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원 목사] 욥기는 의인이 받는 고난의 문제인가?(2)
[황대원 목사] 욥기는 의인이 받는 고난의 문제인가?(2)
  • 황대원 목사
  • 승인 2019.02.20 12: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욥기를 해석하기 위해 구약성경이 말하는 의에 대하여 알아보자.
▲팟캐스트 <타브>의 '바이블코어'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황대원 목사
▲팟캐스트 <타브>의 '바이블코어'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황대원 목사

 

제1장 ‘의’란 무엇인가?

1. 구약성경이 말하는 의

욥기를 해석하기에 앞서 먼저 정립해야 하는 용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의’라는 단어이다. 지난 회에서 언급했듯이 욥기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인간의 의의 실체’이다. 때문에 의가 무엇인지 정리하지 않고 욥기를 바르게 해석하기는 매우 힘들다. 어느 정도 신앙의 연륜이 있는 분들이라면 의에 대해 적지 않게 들어보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분들께 “의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면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분들을 지적할 마음은 없다. 왜냐하면 내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라는 용어를 흔히 듣고 사용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이해 없이 두루뭉술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의가 무엇인지 정리해보기로 하자. 성경은 의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그 전에 먼저 드릴 말씀이 있다. 우리는 한글번역 성경을 사용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언어가 다른 인류에게 진리 전파의 수단으로 성경번역을 사용하신다고 믿는다. 성경을 번역하시는 분들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지혜와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 가운데 충실히 번역작업을 수행하셨다고 믿는다.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번역 성경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고 구원으로 이끄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본문의 명확한 이해를 위해 히브리어 원문을 살펴야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나는 어떤 글을 읽다가 알지 못하는 용어가 등장하면 어렵게 느껴지며 거부감이 든다. 그런 마음이 드는 건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전문적인 배경지식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려 한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기록하는데 사용된 히브리어를 가급적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본문의 바른 해석을 위해 원어를 꼭 확인해야하는 경우에는 살펴볼 수밖에 없다. 그 때에는 원어와 그 발음을 함께 기록하니 그대로 받아들이고 읽으시면 될 것이다.

구구절절 서론이 길었던 이유는 ‘의’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를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개역개정성경>에서는 히브리어 ‘צדק’를 ‘의’로 번역하였다. 히브리어에서 기본형 ‘צדק’를 어근으로 하는 단어는 다음 네 가지이다. ‘צדק’라는 어근의 모음을 다르게 읽어 명사는 ‘צֶּדֶק(쩨데크)’로 동사는 ‘צָּדַק(짜다크)’로 읽는다. 그리고 형용사 ‘צַּדִּיק(짜디크)’와 명사 ‘צְּדָקָה(쩨다카)’가 있다.

이들은 <개역개정성경>에서 주로 ‘의’로 번역되었다. 형용사인 ‘צדיק(짜디크)’는 대개 ‘의인’으로 번역되었고 명사인 ‘צדקה(쩨다카)’는 많은 부분 ‘공의’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를 문맥에 따라 ‘의’뿐만 아니라 ‘공의’ 또는 ‘공평’ 등으로 의역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개역개정판>을 비롯한 한글번역 성경에서는 ‘צדק’가 쓰인 부분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본서에서는 기본형 ‘צדק’를 어근으로 갖는 단어를 통일해서 ‘의’로 받아들이고 명사형 ‘צדק(쩨데크)’로 읽으며 구약성경을 살펴보려 한다.

우리는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보통 ‘의’라는 번역어가 지닌 개념으로 ‘צדק(쩨데크)’를 이해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람으로서 행해야할 바른 도리를 의라고 생각한다. 즉 도덕적인 이상이 충족된 상태를 의롭다고 한다. 그런데 히브리어 ‘צדק(쩨데크)’가 쓰이는 성경용례를 보면 ‘옳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צדק(쩨데크)’를 ‘의’로 번역한 것은 매우 탁월하다.

그러나 ‘צדק(쩨데크)’의 용례 가운데 단순히 도덕적 가치 이상의 의미를 지닌 내용이 있다.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의’라는 용어와 ‘צדק(쩨데크)’가 완전히 호응하진 않는다. 그래서 이제 구약성경에 나타난 ‘צדק(쩨데크)’를 소개하려 한다. 구약성경에 사용된 ‘צדק(쩨데크)’라는 용어를 살펴보며 성경이 말하는 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1) 옳음

‘צדק(쩨데크)’가 지닌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옳음’이다. 옳다는 뜻으로 사용한 용례를 몇 군데 살펴보겠다. 처음으로 살펴볼 내용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그랄 왕 아비멜렉의 말이다. 아비멜렉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인 줄 모르고 취하려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경고하시자 화들짝 놀라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צדיק) 백성도 멸하시나이까”(창 20:4).

아비멜렉은 사라가 유부녀인 줄 몰랐다. 그리고 그녀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비멜렉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잘못이 없음을 ‘צדק(쩨데크)’의 형용사형인 ‘צדיק(짜디크)’로, 번역하면 ‘의’로 표현하였다. 여기에서 ‘의’가 잘못이 없음 즉 옳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비멜렉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의’는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용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창세기에서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צדק(쩨데크)’를 언급한 부분을 보겠다. 유다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가 결혼한 후 죽고 말았다. 당시 형이 자녀를 얻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죽은 형의 후사를 잇는 전통이 있었다. 그런데 형의 후사를 잇지 못하고 둘째 아들도 죽고 말았다. 유다는 마지막 하나 남은 셋째 아들을 며느리 다말과 결혼시키기 주저하였다. 마지막 아들조차 죽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자 며느리 다말은 대를 잇기 위해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 관계를 맺어 임신한다. 며느리의 임신 소식을 접한 유다는 다말이 가진 태아의 아버지가 자신인줄 모르고 다말의 죄를 물어 죽이려 한다. 그러나 다말은 아기의 아버지가 유다임을 밝히는 증거를 제시한다. 그러자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다말에게 ‘צדקה(쩨다카)’라고 말한다.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옳도다”로 번역되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צדקה)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창 38:26).

그 의미가 분명하여 번역자들이 문맥에 따라 “옳도다”로 번역하였다. 이 경우에도 ‘צדק(쩨데크)’의 명사형인 ‘צדקה(쩨다카)’를 옳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צדק(쩨데크)’가 ‘옳음’이라는 의미를 지닌 내용을 한부분만 더 찾아보겠다. 신명기 24장에는 다양한 율법 규례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צדקה)로움이 되리라”(신 24:13).

당시 이스라엘 문화권에서는 겉옷이 밤에 추위를 막아주는 이불 역할을 하였다. 때문에 겉옷은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그러므로 겉옷을 담보로 급전을 빌리는 경우는 형편이 매우 어려운 처지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만약 해가 저무는데도 돈을 갚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날 밤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담보물로 받은 겉옷을 돌려주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드러나는 규례이다. 위 구절은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이 공의롭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공의’로 번역된 단어는 ‘צדק(쩨데크)’의 명사형인 ‘צדקה(쩨다카)’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율법을 선하게 행한 옳은 일을 ‘의’로 표현하였다.

이번 회에서는 욥기를 바로 해석하기 위해 구약성경에서 의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 중 구약의 몇몇 용례를 통해 ‘צדק(쩨데크)’가 ‘옳음’이라는 도덕적 개념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의의 개념이다. 그러나 ‘의’에 대한 개념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다음 회에서는 구약성경에서 독특하게 언급된 ‘의’에 대해 확인해보려 한다. 꼭 함께 해주시길 바란다.

 

----------------------------

*황대원 목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학사(B.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 석사(M.Div.),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에서 성경학 석사(Th.M)을 마쳤다. 2018년 목사안수 후 팟캐스트 타브의 바이블코어 방송을 운영하고 있다. 


  • 서울특별시 중구 창경궁로 18-1 401-51호(예관동, 비즈헬프)
  • 대표전화 : 010-7551-3091
  • 팩스 : 0540-284-309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지숙
  • 법인명 :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 제호 :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 등록번호 : 서울 아 05303
  • 등록일 : 2018-06-15
  • 발행일 : 2018-07-01
  • 발행인 : 윤지숙
  • 편집인 : 윤지숙
  •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oshuayoon72@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