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원 목사] 욥기는 의인이 받는 고난의 문제인가?(15)
[황대원 목사] 욥기는 의인이 받는 고난의 문제인가?(15)
  • 황대원 목사
  • 승인 2019.04.0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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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타브의 '바이블코어'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황대원 목사
▲팟캐스트 타브의 '바이블코어'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황대원 목사

(2) 하나님의 통치원칙, 보응

하나님을 원망하는 욥의 말을 들은 친구들은 못마땅했다. 욥의 친구들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기를 괜히 태어나게 하셔서 이런 고통을 당한다고 투덜거리는 욥이 달갑지 않았다. 그들 중 한명인 엘리바스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을 행하면 복을 주시고 악을 행하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신다고 믿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과응보’라는 용어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보고 지나가자. 인과응보는 불교에서 기원한 용어이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윤회의 작동원리를 인과응보라고 부른다. 인간이 선과 악을 행한 원인에 따라 해탈하거나 다양한 내생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철학이다.

그러나 인과응보는 불교계에만 존재하는 사상이 아니다. 악을 행하면 망하고 선을 행하면 흥한다는 권선징악의 논리는 역사상 다양한 문화권에서 존재하던 개념이다. 인과응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편적인 사상으로 자리잡았다.

그렇게 인과응보는 우리가 가진 역사적 배경에 종속된 용어이지만 성경에도 인과응보의 개념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잠언 12:21을 보면 “의인에게는 어떤 재앙도 임하지 아니하려니와 악인에게는 앙화가 가득하리라”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의인과 악인이 다른 결과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인과율에 따라 보호를 받거나 보응을 받는다는 인과응보 사상이라 할만하다.

다만 불교에서 인과응보는 자연법칙에 해당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과응보의 가치기준인 공의를 가지고 계시고 보응의 집행자이시다. 따라서 기존에 통용되는 인과응보 사상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과응보 신학과 엄밀하게 다르다.

그렇기에 기독교에서는 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보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보응은 인과에 따라 선악의 대갚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와 유사한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제부터 ‘보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엘리바스의 보응의 신학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말은 다음이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욥 4:7~9).

엘리바스의 주장대로라면 죄를 짓지 않으면 망하지 않고 정직하다면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사람만을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보기에 욥의 비참한 상황은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했다. 그래서 엘리바스는 욥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고 확신했다. 그는 욥기 1:1에서 욥에게 적용되었던 ‘온전’, ‘정직’, ‘하나님을 경외’, ‘악에서 떠남’을 모두 부정한다.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 4:6~8).

엘리바스는 욥이 범죄하여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지만 욥을 아끼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하기에 그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회복하길 바랐다. 그래서 자신 같으면 하나님께 의지하며 간구하겠다고 권한다. 다음은 엘리바스가 욥에게 권하는 말이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욥 5:8).

엘리바스는 인간이 겪는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범죄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다시 바른 길로 이끄시기 위해 벌을 주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욥에게 자신의 현실을 진지하게 돌아보라고 한다. 만약 욥이 죄에서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 충분히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이라고 알려준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7~18).

욥과 세 친구들의 대화를 읽을 때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다. 욥기를 이미 읽어보았거나 욥기 결론부의 설교를 들어 본 사람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두 배의 복을 주시고 세 친구들을 책망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때문에 많은 경우 욥을 긍정적으로 세 친구들을 부정적으로 선입견을 가진다. 그래서 그들이 한 말을 욥은 긍정적인 논조로 세 친구들은 부정적인 논조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없지 않다.

한편 대사에서 읽히는 심리적 해석으로 욥기를 이해하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번역본을 가지고 있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때문에 욥과 세 친구들이 한 말의 뉘앙스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한다면 본문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욥과 친구들의 주장이 지닌 의도와 의미에 초점을 두어야 바른 해석에 보다 가까워질 것이다.

엘리바스가 욥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다면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 그냥 욥이 망하든 말든 내버려두면 그뿐이다. 엘리바스는 욥을 위해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고 대처 방안을 권면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기 위해 사랑 없이 다른 이의 문제를 지적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들은 어려움에 처한 욥의 소식을 듣고 먼 길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의 고통에 전전긍긍하며 7일을 함께 머물렀다.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욥 2:13).

이런 상황을 미루어 추측하면 엘리바스가 냉소적인 마음으로 욥을 지적한다고 보기 어렵다. 엘리바스는 자신이 믿고 있는 내용을 진심으로 욥에게 전한 것이다. 이제 욥과 세 친구들 간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다음 시간에는 엘리바스의 말을 들은 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계속해서 함께 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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