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삼 교수 "공동서신, 바울서신과 동등한 권위로 해석되야"
채영삼 교수 "공동서신, 바울서신과 동등한 권위로 해석되야"
  • 윤지숙 기자
  • 승인 2019.06.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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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사본 공동서신의 위치, 사도행전 다음

-예루살렘의 기둥들 같은 사도들 권위와 관계, 서신서에서도 일치 

-초기 교회의 카운터 파트는 율법과 로마(세상)
▲백석대 신학대학원 채영삼 교수(신약학)

“예수님 이후 초기 교회의 사도 전통은,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을 보완하기 위해 오늘날과 같이 ‘바울의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을 제시하는 식의 접근을 하지 않았다. 대신,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기록한 공동서신을 교회에 줌으로써 바울 신학을 보완하고, 보다 온전하고 균형 잡힌 신앙을 가르쳤다. 그것이 공동서신이 바울서신과 함께 신약의 정경 안에 포함되어 교회에 주어진 이유기도 하다.”

<공동서신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공동서신 서론과 신학>이라는 주제로 한 교회를 위한 신학강좌에서 백석대 신학대학원 채영삼 교수(신약학)가 한 말이다.

도서출판 이레서원의 주최로 열린 이번 강좌는 6월 10일 오후 2시 서울 도곡동 강변교회(담임 이수환 목사)에서 채 교수는 “초기의 사도적 교회는 안디옥을 중심으로 바울의 이방인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됐지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기둥과 같은 사도들(갈 2:9; 야고보, 베드로, 요한)의 뿌리 깊은 신학과 교회 통합적 노력도 빛을 발했다.” 강조했다.

채영삼 교수는 “야보고서,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이삼서, 그리고 유다서 이 7개의 공동서신은 하나의 일관된 신학을 가진 정경 모음(canonical collection)”이라며,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상대해야 했던 초기 교회가 바울서신들을 남겼다면, 로마라는 거대하고 적대적인 세상을 상대해야 했던 교회가 남긴 성경이 바로 공동서신”이라고 의미를 뒀다. 

다음은 강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최근의 공동서신 연구 동향

20세기 말까지도 오랫동안 학계에서 공동서신은 소외된 서신들이었다. 역사비평학적(historical-critical) 접근에 의해 각 서신의 저자와 역사적 배경 혹은 서신서 내의 문학적 구조 등의 분석 방식으로 공동서신은 낱낱 권으로 이해돼 왔다.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초기 교회의 사회적 산물로 봤다.

하지만 1970년대 역사비평의 몰락을 성경해석의 주도권은 독일에서 영미권으로 넘어갔다. 영미를 중심으로 문학비평( literary criticism)은 본문을 중심으로 한 본문비평과 간본문적 해석(intertextuality)으로 발전됐다.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 정경화 과정의 해석학(hermeneutics of the Canonical Process)은 ‘어떤 요소들이 공동서신의 각 권들을 서로 연결하며 신약의 정경들 안에서 그들의 위치를 결정하는지’에 관심을 두게 됐다. 이를 위해 예루살렘 초기 공동체에서 지도력을 발휘했던 사도들에 대한 공동서신의 언급을 살피는 것에서 시작해 공동서신을 하나의 정경 모음집으로 보고, 한데 묶는 신학을 찾으려는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21세기에 들어서는 공동서신 7개의 책이 모두 바울 신학과는 별도로 사도적 전승을 따라 형성되고 모아진 정경으로서, 전체가 일관된 주제에 따른 한 덩어리일 수 있다는 해석적 전략이 시도됐다.

▲<공동서신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공동서신 서론과 신학>이라는 주제로 한 교회를 위한 신학강좌가 도서출판 이레서원의 주최로 6월 10일 오후 2시 서울 도곡동 강변교회(담임 이수환 목사)에서 열렸다.

◇사도행전과 공동서신 그리고 바울서신과의 관계

유세비우스(Eusebius, AD. 320)는 공동서신이 사도행전과 더불어 회람되어오면서 야고보서가 맨 앞에 오는 순서대로 된 것을 처음 목격했다. 공동서신이 지금의 순서대로 언급된 경우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AD.367)였고, 중세 가톨릭교회가 불가타역(히브리어 성경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최초의 성경)에서 사용됐다.

하지만 초기 사본들(예루살렘의 씨릴의 교리서, 아타나시우의 39번째 부활의 편지, 라오디게아 공의회 59번째 정경 등)은 공동서신이 바울서신들 뒤가 아니라, 사도행전 바로 다음에 나온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유래한 균형 잡힌 규범적 신앙과 사도들의 전승의 기준이 된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의 총회가 열렸다. 이방인 선교를 중심으로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올라왔다. 안건은 이방인들의 할례가 아닌 이신칭의(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됨)였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에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다고 전했다.

베드로 역시 고넬료 사건을 통해 이방인들도 생명을 얻는 구원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사도행전 15:15-17에서 예루살렘의 수장인 주의 형제 야고보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로써의 3가지 권위 있는 결정을 내린 후 상황은 종료됐다. 예수님의 가르치고 선포한 복음을 직접 들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 그 문제를 해결해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신학적으로 정치적으로 통합을 이룬 것이다. 그러한 결정들은 이들이 쓴 서신이 바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이삼서에서도 나타다.

이는 초기 교회의 정신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였고, 신약신학은 바울 혼자만의 독창(solo)이 아니라 사도들과의 합창(chorus)이었음을 알려준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권위와 그들의 관계는 그들이 쓴 서신들의 권위와 그 서신들의 관계에 일치한다. 공동서신의 권위와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을 보아야 한다.

공동서신의 책들이 그 안에서 배열된 순차를 눈여겨보면, 야고보를 필두로, 베드로, 그리고 요한이 순서대로 나온다. 공동서신의 배열도 같다. 야고보, 베드로, 요한은 모두 바울이 갈 2:9에서 말한 “예루살렘의 기둥들 같은 사도들”이다. 야고보는 그 기둥들 맨 우두머리로, 맨 뒤의 유다까지 예수님의 형제로서의 권위로 둘러싸여 있다.

바울서신은 원래부터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서신들의 토대 위에서 읽도록 되어졌다는 페인터(Painter)의 말처럼, 오늘날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을 보완하기 위해 바울의 새관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공동서신에서 찾아야 한다.

▲백석대 신학대학원 채영삼 교수(신약학)

◇7개의 공동서신의 공통된 신학적 주제들

초기 교회의 카운터파트(counterpart)는 율법과 로마(세상)였다.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상대해야 했던 초기 교회가 바울서신들을 남겼다면, 로마라는 거대하고 적대적인 세상을 상대해야 했던 교회가 남긴 성경이 바로 공동서신이다.

바울서신은 유대교와 맞부딪치면서 옛 언약을 성취하고 새 언약을 따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기초한 교회를 세우는데 요긴한 권면들이다. 그러나 공동서신은 로마의 주변부에서 세속 사회에 부딪치면서 갈등하는 교회에게 주는 권면들이 주를 이룬다.

야고보서의 세상의 세속주의와 부딪히면서 발생하는 시험과 고난, 나뉜 마음(두 마음, 1:18, 21)과 세상을 사랑하는 문제(요일 2:15-16) 등은 공동서신이 염두에 두는 교회 문제들이다. 베드로전후서와 요한서신에서 ‘말씀’은 핵심적 전략이다. 또한 공동서신은 신앙 고백 뿐 아니라 믿음의 행동을 강조한다. 결국 이런 신앙의 특징은 세속으로부터의 정결함을 나타내고, 그 순결한 신앙의 결과 생명의 면류관과 영생이 제시된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공동서신의 맨 앞에서 서론을 이루며 세상과 짝하지 않는 전심(全心)의 교회를, 베드로전서는 나그네와 행인처럼 세상을 지나가며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다하는 교회로, 베드로후서는 교회 속으로 밀려들어 온 세상을 몰아내고 신적 성품에 꾸준히 성장하는 교회, 요한서신은 삼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거하며 세상을 이기는 교회, 결론인 유다서는 끝내 세상 속에서 성도의 구원과 영광을 지켜 내는 교회라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다.

아직까지 한국교회는 이미 초기 교회 사도회의가 끝낸 칭의, 성화 문제를 놓고 토론하며 문제를 일으킨다. 이것은 초기교회 뿐만 아니라 16세기 이후 계속해서 반복 되어온 논쟁이다. 교회는 이신칭의의 문제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로 가져간다. 초기 교회는 바울의 복음을 오해한 사람들을 바로잡기 위해 ‘바울의 새관점’으로 해결하도록 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초기 교회의 오해에 대해 바울의 본문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야고보, 베드로, 요한의 서신, 즉 사도들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했다.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로 구원을 확신하는 이 땅의 교회가, 참으로 다루기 어려워하는 대상은 ‘세상’에 정경론적 혹은 교회론적인 해법을 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복을 받고, 그 받은 세상 복 속에서 점점 더 세상처럼 되어 가는 교회의 위기를 바라보며, 세상을 맞닥뜨린 교회(the church facing the world)가 공동서신을 통해 회복해야 할 교회의 영광스런 모습들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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