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강해8] “별똥별? 새벽별!” (계 2:18-29)
[요한계시록강해8] “별똥별? 새벽별!” (계 2:18-29)
  • 김상학 목사
  • 승인 2019.06.10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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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성경제일교회 김상학 목사
▲안산 성경제일교회 김상학 목사

 

들어가는 말

하늘의 로또라고 불리는 운석이 있습니다. 2014년 3월 무렵, 경남 진주에 운석이 여기저기 떨어졌습니다. 진주 운석의 나이가 45억 살이랍니다. 정부에서 3억 5천만 원에 매입하려고 했는데 소유자는 270억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부와 협상이 결렬되어 지금은 은행 금고에 진공포장 되어 있다네요. 이만하면 로또라고 할 만 하지요?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진주로 몰려와 운석을 찾으려고 북새통을 이루었다죠? 어떤 이는 그 자리의 흙을 병에 담아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운석이 떨어진 곳에 절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답니다.

정말 하늘의 운석을 갖고 싶습니까? 그 운석이 어디에 많은지 보여드릴까요? 요한계시록 6장 13절에 가면 굉장히 많습니다. 모든 별들이 다 떨어진답니다.(cf. 사 34:4; 막13:25). 운석이 바다 모래처럼 많아졌다고요? 천만에요! 종말 심판의 때라는 사실이지요. 영원하지 않은 것에 목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원한 것을 찾아야지요. 오늘 그 소망을 향해 함께 나아가기를 소원합니다.

 

1. 똘똘 뭉친 두아디라 경제 공동체

두아디라는 사도행전 16장 14절에서 자주 옷감장사 루디아의 고향으로 소개되는 도시입니다. 버가모와 사데 사이에 위치한 작은 공업도시로 직물 염색과 금속세공으로 유명했습니다. 이들은 협동조합의 형태의 경제 공동체를 이루어 로마의 필요한 물품들을 판매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또한 협동조합에 가입되어 조합의 모든 행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중에 빠지지 않는 정기 행사가 있는데 자기의 수호신께 제를 올리는 축제입니다. 이 축제는 우상의 제물과 신전의 여 사제들의 음란한 행위가 가득한 난교파티였습니다.

이런 도시 환경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이 가나요? 더군다나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와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를 잇는 중간지점에 있었기에 로마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똘똘 뭉친 경제 공동체와 로마 수비대 사이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위치는 두 맷돌 사이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자주 옷감장사 루디아도 그런 상황에서 예수를 믿었겠지요? 그럼 두아디라 교회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2. 두아디라 교회의 행위들

19절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우리 성경의 번역이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라고 병렬로 연결했지만, 원문에 가까운 번역은 “네 사업들, 즉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입니다. 톰 라이트 교수는 이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는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다. 나는 너의 사랑, 너의 믿음, 너의 봉사, 그리고 너의 인내를 알고 있다. 나는 너의 행위가 과거보다 최근에 훨씬 더 두드러졌음을 알고 있다.”

두아디라 교회에 사랑의 수고, 믿음의 역사, 소망의 인내가 두드러졌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런데 이것은 교회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었다면 마땅히, 당연히 나타나는 결과니까요. 따라서 이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나타나는 책망이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는 칭찬이 주어질 때 “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책망 앞에서는 수술대에 누워 의사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주께 드러내야 할 줄 믿습니다. 2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3. 이세벨을 용납한 교회

20절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아니 어떻게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죠? “이세벨”이 누구죠? 이세벨은 열왕기상 16장에 나타나는 바알을 섬기는 두로의 여인으로 북 이스라엘 왕 아합과 결혼하여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를 강요한 여인이지요.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쫓아다닌 여인입니다. 그런 여인이 두아디라 교회에 있는데 두아디라 교회가 묵인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대로 용납하고 있다가는 두아디라 교회는 두아디라 우상 신전과 똑같은 사이비 집단이 되는 것이지요.

왜 용납했을까요? 아마도 이세벨을 닮은 이 여인은 두아디라에서 상당한 재력가입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두아디라 교회에서 많은 헌금을 하면서 자기의 목소리를 높였을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그 여인을 ‘루디아’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두아디라가 루디아의 고향이고 빌립보에서 바울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두아디라 교회를 세우는데 일조했거나 주축이 되었겠죠?

그러다가 두아디라의 두 맷돌 사이에서 타협하다보면 그의 신앙이 온전할 수 없는 것이지요. 사탄과의 타협은 큰 것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하나 타협하다보면 결국 통째로 넘어가는 게지요. 바울의 동역자였던 루디아라도 은혜에서 멀어지면 이세벨처럼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이 여인이 이세벨에 비교될 정도로 악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두아디라 도시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였으니 얼마나 많은 궤변을 늘어놓았을지 불 보듯 뻔한 겁니다. 단박에 내쳐야 하는데 그놈의 돈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차일피일 미뤘던 것이 예수님의 책망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지요.

 

4. 회개의 기회

예수님은 이세벨에게, 그리고 이세벨과 관련된 자들에게 충분히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 그녀를 징계할 기회를 주었다고 말씀합니다.(21절).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기회를 주셨다는 걸까요?

22절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본문의 “침상”은 “병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병상에 던진다는 것은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암 환자들은 암이라는 병이 죽음의 병이긴 하지만 복된 병이라는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암은 단번에 죽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있고 충분히 회개할 시간을 갖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저는 이 말을 100% 동의합니다. 하지만 두아디라의 이세벨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아디라의 이세벨에게도 심판이 주어집니다.

이런 이세벨의 죄악이 그의 곁에 있는 자들에게 전해지고 그들 자녀 역시 동일하게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게지요(23절).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려면 이세벨을 물리치고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이세벨이니까 회개하지 않는다 해도, 교회는 이세벨을 물리쳐야죠. 예수님처럼 선포해야 합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이세벨을 물리치면 당장에 교회 살림이 어려워질 것 같고, 두아디라의 두 맷돌이 더 맹렬이 돌아갈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물리치면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수종 듭니다. 할렐루야!

 

5. 사탄의 깊은 죄악 VS 하나님의 깊은 은혜

그러고 보면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많다고 하는 것이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뉘앙스가 어딘가 이세벨의 돈으로 그 일이 많아진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언제나 경계해야 할 일인 게지요. 촛불을 훔쳐서 성경을 본다는 말과 같은 뜻일 겁니다.

하지만 모두가 이세벨에게 잡힌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은 자를 살펴볼까요?

24절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지지 않고 ‘남은 자’들은 복음에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세벨의 자녀, 즉 그녀의 제자들은 왜 빠졌을까요? 이세벨이 가진 돈과 함께 그 여인에게 무언가 감춰진 깊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빠지는 게지요. 그 곁에 있으면 뭔가 나올 것 같은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탄의 유혹일 뿐, 나오는 것은 사망뿐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도적이 온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했지요? 결국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었기에 이세벨에게 빠지는 겁니다.

복음에 만족하는 사람은 미혹 받을 것도 없습니다. 주께서는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라고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다른 짐을 지려고 하는지 이세벨의 불법적 짐까지도 끌어다지고 스스로 자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 재능과 은사로 쓰임 받으면 됩니다. 나에게 주어진 적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주님도 “다른 짐으로 지울 것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죠? 오직 주님이 주신 은사, 재능, 즉 사랑, 믿음, 섬김, 인내를 주님 오실 때까지 굳게 잡으라는 겁니다.

다른 짐까지 짊어지려고 하지 말고 맡은 일에 충성하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거기에서 기쁨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꾸만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다른 교회와 비교하고, 심지어 세상 사람을 부러워한다면 결국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 것만을 찾으십니다. 굳이 이세벨의 돈을 끌어다가 에베소, 버가모 교회를 닮으려고 하고, 두아디라 도시를 닮으려고 애쓸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 재능에 최선을 다하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세벨 곁에서 있다 보면 사탄의 깊은 것, 죽음이요, 하나님의 은사에 거하면 하나님 나라, 그 깊은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 깊은 은혜가 26-28절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6. 철장 권세와 새벽별

26-28절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그 깊은 은혜는 첫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도시의 경제 공동체, 그리고 군대 수비대의 두 맷돌 짝 사이에서 갈려야 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제 그들을 다스리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둘째는 새벽 별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벽 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구원의 은혜이지요. 에베소 교회에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서머나 교회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생명의 관”, 버가모 교회에는 “만나와 흰 돌”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에는 “철장 권세와 새벽 별”을 주신다는 겁니다. 이 모두가 다 구원의 은혜이지요. 특별히 새벽은 가장 춥고 어둡습니다. 그때의 새벽 별은 유난히 반짝입니다. 그 새벽 별을 보고 내게도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 날이 온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세상을 보면 경제가 세상을 다스리는 것 같고, 군대가 세상을 다스리는 것 같습니다. 두아디라도 협동조합과 군대 수비대가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이 두 맷돌 짝을 철장 권세로 깨트리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과 주어진 은사로 만족하며 살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네 나중 행위가 많지 않아도 된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울 버전으로 하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로 말할 수 있겠지요.

 

나가는 말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었기에 이미 “새벽 별”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주님은 이 새벽 별이 우리에게서 더욱 더 반짝이기를 원하십니다. 새벽 별은 어둡고 캄캄할 때, 더 빛을 발하지요. 바로 이 시대에 더 빛을 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가치관에 끌려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과 은사에 만족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역사를 우리가 경험하고 세상은 그것을 보게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39장에서 요셉이 노예로 잡혀 왔으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었고, 그 집주인 보디발이 이 사실을 보고 요셉을 가정의 총무로 삼는 것처럼 말입니다. 은혜 받은 자에게서 당연히 나타나는 역사인 줄 믿습니다.

서두에 하늘의 로또를 말씀드렸습니다. 아마도 그 로또를 목매어 찾아다닌다면 사탄의 깊은 것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하늘의 로또, 새벽 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찾으며, 그 은사를 따라 행할 때에 하나님의 깊은 은혜 속에 거하게 될 줄 믿습니다.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우리 교회, 모든 성도와 가정과 일터에서 새벽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역사가 있어서 많은 이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단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새벽 별을 소유한 자요, 그 주어진 은사를 끝까지 붙잡는 자는 하나님의 도움 가운데 살며 더 나아가 그 빛을 발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을 주께 돌아오게 하는 자라는 사실과 함께 영원토록 빛나는 주의 백성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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