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강해7] 군대대장 예수 그리스도(계 2:12-17)
[요한계시록강해7] 군대대장 예수 그리스도(계 2:12-17)
  • 김상학 목사(안산 성경제일교회)
  • 승인 2019.05.21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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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성경제일교회 김상학 목사
▲안산 성경제일교회 김상학 목사

들어가는 말

오늘은 ‘트로이 목마’를 타고 본문 속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트로이 목마’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그리스와 트로이 간에 전쟁에서 나타나는 나무로 만든 거대한 목마입니다. 그리스가 트로이를 공격하지만 트로이를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리스가 패하여 물러난 해변에 거대한 목마가 서 있습니다. 트로이 사람들은 그 목마를 트로이 성으로 끌어다 놓았습니다. 목마가 워낙 컸기 때문에 성의 일부를 헐고 가져와야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끌어다 놓은 것은 목마가 그리스의 아테나 여신에게 바쳐진 신성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것까지 취해야만 완전한 승리라고 여겼던 게지요.

목마를 성안으로 끌고 온 트로이는 승리의 축배를 들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목마를 탈취한 것이 진정한 승리였을까요? 그들이 잠에 빠졌을 때 목마의 문이 열렸습니다. 무장한 군인들이 줄을 타고 내려오더니 성문을 열어 제쳤습니다. 그리스 군사들이 봇물같이 들이닥쳤고, 무방비 상태의 트로이는 한 순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트로이 목마는 컴퓨터에서도 무서운 바이러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커는 이 트로이 목마 바이러스를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콘텐츠에 심어놓고 유저들을 유혹합니다. 유저들이 바이러스가 담긴 콘텐츠를 끌어 자기 컴퓨터에 담는 순간부터 이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아 컴퓨터의 정보가 상대방에게 빠져 나가기도 하고 컴퓨터 제어가 어렵게 되고 컴퓨터 사용불능에 이르게 됩니다. 심지어는 사용하는 프로그램의 암호를 바꾸어 놓고 막대한 돈을 요구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오늘 본문은 버가모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을 보면 버가모에 사탄의 권좌와 발람과 니골라가 등장하는데 이것들의 모습이 트로이 목마와 비슷합니다. 영적 전쟁의 현장에서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사탄의 궤계로 인한 참사는 불 보듯 뻔한 일이 되는 게지요. 먼저 버가모 도시에 관해 살펴볼까요?

 

1. 사탄의 보좌, 버가모.

13절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버가모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은 고지대에 자리 잡은 ‘언덕 위의 도시’입니다. 버가모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그 높은 곳에 만신전을 세웠습니다. 로마 황제 신전, 로마 여신의 신전, 제우스, 아테네, 디오니소스, 트라얀, 그리고 뱀 신으로 알려진 에스클레피오스 신전까지 만신이 자리잡은 도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만신전을 “사탄의 권좌”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사탄이 보좌에 앉아 다스리는 도시라는 겁니다. 마치 큰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형국이지요. 그 사탄이 신전의 귀신들을 조종하고, 사람들에게 역사하니 버가모는 소돔과 같은 죄악의 도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당시 교회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먼저 ‘안디바’의 순교 이야기가 있지요? ‘안디바’는 서머나의 폴리갑과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이 세운 버가모 교회의 목회자입니다. 안디바는 그 이름이 ‘안티파스’인데 ‘안티’는 ‘반대하다’하는 뜻이고, ‘파스’는 ‘동질화하다’, ‘동의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버가모의 통치자가 우상숭배를 강요할 때, “나는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진 것입니다. 결국 안디바는 도미티안 황제 때에 불에 달군 놋 황소 위에 얹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본문의 표현은 이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목회자 안디바가 그렇게 죽임을 당하면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3절 하반절을 보면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안디바가 그렇게 죽었으면 순서대로 그렇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말 아닌가요?

버가모 교회는 그럼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정말 대단한 믿음 아닙니까? 사탄도 넘보지 못할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인 게지요.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싸우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았던 게지요. 이것이 사탄의 권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2. 사탄의 트로이 목마

그러나 그렇게 이기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사탄이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심판주로 다시 오시기까지는 계속해서 공격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다른 작전을 가지고 오겠지요? 무슨 작전일까요? 교회 안에 트로이 목마를 심는 작전을 펼친 겁니다. 그것이 바로 “발람”,  “니골라”를 심는 것입니다.

발람은 민수기 22장에 등장하는 불의의 삯에 끌려다닌 복술가입니다(벧후 2:15).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모압 왕의 요청은 거절했지만 결국엔 모압 여인과 이스라엘 백성의 혼합을 부추겨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함으로 칼의 심판을 받은 악한 사람입니다(민 31:8; 수 13:22). 본문 14절에 보면,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도 발람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읽어 볼까요?

14절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이란 모압왕이 이스라엘에게 “미인계”를 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의 여인들과 행음에 빠졌고, 그 여인들의 우상을 섬기게 했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던 것이지요. 여인들을 트로이 목마처럼 사용한 것이고 이스라엘은 그렇게 무너졌던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염병으로 24,000명이 죽었습니다(민 25:9).

그런데 버가모 교회에도 이런 발람과 같은 트로이 목마가 들어왔는데 그것이 바로 ‘니골라 당’입니다. 그들은 니골라 당의 거짓 교훈을 전했고 사람들은 미혹되었습니다. 버가모의 만신전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행음하며 우상의 제물을 취하는 자들이었던 게지요.

처음에는 안디바의 믿음을 따라 자신들의 믿음을 굳게 지켰지만 니골라당의 교훈이 들어와 성경이 왜곡되고 혼돈케 됨으로 하나 둘씩 허물어져 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허물어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안디바의 신앙과 대치하고 있는 것이지요. 안디바의 신앙을 따랐던 충성된 성도들이 대충 타협하며 신앙생활 하는 니골라 당을 보면서 계속 허물어지겠죠?

그들도 처음부터 사탄의 신전에 절하라고 하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겁니다. 목이라도 내놓으면서 믿음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미혹에 넘어지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말씀대로만 살려고 해!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지!” 라는 말에 하나씩 허물어져 가는 것입니다. 바늘구멍에 댐이 허물어지는 것이지요.

오늘날도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이렇게 허물어지곤 하지요. 신앙인으로서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잘 지키다가 작은 일에 한 번 타협하고 나면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덧 니골라 당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트로이 목마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 끝까지 이겨야 할 것과 니골라 당의 미혹에 빠졌다면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3. 회개하지 아니하면

16절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게 니골라 당의 교훈을 버리고 돌이키라고 하셨습니다.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가르치고 보여준 그 믿음으로 돌이키라는 것이지요. 만약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속히 가서 “예수님의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의 검”이란 12절에 있는 “좌우의 날선 검”입니다. “좌우의 날선 검”이란 군대대장의 장검을 의미합니다. 철장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진을 부숴버릴 강력한 이미지입니다. 버가모의 사탄의 권좌를 쪼개어 산산이 부술 장검입니다. 발람의 교훈, 니골라 당의 교훈을 산산이 부술 철장입니다. 이것은 곧 히브리서 4장 12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장검 앞에 회개하지 않는다면 결국 산산이 쪼개어질 것이며 모든 죄악이 벌거벗은 것처럼 다 드러나 심판받게 될 것이란 말씀이지요.

여호수아 5장 13절 이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향했을 때, 여호와의 군대대장이 칼을 들고 앞장섰다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여리고가 아무리 난공불락의 성이라 하더라도 여호와의 군대대장의 칼 앞에 산산이 허물어졌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온 라합과 그의 가족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이 목회자 안디바가 순교함에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이겠죠?

바로 그 검을 가지신 예수님 앞에 누가 맞설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철장 권세를 누가 당할 수 있습니까? 안디바가 바로 철장 권세의 주님으로 인해 그 믿음을 지킬 수 있었고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철장 권세를 가지신 주님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디바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미혹되어 니골라의 편에 서 있다면 회개하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칼에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니골라 편에 서지는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회개는 날마다 계속되어야 한다고 했지요? 회개할 것이 없다 하는 것처럼 교만이 없습니다. 세상에 가장 큰 죄는 아마도 “나는 죄가 없다”일 겁니다. 아마도 이것이 제일 악한 니골라의 교훈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 1:10).

하나님께서 왜 버가모 교회에 장검을 들고 나타나셨는지, 입에서 검이 나오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 알 수 있지요? 뱀은 그 입에서 두 개의 혀가 널름거리지만, 예수님의 입에서는 좌우의 날선 검이 나와 모든 거짓된 혀를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좌우에 날선 검의 우리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자백함으로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주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나가는 말

버가모 교회에도 에베소나 서머나 교회에서처럼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1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에베소에서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을 주신다고 했고, 서머나 교회에서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는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고,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의 말씀처럼 감추인 만나, 생명의 떡이신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또한 흰 돌은 재판장이 죄인에게 주는 사면장입니다. 그리고 왕의 잔치에 입장할 수 있는 초대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돌에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답니다. 누구의 이름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요, 이 돌을 가졌을 때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가 사해 졌다는 의미로 천국 연회에 참여할 수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직 받는 자만이 그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사탄의 권좌는 산산이 부숴질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의 트로이 목마와 같은 니골라당도 결국에는 도려내어 지옥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 성도들은 말씀의 검 앞에서 회개의 영성으로 언제나 주님 편에, 안디바 편에 서서 만나와 흰 돌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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