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원 목사] 욥기는 의인이 받는 고난의 문제인가?(9)
[황대원 목사] 욥기는 의인이 받는 고난의 문제인가?(9)
  • 황대원 목사
  • 승인 2019.03.18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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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3:10은 고난 가운데 인내하는 의인의 고백일까?
▲팟캐스트 <타브>의 '바이블코어'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황대원 목사
▲팟캐스트 <타브>의 '바이블코어'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황대원 목사

3. 욥을 의인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구절들

욥기를 읽다보면 문맥의 흐름에서 어색한 말이 종종 등장한다.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갑자기 중간에 훌륭한 신앙고백을 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런 내용을 이해하기 힘든 난제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욥이 고난으로 인한 탄식 가운데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난 이전부터 시종일관 욥이 의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욥의 말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듯한 내용도 있다. 그런 고백은 욥이 메시아를 대망하는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고 추정케 한다. 어떤 이들은 더 나아가 욥을 그리스도의 예표로까지 해석을 발전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이해는 욥이 의인이어야만 하는 전제가 필요하다. 때문에 욥이 시종일관 의인이었다는 근거로 받아들여진다.

조심스럽지만 솔직히 말하면 <개역개정> 성경번역자들도 고난 받기 이전의 욥을 의인으로 보는 입장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욥의 말을 긍정적으로 번역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구절이 문맥에 어색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런 미묘한 번역의 문제가 고난 받기 이전의 욥을 의인으로 볼 수 있는 근거구절이 되었다. 그래서 가장 두드러지는 번역 상 오해되는 부분을 확인하고 본문의 진의를 알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이어서 욥이 지혜자로 평가 받는 근거인 욥기 28장도 살펴보겠다.

 

(1) 욥기 23:10의 널리 퍼진 오해와 바른 이해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이 구절은 널리 알려진 유명한 구절이다. 아마 이 글을 읽으실만한 분들이라면 위 구절을 모르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이 구절을 보통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하나님의 훈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모든 고난의 과정을 거친 후에 자신이 보다 온전한 신앙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욥은 고난으로 인해 탄식하면서도 내면에 있던 말을 한다.

위 구절은 자신이 하나님의 제련 과정을 거치고 나면 순금처럼 될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욥기 23:10은 욥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욥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는 의인이다.

그러나 23장 전체 문맥을 보면 위와 같은 의미로 생각하기 힘들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현실로 인해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욥 23:2a)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결백하기에 하나님과 변론하여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고 한탄한다. 그리고 지금 논하고 있는 10절을 고백한다. 너무 유명한 구절이기에 익숙한 요절로 읽지 말고 앞의 문맥에 이어 10절을 살펴보자.

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בחן)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6~10)

욥은 자신에게 닥친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기 때문에 억울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과 시시비비를 가리기를 원한다. 6절은 하나님께서 큰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더라도 자신이 옳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시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7절의 “정직한 자”는 욥 자신을 가리키고 변론의 상대자인 “심판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7절에서 욥은 자신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다. 욥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변론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결백이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나주지 않으시니 답답하다. 그 내용이 8~9절이다.

욥은 자신에게 재앙이 닥친 사실이 억울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옳고 그름을 따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하시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나는 순전한 금처럼 완성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상하다. 이야기의 흐름이 매우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도 10절과 호응하지 않는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욥 23:11~12).

10절에서 자신이 현재 연단 받고 있으므로 그 과정을 마친 후를 기대한다던 사람이 바로 이어지는 11~12절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다니 역시 어색하다. 그렇지 않은가? 오히려 욥기 23장 전체에서 10절이 빠지면 욥의 말에 일관성이 생긴다.

이와같은 욥기 23:10의 문제는 바로 히브리어 ‘בחן(바한)’을 ‘단련’으로 의역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서 ‘בחן(바한)’은 대게 ‘시험’ 또는 ‘감찰’로 번역되었다. ‘בחן(바한)’의 의미를 알기 위해 ‘시험’으로 번역된 구절을 하나 확인해보겠다.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בחן)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창 42:16b).

이러한 용례를 통해 ‘בחן(바한)’이 어떤 대상의 진실여부나 가치를 파악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בחן(바한)’을 ‘시험’으로 하여 욥기 23:10를 개인적으로 번역해보았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길을 안다. 그가 나를 시험(בחן)하면 내가 순금처럼 나올 것이다”(욥 23:10, 사역).

그런데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בחן(바한)’을 ‘단련’으로 의역하였다. ‘בחן(바한)’이 지닌 ‘시험’을 연단의 의미로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다”도 앞에 있던 ‘단련’에 맞추어 자연스럽도록 번역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 의역이 의미상 오해를 낳고 있다. 본문은 ‘בחן(바한)’이 지닌 ‘시험’을 테스트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10절을 욥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문맥의 흐름에 따라 본다면 욥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행한 길을 알고 계신다. 내가 옳은지 그른지 테스트해보면 나는 옳다는 판정을 받을 것이다.’

즉 욥은 자신의 결백을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감찰해보시기만 한다면 순금처럼 깨끗하다는 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다음은 본문의 의미가 잘 드러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새번역> :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공동번역개정> : “그런데도 그는 나의 걸음을 낱낱이 아시다니.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

그렇다면 욥기 23:10이 오랫동안 오해되어 널리 퍼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요절중심 성경읽기의 폐해 중 하나이다. 요절중심 성경읽기란 성경본문을 문맥의 흐름 가운데 파악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한구절만 떼어 적용하는 접근법이다. 이 영향으로 욥기 23:10이 문맥에 호응하지 않는 점을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지나쳤다.

또한 욥을 처음부터 시종일관 의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번역이 지닌 문제점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욥기 23:10은 훌륭한 신앙고백을 보여준 욥이 의인이라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 자신이 옳다고 강하게 따지는 불손한 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으로 욥기 23:10의 바른 해석을 정리하였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약간의 고민이 있다. 주변에 욥기 23:10에 의지하여 고난을 극복한 분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연단하시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욥기 23:10의 내용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인내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귀한 구절의 의미가 번역에 의한 오해라고 한다면 혼란스러운 점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살아가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육하시는 과정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 대한 근거구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 염려된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 대한 내용이 전반적인 성경 내용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련을 통해 인간을 연단하신다는 신학은 변함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연단과 성장이라는 의미를 대표하는 욥기 23:10을 대체할 구절을 소개하려 한다. 그 내용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구절은 시편 66:10~12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시 66:10~12).

하나님의 연단으로써의 시련이 인간에게 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보다 풍부한 곳으로 이끄셨다는 내용이다. 암송하기에는 조금 길어서 접근성이 약하지만 찬송을 만드시는 분들이 곡으로 만들어 불리우고 가르치는 분들이 욥기 23:10의 내용을 대체해서 교육하면 좋을 듯하다.

오늘은 욥을 의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구절 중 하나인 욥기 23:10의 오해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음 시간에는 욥이 메시아를 암시하는 듯한 욥기 16:19을 살펴보려 한다. 계속해서 함께 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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