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교수 "소모적 논쟁보다 목회적, 실천적 신학교육 필요"
김재성 교수 "소모적 논쟁보다 목회적, 실천적 신학교육 필요"
  • 윤지숙 기자
  • 승인 2019.03.0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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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에서 '능동적 순종' 강조한 이유

-정이철 목사가 수동적 순종을 강조위해 논문내용 변경한 것 "유감"

-소모적 논쟁보다 목회의 실천적, 상황적, 규범적 안목 필요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편집자 주]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개념에 대한 레이몬드 교수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는 "신학자들이 개발해 낸 신학 용어들은 시대적인 정황이 반영되어 있어서,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한 김재성 교수의 아티클에서 일부 내용을 수정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만을 강조하면서 교계에 혼란을 주고 있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김재성 교수(조직신학)의 논문 <아담 안에서 사망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 기독교 신앙의 두 가지 기본구도>(국제신학, Vol.20 No, 2018)의 증보판인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에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전가' 교리를 5페이지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김재성 교수(조직신학)/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김재성 교수(조직신학)/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전가' 교리를 뒷받침한  J.V. Fesko, 『Death in Adam, life in christ : the doctrine of imputation』(Mentor, 2016)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는 2월 25일 오전, <김재성 교수, 능동수동 신학자들이 만든 용어 만고불변 진리 아냐>(http://m.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398&fbclid=IwAR2Wdk9EAu-E_a5yZt7tNegz2usit85am65NgFaCoQfA440T6t1EEGp7HKg)라는 제하의 글이 게재됐다.

바로 다음날인 26일 노승수 목사는 “해당 글은 그간의 자신의 주장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치 김재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의 논문 <아담 안에서 사망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 기독교 신앙의 두 가지 기본구도>(국제신학, Vol.20 No, 2018)를 짜깁기해 마치 김 교수의 의견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성경과삶이야기 《울림》은 2월 27일 오전 11시 인천시 박촌동의 모 카페에서 김재성 교수를 만나 논문에서 원래 의도했던 내용이 무엇인지를 들어보았다. 당일 인터뷰 내용은 문답형식으로 정리했다.

◇15페이지 분량의 논문이 20페이지로 증보된 이유?

2주전에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식학 석박과정의 학생 중 하나가 “정이철 목사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정적으로 본다.”며, “정이철 목사와 노승수 목사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대해 논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얼마 후, 정이철 목사가 먼저 “가르침을 주시면 열심히 배우겠다.”며 전화를 했다.

그래서 2018년 국제신학대학원의 논문집에 실린 <아담 안에서 사망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 기독교 신앙의 두 가지 기본구도>에서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부분을 5페이지 분량을 추가해 증보판인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을 공부하라는 의미에서 정이철 목사에게 e-mail로 보내주었다. 하지만 정이철 목사는 《바른믿음》에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내 논문의 내용을 왜곡해서 올려서 유감스럽다.

 

◇우선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용어 정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대변하는 가장 결정적인 개념은 빌립보서 2장에 담긴 기독론에서 핵심사항인 “죽기까지 순종하심”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비움, 사람의 모습, 종의 형태, 겸손함, 죽음의 순종 등 5가지로 풀이한다. 특히 죽음의 순종은 로마서 5:11-19의 불순종한 첫 사람 아담과 대조되는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의 특징은 온전한 순종이다.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셨다.

개혁신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생애에 모든 율법을 지켜낸 순종의 내용을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과 수동적 순종(passive obedience)/교훈적 순종(preceptive obedience)으로 구별했다.

개혁신학자들이 사용한 ‘능동적 순종’인간의 몸을 입고 살아가신 전 생애 기간 동안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켜냈음을 의미한다. ‘수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의 생애가 마지막에 이르게 되면서 하나님의 진로를 감당하면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최종적인 복종이다.

여기서 ‘수동적’이라는 형용사 ‘passive’는 라틴어 ‘파티오르’(patior)에서 파생되었다. 원래 이 단어는 ‘고난을 당하다’라는 동사형에서 나왔다(John Frame, Systematic Theology, 902). 예수님께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옮겨주시옵소서”라고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진통을 겪으셨기에 수동적 순종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조금이라도 ‘수동적’이라는 용어가 빚어낼 오해를 염려해 “그리스도가 결코 하기 싫어하거나 억지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 즉 수동적으로 하지 않고, 진정으로 자원하고 전적으로 염원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교훈적 순종’ 혹은 ‘명령적 순종’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하기”(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631)를 제안했다.

정이철 목사는 이런 레이몬드 교수의 견해를 간과하고, 내 논문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에서 “신학자들이 개발해 낸 신학 용어들은 시대적인 정황이 반영되어 있어서,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라는 부분만 가져와서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왜곡시켰다.

메첸 박사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 동안 벌어진 일은 죄의 값을 지불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생애의 모든 순간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영광스럽게 준수하는 일부분들로 구성되어졌고, 그로 인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가져다 줄 수 있었다.”고 이해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만물의 주님이시므로 전혀 그렇게 순종할 것을 요구할 수 없다.”(J. Gresham Machen,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191)고 했다.

결론적으로 십자가의 순종이 하나님의 모든 법을 지키는 최종적인 완성이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전생애 동안에 율법에 정한 기준을 모두 다 충족시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완벽한 생애는 필수적인 요소다.

 

◇교회사적으로 이렇게 ‘그리스도의 순종’ 교리에 대한 논쟁은 없었나요?

교리의 발달사를 살펴보면,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 발견하게 된 것인데, 성자 예수님의 죽음과 희생을 단지 성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으로만 보아서는 부족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중세시대는 성부 하나님을 위주로 해서 십자가 고난을 해석하려는 속죄론이 대세를 이뤘다.

이런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희생을 조망하면, “성부가 고난을 당했다.”는 소위 ‘성부 수난설’(patripassianism)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이단으로 정죄됐다(Frame, The Doctrine of God, 612n21, 688). 이런 주장이 확장돼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나오게 되고, 바르트는 “신 성부 애통설”(Neo-theopaschitism)을 선호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성부 하나님의 순종이나 희생이 언급된 곳은 없다. 

또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성도의 칭의에 있어서 중요한 근거가 된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이 믿음의 성도들에게 전가되여서 칭의를 얻는다고 가르쳤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 유사펠라기언주의를 물리치고, 성경적 칭의론으로 구원론의 체계를 세우고자 칭의와 성화의 관련성을 확실히 해결하고자 능동적 의로움과 수동적 의로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결국 루터는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나에게 의를 전가한다는 혁명적인 공헌을 남겼다(Robert Kolb, Martin Luther’s Theology, 176-177).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전가' 교리를 뒷받침한  J.V. Fesko, 『Death in Adam, life in christ : the doctrine of imputation』(Mentor, 2016)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전가' 교리를 뒷받침한 J.V. Fesko, 『Death in Adam, life in christ : the doctrine of imputation』(Mentor, 2016)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는 우리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의 「하이델베라크 교리문답」 60번 문항과 16세기 후반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요한 볼레비아누스, 아만두스 풀라누스, 윌리엄 퍼킨스, 로버트 롤록, 더들리 등이 가르쳤다(Richard Muller, Mid-America Journal of Theology 17, 21-26).

17세기로 넘어가면 개혁주의 정통신학에서 일부 이탈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변질시켰고, 파스카토르(1546-1625)가 수동적 순종만을 주장해 논쟁이 일어났다. 1603년 가프의 총회에서는 피스카토로의 주장을 거부하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라이덴, 제네바, 하이델베르크, 바젤, 헤르본의 대학들에게 더 이상 혼란스러운 주장에 현혹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뒤로 소무르 아카데미의 신학자 플라카에우스가 샤렌톤 총회(1644-45)에서 죄의 전가 교리를 거부하면서 논쟁이 일어났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3항과 대교리문답서 70번 문항에서 그리스도의 순종과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능동적 순종을 강조했다.

이런 소모적 논쟁이 정이철-노승수 목사의 논쟁에서 다시 되살아 나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성경과삶이야기 《울림》은 2월 27일 오전 11시 인천시 박촌동의 모 카페에서 김재성 교수를 만나 논문에서 원래 의도했던 내용이 무엇인지를 들어보았다.
▲성경과삶이야기 《울림》은 2월 27일 오전 11시 인천시 박촌동의 모 카페에서 김재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를 만나 논문에서 원래 의도했던 내용이 무엇인지를 들어보았다.

◇사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니 수동적 순종이니 하는 내용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등을 믿으면 되지 왜 이런 용어로 구분되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그리스도의 순종’ 교리가 성도들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요?

죤 머레이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순종이야말로 그저 하나의 성경적 교리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구원의 혜택을 누리게 하고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도록 집약하는 큰 구조(a category)”라고 했다(John Murray, Redemption, I.204-5).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모두 다 믿는 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로움의 전가가 주어지게 되는 확고한 근간이 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향해,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자들이기에, ‘새로운 피조물’의인으로 선언하신다(고후 5:21). 둘째,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믿음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근간을 이룬다. 성자의 피흘림과 죽음은 성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결과다. 성자의 능동적 순종은 인류를 “대리하는 순종”(vicarious obedience)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5:7-9는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오셔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 아들 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하고 있다.

셋째,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죽으심과 부활에까지도 확장되어져 있다. 성자의 능동적 순종은 일반 성도들이 아무리 철저하고 완벽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해도 여전히 부족한 상태에 놓여서 항상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상황을 해결하는 답이 될 수 있다. 아직도 점진적 성화의 과정에 있으면서, 아무리 노력을 다해도 온전케 될 수 없음을 탄식하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야말로 완벽한 복음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의 능동적 순종의 의로움을 전가 받아서, 비록 죄인이지만 전혀 죄가 없다고 간주된 성도들에게는 엄청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알기를 원치 않았고 감옥에 갇혀서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로 만족하지 못하고 한 발은 세상에, 또 다른 한 발은 교회에 두며 줄타기를 한다. 예수는 기독교신학과 신앙, 우리의 인생의 전부다. 우리는 예수 중심의 가치관을 확고히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이철-노승수 목사의 논쟁에 대해 해주시고 싶으신 조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그리고 전가 교리, 칭의 문제 등은 목회적 삶의 현장으로 가면 훨씬 더 복잡해진다. 하지만 앞선 신학자들이 명백하게 답을 제시해 놓았다. 현대 개혁주의 신학자들 중 워필드, 챨스 하지, 헤르만 바빙크 등 굳이 원서를 안 봐도, 번역된 조직신학 책들이 많이 있다.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을 지켜보면서, 한편으로는 자칫 지식자랑, 현학주의, 교만에 빠질 우려가 있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교회는 기초가 너무 허술하다는데서 오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해 성도들에게 명확한 답을 찾아 주기 위해 목회자들은 왜 명확하게 공부를 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많은 부분 이단에게 빼앗긴 것도 이와 유사한 이유다. 방비책을 촘촘하게 세우지 못한 사이에 약점들이 노출되고, 성도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체질강화의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적 관점과 상황적 관점, 규범적 관점 등 3중적 관점이 같이 가야하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엄청난 기도와 묵상을 통한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씨름, 깊은 성경연구로 본문과의 씨름하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또한 성도들이 고민하고, 갈등을 겪고 있는 문제들을 가지고 “답답한 상태로 교회에 왔는데, 필요한 답을 듣고, 하나님의 위로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정말 시원하다.”던지, “은혜를 받고 하늘나라가 내 마음 안에 들어왔다.”고 고백할 수 있는 목회적, 실천적 안목의 심금을 울리는 설교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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