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원 목사] 욥기는 의인이 받는 고난의 문제인가?(32)
[황대원 목사] 욥기는 의인이 받는 고난의 문제인가?(32)
  • 황대원 목사
  • 승인 2019.07.2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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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하나님께 돌려보내겠다는 엘리후의 마지막 변론을 시작합니다.
▲팟캐스트 타브의 '바이블코어'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황대원 목사
▲팟캐스트 타브의 '바이블코어'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황대원 목사

[본문연구]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욥기 35:14)의 의미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חול) 말하는 그대일까보냐”(욥 35:14).

이 구절은 엘리후가 욥에게 한 말인데 욥을 긍정하는 것인지 부정하는 것인지 애매한 구절이다. “하물며 말하기를 … 말하는 그대일까보냐”라고 하며 중간에 인용한 욥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구문이다.

그런데 중간에 인용한 욥의 말은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이다. 이는 욥이 어떤 일을 판단하는 기준이나 근거는 하나님께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평가를 들을 수 없으니 자신으로써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힘들다. 인간이 섣부르게 어떤 판단을 내리지 않고 하나님의 결정을 기다리겠다면 이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닌가? 그런데 전후 문맥은 엘리후가 욥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이는 매끄럽지 않은 번역의 결과이다. <개역개정>에서 “기다릴 뿐이라”로 번역된 단어는 ‘חול(훌)’인데 구약성경의 다른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①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חול)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대상 16:30).

②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는(חול)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욥 39:1).

③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חול) 깊음도 진동하였고”(시 77:16).

④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חול)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7).

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חול)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시 55:4).

⑥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חול)”(사 23:5).

이처럼 히브리어 ‘חול(훌)’은 상당히 다양한 뜻으로 번역되었다. 한 단어가 이렇게 많은 뜻을 지니고 있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뿐만 아니라 고대어는 현대어에 비해 어휘가 적다. 이는 상식적으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한 문자 체계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멸되는 단어와 생성되는 단어가 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새로 생기는 사건, 물체, 개념이 증가할 것이기에 소멸되는 단어보다 생성되는 단어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에는 세분화된 개념이 과거에는 통합적으로 이해되었을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이 기록될 시기에는 ‘חול(훌)’이라는 한 단어로 의미전달이 되었는데 현재 우리는 그 개념을 세분화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חול(훌)’이 가진 핵심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위에서 정리한 다양한 용례를 종합해보면 유추할 수 있다. ①‘떨다’, ②‘출산하다’, ③‘두렵다’, ④‘참고 기다리다’, ⑤‘아프다’, ⑥‘고통 받다’ 이 단어들의 공통분모는 ‘두렵고 고통스러운 인내’ 정도로 표현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개역개정>에서는 이 중 한 개념인 ④번 ‘참고 기다리다’를 적용하였는데 “기다릴 뿐이라”라고 번역하여 단순히 기다림이라는 의미만 남았다. 그래서 괴로움이나 고통스러운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욥기 35:14의 히브리어 원문은 “אף כי־תאמר לא תשורנו דין לפניו ותחולל לו”인데 각 단어의 뜻을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다.

엘리후가 욥을 비난하는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חול(훌)’을 고통 가운데 ‘괴로워하다’로 번역하였다. 전체적으로 직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더욱이 당신은 그를 볼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의 앞에서 판단하고 그를 향하여 당신은 괴로워하고 있다’(욥 35:14, 사역).

그러므로 엘리후는 욥기 35:14에서 재앙 가운데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불평하면서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는 욥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5. 엘리후의 네 번째 설명 : 인과응보를 넘어서는 섭리

(1) 온전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의롭게 함

엘리후는 욥에게 할 말이 더 있다고 하며 말을 이어간다. 지금까지는 ‘의’의 문제가 인간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엘리후는 ‘의’를 하나님께로 돌려드리겠다고 한다.

“내가 먼 데서 지식을 얻고 나를 지으신 이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욥 36:3).

3절을 보면 엘리후가 먼 곳에서 지식을 얻었다고 했는데 ‘먼 곳’은 어디이고 그가 얻은 ‘지식’은 무엇일까? 엘리후가 얻은 지식은 자신이 여태껏 제시한 내용들이다. 즉 인간이 구현한 <도덕적 충족으로써의 의>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할 수 없고 대속의 의가 필요하다는 지식이다.

엘리후는 그 지식을 하나님 편에서 온 깨달음에 의해 얻었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의 통찰력으로 얻을 수 없기에 출처를 ‘먼 곳’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먼 곳’은 ‘하늘’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이어서 엘리후는 3절 후반부에 하나님께 ‘의를 돌려보내겠다’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 받은 지식으로 그가 옳다는 사실을 바로 잡겠다는 뜻이다. 즉 욥이 주장하는 그의 의를 파기하고 하나님께서 의로우심을 변증하겠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3절을 통해 의의 출처를 유추할 수 있다. 엘리후에 의하면 의의 본질과 그에 대한 지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주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의 실체를 밝힘으로 하나님께로 돌리려는 것이다. 이제 엘리후의 마지막 주장을 들어보자.

 

[본문연구]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욥 36:4)는 누구인가?

엘리후가 욥에게 설명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진실로 내 말은 거짓이 아니라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욥 36:4).

엘리후는 누구를 가리켜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라고 한 것일까? 그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는 하나님이시거나 아니면 엘리후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תמים דעות עמך”를 직역하면 ‘완전한 지식들이 당신과 함께’이다. 이와 같이 직역에 초점을 둔 번역본을 확인해보자.

‘진실로 나의 말들은 참으로 거짓말이 아닌즉, 완전한 지식들이 당신 곁에 있습니다’(욥 36:4 바른복음 성경연구원).

그러므로 4절은 엘리후가 누군가를 지칭했다기보다 욥에게 참된 지식이 전해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엘리후는 온전한 지식으로 욥이 자기 의를 포기하고 욥이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도록 설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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