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을 멈추라는 부르심(마7:1-5)
판단을 멈추라는 부르심(마7:1-5)
  • 김병년 목사(다드림교회)
  • 승인 2019.02.0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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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3일 주일설교

-내로남불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외침

-목적: 우리의 부르심은 명절에 온 가족을 만날 때, 판단하기보다 “먼저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다.

마태복음 7장 1-5절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들어가며 –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세상과 섞이는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이 되고 처음 맞이했던 명절날에 제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오직 한 가지 결심이 분명했습니다. ‘제사상에 절하지 않아야지!’하는 생각으로 충만했습니다. 모든 남자들이 명절 제사상에 절할 때 혼자 뻘쭘하게 서 있었습니다. 고모님들이 수군거렸습니다. “병년이가 예수 믿는 단다!” 할아버지가 화를 내셨습니다. 아버지도 화를 내셨지만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확실하게 불신자들과 구분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절에 제사에 절하는 것은 거부했지만 가족들을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제사를 대하는 제 태도의 어색함으로 ‘세상에 속하여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만 제사를 드리는 가족들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 그들과 얽혀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제 삶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분리되어 있지만 세상과 얽혀 있습니다. 세상에 스며든 제자들의 삶입니다. 세상과 분리됨으로 제자 됨을 구별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그 속에 살면서 섞임으로 제자 됨을 나타내기도 한다.

마태복음 7장의 산상수훈 말씀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대접을 받고자 합니다. 대접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1. 입은 눈의 대변인이고, 눈은 판단하는 기관입니다.

자, 어린이들 눈이 몇 개여요. 두 개이지요. 옆 사람이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볼 수 있어요? 자 다시 한 번 옆 사람 얼굴을 보셔요. 얼굴에 먼지가 묻었나요? 옷에 묻은 먼지가 보이지요. 그래요 다 보여요. 옆 사람 옷에 묻은 먼지도 보이고, 눈에 낀 눈꼽도 볼 수 있어요.

오늘 예수님 “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본다.”고 했어요. 옆 사람 눈에 있는 티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사실은 그 사람이 말하지 않으면 못 보지요. 다른 사람 눈에서 티를 발견하는 사람은 안과 의사입니다. 의사도 아닌데 다른 사람의 눈 속에 들어 있는 티를 보고 빼려는 사람은 능력잡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 눈 속에 있는 티를 본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이 가진 작은 허물을 발견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작은 실수를 발견하는 사람을 말해요. 눈에 자꾸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것이 보여요.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인다고 해요.

그래서 눈으로 본다는 것은 판단한다는 뜻이어요. 눈으로 보았다는 말은 내가 그렇게 판단했다는 말입니다. 입은 단지 눈이 판단한 것을 알리는 대변인이어요. 입은 말하지만 눈은 판단해요. 입은 알려줄 뿐이어요. 눈이 생각하고 판단해요.

눈으로 본다는 판단하다는 말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 있어요. ‘비판하다’, ‘판단하다, 평가하다’, ‘비평하다’, 분별하다.’ 사실 우리들 모두는 언제나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 윤지의 학교생활 성적표가 식탁에 놓여있습니다. 모든 체육 잘한다고 해요. 팀웍을 이루면서. 그림도 잘 그린대요. 이런 것은 비판이라고 하지 않고 평가라고 하지요. 평가는 잘했다 못했다는 판단을 말해요.

그러나 비판이라는 것은 옳다 그러다. 악하다 선하다는 것을 판단하는 것을 말해요. 음식이 맛있다 맛없다는 것도 하나의 평가이지요. 음식을 보며 악하다 선하다고 할 수 있나요? 음식자체는 그렇게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은 악하다 선하다고 판단할 수 있지요. 그것을 비판한다고 말하는 것이어요. 여기서 비판은 악과 선을 판단하는 기준을 자신이 가진 것을 말해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6:22에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어요. 성한 눈은 온 몸을 밝혀줍니다. 눈은 등불을 밝혀서 몸을 성하게 합니다. 건강하게 합니다. 그러나 눈이 병 들면 자기 몸을 밝히지 않고 병들게 합니다. 병든 눈은 누구를 밝힐까요?

 

2. 예수님의 눈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눈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요.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죠. 자신의 눈 속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찾아내는 능력을 갖고 있어요. 요것이 병든 눈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보는 눈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볼 수 있는 등불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위선자다.” 남의 허물은 티끌까지 보이는데 자신의 큰 허물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게 바로 위선자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면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얼핏 들으면 비판 받기 싫어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로 들려요. 비판받기 싫어서 비판을 멈춘다면 두려움만 키웁니다. 그 뜻이 아니어요.

예수님이 선하다 악하다는 “모든 판단”을 내렸다. 율법의 뜻은 이것이다 고 이미 비판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들은 예수님이 내리신 비판을 근거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평가하거나 비판의 근거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비판하신 근거로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지 못합니다. 영어성경 NIV는 이 구절에 ‘티와 들보’를 ‘톱밥 부스러기와 널빤지’로 번역했습니다. 기막힌 표현이지요. 어떻게 자신에게 있는 널빤지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톱밥 부스러기는 발견하는지요. 내게 더 큰 허물이 있는데 누구에게 강요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제가 1주일 전에 아들에게 분노했습니다. “세탁소에 다녀오라.”는 아빠의 여러 번에 걸친 부탁을 거절하는 아들에게 분노하여 문을 세 번씩이나 쾅 닫고 “나, 집에 안 들어가!”라고 하고 나왔습니다. 세탁물을 세탁소에 맡기고, 그날 밤에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교회에서 잤습니다.

저도 이런 제 자신을 보며 어이가 없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분노가 숨어 있을까요? 그러고 나니 지난주 설교하는데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제 속에는 아빠의 말에 불순종하는 아들의 거절보다 더 큰 악한 분노가 가득합니다. 내 요구가 거절당하면 언제든지 터져 나오려고 하는 분노가 있습니다.

등불이신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저는 죄인입니다. 성도여러분, 이번 명절에 남에게 부탁하기 전에 자신을 살핍시다. 자신 속에 있는 더 큰 악을 발견하고 회개하십니다. 이것이 “비판하지 말고 예수님의 눈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아들에게 향하는 강요를 내려놓습니다.

 

3. 다른 이들을 향한 판단과 같은 기준으로 자신을 보라는 부르심입니다.

2절의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는 말씀은 같은 기준으로 측량한다는 말입니다. 헤아림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가 바로 ‘메트론’입니다. 메트로놈이라고 있지요. 박자를 잴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이 단어는 ‘측정’이라는 뜻의 ‘메트로’와 ‘규칙적이다,’는 의미의 ‘노모스’가 합쳐서 박자를 재는 도구인 ‘메트로놈’이라는 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예배를 인도할 때마다 저를 아주 예민하게 만드는 것은 찬양할 때의 리듬입니다. 주일 예배에서 드리는 찬양의 빠르기가 항상 저를 긴장시킵니다. 제 기분에 따라서 박자를 빨리 할 때도 있고, 어떤 경우는 느리게 할 때도 있습니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들은 이런 훈련을 많이 해서 일정한 박자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할 때, 제 마음이 흥분되면 박자가 빨라집니다. 찬양할 때, 리듬이 축 쳐지면 제 마음이 답답합니다. 영적인 의미까지 더해서 기도가 격해질 때, “리듬을 빨리 해야지요.”하는 강박이 생깁니다. 반주자가 누구든지 저의 변화무쌍한 감정 스피드에 맞추어서 반주를 할 수 없잖아요.

초등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을 하시는 부모님이 계셨습니다. 이 교장 선생님이 사시는 아파트에 아이들이 엘리베이터를 타서 떠들면 화를 내시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딸이 시집을 갔습니다. 손녀와 손주를 낳았어요. 자기의 손주와 손녀가 엘리베이트에서 떠들면 “아이들은 다 그래!”라고 하셨습니다. 기준이 달라진 것이죠.

“판단할 때 나 자신의 악과 다른 사람에게 임한 은총에 장님이 된다.”(스텐리하우스, 『마태복음』, 159) 스텐리 하우어워스의 말처럼 자신의 악에 대하여 장님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악에 대하여 눈을 뜨고 회개하시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임한 은총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시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임한 은총을 보고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명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나 자기를 판단하는 기준이 같은지요. 비판을 멈추려고 하면 먼저 같은 기준으로 비판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사람이 정직하면 그래도 ‘동일한 방식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절대로 동일한 방식으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항상 자신에 대하여서는 너그럽고 다른 이들에 대하여서는 엄격합니다. 이 말씀은 자신에게 정직하라는 부르심입니다.

 

4. 드러난 죄보다 감추어진 내면의 죄를 더 살피라는 것입니다.

개역개정판에 있는 ‘티’와 ‘들보’를 영어성경 RSV는 “나무 조각과 통나무”로 번역했습니다. ‘나무 조각’과 ‘통나무’는 그 크기에 있어 엄청 다르지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작은 허물은 쉽게 발견하면서 자신에게 있는 널빤지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위선적인 사람은 자신에게 시각장애인이 됩니다.

메시지 성경은 “네 이웃의 얼굴에 묻은 얼룩은 보면서, 자칫 네 얼굴에 추한 비웃음은 그냥 지나치기 쉽다”고 의역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난 얼룩은 쉽게 발견하면서 자신의 얼굴에 나타나는 마음은 잘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나오는 ‘비웃음’을 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얼굴에 번진 화장을 쉽게 발견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속에 번진 비웃음을 쉽게 발견하지 못합니다. 메시지 성경에 번역한 것처럼 내 속에 있는 비웃음을 인하여 더욱 민감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려는 것은 타인과 비교를 내려놓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드러난 죄보다 거의 대부분 내면적인 죄에 더욱 민감하셨습니다. 이방인보다는 자랑에 더 분노하였습니다. 명절에 모이면 자랑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요. ‘이번 명절에 세뱃돈 얼마 받을까?’ 저의 장모님은 손자에게는 5만원, 큰 손녀에게는 3만원, 막내에게는 2만원을 주십니다. 똑같이 주셔야지요. 아이들이 받은 세벳돈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법도 가르쳐야 합니다.

여러분! 과식이 나쁠까요? 욕심쟁이가 더 나쁠까요? 과식보다 욕심이 더 나빠요. 과식은 한 번이지만 욕심은 마음의 상태잖아요. 술도 먹지요. 예수님은 음주보다는 교만에 더욱 비판적이었습니다. 쾌락주의보다는 위선에 더욱 민감하셨습니다. 드러나는 것보다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죄를 예수님은 더 많이 지적하였습니다.

존 스토트는 자신의 저서 『변론자 그리스도』에서 “예수님의 태도를 비판하기는 쉬워도 정작 바리새인들이 지녔던 오만함을 반복하는 자신을 간과한다. 반면, 나락을 떨어진 우리들의 본성에는 사람들의 찬사에 목마른 성향이 있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심리적인 요구에서 비롯된 악한 변태적인 행동이다.

우리는 사람의 박수에 목말라하고, 칭찬 받을 만한 미끼를 쫓으며, 아부를 즐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인기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마지막 날 하시는 칭찬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씀에 만족하지 못 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명절에는 칭찬에 굶주린 우리들의 변태적인 행동이 아니라 주님이 주실 칭찬에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은밀하게 하나님의 나라백성으로 사는 우리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판단하기보다는 겸손하게 섬기는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증명하려는 의도성을 내려놓고 사랑하십시다.

 

나가며 – ‘내로남불’의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

‘내로남불’이란 말을 자주 듣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것이지요. 내로남불의 시대는 다른 이들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삶입니다. 존 칼빈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악, 즉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아주 치밀하게 캐낼 때에 보여주는 사랑의 결핍으로부터 생겨나는 지나친 영리함과, 우리 자신들의 죄악을 변명하고 옹호할 때에 보여주는 관대함을 책망 하신다.”(『공관복음주석』, 342)

판단을 멈추라는 부르심은 분별력을 상실한 시대가 아닙니다. 올바른 분별력으로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등불을 켭니다. 2019년 명절에는 판단을 멈추고 세상과 어울리는 명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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