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년 목사] 노래중의 노래, 솔로몬의 노래(아 1:1)
[김병년 목사] 노래중의 노래, 솔로몬의 노래(아 1:1)
  • 김병년 목사(다드림교회)
  • 승인 2019.02.1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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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0일 주일설교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들어가며 – 노래의 언어

명절에 『노래의 언어』라는 책을 쓴 한성우 교수의 인터뷰를 들었습니다. 방언을 연구하는 아주 재미난 국어학자셨습니다. 노래방에 있는 가요목록에서 우리말의 쓰임새를 분석했습니다. 여러분도 맞춰 보실래요? 어느 계절이 노랫말에 가장 많이 등장할까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서 어느 계절이 가장 많이 나올까요? 단연코 겨울이랍니다.

그렇다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쉽죠? 추측하시는 대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나와 너를 합치면 어마어마한 분량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왜 노래에 사랑이 많을까요?. 왜 사랑은 노래로만 표현할까요? 노래 형식이 아니고서는 사랑을 표현할 방식이 없을까요?

한성우 교수가 쓴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노랫말은 죽어 있는 단어와 문장의 조합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명체와 같은 것이다. 노래로 불리기 위해 다듬어진 말이고, 부르고 듣는 사람들의 삶을 담아낸 것이 노랫말이다.” 노래는 살아 숨 쉬는 생명체들의 존재방식이요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생명의 존재방식, 생명체 의 삶의 방식,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세 달 정도 아가서를 설교하려고 합니다. 매 주일마다 이렇게 에로틱한 본문을 성도들에게 읽힌다는 것은 설교자인 저에게 상당한 부담입니다. 한편으로 무모한 도전 같아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은유로 가득 찬 아가서에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이끌어야 하는 해석도 저에게는 또 다른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아가서가 사람과의 사랑이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든지 간에 모든 관계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관계가 회복된 것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평안이지요. 샬롬은 모든 관계가 회복될 때 일어나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읽은 아가서의 첫 구절은 ‘솔로몬의 노래’라고 하지만 어떤 번역들은 ‘노래 중의 노래, 솔로몬의 아가’라고도 합니다. 왜 아가서를 노래 중의 노래라고 할까요?

 

1. 노래 중의 노래는 ‘사랑의 회복’입니다.

아가서는 남녀의 사랑, 사랑을 갈구하는 남녀의 대화로 가득합니다. 등장하는 남자든지 남자들이든지, 여자든지 여자들이든지 사랑을 노래합니다. 남자가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간청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며 깨우지 말찌니라”(2;7, 3;5, 5;8, 8;4).

잠든 자기 연인을 보며 푹 자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에게 더 큰 안식을 누리도록 주변사람들에게 간청합니다. 잠든 사람이 더 푹 자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관계는 상대방을 쉬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가 아니면 상대방을 지배하고, 노동을 강요합니다.

아가서에 자주 언급되는 ‘소유공식’이라고 불리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2;16). ‘나’ 주어로 하는 1인칭 단수, 즉 남자가 연인을 부를 때 ‘내 사랑’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라야티’는 아가서에서 9회 등장하는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라야티’로 내 친구, 동료를 뜻합니다. 언약적인 의미를 가진 호칭으로 동등함을 강조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타락 전에 지녔던 태도로서 지배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사랑을 회복하면 나타나는 관계는 바로 동등함입니다. 남녀의 동등함이 우리가 사는 시대에 주요한 주제입니다. 이것은 시대가 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만든 세상의 모습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거나 혐오하는 것도 타락의 모습이지만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고 혐오하는 것도 타락입니다. 사람을 남여로 성적인 존재만 부각시키고 남녀가 한 인간임을 잊는 행위는 분명히 타락한 세상입니다.

사실 아가서를 읽을 때, 우리는 결혼관계를 자꾸 연상합니다. 아가서 3장이나 5장에 결혼식을 상징하는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잊지 말 것은 아가서는 결혼을 위한 사랑만을 이야기 하지는 않습니다. 결혼의 관점에서 아가서를 읽을 수는 있지만 아가서는 직접적으로 성에 초점을 맞춘 유일한 책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랑을 그리워하고 친밀감을 얻기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적인 연합이 없어도 친밀감을 누릴 수 있는 세상, 그것이 천국의 모습이지요. 결혼도 없고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하나 됨이 있습니다. 2019년도에 우리가 회복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의 회복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에덴으로 돌아가는 첫걸음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관계로 살아가는 인간은 타락하지 않은 에덴의 모습을 회복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을 사랑하라는 말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로 왜 새 계명으로 주었을까요? 가족사랑은 배타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족만 사랑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제자됨의 표지가 아닙니다. 제자됨의 표지는 원수를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보내실 때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리라”(마 10;21)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그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사람이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5-37).

“우리 시대는 너무나 자주 기독교를 안정과 질서로 안내하는 삶의 방식으로 정당화 하려고 한다”(스텐리 하우워스, 『마태복음』 , 205). 혈육을 사랑하는데 혈안이 되어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된 피조물이 살아야할 원형적인 삶을 몸으로 오신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이웃과 사랑의 노래를 부르길 원하십니다.

 

2. 노래 중의 노래는 ‘창조 세계를’ 긍정합니다.

아가서에서 두 연인은 서로를 둘만이 있는 장소로 초청합니다. 그 장소들은 묘사한 다음구절을 보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 들리는 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에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2;11-13).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비가 그치고 봄이 오고 꽃이 핍니다. 비온 뒤에 봄이 오고 봄에 피는 꽃을 본 적이 있으시죠?모든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심지어 사람을 묘사할 때 짐승의 어떤 모습으로 연상합니다. 남자를 노루와 사슴으로 묘사합니다. 말과 염소 양 등 가축들을 여자를 묘사하는 은유로 사용합니다. 자신의 연인의 아름다움이 자연에 묻어납니다.

지리적인 언급도 나옵니다. 산골짜기, 정원 동산, 포도원, 과수원, 우물, 연못, 금속과 보석도 나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사랑하는 연인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습니다. 심지어 이국적인 향신료와 몰약과 유향까지도(3;6). 한 마디로 에덴동산은 모든 것이 풍요롭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물론 아가서에도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에 파괴된 부분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인간을 헤치는 자연이 아닙니다. 폭풍우도 있고 죽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다스릴 수 없는 그것조차도 격정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긍정으로 사용합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8:6)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합니다. 많은 물로 끄지 못하는 불은 없습니다. 그러나 불 같은 사랑은 물로 끄지 못합니다.

아가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긍정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긍정하게 합니다. 그 속에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긍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찬송가 478장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라는 노랫말처럼 자연스럽게 부르도록 합니다. 무엇보다 피조물에 대한 긍정 중에 긍정은 바로 인간일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렘 17:9)이라고 노래했지만, 아가서를 기록한 솔로몬은 “만물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성적인 존재인 사람이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고 노래합니다.

나를 지으신 그 하나님의 창조성을 긍정할 때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온전함을 누립니다. 그러나 탐욕에 사로잡히면 창조된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불만투성이 입니다. 창조된 내 모습을 사랑하고 긍정하기보다는 비교하며 자신을 학대할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를 ‘나는 샤론의 꽃이다 나는 골짜기의 백합화다’라고 긍정하는 이 두 연인의 닭살 돋는 고백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건강한 자아상은 하나님의 창조를 긍정하는 믿음을 가질 때 누립니다. 자신의 기질을 이해하고, 성격유형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믿음은 내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제가 작년부터 심방을 가면 미물인 강아지와 고양이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제가 이면에서 회심하였습니다. 며칠 전, 지역 목사님들 모임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목사님은 “15년 동안 같이 살았던 강아지가 죽어서 화장하고 그 유골을 매장하며 대성통곡했다.”는 얘기를 하셨습니다.

참석한 다른 분들 중에는 동의 되지 않은 모습으로 머쓱해 하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저는 이미 회심하였기 때문에 그분이 강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애가를 조용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 슬픔에 동감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실 때, 말라붙은 풀 한 포기라도 보시면서 창조된 피조물들을 살펴보십시다. 풀도 나처럼 지음받은 존재라는 그 사실을 기억하며 피조물들을 귀하게 여기십시다. 아가서는 피조물들의 탄식이 아니라 완성된 세상, 에덴에서 살기에 노래 중에 노래라고 합니다.

 

3. 노래 중에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솔로몬의 아가, 노래 중의 노래라고 마지막 이유는 그리스도와 관련성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아가서를 낭독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는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애굽의 장자들이 죽어서 온 나라가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는 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어린양의 피를 자아서 그 피를 문지방에 뿌리는 날입니다. 붉은 색이 넘치고 피비린내가 나는 날입니다. 그날에 성적인 묘사가 가득한 아가서를 읽습니다. 이미지가 너무도 대조적이지요.

유월절은 이스라엘 나라에게는 새해의 첫 달의 시작입니다. 그들은 구속받은 사건 유월절로 민족의 출발을 삼았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은 날입니다. 그날에 아가서를 읽으며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핵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구원의 완성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의 관계가 바로 언약의 지속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맺은 사랑입니다.

아가서에는 포도원이 자주 나옵니다. 이 포도원의 이미지도 언약적인 이미지입니다. 이사야서 5장 1-7절에 보면, 이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여호와는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입니다. 극상품의 포도가 맺혀지길 기대하였지만 먹지도 못할 포도가 맺어졌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지 못하는 포도라고 하였습니다. 언약적인 관계가 이루어지 못한 것입니다. 포도원에 포도는 심은 것은 극상품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는 먹지도 못하는 포도였습니다.

예언자 중에 예레미야는 광야에서 받은 율법과 유월절 절기는 야훼와 이스라엘이 맺은 허니문 기간이었다고 하였습니다(렘 2:1-3). 허니문 기간이 끝났습니다. 허니문이 끝나고 사랑의 관계로 이어져야하는데 허니문의 끝이 사랑의 끝이었습니다.

아가서는 우리에게 구속받는 것은 사랑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초대받는 자들입니다. 허니문이 끝나고 사랑의 관계로 이어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아가서는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고백합니다. 사랑에 당당한 여자의 모습입니다. 자신에게도 당당하지만 연인을 찾는데도 이 여자는 아주 당당합니다.

구약성경은 남녀가 하나됨을 결혼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남녀의 하나됨을 성적이 관계에서 찾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찾습니다. 남녀의 육체가 하나 되는 것은 결혼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성적인 연합이 아니어도 하나 되는 즐거움을 노래합니다. 연인으로 살아도 즐거운 것이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으로 누리는 친밀함입니다.

 

나가며 – 노래 중의 노래를 회복하는 2019년도.

사람들은 누구나 다 ‘사랑 없이 인간은 살수 없습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고 사랑을 먹고 산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으로 온전하게 회복되는 것을 성경은 에덴의 회복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읽은 아가서는 회복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에덴동산으로 회복된다는 것은 너무도 큰 이상입니다.

“우리 시대의 큰 도전은 바로 친밀성의 회복입니다. 하나님, 다른 인간들, 기타 피조물과의 진정한 친밀성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 시대 교회가 할 일들입니다”(김수영, 『하나님의 전심』. 규장, 2013, 120). 노래 중의 노래인 아가서를 통하여 그 샬롬의 아름다움을 꿈꾸는 한해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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