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요셉 목사] 부르족 사람들(5) 의리의 남자, 오웅아 제이콥
[권요셉 목사] 부르족 사람들(5) 의리의 남자, 오웅아 제이콥
  • 권요셉 목사
  • 승인 2019.03.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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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선교사의 치유적 글쓰기
교사 교육중인 청년들. 빨간 쳐츠가 오웅아 제이콥.
▲교사 교육중인 청년들. 빨간 셔츠가 오웅아 제이콥.

"오웅아. 오웅아." 오웅아가 자기 이름을 소개한 대로 따라 말했지만 내가 한 발음이 틀린 발음이었는지 모두 깔깔대며 웃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하자 비난슈는 내가 부르기 좋도록 그에게 제이콥이라는 이름을 만들어주었다. 처음에는 왜 맘대로 이름을 짓냐고 따졌지만 비난슈가 좋은 이름이라고 설명해주자 오웅아는 제이콥을 자기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좋아했다.

그러자 다른 청년들도 비난슈에게 영어 이름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비난슈는 각각의 청년들에게 영어 이름을 만들어주었다. "존, 존, 존." 존이 너무 많았다. 여자는 모두 에스더 아니면 그레이스였다. 그레이스가 넘쳐났다. 비난슈도 그리 많은 영어 이름을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영어 이름을 받은 청년들은 상관없이 자신들의 이름을 좋아했다.

아내는 주일학교를 위해 영어 설교 원고를 작성했다. 주일학교가 끝나고 영어 설교 원고가 바닥에 떨어졌다. 제이콥은 그 원고를 주워들고 비난슈에게 영어 단어를 하나씩 하나씩 배웠다. 제이콥이 시작하자 다른 청년들이 한명 두명씩 영어 설교 원고 주변에 모여들었다. 비난슈는 영어 설교 원고에 있는 단어를 청년들에게 가르쳐주었지만 알아듣는 청년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아내가 청년들을 모아서 영어교육과 주일학교 교사 교육을 시켰다. 청년들은 서서히 훌륭한 주일학교 교사로 성장했다. 그중에서 가장 탁월한 교사는 단연 제이콥이었다. 제이콥은 교사로서의 역할도 훌륭하게 감당했을 뿐 아니라 영어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나를 ‘목사님’이라고 영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사과, 교회, 옷, 종이. 그의 영어 단어 양이 점점 늘었다. 문장으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단어 단어를 연결하며 영어로 의사 표현을 하려고 노력했다.

제이콥은 전 추장의 아들이었다. 제이콥의 아버지는 비록 추장에서 은퇴하고 술독에 빠져 살았지만 명예롭고 부유한 아버지였다. 제이콥은 존경받는 원로의 아들로 부족에서 가장 사랑받는 청년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다 똑같은 집처럼 보였지만 제이콥의 집은 레인메이커(제사장) 다음으로 부유한 집이었다. 다른 집보다 조금 더 컸고 야자수잎으로 만든 지붕이 더 풍성하고 견고했다. 옷도 유엔에서 보급받은 낡은 것이 아니었고 외부에서 구입한 옷이었다.

제이콥은 청년으로서는 첫 번째로 교회에 온 성도였다. 처음부터 내게 호감을 보였고 복음에도 반응했다. 영어로 ‘예스’라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교회 일을 부탁하면 무조건 예스라고 했다. 대나무로 교회 건물을 지을 때도 자원봉사자를 요청하자 제일 먼저 나섰다. 주일학교 교사로도 제일 먼저 지원했고, 성경공부도 제일 먼저 지원했다. 모든 교회 일에 적극적이었다. 성격도 매우 밝고 재밌어서 제이콥이 교회에 있으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오웅아 제이콥
▲오웅아 제이콥

제이콥은 부르족을 사랑했다. 부족 밖으로 나가는 것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단기 선교팀이 부족에 왔다 가고 큰 결정을 내렸다. 단기 선교팀에는 제이콥의 또래 청년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온 자기 또래 청년들이 찬양을 인도하고 연극 공연을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단기 선교팀이 돌아가자 비난슈에게 어떻게 하면 공부하러 갈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비난슈는 우간다의 유엔난민촌 학교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제이콥은 비난슈에게 들은 방법을 곧바로 실행했다. 제이콥의 아버지는 소를 팔아서 우간다까지 가는 여행비용을 마련해주었다. 나도 적당한 수준의 여행경비를 보조해주었다. 그리고 공부에 대한 그의 열정을 격려했다. 그러나 우려되는 것이 있었다. 만약에 제이콥이 남수단에 비해서 상당한 발전을 이룬 우간다를 보고 부족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부족 입장에서는 좋은 인재를 잃어버리는 꼴이었다. 물론 그래도 그 개인을 위해서는 이익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제이콥이 공부를 끝내고 부족으로 돌아와서 부족을 위해 배운 바를 써 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돌아올 거지?”

그의 대답은 매우 확신에 차 있었다.

“네가 여기 계속 있는다면 내가 돌아오는 걸 볼 수 있을 거야.”

우간다로 떠나는 그를 배웅해주고 이틀 뒤 전쟁이 터졌다. 제이콥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우간다에 잘 도착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틀이나 지났으며 국경은 벗어났겠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잘 됐어. 잘 됐다. 정말 잘 됐어.’

나는 제이콥이라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지 않고 우간다로 간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부족 사람들도 제이콥이 전쟁 전에 잘 빠져나가서 다행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교회에 오지 않던 제이콥의 아버지는 오히려 전쟁이 나고 교회에 왔다. 전쟁에서 제이콥을 구해준 제이콥의 하나님을 만나러 왔으리라.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려고 온 건지 아니면 우간다에 있는 제이콥을 지켜달라고 기도하러 온 건지 모르겠지만 그가 교회 온 것이 제이콥 때문인 것은 분명했다.

 

전쟁이 격렬해지자 우리 가족은 남수단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얼마 후 남수단에서 전화가 한 통 왔다.

“헬로? 윌리엄?”

남수단에서 내게 전화할 사람은 윌리엄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의외의 사람이었다.

“요셉!”

제이콥이었다.

“제이콥? 이건 남수단 번호인데? 너 남수단이야?”

“응. 부족으로 돌아왔어.”

“왜? 남수단은 지금 전쟁 중이라고. 몰랐어?”

“전쟁이 났으니까 왔지.”

“다들 빠져나가는데 돌아오면 어떻게 해?”

“돌아와야지. 가족들을 지켜야 하는데. 공부는 전쟁 끝나고도 할 수 있잖아.”

할 말을 잃었다. 전쟁이 나자 나는 그곳에서 나왔고 제이콥은 들어갔다. 이것이 그와 나의 부르족에 대한 생각의 차이였다. 나는 위험해서 나왔고 그는 위험해서 들어갔다. 나는 이방인이었고 그는 가족이었다. 그와 나의 경계가 명백해졌다는 생각이 들며 할 말을 잃고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제이콥이 나를 불렀다.

“My Brother.”

그는 늘 나를 요셉이라고 불렀다. 가끔 윌리엄을 따라서 목사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부른 적은 없었다.

“나의 형제여!”

그는 제법 문법에 맞는 영어로 말했다.

“내가 교회를 지킬게. 나를 잊지 마. 헤헤.”

"Don’t forget me." 제이콥답게 장난스럽게 “Don’t forget me.”라고 명료하게 말하고 헤헤거리며 가볍게 웃었지만 그 말이 내게 너무 묵직하게 다가왔다.

전쟁터에서 나온 내가 전쟁터로 들어간 너에게 형제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 잊지 않는다. 나의 형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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