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원 목사] 욥기는 의인이 받는 고난의 문제인가?(33)
[황대원 목사] 욥기는 의인이 받는 고난의 문제인가?(33)
  • 황대원 목사
  • 승인 2019.08.0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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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훈계를 받아들이는 순종과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불순종의 갈림길
▲팟캐스트 타브의 '바이블코어'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황대원 목사
▲팟캐스트 타브의 '바이블코어'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황대원 목사

(2) 운명의 갈림길

과연 엘리후가 밝히는 의의 실체는 무엇일까? 욥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죄가 없는 사람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이나 죄인이나 상관없이 동일하게 대하신다고 말했다.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욥 9:22~23).

엘리후는 그 말에 반박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높여주신다.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욥 36:6~7).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심판하신다. 그로 인해 고통 받던 사람들에게 공의가 실현된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빠뜨리지 않고 일일이 살피셔서 존귀한 왕의 자리까지 영원히 높여주신다. 영원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의인이 높음을 얻는 것이 세상뿐만 아니라 내세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엘리후가 재미있는 말을 한다. 왕의 자리까지 높임을 받은 의인이 겪는 환난에 대해 이야기한다.

8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9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10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욥 36:8~10)

“그들”은 분명 7절에서 왕들과 함께 한 의인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의인이 만약 환난을 겪는다면 이는 그 의인의 교만이나 악한 행실을 깨달아 돌이키도록 훈계하시는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의인에게 교만이나 악한 행실이 있다니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엘리후의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은 의를 <도덕적 충족으로써의 의>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인이라면 도덕적 완전성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니 의인에게 교만과 악한 행실이 있다는 말이 모순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의를 <구원의 근간으로써의 의>로 받아들이면 위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 엘리후는 <구원의 근간으로써의 의>를 도덕적 성취로 얻을 수 없고 대속물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다고 했다. 그 의를 소유한 사람은 의인으로 불리며 하나님께서 왕의 자리로까지 높여주신다.

그러나 그 의가 도덕적 완전성을 담보하진 않는다. 때문에 그런 의인일지라도 도덕적 불완전성으로 인해 교만과 악한 행실을 할 수 있다. 그럴 경우 하나님께서 훈육의 수단으로 환난을 이용하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훈계는 고난 가운데 뉘우치고 돌이키도록 하시려는 목적이다. 엘리후는 이러한 내용을 설명한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11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12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욥 36:11~12).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순종과 불순종을 계명의 실천여부로 이해한다. 그러나 엘리후가 여기에서 설명하는 내용은 조금 다르다. 엘리후가 촉구한 순종과 불순종은 무엇일까? 인생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훈계하신다. 그런데 그 훈계는 각자의 삶에 다양한 모습으로 적용될 것이다. 우리가 겪는 시련도 그 훈계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훈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종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 환난 가운데 있는 의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훈계를 받아들이고 그 뜻에 따르는 순종이다. 만약 하나님의 훈계에도 불구하고 강퍅한 마음으로 버티며 불순종하면 결국은 지식 없는 자처럼 멸망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엘리후가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지식”은 앞에서 설명했던 내용이다. 바로 인간이 구현한 <도덕적 충족으로써의 의>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할 수 없고 대속의 의가 필요하다는 지식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훈계하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불순종하는 자는 그 지식이 없는 자와 같이 죽을 것이다.

이어서 엘리후는 추가설명을 하는데 순종하는 자를 ‘곤고한 자’라고 묘사하였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עני)에서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욥 36:15).

“곤고”로 번역된 ‘עני(아니)’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3a)와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 곤고한 자를 구원하신다. 이는 그의 귀를 열어 깨우치신 후에 복되게 회복시키시는 본질적인 변화이다.

 

(3) 욥의 현재 상황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훈계하시는 상황에 욥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설명한다. 욥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대항하며 불순종의 길을 가고 있다.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그대에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정의가 그대를 잡았나니”(욥 36:17).

그리고는 뜬금없이 분노를 조절하고 뇌물을 많이 받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그대는 분노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많은 뇌물(כפר)이 그대를 그릇된 길로 가게 할까 조심하라”(욥 36:18).

여기에서 “뇌물”로 번역된 ‘כפר(코페르)’는 일반적으로 ‘속전’의 의미이다.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כפר)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민 35:31).

엘리후의 예화 가운데 ‘대속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כפר)을 얻었다 하시리라”(욥 33:24).

그런데 18절에서 “뇌물”로 번역한 이유는 엘리후가 욥을 비판하고 있기에 뇌물을 받는 부정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문 어디에도 욥이 뇌물을 받았다고 추정할만한 내용이 없다. 문맥의 흐름 가운데 욥이 뇌물을 받았다고 지적하는 것은 너무나도 생뚱맞다.

이는 욥이 자녀들을 위해서도 번제를 드린 것처럼 제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속전’을 가리키는 것이 맞다. 그러나 욥기 33:24의 ‘속전’과 다른 점은 대속물을 준비한 주체가 다른 점이다. 욥은 자신이 준비하여 속전을 치렀고 엘리후의 예화에서는 하나님께서 속전을 발견하셨다. 따라서 위 구절은 엘리후가 욥에게 제사를 많이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만큼 대가를 치뤘다고 오해하지 말라고 충고한 것이다.

하나님의 훈계인 고난 가운데 인간은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하나님의 훈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악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악의 길에 머무르는 것이다. 엘리후는 이 두 가지 선택의 길에서 욥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라고 권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그대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욥 36:21).

여기에서 “이것”은 앞에 있는 “악”을 가리킨다. <개역개정>에서는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라고 했다. 이는 욥이 환난과 악의 선택의 기로에서 악을 선택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선과 악 혹은 순종과 불순종의 대비되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과 악 중에서 선택을 했다니 무슨 말인가? 또한 욥은 현재 환난 가운데 놓여 있다. 환난을 피해 악을 선택했다고 볼 수도 없다.

이는 “환난보다”의 히브리어 ‘אל־און(엘 아벤)’을 비교급 조사 ‘~보다’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본문에서 ‘אל־און(엘 아벤)’은 ‘환난으로부터’ 또는 ‘환난에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그대가 환난에서 이것(악)을 택하였느니라“(욥 36:21, 사역).

그러므로 본문은 욥이 현재 처한 환난 가운데 하나님의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길을 가고 있다는 말이다.

고난은 하나님의 훈계로써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오늘은 그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순종과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불순종이 있다는 엘리후의 주장을 살펴보았다. 다음 회는 엘리후의 이야기 마지막 시간이다. 그의 결론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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