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피트리(Brant Pitre)의 『성만찬의 신비를 풀다』
브랜드 피트리(Brant Pitre)의 『성만찬의 신비를 풀다』
  • 박성원 기자
  • 승인 2018.07.07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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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다!

 

어느 신학도가 본 브랜드 피트리(Brant Pitre)의 『성만찬의 신비를 풀다』

: 기독교 신앙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다!

 

브랜트 피트리(Brant Pitre) 교수의 “Jesus and the Jewish Roots of the Eucharist: Unlocking the Secrets of the Last Supper” 라는 책이 『성만찬의 신비를 풀다』라는 제목으로 2016년 7월 에클레이시아북스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간됐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성만찬이 1세기 유대교적 관점에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함을 피력한다. 각 단락에서 논의되는 주제들은 성경에 대한 구속사 신학(history of redemption theology) 내지 언약 신학(covenant theology)의 충분한 신학적 지식이 요구되지만, 저자는 그런 장벽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는 매력 발산으로 허물어뜨린다.

 

제1장 마지막 만찬의 신비(THE MYSTERY OF THE LAST SUPPER)

저자는 예수는 역사적 유대인이었기에 “그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1세기 유대적 배경과 상황”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언급한다. 이런 점에서 유대민족의 메시아가 유대교 율법을 위반하는 말 곧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는 충격 선언 또한 고대 유대인의 믿음과 소망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복음서 기자들의 메시지들이 1세기 사회적-문화적 정황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성경해석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적 상황속에 주어졌다는 해석의 전제를 깔고 있다. 이러한 해석학적 작업을 통해 시공간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해석학적 작업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2장 유대민족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나?(WHAT WERE THE JEWISH PEOPLE WAITING FOR?)

저자는 유대 성경과 고대 유대교 문헌에 의하면, 대다수 “1세기 유대민족은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아만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큰 존재 즉 새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를 기대했다고 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새 모세로 인해(신 18:15-18; 참고. 3, 4세기 랍비 베레키아[Rabbi Berekiah, Ecclesiastes])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체결되기를 소망했다(렘 31:31-33). 이 언약의 절정은 천상의 연회이며(출 24:11), 거기서 의인들은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 먹고 마시는 천상의 식사를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Babylonian Talmud, Berakoth 17a). 그리고 영광스러운 새 성전이 세워질 것을 기대했고(미 4:1-2; 사 56:6-7 ;60:1-7; 겔 37:24-28 ;학2:6-9, 참고 성전 두루마리[Temple Scroll]), 하나님은 그 곳에서 경배를 받으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장차 올 세상”)의 일부일 약속된 미래의 땅(사 65:17-18; 66:18, 20, 22)으로 들어갈 것을 소망했다고 한다(사 43:18-19; 계21:5). 그리고 저자는 1세기 당시 유대인들에게 새 출애굽의 사상이 광범위 하게 펴져 있었고(드다, 이집트인 / Josephus, Antiquties 20:97-98; Josephus, Antiquties 20:169-170), 예수님은 “새 출애굽의 징조인 기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이사야가 예언한 새 출애굽의 신호이며(사 35:5-10, 참고. 마 11:4-6; 눅 4:18-19), 구원을 전하는 메시아 전령”임을 선포하셨다고 한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새 출애굽을 자신의 죽음으로 성취하시는 분이다(눅 9:28-31).

 

3장 새 유월절(THE NEW PASSOVER)

저자는 위의 “새 출애굽이 일어나려면 새 유월절도 함께 일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이 마지막 만찬의 수수께끼를 푸는 첫 열쇠이며 이를 위해 유월절의 성경적 뿌리를 우선적으로 살핀다. 고대 유대교 유월절에는 “흠 없는 어린 양 수컷”을 취해(출 12:1-6), “제물로” 드려(출 12:6), 그 “피를 이스라엘 각 집의 문 인방과 문설주”에 뿌렸으며(출 12:7), 그 후 “어린 양의 고기를” 무교병과 함께 먹었다(출 12:8-12). 유월절은 매년 ‘기념일’로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이다(출 12:24-28).

그러나 저자는 예수님 당시 유월절의 모습은 고대 유대교 유월절의 모습과의 차이점 네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장소로 관련된 것으로 예수님 당시 유월절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의 집전에 의해 드려졌다(신 16:5-7, 참고. Josephus, War 6:423-27). 둘째 1세기 유월절 어린 양은 성전에서 제물로 드려졌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혔다”. 셋째,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첫 출애굽을 기념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그것을 현재화했다(출13:8, 참고. Mishanah, Pesahim 10:5). 넷째, 유대인들은 유월절 축제를 메시아 시대 도래, 구원의 시대와 연결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밤에 메시야가 도래할 것이고, 그가 자기 백성을 속량할 것이다. 즉 메시아의 유월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Jerome, Commentary on Matthew 4 on 25:6).

유대교의 믿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유월절 밤에 시행했고,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식사를 했다(마 26:17-19; 막 14:12; 눅 22:14-15). 이 식사에서 떡의 의미를 설명하고(출 12:26-27, Mishnah, Pesahim 10:5), 마지막은 찬양을 부르는 것으로(대할렐[Great Hallel], 시편 118편, 마 26:30, 막 14:26) 마무리했다는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교 유월절 식사와 달리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집행자 역할을 하셨고, 어린 양의 살과 피가 아닌 자신의 살과 피를 제물로 드리신 것이다.

저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내가 바로 새 출애굽의 새 유월절 어린 양이다. 오늘이 메시아의 유월절이며 내가 새 제물” 자기 이해를 가지고 계셨음을 말한다. 그리고 유월절 제사의 완성은 첫 출애굽의 유월절과 마찬가지로 어린 양의 고기를 먹는데 있다고 한다. 다만 중요한 차이는 새 유월절의 어린 양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점이다.

 

4장 메시아의 만나(THE MANNA OF THE MESSIAH)

저자는 성만찬의 신비를 푸는 두 번째 열쇠로 만나와 마지막 만찬 사이의 연관성을 조사한다. 구약성경을 통해 만나의 다양한 의미를 언급하는데 만나는 “하늘에서 온 기적의 떡”(출 16:4-5, 11-15, 참고. 시 78:23-25, 29; 솔로몬의 지혜서 16:20-21)이며, 이중의 기적(하늘에서 온 떡과 하늘에서 온 고기, 출 16:12) 선물이었다. ‘거룩한 성막’에 두고 보존하며 그것을 ‘보게’ 하였고(출 16:32-34),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의 맛보기(출3 :8)였다고 한다.

후대 유대교 전통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새 출애굽을 개시할 메시아를 보낼 때 이루실 일을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 중 하나였다고 한다. 성경 밖의 고대 유대교 문헌의 의하면, 고대 유대인들은 만나가 태초로부터 존재했다(만나의 선재, Targum Pseudo-Jonathan on Exodus 16:4, Targum Pseudo-Jonathan on Exodus 16:15). 하늘 성전안에 영원히 보관되어 있으며(Babylonian Talmud, Hagigah 12b), 새 모세인 메시아가 도래할 때 그쳤던 만나가 다시 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2Baruch 29:3, 6-8).

이러한 유대인의 소망을 예수님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요한복음의 생명의 떡 담화(요 6:53-55)의 배경은 ‘새 모세의 도래’ 와 ‘하늘에서 온 만나의 재개’ 라는 유대인의 소망과 관련된다 한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성찬 전례에 자신이 실제로 현존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예수님의 살을 하늘에서 온 만나와 동일시한다고 한다. 출애굽의 옛 만나가 하늘에서 온 초자연적인 떡이었다면 메시아의 만나 또한 하늘에서 온 초자연적인 떡이어야 한다고 한다.

예수의 신비로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 즉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의 신비와 부활의 신비를 제시한다(요 6:61-64). 예수님이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의 형태로 자신의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오직 그 분의 신적 정체성(막 2:5-10; 마 10:22-33)과 신적 권능이란 신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요 6:55).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일어날 그 분 몸의 부활과 승천의 신비이다.

예수님께서 성찬 전례에서 먹으라고 한 몸은 죽은 몸이 아니라, 생명의 영으로 ‘부활한 나의 육체’인 것이다(요 6:53-55). 저자는 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는지에 대해 ‘생명’의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한 몸이 지닌 ‘생명’에 동참하고 싶다면 그 분의 몸과 그 분의 피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은 ‘하늘에서 온 새 만나와 예수님의 부활한 몸 사이의 관련성을 파악해야 예수께서 그 분의 피를 마시라는 놀라운 명령이 설명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피를 마시는 행위를 금지하신 이유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분의 피를 마시라고 명령하신 이유와 동일하다”

 

5장 진설병(THE BREAD OF THE PRESENCE)

저자는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을 ‘새 유월절’과 ‘하늘에서 온 새 만나’ 로 보셨을 뿐만 아니라, 진설병의 메시아적 성취로도 보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구약성경의 진설병(“Showbread”)을 금상 위에 놓여져 있는 것으로(출 25:23-24, 29-30), 그 옆에 관제(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음료 제사)를 붓기 위한 ‘병과 잔’이 있었기에 “진설의 떡과 포도주”로 부르며, 이것은 신성한 식사로서 붓는 것이 아니라 마셔야 했다고 한다.

아울러 진설병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표이며 신호였다. 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영원한 언약의 증표이고(레24:5-8), 성막에서 여호와 앞에 지속적으로 있어야 할 ‘영구한’ 제사이다. 중요한 것은 진설병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제물이고, 또한 가장 거룩한 제물로써 안식일 마다 드려져야 했으며 이스라엘 예배의 핵심이었다고 한다.

고대 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진설병은 멜기세덱이 드렸던 ‘태고의 제물’이고(Genesis Rabbah 43:6), 예수님 당시에는 진설병이 제물로 ‘금상 위에 드려질 때 기적적인 일’이 벌어진다고 믿었다고 한다(Babylonian Talmud, Yoma 39a). 그리고 예루살렘 제사장들은 유대 순례자들에게 성소에 있는 진설병을 외부로 가져 나와서 높이 쳐들고 “보십시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라고 외쳤다(Babylonia Talmud, Menahoth 29a).

이것은 진설병이 영원한 언약의 가시적인 증표이며 신랑이신 하나님이 신부인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표였다. 이렇게 보여줌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누리게 된다(출 34:23; 23:17).

이런 구약과 유대교 전통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과 새 진설병을 연결시킨다. 저자는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는 행위 논쟁(마 12:1-6)에서 레위계열의 제사장 제도가 아닌, 멜기세덱과 다윗(시 110:1-4)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제사장의 또 다른 계보를 언급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새 성전이며 그 성전안에 현존하는 진설의 떡과 포도주로 이해했고, 중요한 것은 저자는 마지막 만찬을 - 새 유월절을 넘어 - 예수님께서 새롭게 현존하는 떡과 포도주 즉 예수님 자신의 임재를 가리키는 떡을 제정하는 행위이다고 한다.

이렇게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의 현존의 신비는 그 분의 신적 권위와 신적 정체성이라는 신비와 연관되어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선지자 이상의 존재이며 하나님의 신적 아들이라면, 그 분이 제정하는 새 언약의 새 떡과 새 포도주는 단순한 상징이 아닌, 실제적으로 현존하는 기적의 떡이 된다고 한다.

 

6장 네번째 잔과 예수님의 죽음(THE FOURTH CUP AND THE DEATH OF JESUS)

저자는 마지막 만찬에서 유월절 식사를 마무리하지 않은 것과 갈보리 십자가 처형 사건의 관계를 살핀다. 예수님의 유월절 식사는 평범한 유대교 유월절 식사 형태와 유사하게, 네 잔의 포도주를 마심으로 루어졌다. 그러나 유월절 식사 직후 마셔야 할 네 번 째 잔 있음에도 하나님 나라가 오기 전까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맹세와 마태와 마가 모두 네 번째 포도주 잔을 마시는 의식 언급이 부재한 것으로 보아, 저자는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실제로는 마무리하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겟세마네 기도에서 찾는다. 겟세마네 동산 기도에서 자신의 죽음을 잔을 마시는 것으로 비유하신다(마 26:36-46). 조금 전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의 몸을 새 유월절의 제물로, 포도주 잔 가운데 하나를 자신의 피로 규정하셨다. 예수님은 성만찬 제정 말씀과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유대교 유월절 식사와 연결하신 것이다. 식사가 종료되고 마지막 잔을 마시면 그것은 자신의 죽음 왔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네 번째 잔을 마시지 않고 마지막 만찬을 끝내신 이유이다. 그 후 네번째 잔은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 루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직전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마실 음료를 직접 요청하셨고 건네 받은 신 포도주를 마셨고 후에 “다 루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유대교 유월절의 네 번째 잔을 마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순간까지 유대교 유월절의 네 번째 잔 마시기를 기다리심으로써 마지막 만찬을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하나로 묶으셨다. 떡과 포도주의 형태로 자기 자신을 준 행위를 갈보리에서 자신을 드린 행위와 연결하신 것다. 그 결과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통해 십자가를 유월절로 변화시켰고 십자가를 통해 마지막 만찬을 제사로 변화시켰다고 하며, 마지막 만찬과 십자가 처형 사건을 유대교 식사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 자신 두 사건을 단일한 제사로 이해했음이 분명해진다고 한다.

 

7장 기독교 신앙의 유대적 뿌리(THE JEWISH ROOTS OF THE CHRISTIAN FAITH)

저자는 예수님의 성만찬의 유대적 뿌리에 관한 내용을 재언급함으로, 기독교 신앙이 유대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예수님은 고대 유대인들의 메시아의 새 출애굽과 메시아의 새 유월절의 소망을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 만찬은 그것들의 성취로서 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는 어린 양의 살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살 즉 성육신하신 신적인 말씀의 살을 먹으며 파스카 유월절을 지켰다.

저자는 유대교 유월절과 기독교 성만찬 사이의 연관성은 『카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의 가르침에도 핵심에 해당하는 내용이다고 한다. 저자는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서 성취될 새 유월절을 예상하셨고(CCC 1339-1340), 유대교 유월절의 세 번째 잔과 마지막 만찬의 잔, 겟세마네의 잔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마신 잔 사이의 연관성도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CCC1334)을 언급한다. 이를 통해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신약성경과 사도적 전통 그리고 초기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토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을 하늘에서 온 ‘새 만나’로 설명하셨음을 상기시키며 성만찬은 유월절 식사를 넘어 ‘기적’ 또는 초자연적인 식사로 본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성경(요6; 고전 10:1-3, 16; 계 2:17)과 초기 교회의 교부의 글(Tyconius, Commentary on the Apocalypse, 2:17, 어거스틴 요한복음 주석 “Tractate on John, 26:13) 역시 성만찬을 하늘에서 온 만나라는 고대의 기적을 성취하는 사건으로 이해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현대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CCC1094)도 신약 성경과 초기 교회 교부들의 증언과 연속성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성만찬 제정 때 제자들에게 주신 떡은 특정 내용 즉 새 출애굽, 새 유월절, 만나의 기적을 가리키는 신호만이 아니라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신호로 보셨다고 한다. 실제 예수님은 그 떡을 자신의 개인적 현존으로 이해하셨다. 그리고 그 떡은 단순한 현존의 떡 정도가 아니라 얼굴의 떡 즉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얼굴’이 이 땅에 드러난 가시적인 증표이다. 이러한 신비한 현존의 떡이라는 개념은 신약성경(마 12:1-8; 막 2:23-28, 눅 6:1-5; 히 9:1-3)과 초기 교회 교부들의 저작에서 연속적으로 나타난다(Origen, on Leviticus 13; Saint Cyril, Catechumens(그리스도인 세례 예비자들에게 주는 가르침)).

오늘날 카톨릭 교회는 성만찬의 신비를 예수님의 진정한 현존이란 표현을 사용한다(CCC1374-75). 예수님의 성만찬이(그리고 그 이후 모든 성만찬이) 단순한 증표가 아닌 기적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카톨릭교회는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성만찬의 떡을 들어올림으로써 신자로 하여금 그 떡과 포도주의 겉모습 아래 숨겨진 메시야의 얼굴을 묵상하게 한다.

출애굽 당시 제사장들은 모세의 성막과 나중의 성전에 현존의 떡을 보관했듯이 카톨릭교회는 예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새 떡을 보관한다고 한다. 요약하면 카톨릭교회는 예수님이 성만찬에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가르침을 통해 정통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믿어 왔던 내용을 다시 진술했을 뿐이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카톨릭교회와 함께 성만찬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천이지 정수”(CCC1324)라고 말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다.

 

8장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ON THE ROAD TO EMMAUS)

저자는 성만찬과 육체적 부활의 관계를 설명한다. 저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은 유대교 소망의 성취이며, 예수께서 성만찬을 - 십자가에서 죽을 그의 육체적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 그의 육체적 부활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죽으시고 다시 살아난 예수님의 몸과 살을 먹고 마셔야 하는 것이며, 마지막 만찬 때의 명령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성취되었다고 한다(눅24:13-24).

또한 떡을 뗀 후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자 예수님 사라진 이유에 대해, 그 때부터 예수님은 그들 곁에 현존하는 방식 즉 승귀 후 더 이상 인간의 외양으로 그들 곁에 계시지 않고 오직 성만찬의 떡의 모습으로만 현존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원했기 때문이다고 한다. 그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귀하신 예수님은 천상의 보좌에서 세상의 제단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부어주심으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은 그 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된다고 한다.

 

글을 갈무리하며

저자는 마지막 만찬의 신비한 말씀이 유대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 하며, 그것을 풀기 위해 구약성경으로 소급해 올라간다. 이것은 신약성경 저자들의 신적 계시가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되어 그리스도에게 절정을 이루게 되는지 그 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저자는 메시아 예수께서 새 유월절의 어린 양, 하늘에서 내려 온 기적의 만나, 성전안에 드려질 신비한 진설병 등유대인의 예배 신앙과 미래 소망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마지막 만찬의 신비를 심오하면서도 간명하게 풀어낸다.

이 과정에서 고대 유대교에서부터 시작하여 1세기 유대교와 예수의 부활 승귀 이후, 초기 기독교 시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시대의 다양한 역사적 – 사회적, 종교적 세계관 – 자료들을 제공한다. 이렇게 저자는 본문 뒤에 숨어있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습과 세계관을 드러내어 줌으로써 그에 대한 사전적 지식이 부족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역사적, 신학적 학습에 도움을 제공하며, 또한 그것으로 인해 페이지를 넘기는 즐거움 또한 배가시킨다.

저자는 고대 유대교의 제의적인 의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메시아적 사역 특히 영원한 언약의 피흘림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구속사적 성취를 보여준다. 이러한 약속과 성취라는 성경해석의 관점과 방법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의 측면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저자는 예수의 성만찬에 대한 고대 유대교의 전통과 해석을 연속적으로 이어가지만, 종속되거나 제한받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고 확장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유대교 유월절 어린 양의 제사가 갈보리 십자가 처형으로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십자가 죽음 사건은 유대교 유월절 제사의 완성이며 동시에 종결을 의미한다. 또한 과거 유대교 유월절을 회상하는데 머물지 않고, 미래의 새 출애굽의 시작을 보여주고 알리는 신호탄으로서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네번째 잔의 미완의 모습을 겟네마네 기도(마26:36-46) – 몰약의 포도주를 거부하신 예수님(마27:31-36; 막15:23) – 신포도주를 마시고 운명하신 예수님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완성시키는 작업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여기서 필자는 저자에게 엄지척을 치켜 세우고 싶다.

이러한 저자의 학자적 열정과 통찰력은 성만찬의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뿌리를 캐내어 보여줌으로써 피상적이며 편협한 성만찬 이해를 성찰하게 하고, 보다 깊고 넓은 이해를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학문적 공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것이 무의미하게 습관적이며 반복적인 예전의식에 취함으로써 매너리즘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임재하며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고 누리라며 초대한다는 점에서 실천적 공헌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본서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13-22p), 자신은 카톨릭 신학자로서 성찬 전례에 “예수의 실제적 현존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주장에 오히려 놀란다. 물론 저자는 ‘화체설’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지만, “현존”, “기적”, “예수의 신적 정체성” 그리고 포도주 보다는 “떡”(몸)에 집중하여 설명함으로 ‘화체설’ 로 본서의 결론을 이끌어간다. 그리고 성만찬의 실제적 현존이라는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신약성경과 초기 교회 교부들의 증언과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주석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다수의 신약학자들은 성만찬 제정 본문의 “이것은 내 몸이다(tou'tov ejstin to; sw'mav mou)” 에서 “…….이다(ejstin, is)”에 해당하는 아람어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동의한다.[1] 이런 점에서 신약성경 주석가들은 떡과 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보다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한다(또는 “이것은 내 몸을 나타낸다)”고 해석하는 것을 선호한다.[2] 그의 학문적 작업은 논리적이며 타당성 있게 다가오지만, 그럼에도 필자가 고수하고 있는 개혁적이며 복음주의 계열의 신학적 입장과 필자 자신의 일천한 신학적 지식으로는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든 부분이 존재한다.

본서는 성만찬의 신비를 풀기 위해 유대적 뿌리를 찾는 목적에 충실하기에 성만찬의 신학적 함의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첫번째는 교회론의 측면에서 그렇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성만찬을 통해 그의 한 몸에 참여하고 연합되는 사실(고전 6:12-17; 엡 1:22-23; 4:15-16; 5:23; 골 1:18; 빌 1:20), 두번째는 성만찬의 종말론적 의미와 함께 선교적 또는 복음전파적인 측면도 함께 언급되었으면 좋을 듯 하다.

주의 만찬의 목적은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선포하는데 있다(고전 11:6).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에서 베풀어 질 궁극적 승리의 메시아 잔치를 미리 보여주며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미래 하나님 나라의 영생 향유를 확인시켜 주며, 더 이상 종말론적 긴장을 가지지 않고 안주하게 만드는 개인적 ‘정신 승리’의 방편이 아니다. 따라서 새 언약 백성으로의 첫 번째 부르심에 대한 은혜는 ‘이미와 아직’(already and not yet) 사이의 긴장속에서 ‘많은 사람’을 새 언약 백성으로 편입시키는 두 번째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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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놀랜드는 존 놀랜드, 『WBC성경주석: 누가복음 하』, 김경진 역 (서울: 솔로몬, 2004), 333에서 예수의 말씀들은 아람어로 표현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형태는 당시에 통용되었던 아람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공관복음과 고린도전서의 성만찬 제정 본문에 대한 가장 원래적 형태와 구조에 대해서는 놀랜드, 『WBC성경주석: 누가복음 하』, 330-40을 참고하라.

[2] 크레이그 에반스, 『WBC성경주석: 마가복음 하』, 김경진 역 (서울: 솔로몬, 2004), 618.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Vincent Taylor, Jesus and His Sacrifice - A Study of the Passion Saying in the Gospels, (Oxford: Whitaker Press, 2007), 122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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