하여 서는 것입니다.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어린 선수들이 아닙니다. 고치와 그들을 가르친 감독들입니다.

 

4. 우리를 언제나 사랑하시는 이가 삶에 계십니다.

대적(31절), 고발33절), 정죄(34절). 하나하나가 다 무섭습니다. 누군가 법정에 간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환란,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35절)은 또 어떻습니까? 만만한 단어가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모든 고난을 다 열거할 기세입니다. 심한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겨나게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예.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난을 언급할수록 그는 더욱 담대하게 말합니다. “이 모든 일에 졌다.”가 아닙니다. 넉넉하게 이긴다. 이중에 한 가지만 나타나도 우리들의 확신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 강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심지어 아직 만나지 못한 장래 일들도 있습니다. 만나지 못한 것이라고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길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확신이 흔들릴 때 삶이 흔들립니다. 견고하게 그분의 사랑위에 서시기 바랍니다.

 

“내안에 주를 향한 이 노래”

내 안에 주를 향한 이 노래 영원한 노래 있으니

날 향한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찬양하리라

내 안에 주를 향한 이 노래 영원한 노래 있으니

날 향한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찬양하리라

영원히 찬양하리라

아름다우신 오 놀라우신 형언할 수 없는 사랑

오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 영원히 찬양하리

십자가 그 사랑 찬양하리 날 구원하신 그 사랑

내 삶을 드려 찬양하리라 놀라우신 주의 사랑

영원히 찬양하리라 아름다우신 오 놀라우신

형언할 수 없는 사랑 오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

영원히 찬양하리

주와 같은 분은 없네 이 세상 그 누구도

주와 같은 분은 없네 누구도 비길 수 없네

주와 같은 분은 없네 이 세상 그 누구도

주와 같은 분은 없네 누구도 비길 수 없네

아름다우신 오 놀라우신 형언할 수 없는 사랑

오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 영원히 찬양하리

아름다우신 오 놀라우신 형언할 수 없는 사랑

오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 영원히 찬양하리

아름다우신 오 놀라우신 형언할 수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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