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론5] 노승수, "정이철 목사=반율법주의에 기울어진 것 아닌가?"
[반론5] 노승수, "정이철 목사=반율법주의에 기울어진 것 아닌가?"
  • 노승수 목사
  • 승인 2019.02.2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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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믿음》 정이철 목사의 글에 대한 반론 (5)
▲사진은 왼쪽=《바른믿음》 정이철 목사(출처: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351)/오른쪽=『핵심감정 탐구』(세움북스, 2018.9.), 『핵심감정 치유』(세움북스, 2019.1.)의 저자 노승수 목사
▲사진은 왼쪽=《바른믿음》 정이철 목사(출처: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351)/오른쪽=『핵심감정 탐구』(세움북스, 2018.9.), 『핵심감정 치유』(세움북스, 2019.1.)의 저자 노승수 목사

《바른믿음》 2월 4일 자 <노승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그리스도가 이루었다고 주장>_(http://archive.fo/1jWaG)에 대한 반론

이글은 사실 응대의 가치를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범책(죄의 책임, reatus culpa, potential guilt 이하 RC로 표기)과 벌책(형벌적 책임, reatus poenae, actual guilt 이하 RP로 표기)은 중세신학뿐만 아니라 칼뱅, 투레틴, 바빙크, 벌코프에 이르기까지 인죄론을 다룰 때 가장 기본적인 성경 해석을 위한 개념입니다. 정이철 목사는 이것을 들어서 공인된 신학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정이철 목사는 과연 어떤 신학교를 나왔는지 되묻고 싶어지는 상황입니다. 과연 그런지 어디 꼼꼼히 차근히 살펴봅시다.

 

[반론1] 범책과 벌책은 공인된 신학이다.

벌코프 조직신학, 인죄론 페이지만 몇 쪽 들썩거렸어도 이런 무지한 말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법적 책임으로서 죄책은 범책(죄의 책임, RC)과 벌책(형벌적 책임, RP)로 구분합니다(벌코프, 449, 464). 투레틴은 분명하게(벌코프 464), 댑니는 모호하게 구분했습니다(벌코프, 449), 이 용어는 다소 모호한 번역을 분명하게 드러낸 번역일 뿐입니다. 친절하게 괄호치고 라틴어도 영어도 병기해두었습니다. 그러면 찾아보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러고도 안 되면 물어보아야 할 일은 이단정죄부터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이철 목사의 주장과는 달리 완전 정통 신학의 핵심개념인데 말입니다. 그것도 창세기 2:17을 해석하는 해석학적인 조직신학 개념인데, 그가 공인된 신학의 용어가 아니라는 말은 진실이 아닌 셈입니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하려면 적어도 근거가 될 만한 레퍼런스를 들고 와야 하지 않을까요? 막무가내로 단정적으로 마녀사냥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반론2] 아담의 최초의 죄와 원죄는 구분해야 한다.

정이철 목사는 “아담의 '원죄'와 아담의 후손들인 우리가 법적으로 아담의 죄에 대한 연대책임을 있음을 의미하는 '죄책'이 있을 뿐이다.”(정이철 목사의 주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벌코프 조직신학을 원서로 찾아 봤습니다. 한글로 주장을 펼치면 그런 게 어딨냐라고 할 것 같아서 직접 밤새 찾았습니다. 우선 지적할 것 하나, 아담의 원죄는 틀린 표현입니다. 원죄는 아담에게서 우리에게 전가된 죄를 일컫고 아담의 최초의 죄와 원죄는 구분해서 써야 합니다. 그리고 죄책만 있다는 데 대해서 아래를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We can speak of guilt in a twofold sense, namely, as reatus culpae and as reatus poenae.(원서 269)

The usual sense, however, in which we speak of guilt in theology, is that of reatus poenae.(원서 270)

269쪽은 원죄의 두 요소를 설명하면서 나오는 구절입니다. 270쪽은 원 죄책의 정의에 나오는 구절이고, 벌코프는 정이철 목사의 주장과 달리 죄책은 범책(죄의 책임성, reatus culpae)과 벌책(형벌적 책임, reatus poenae.)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이철 목사는 정말 어이없고 근본 없는 신학으로 한국교계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연대 책임만을 의미하는 죄책만 있을 뿐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계통의 정통 신학입니까? 솔직히 저는 이런 허무맹랑한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물론 벌코프는 “이 부패는 인류의 연대성 때문에 아담뿐만 아니라 모든 그의 후손들에 게도 영향을 미쳤다”(벌코프, 435-436)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이는 대답을 묻지 않을 수 없네요. 저는 합신 교단에서 정통 개혁파의 교의신학을 배웠습니다. 정이철 목사가 배운 신학은 어떤 신학교의 신학이기에 그리고 본인이 알면 얼마나 알기에 이리 오만하게 “죄”와 “죄책”만 있을 뿐이라면서 단정적으로 말합니까?

한국의 보수 교단의 조직신학 교과서가 지난 30년간 벌코프였다는 사실을 주지의 사실입니다. 예장 합동, 고신, 합신에 이르기까지 주요 교단의 교과서 내지 참고서입니다. 도대체 이단 연구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글쓰기는 단지 컴퓨터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비판을 하려면 찾기라도 해 봤어야 할 것 아닌지 되묻고 싶습니다. 간단한 검색조차 하지 않고 그렇게 단정적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구는 모습이 참 속절없습니다. 이 신학적 가르침을 부인하면서 자신의 주장만이 개혁신학이라고 말하는 주장의 근거를 밝히시기를 바랍니다.

“아담의 행위로 지어진 죄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제대로 공부를 안 했으니 모르지 않겠습니까? 죄책 중 자범죄의 범책(죄의 책임, RC)을 일컫는 말입니다. 아담의 최초의 죄는 행위 언약에 요구에 불응한 것이고 이후에 일어나는 죄들은 우리와 형편이 똑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그에 따라 각 범죄의 범책(죄의 책임, RC)이 생성이 되고 이것은 천국에까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 개혁파의 통상적인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 탑재가 기본으로 안 되어 있으니 설명을 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죠. 마치 징징대고 떼쓰는 초등학생 같습니다. 토론이 되거나 논쟁이 되려면 그리고 그런 것을 제게 물어 요구하려면 스스로 개혁신학의 기본적 소양부터 갖추시기를 바랍니다.

정이철 목사는 “(노승수 목사가) 이런 용어를 남발하면서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칼뱅도 투레틴도 바빙크도 벌코프도 다 쓰는 용어입니다. 인터넷 검색만아러도 제대로 한번 했더라도 이런 소리를 안 했을 듯합니다. 김병훈 교수가 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6장 6항>의 해설과 관련하여서 바로 이 범책(죄의 책임, RC)과 벌책(형벌적 책임, RP)이 검색이 되니 말입니다(http://archive.fo/EmayN). 정이철 목사는 기본부터 다시 배우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런 문제에 답하고 있는 제가 지금 한심할 지경입니다. 읊어볼까요? <기독교 강요> 영문판 각주 308번 '죄의 전가'를 설명하면서 '빚 개념'으로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정이철 목사는 "어느 나라 천주교냐?"고 물었습니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3권에는, “로마교 신학은 죄의 허물이 있는 상태 reatus culpae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상태 reatus poenae를 구분한다.”(개혁교의학3권, 208)고 했습니다. 이 개념에 대한 서지 정보는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입니다.

P. Lombardus, Sententiarum, II, dist. 42‘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 II, 1, qu. 87, art. 6. Concilium Tridentinum, c. 14, can. 30. XIV ‘de poenitentia’, c. 8 그리고 can. 18-15. R. F. R. Bellarminus, De amissione gratiae et statu peccati libri sex, V, 19. Theologia Wirceburgensis, dogmatica polemica scholatica et moralis, V!I, 27.

바빙크도 반反 율법주의를 경계하기 위해서 구분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부인하고 따라서 신자들의 용서를 위한 기도를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반反 율법주의자들에 대항하여, 개혁파는 이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했고 잠재적 죄과 reatus poentialis와 실재적 죄과 reatus actualis를 구별했다.”(개혁교의학3권, 208).

 

[반론3] 정이철 목사=반 율법주의에 기울어진 것이 아닌지?

사실 지금의 사태는 정이철 목사가 《바른믿음》에 “손성은 목사가 서철원 박사의 성화론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http://archive.fo/pILEj)라는 글을 1월 25일에 올린데서 시작됐습니다. 손성은 목사는 서철원 박사의 강의 영상을 듣고, 그의 신학에 대한 질문을 페이스 북에 올렸습니다. 해당 영상에서 손성은 목사가 인용한 서철원 박사의 주장은 아래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옛 사람을, 지난 죄를 용서받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가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우리 안에 있는 저 욕망을 제어 받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죄의 욕망이 일어날 때 주 예수의 피가 나의 모든 죄에서 나를 깨끗하게 한다고 선언하면 그 말씀에 역사하는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죄의 욕망이 소산돼요! 흩어져요! 없어져요!

옛 사람의 죄를 뿌리채 뽑아내는 것이 아니예요. 그렇게 하고 났는데, 얼마 지나면 또 그 욕망이 올라와요. 그러면 또 그 말씀을 선언하는 것이예요. 주 예수의 피가 나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한다고 선언함으로 죄 욕망이 소산돼요. 그것이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예요. 전적인 은혜로 ...’”(손성은 목사의 페이스북, 2018.6.11.)

그런데 서철원 박사의 이 주장은 사실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사실 저는 이런 사태를 막고자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인데 오히려 저를 “이단이라”고 하며, “귀신을 설교시키는 게 낫겠다.”고 정죄를 하고 나서니 어이가 없습니다. 첫째와 둘째 반론 글에서 보았듯이 사실 저는 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서철원 박사와 그 제자들의 신학에도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조금 달라도 그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 믿고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정이철 목사는 서철원 박사가 무슨 자신의 하나님인양 저에 대해 11개의 글을 올리면서 비판하며 이렇게 겁박하는 사태에 대해서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바빙크의 설명, 곧 “신자들의 용서를 위한 기도를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반(反) 율법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한 신학적 개념 구분”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서철원 박사의 신학을 따르는 정이철 목사가 "개혁파"의 이런 구분을 가졌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정이철 목사의 신학이 반 율법주의에 기울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 아닐까?’하고 의심을 갖게 합니다. 정이철 목사는 바빙크의 설명에 대해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을 꼭 밝혀주시기를 바랍니다.

 

[반론4]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신앙고백서와 신학자들의 견해

정이철 목사는 “벨직 신앙고백서가 작성될 당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개념이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1561년에 작성된 이 문서에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이 나오냐?”고 물었습니다.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는 1561년에 작성한 대요리 문답을 통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할 당시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고수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Lyle D. Bierma,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5), 163-223).

우르시누스뿐만 아니라 올레비아누스(Casper Olevianus)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교리를 고수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Caspar Olevianus, In epistolam d. pauli apostoli ad galatas notae... (Geneva: Eustathium Vignon, 1578), 57. See also his In epistolam d. pauli apostoli ad romanos notae... (Geneva, 1579), 196, 197, 205, 206, 209, 210.).

이 문서로부터 50년이 안 되어서 1607년 라 로쉘(La Rochelle) 총회는 "피스카토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인하는 것이 개혁주의 고백서 밖에 떨어진다."고 결론내리고 그에 따라 5년 후 모든 목사들로 하여금 서명을 하게 한 결정문에 나타난 다른 표현입니다. 모든 목사가 서명한 문서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의 위치에서 대신하여서, 도덕법과 의식법에 순종하셨으며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순종이 따라서 우리에게 전가된다, 그리고 우리의 칭의는 죄 사함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로움의 전가로도 이루어진다.(John Quick, Synodicon in Gallia Reformata, volume 1 (London: T. Parkhurst and J. Robinson, 1692), 348. 총회 결정은 265를 보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개념은 종교개혁이 지나고 17세기나 되어서 소위 정통주의 신학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스콜라 신학을 싫어하는 정이철 목사는 17세기가 왜 과거 스콜라 체계를 동원해서 개혁신학을 구축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런 데 기초적인 지식이 없는 듯합니다.

고재수 교수의 언급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신학자가 이것을 고수했다.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중세적인 공로신학을 막는 신학적인 장치였기 때문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곧 출간될 세 번째 책을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루터파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만 아래의 서지 정보를 확인하기 바랍니다.

아우구스브루크 고백서(Augsburg Confession)와 협화신조(Formula of Concord)는 둘 다 칭의 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고백합니다(Augsburg Confession and Formula (Solid Declaration) III:14-16의 4항, Concordia: The Lutheran Confessions, A Reader’s Edition of the Book of Concord (Second Edition), ed. Paul Timothy McCain (Saint Louis: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5), 32-33; 538.)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국내 신학자들의 언급도 들을 수 있습니다. “루터는 칭의가 “수동적 칭의”와 “능동적 칭의”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였다. “수동적 칭의”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은 옳은 분이시고, 인간은 죄임임을 고백하는 일이다.…“능동적 칭의”란 하나님께서 이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이다.”(우병훈, re 50호 33)

루터는 “능동적 의로움”(active righteousness)과 “수동적 의로움”(passive righteousness)이 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나에게 의를 전가한다”고 포괄적으로 가르쳤습니다(Robert Kolb, "Luther on the Two Kinds of Righteousness: Reflections on His TwoDimensional Definition of Humanity at the Heart of His Theology," Lutheran Quarterly 13 (1999): 449-66. Charles P. Arand, "Two Kinds of Righteousness as a Framework for Law and Gospel in the Apology," Lutheran Quarterly 15 (2001): 417-39. 원문출처: http://archive.fo/9FYxs)

다음 문장에 대한 정이철 목사의 글은 난독증에 가깝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은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적 구조다.”(노승수 목사의 주장)라는 제 글에서 정이철 목사가 인용한 글은 아래 문장입니다.

중세 후기 신학은 이 순종을 개념은 지니고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주입된 의에는 이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의 그 범책과 자범죄에서 비롯되는 벌책과 범책은 주입된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의 의를 근거로 순종해서 얻어야 하는 구조였기 때문이죠.

이 글을 인용하면서 정이철 목사는 “개혁신학에서 신자에게 '주입된 의'를 가르치는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의가 우리에게 주입되는가?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의 의가 우리에게 주입된다는 말은 난생 처음 들어본다. 참으로 해괴하고 금시초문이다.”(정이철 주장)

제가 볼 때는 이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말꼬투리를 잡아서 사건을 왜곡하고 가십을 만들려는 겁니다. 그런 이유 아니고는 지금 이 사태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쓴 글의 주어가 “중세 후기 신학”입니다. 그런데 정이철 목사는 이 문장을 인용해놓고 개혁신학이 주입된 의를 가르치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정이철 목사는 정말 제 글을 제대로 읽고 이해했을까요? 의의 주입은 중세 신학의 아퀴나스 구조의 내재주의 신학입니다.

이미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2월 13일자 [이슈체크]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간의 논쟁 이해”에서 신학자들의 글과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정이철 목사는 적어도 장로교회의 기본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조차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거나 공부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절>은 명백하게 로마 교회의 “주입된 의”를 거부한다고 천명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개혁교회의 공교회의 기본 입장”이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정이철 목사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이라는 신학은 존재하지 않았다.”(정이철 목사의 주장)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나요? 김재성 교수는 저와 같은 입장입니다. 이번에는 김재성 교수도 이단으로 모실 셈인지 그 후속 거취가 궁금해졌습니다.

또한 다음 링크에서 한국 보수 개혁주의 신학의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정이철 목사가 이 링크의 글을 보고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바른믿음》의 현혹기사를 읽으셨던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따라 들어가셔서 꼭 이 글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참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지를 너무 잘 설명해두었습니다(http://archive.fo/9FYxs). 아울러 아래 서지 정보를 보고 해명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반론5]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분리될 수 없어.

정이철 목사의 주장대로라면, 칼뱅도, 투레틴도, 바빙크도, 존 프레임이나 비키, 윌리암슨, 현대에 이르러 존 맥아더 목사에 이르기까지 개혁주의 주류 신학자들이 대부분 이단이라는 소리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정이철 목사가 역사적인 장로교회의 노선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해줍니다. 그러면 정이철 목사가 주장하는 칭의에서 의는 도대체 무엇인지 참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도 율법에 대해 순종하신 의가 아니라고 부인하니 그의 생각을 알아 봐야겠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여 얻으신 의를 우리에게 전하셨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아무리 지켜도 의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흠 없는 하나님 백성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셨던 삶과 신앙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옳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이것이 정이철 목사의 입장입니까?

이 입장으로 제게 이단이라고 정죄를 근거도 없이 한 것입니까? 이 입장에 대해서 좀 더 알아봐야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의는 그리스도가 율법에 순종하신 능동적 순종의 의가 아니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켜서는 의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말인데요. 그 다음 문장에서 그의 생각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정이철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셨던 삶과 신앙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합니다.  종래의 장로교 신학은 믿음을 습관이나 기질로 묘사하기에 이는 아마도 그리스도의 내적 자질, 곧 본질적 의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행위의 의가 아니니 그럼 남는 것은 그의 존재로부터 도출되는 의라는 말로 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 과연 역사적 장로교회는 이런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우선 칼뱅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오시안더는 ‘본질적인 의’라는 용어가 다른 뜻이 아니고 그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견해에 부응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하심’과 ‘희생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얻어진 의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품성 모두를 주입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본질적으로 의로운 자들이라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Inst. 3. 11. 5).”

칼뱅의 논지는 이런 사상은 이단적이라는 것입니다. 투레틴은 본질적 의를 주장하게 되면 그리스도와 우리가 본질에서 같아지는 신성모독적인 상황이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의”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신들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인 그 의는 대상적인 측면에서나 형상적인 면에서나 우리에게 전해질 수 없다." 

"성경은 어디에서나 우리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율법의 요구들에 부응하고 그 요구들을 완전하게 성취한 그의 삶과 순종과 그의 죽음의 고난과 연결시킨다. 우리에게 무한한 의가 필요했다면, 그 의는 본질에 있어서가 아니라 가치와 공로에 있어서 무한한 의일 수밖에 없다.…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의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걸쳐 능동적이 것이든 수동적인 것이든 그의 순종 전체를 가리킨다(프란시스 투레틴 “칭의” 96.).

정이철 목사는 율법을 지켜서 의가 발생하지 않는데 우리가 갖게 되는 의가 어떤 공로인지 밝히기를 바랍니다. 그 공로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그의 본질에 기대어 있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 대해서 성실히 답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본질적 의라고 주장한다면 정이철 목사는 지방교회와 유사한 신학이라고 판단 할 수밖에 없고 만약 아니라면 율법의 순종이라는 공로 외에 어떤 공로가 가능한지 설명해보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정이철 목사가 저의 워딩을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구원해야 할 존재라고 주장한 것으로 이해한 것과 관련하여서, 그의 이해는 바로 이 지점 곧 그리스도의 본질적 의에 시각에서 그리스도와 그 칭의를 바라봄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만약, 율법에 대한 순종이고 이것이 신적 본질에서 이뤄진 일이 아니라 제2위격이 인성 안으로 내인격화(inpersonal)하시면서 참 사람으로서 우리의 위치에서 행하신 일이라는 점을 이해했다면, 또 그런 지위에서 율법의 요구를 받고 거기에 속상과 공로적 의를 순종으로 이루셨다는 이해를 가졌다면 아마도 저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지는 못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정이철 목사의 주장은 음해가 아니라면 그의 신학적 스탠스는 그리스도와 본질적 의를 공유하는 자리에 서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문병호 교수는 투레틴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이중적 순종이 무죄함의 의와 견인의 의에 부합한다고 보며 율법의 이중적인 작용과 관련시킨다. 즉, 그리스도의 의는 율법의 형벌에 대한 값으로 뿐만 아니라 율법의 규범을 준수함에 있어서도 역사한다고 본다.…성도가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됨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순종과 죽음의 순종의 의를 모두 전가 받기 때문이다.”(문병호, 기독론, 998-999).

물론 이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순종은 모두 경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신인양성의 인격으로 수행됩니다(문병호, 기독론, 1000). 그런데 그리스도의 인성적 위치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긴 오류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제임스 뷰캐넌도 같은 주장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하나님의 율법과 정의에 대해 완전하고도 효과적인 만족을 제공하였다.(제임스 뷰캐넌, 칭의 교리의 진수, 334-335).

 

[반론6] 서철원 박사와 정이철 목사의 견해 검토

그러면 왜 정이철 목사는 이런 주장을 할까? 서철원 박사의 책을 검토해 보면,

서철원, 교의신학4권, 147

“그리스도의 율법성취는…율법을 범함으로 죗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그의 죽음으로 갚았다.…그리스도가 그의 삶에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킨 것은 율법을 다 지켜 의를 가져오는 그런 능동적인 순종이 아니다. 전통적 신학이 제시하는 능동적 순종과 피동적 순종은 전적으로 그릇된 사변적 산물이다. 능동적 순종은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는 그리스도가 스스로 지켰으므로 능동적 순종이고 하나님의 작정을 따라 죽으셨으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피동적 순종이라고 구분하였다. 이런 것은 성경에 맞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전혀 맞지 않다.”(서철원, 교의신학4권, 147)

정이철 목사의 신학은 서철원 박사에게 기원을 두는지는 몰라도 역사적인 개혁신학은 아닙니다. 다만 저도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서철원 박사의 신학에 대해서 여러 경로로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다가 2013년 리폼드 뉴스에 난 서철원 박사의 기록론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전통적인 장로교회와 개혁파의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서철원 박사에 대한 언급을 인용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http://archive.fo/KxnWh).

출생 후에 예수님은 할례를 받음으로 언약 백성의 표를 받아 율법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생은 다 율법 준수의 생이었습니다. 곧 율법의 성취자로서 율법의 요구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셨습니다. 또 세례를 받음으로 자기를 죄인과 일치시키고 율법을 지켜야 살 수 있는 길을 열리게 하셨습니다. 불의를 속상하는 길은 율법을 지키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새 인류의 대표로 율법준수의 의무를 지게 되었습니다.

의는 하나님의 법을 다 지킴입니다. 의는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생존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의가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킬 때에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존이 허락됩니다. 법을 어기면 사망입니다. 첫 인류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여 죄인이 되고 생존이 박탈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법을 순종하므로 생존권이 허락되었습니다. 이 생존권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므로 획득했고 백성들에게 전가할 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입법자로서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는 데도 율법을 인류의 대표로서 다 지켰습니다. 자원하여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율법 준수가 의를 이루었습니다. 전통적 신학에서는 이를 능동적 순종이라고 칭하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피동적 순종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율법만 아니라 십자가에까지 이르는 순종입니다.

이 순종에 의해 예수님이 저주 아래 죽음으로 우리가 구원되었습니다. 이 죽음이 대리적 죽음이어서 우리 모두가 죽은 것이 되었습니다. 또 이 죽음이 하나님의 작정으로 이루어졌기에 우리의 구원입니다.

『교의신학4권』은 2018년에 출간되었으니까 2013년부터 2018년 사이에 입장이 바뀐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역사적 개혁파 신학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모종의 상황이나 사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정이철 목사는 2018년의 서철원 박사의 『교의신학4권』에 나타난 신학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역사적 개혁신학과 거리가 있다는 점입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관찰되는 미묘한 지점이 있습니다. 정이철 목사가 2012년 인터콥을 대한 논조와 2018년에 변화되는 시기와 묘하게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개혁신학이 아닌 위치에서 제게 이단이라 정죄할 형편은 아닌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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