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식 작가] #35.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김재식 작가] #35.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김재식 작가
  • 승인 2019.04.26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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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보는 불행속 그때 그 말씀들 10

"안정숙씨! 채혈 좀 하겠어요."

"? 아까 해갔는데 또 해요?"

 

그렇게 잠에 빠질 만하면 깨워서 채혈, 다시 잘만 하면 또 깨워서 채혈, 새벽부터 채혈공세가 심했습니다. 지난밤부터 금식해서 배고프고 피도 모자랄 집사람에게서 세 번씩이나 채혈해 갔습니다.

 

창밖에는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매는 고사하고 모진 소리 한 번 한 적 없이 사랑으로 키운 딸아이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울어서 나를 힘들게 했습니다. 오랜 세월을 나와 살아온 아내도 괴로움을 숨기지 못하는 데 하물며 어린 딸이야 더할 겁니다. 아비라는 나도 나를 감당 못 하는데...

 

말 없는 새벽 비

 

새벽부터 내리는 비는 말이 없다 / 참아라! 하지 않고 / 못난 사람! 하지도 않고 / 그저 내려와 파편이 될 뿐 / 그러니 나도 대꾸도 하소연도 못한다.

아무도 눈치 못 채도록 슬쩍 창밖을 힐끔거리며 / 병든 아내를 밥도 먹이고 세수도 시키고 / 무심한 척 나가 병원 뒤 산책길을 타박타박 걷는다.

몸속에 갇혀있던 눈물을 / 조금씩 내보낸다. / 쇼생크탈출 영화에서 / 흙무더기를 바지 단에 넣어서 / 운동장에 조금씩 버리던 죄수들처럼 / 빗물과 눈물은 섞이고, / 아무도 눈치 채지 못 한다 아직까지는...

 

▲ 혈장교환을 위해 가슴 위쪽 정맥에 관을 시술한 아내. 원래 예정이었던 8번에서 혈장 림프를 필터하기 위해 7번이 추가되어 모두 15회를 했습니다. 피 묻은 환자복을 갈아입히며.
▲혈장교환을 위해 가슴 위쪽 정맥에 관을 시술한 아내. 원래 예정이었던 8번에서 혈장 림프를 필터하기 위해 7번이 추가되어 모두 15회를 했습니다. 피 묻은 환자복을 갈아입히며.

아침밥 먹자마자 곧바로 침대로 9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서 CT, MRI, 초음파 등 세 번을 촬영하고 돌아오니 벌써 한 낮, 간신히 점심밥을 먹었습니다. 이어 혈장교체시술을 위해 정맥에 관을 시술하러 또 내려가야 했습니다. 목 아래 오른쪽 가슴 윗부분에 관을 삽입하고 올라온 아내는 좀 무서워했습니다. 왜 안 그럴까요, 나 같으면 아마 쫄아서 새 가슴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나는 피를 유난히 무서워합니다. 큰 아이가 중학교 다닐 때, 학교 과제물로 무엇을 만들다가 커터 칼이 힘을 잔뜩 준채로 엄지손가락을 타고 넘어 갔습니다. 안에 뼈가 보였던가? 하여간 피가 많이 나오고 나는 가슴이 덜덜 떨려 도저히 자세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가 나대신 급하게 지혈을 하고 직접 운전해서 아이를 태우고 병원 응급실로 데려갔습니다. 그럴 때는 아내가 나보다 용감합니다. 그런 내게 날마다 수시로 응급실에서 밤을 새고, 아픈 사람들, 피 흘리는 사람들을 보며 사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지독한 운명...

 

국립암센터 입원 꼭 한 달 만에 막내 딸아이와 둘째 아들이 왔습니다. 충주에서 일산까지 5시간, 차를 4번씩 갈아타고, 참 멉니다. 딸아이와 뉴코아할인매장을 들러 곧 다가올 겨울에 입을 옷을 하나 사주었습니다. 병원에 돌아와 보쌈에 족발로 배를 채웠습니다. 오랜만에, 정말 한참 만에 가족들이 한자리에서 온갖 이야기꽃들을 피우고 웃었습니다. 밤이 늦어 잠자기 위해 각자 뿔뿔이 처소로 흩어졌습니다. (병실에는 보호자 한사람 자리만 있어서 둘째 아들과 나는 1층 대기실로 내려가서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습니다.)

 

아내가 아프기 전, 우리는 저녁마다 웃으며 밥 먹고,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 나누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때는 왜 그 순간들이 그렇게 귀한 줄 몰랐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지루하게 여기다가도 정작 빼앗기면 눈물로 간절히 바라는 일상생활, 알고 보면 귀한 그 소소한 대화들을 얼마나 무심히 흘려보내는지 모릅니다. 병상에 누운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 재산을 다 털어주고도 사고 싶은 행복이고, 그래도 못 이루는 꿈인데 말입니다.

 

아내는 두어 번 방송 촬영 때마다, 몸이 나아지면 뭘 하고 싶은지 소원을 묻는 피디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 것도 소원 없어요. 남편과 아이들에게 다시 따뜻한 밥 한끼 차려주고 싶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 지겨워하고 지루한 가족에게 밥 해먹이기가 최고의 소원이 되었습니다.

 

▲ 아내는 방송 촬영 때 소원 1순위가 가족에게 밥 해먹이기 라고 했습니다. (kbs ‘생로병사의비밀’ 방송 자료화면)
▲아내는 방송 촬영 때 소원 1순위가 가족에게 밥 해먹이기 라고 했습니다.
(kbs ‘생로병사의비밀’ 방송 자료화면)

 

"안정숙씨 혈액 속의 염증이 아주 심한 악성으로 보이네요..." 순탄한 듯 진행되던 치료가 브레이크가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틀을 지켜본 결론은 8번째 재발, 다시 찍은 MRI 사진에 넓게 퍼져버린 염증들, 다른 때보다 긴 일주일의 스테로이드 주사와 12알부터 2알씩 줄여가는 스테로이드 알약 처방이 내려졌습니다, 오래 동안 약 300명의 환자들을 치료한 교수님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보았다며 어두운 얼굴로 말을 했습니다.

 

옆 침대에 아내 나이 정도의 새 환자가 왔습니다. 폐암 말기라고 합니다. 2년 전에 수술하고 제주도로, 또 장성 편백나무 숲으로, 강원도로, 좋다는 곳은 전부 찾아가서 요양을 했는데도 다시 재발해서 암세포가 머리까지 퍼지고 말았습니다. 그 분은 식사 때마다 밥을 잘 먹지 못하고 남편과 다투기 일쑤였습니다. 항암치료 때문에 오는 메스꺼움과 울렁거림으로, 그 분은 스테로이드 효과로 밥을 연달아 퍼넣다시피 하며 먹는 아내를 부러워했습니다.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생기는 건데도 그분은 그랬습니다. 아내는 반대로 자기 발로 화장실이랑 병원 공원으로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그 사람을 부러워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힘들어하는 그 분을, 세상은 그렇게 서로 부러워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럼 다 행복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게 마음 아픕니다.

 

그 분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번에 암이 퍼진 진단을 받으면서 집의 그릇과 옷들을 다 정리하셨다고, 남편에게는 꼭 재혼을 하라고 했는데 단 10년은 지나서 해달라고 했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만나 10년을 연애하다가 결혼해서 많은 추억이 있다면서 남편이 공연히 밉다고 했습니다. 안 아픈 사람은 자기 심정을 모른다며. 하긴 나도 아내의 고통과 두려움을 다 모릅니다. 아내도 나를 많이 미워할까요? 하긴 안 아픈 나도 아내가 때로는 미운데 왜 안 그럴까요.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요, 누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폐암 4기이신 그 분이 말했습니다. 자기가 극복해야할 문제는 지독한 통증과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두려움이라고, 나도 속으로 동의했습니다. '나도 그러고 살아요'라고, 어느 누군들 이 괴로움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울까요?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쉽지 않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질병과 고통을 각각 가슴에 끌어안고.

 

이런 저런 언덕길을 만나 넘어갈 때마다 생각나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나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외우고 매달리는 예수님이 해주신 그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마태복음 1128]

 

물론 그 말이 가난과 질병, 실패와 갈등 등 여러 고통을 직접 없애주신다는 의미가 아님을 압니다. 그 말씀의 직전에 하신 율법의 온갖 억압과 폐해를 봐도 그렇고 뒤이어하신 내 멍에와 내 짐은...’이라고 하신 말씀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아무 짐도 멍에도 없는 상태를 보장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종류가 다른 멍에와 짐을 지는 것이 해방이며 옳다는 말씀입니다.

 

맞습니다. ‘왜 나만?’ 이라는 억울함이나 내 잘못...’이라는 자책, 죄의 대가라는 율법적 고통에서 자유를 주신다는 말입니다. 어찌 보면 직접적인 가난 질병, 실패의 고통보다 잘못된 억울함, 자책으로 생기는 우울함이 더 견디기 어려워 생을 스스로 마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주시는 제대로 된 멍에와 짐을 지라는 깨달음이 고맙습니다. 그러면서도 감정적으로 자주 매달리고 빌게 됩니다. “주님, 제발 이 고통스러운 수고와 짐들을 벗겨주십시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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