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년 목사] 나의 친구 나의 연인(아 1:9-17)
[김병년 목사] 나의 친구 나의 연인(아 1:9-17)
  • 김병년 목사(다드림교회)
  • 승인 2019.03.19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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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리디 살베르는 프랑스 작가입니다. 이 작가가 쓴 관능수업이란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쓴 동기는 ‘성행위의 즐거움’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 중에 정치인들을 성행위를 하기에 아주 부적절한 부류로 묘사합니다. 정치인들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소홀하게 대하는 히스테리한 환자나 가능하지 인격적인 사람들과 사랑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치인들의 삶에 있습니다.

그들은 “신출귀몰하여, 끊임없이 이동하고 분주합니다. 남을 속이고, 박수갈채를 너무 좋아합니다”. 즉 이들의 삶은 연인에게 집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사랑이라는 이름을 이용할 뿐입니다. 사람의 감정을 무시하고 인격적인 관계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발정해소’만 할 뿐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인만 분주하고, 남을 속이기 좋아하고, 박수갈채를 받으면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아갑니까? 아닙니다. 현대인들의 삶이 그러합니다. 분주하고, 이동이 잦고, 끊임없이 인정에 목말라 하며 살아갑니다. 사랑할 줄 모르는 삶을 살아갑니다.  

리디 살베르의 책을 구입하게 된 이유는 제목보다 번역자인 백선희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 책을 구입하였습니다. 아가서보다 더 성적인 행위를 묘사하는 책이지만 번역자인 선생님이 말 때문입니다. “포르노그라피는 오직 자신의 성적인 흥분만을 유발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다른 사람의 감정에 무관심 합니다."  

이 한마디에 포르노그라피의 외설적인 만큼이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무관심하고 자신의 감정만 흥분하는 이기적인 사랑의 행위를 경계 하여야 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존중합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자신의 쾌락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키우는 것이 하나님이 감각 기능을 주신 목적입니다. 

아가서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이 없는 기쁨은 파괴적이지만 올바른 관계안에서 누리는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가르칩니다. 기쁨을 키우려고 애쓰는 사람은 쾌락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만 사랑을 키우려고 애쓰는 쾌락은 풍성함을 더합니다. 우리 시대가 배워야 하는 성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 전부를 사랑하게 됩니다. 

언젠가 구세군 청년연합수련회에 가서 청년들에게 물었습니다. 형제들과 자매들에게 자신은 이성에 호감을 가질 때 신체의 어떤 부분을 먼저 보냐고 했습니다. 자매들의 경우 생각보다 어깨선을 많이 본다고 했습니다. 형제들은 대부분 눈매와 가슴 그리고 엉덩이였습니다. 저의 경험으로 봐도 형제들은 비교적 정확하게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신체가 호감을 갖는 출발점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사랑의 전부 일 수는 없습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전부를 좋아합니다. 

결혼의 조건을 일반화 시키는 것은 위험합니다만 남자든지 여자든지 대체로 외모를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오히려 점점 더 외모를 보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강단에서 “중심을 보라”고 외치는 설교자도 외모에 먼저 이끌립니다. 그러면 외모에 이끌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외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지만 외모로도 이끌리지 않는 사람과 평생을 살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결혼하신 분들은 지금 사는 배우자의 외모에 처음부터 이끌렸든지, 나중에 이끌렸든지 배우자의 외모에 이끌렸기 때문에 결혼했을 것입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하는 한 가지는 호칭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때는 ‘라야티’라고 합니다. 9절에 ‘내 사랑아’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를 부를 때는 ‘도티‘로 ’나의 사랑하는 자‘로 번역하였습니다. 13,14절의 화자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이 구절은 ‘도티’입니다.

12-14절은 여자가 하는 말입니다. 9-11절은 왕이 여자에게 이끌립니다. 외모에 이끌린 왕이 고백하는 노래를 보십시오.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왕은 사랑하는 연인의 머리털과 목젖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심지어 은과 금으로 그 연인을 꾸며주고 싶습니다. 

저자를 솔로몬 왕으로 한다면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연인을 ‘바로의 전차 부대의 암말에 비유합니다’. 말과 사랑하는 여인을 비교하는 것은 우리의 정서상 무리가 있습니다 마는 하나님의 전심이라는 책을 쓴 앨런 데이비스는 이 구절을 “당신은 강한 남자를 미치게 합니다”로 의역하였습니다. 대단한 성적인 매력을 지닌 술람미 여인입니다. 금과 은으로 만든 꾸러미를 달아주고 싶어합니다. 

연인이 왕의 향기에 취합니다. 남자도 여자의 몸에서 나는 향기에 취했습니다. “나의 나도향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라고 노래합니다. 남자가 여자의 몸에 바른 향기에 반했습니다. 여자의 옷에 뿌린 향기에 취했습니다. 

13-14절은 대단히 애로틱한 장면입니다. 우리 성경은 ‘내 품 가운데 몰약 향 주머니’요 라고 번역해서 그 의미를 그리지 못했습니다. ‘내 품’이라는 원래 뜻은 밤에 연인의 가슴에 몸을 기대어 쉬고 있는 모습입니다. ‘엔게디 포도원안에 핀 야생화’도 아주 에로틱한 언어입니다. 엔게디는 작은 우물로서 오아시스입니다. 우물이 연상하는 성적인 표현이지요. 몸에서 나는 향기와 그 품을 사랑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영혼만이 아니라 전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없는 영적인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전부를 품습니다. 그러나 성행위만 사랑하거나, 하늘과 땅을 분리하거나, 남자와 여자를 분리하는 모든 이분법적인 사랑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만 없다면.... 사랑할 수 있는데’. 혹시 여러분 가라지 비유를 아십니까. 예수님의 비유중에 가라지 비유가 있습니다. 천국의 씨를 뿌렸는데 밤에 와서 원수가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나중에 자라서 보니 곡식이 아니라 가라지였습니다. 종들이 뽑으려고 하자 주인이 말씀하십니다. 뽑지말라고. 그러다가 알곡도 다친다고. 가라지 비유의 핵심은 심판의 날까지 인내하고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것만 없으면...사랑하기 쉬웠을 텐데’라고 했던 것들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줍니다. 

 

2. 사랑은 단순함의 극치를 이룹니다.  

사랑을 하면 단순함이 극치를 이룹니다. 사랑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15절). 이 문장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원문 그대로 번역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너를 보라, 이쁘다, 나의 사랑아 너를 보라 이쁘다 너의 눈은 비둘기다”. 이 구절에서 제일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보라 이쁘다, 보라 이쁘다입니다. 

사랑하면 단순반복을 해도 즐겁습니다. 보라. 이쁘다. 보라 이쁘다. 엄마가 밥을 늘 같은 마음으로 밥을 지어주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단순함은 지루함이 아닙니다. 자식을 향한 사랑입니다. 보라. 내 새끼 이쁘다고 합니다. 단순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을 하고, 반복적인 일을 견디는 단순함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반복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크리프트, p.121인용)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든지, 동물을 사랑하던지, 식물을 사랑하던지 다 같습니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유기견을 보면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단순함은 오직 대상이 하나뿐입니다.  15절은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너를 보라 이쁘다. 나의 사랑아 너를 보라 이쁘다 너의 눈은 비둘기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아가서에서 비둘기는 2:12에 처음 나타납니다. “비둘기 우는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 구나”. 봄이 온 소식을 전해주는 소리입니다. 만물이 소생하고 즐거운 소리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눈을 생기 돌게 합니다. 사랑으로 충만한 눈은 절대로 허물거리지 않습니다.

아가서 4:1은 비둘기를 ‘어여쁘고 어여쁘다’고합니다. 심지어 5;2절에 보면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라고 칭송합니다. 6:9에는 ‘내 비둘기, 내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라고 말합니다. 즉 아가서에서 비둘기는 사랑할 오직 유일한 대상을 의미합니다. 

명지대 심리학과 김정훈 교수님이 쓴 책 중에 ‘나는 나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한 가지 심리적인 남녀의 차이를 말씀하시면서 남자들은 얻지 못한 사랑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남자들의 마음에는 방이 99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방에 모든 여자로 채운다고. 그 빈칸에 여자로 채우는 것이 남자라고. 아 남자들은 골치 아픈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기 아가서에 이상적인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마음에 그녀뿐입니다. 그녀만으로 만족합니다. 보라 이쁘다. 내 사랑아 이쁘다고 무한 반복하는 남자입니다. 

단순함에서 진정한 즐거움이 나옵니다. 16절은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16절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늘 푸르고”로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감을 살려서 번역해 보면 “너를 보라 이쁘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진짜 즐겁다. 진실로 우리의 침상은 푸르다”. 여자가 남자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진짜 즐겁다”. 여자가 말하는 두 번째 말의 이쁘다는 즐겁다는 말입니다. 

사랑을 하면 진정한 즐거움이 나옵니다. 참된 기쁨은 대상의 명료함에 누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으로 만족할 때 우리에게는 기쁨이 넘칩니다.  이 얼마나 단순합니까. ‘진짜 기쁘다’. 이 한마디면 끝나는 것이죠.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무척 단순해집니다.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지루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 사람을 사랑합니까?’라고 백번을 물어도 답은 동일합니다.

“사랑합니다, 죽도록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지요. 왜냐구요. 즐거워서요. 즐거움은 사랑이 주는 선물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영혼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전체가 반응하는 사랑입니다. 몸이 반응합니다. 감정이 반응합니다. 생각이 반응합니다. “인생에 단 한번 오직 그 사람만 보이는 순간이 있다”(언어의 온도, p.178 인용). 사랑은 언제나 반복일 뿐 아니라 즐거움 자체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단 한번 그 한순간에 집중하는 관계가 아니라 영원히 그분을 즐거워하고 그분에게 집중하고, 그분은 우리를 향하여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모습입니까. 

 

3. 사랑은 ‘우리’를 동등하게 합니다. 

여자가 남자를 부를 때 나의 사랑하는 자는 히브리 말로 ‘도띠이‘입니다. 가장 일반적이고 애매한 모든 경우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때는 ‘라야티’입니다. 우리 성경은 9절에 ‘내 사랑아’, 15절에 ‘내 사랑아’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라야티는 5;16절에 여자가 남자를 향하여 그렇게 부른다. 

연인을 친구라고 부르는 것은 동등성과 상호성을 강조합니다. 이 동등함과 상호성을 나타내는 방법이 바로 대화입니다. 대화는 서로를 존중하고 상대방을 받아들일 때 나타납니다. 대화하는 것은 동등함의 표현입니다. 동등함을 다르게 표현하면 서로를 보충하는 존재입니다.

‘돕는 자’로서 자리매김을 하는 창세기의 인간관계가 분명하데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보완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왕이든지, 누구든지 다 같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도움 받지 않는 존재는 없습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도움 받지 않고 설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입니다. 

상호성은 2:16에 말씀처럼 “내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우리를 하나되게 합니다. 서로에게 속한 자입니다. 이 동등함은 자신안에 있는 건강함에서 나옵니다. 왕이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바로의 군대를 이끄는 말에 은유했습니다. 말 은유는 당당함입니다.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6:10)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하구나”(6:4). 

즉 연인은 사랑해서 당당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당당한 사람입니다. 자존감이 아주 높습니다. 왕이 사랑해주니까 우쭐거리며 거들먹거리는 그런 여자가 아닙니다.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전부터 자신을 사랑하고 당당한 사람입니다. 창조 안에서 자신을 수용할 때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를 이룰 때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사람만이 모든 사람과 동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21세기 남녀상이 있습니다. “온유한 남자, 당당한 여자”. 이것이 아가서에 나오는 남녀의 모습입니다. 왕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여자가 바로 아가서의 연인입니다. 우리교회에는 온유한 남자들이 많고 당당한 여자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제 자신도 남자들 축에서 어느 정도 수준으로 안내를 사랑한다고 하는 축에 들었지만 어느 날 이분이 오시면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애 둘의 산후조리를 다해주는 남자!. 그가 진정한 남자였습니다. 

 

나가며 – 사랑은..... 

15절 “너를 보라, 이쁘다, 나의 사랑아 너를 보라 이쁘다 너의 눈은 비둘기다”.
16절 “너를 보라 이쁘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진짜 즐겁다. 진실로 우리의 침상은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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