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요셉 목사] 가족 이야기 (1) - 예하
[권요셉 목사] 가족 이야기 (1) - 예하
  • 권요셉 목사
  • 승인 2019.06.13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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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선교사의 치유적 글쓰기
예하와 친구들
▲예하와 친구들

밖에서 총소리와 포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예하의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트북으로 영화를 틀어주었다. 예하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지만 무섭지 않은 척 가만히 영화를 보았다.

쿠궁.

땅이 울렸다.

쿠구구구궁.

장갑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다다닥.

군인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예하는 이어폰을 꽂고 있었지만 너무도 적나라하게 땅으로 진동이 울려와서 대부분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예하가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이 힘들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내가 소리쳤다.

“앉아!”

창문 아래로 몸을 숙이고 있어야 했다. 총알이 날아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가까운 곳, 바로 집 앞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현지인들과 같은 집이어서 다행이었다. 외국인이라고 유별나게 좋은 집을 지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지금 생각해보면 막막하다.

예하 나이 11살이었다.

총격과 포격 속에서 영화를 보는 척 했지만 영화의 내용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하지만 울거나 보채거나 소리를 내지 않고 그저 영화를 보는 척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비명소리는 울림이 없으니까.

 

예하는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어른이 되었다.

애초에 남수단에, 그것도 정글 깊숙이 부르족에 들어온 건 예하의 의지가 아니었다. 부모의 의지에 불가피하게 따라왔을 뿐이었다. 어쩌면 이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예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창 투정 부릴 나이였지만 말라리아와 각종 병으로 죽어가는 부르족의 아이들을 보면서 투정을 부릴 수 있는 겨를이 없었다. 옷 하나 걸치지 못하고 고기 한점 먹기 힘든 부족 아이들과 만나고 함께 어울려 놀다 보니 한국 아이들이라면 충분히 투정 부릴 일들도 그저 감수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몹쓸 부모였다. 부족에 처음 들어갔을 때 모두가 피부색이 다른 우리를 경계했다. 어른들도 가까이 오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그때 우리가 내린 결정은 조그만 예하를 먼저 부족 아이들에게 접근시키는 것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부족 사람들의 경계심을 푸는 것이 무어보다도 우선시 되었다.

예하는 한걸음 한걸음씩 부족민들에게 다가갔다. 그 조그마한 예하를 보고도 부족민들은 도망가기 바빴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작은 예하를 보고도 부족민들이 경계를 풀지 않자 우리는 예하의 손에 사탕을 쥐어주고 가져다 주게 했다. 예하는 자기가 먼저 사탕을 먹으면서 부족의 아이들을 유혹하는 데 성공했고 예하의 그 행동들은 우리가 부족의 아이들과 가까워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예하는 부족의 아이들과 놀거나 화살을 만들어 쏘는 것을 연습했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화살이 아니라 정말로 살상력이 있는 화살이었다. 예하는 제법 화살을 쏠 줄 알게 되었고 종종 화살로 도마뱀을 사냥하기도 했다.

가끔 코브라나 살모사가 나타나면 내가 '팡가'라고 불리는 칼을 들고 달려가 잡아야 했다. 코브라나 살모사, 전갈들이 심심찮게 나타났다. 내가 뱀들을 잡는 모습을 몇 차례 보다 보니 예하는 뱀 잡는 게 아무것도 아닌 듯이 보였는지 뱀이 나타나면 자기도 칼을 들고 달려왔다. 나는 뱀이 무서운 게 아니라 예하가 뱀에게 달려가는 게 무서웠다.

우리 가족은 한 선교사님이 2m 정도 크기의 킹코브라를 잡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1m 정도 크기의 살모사가 집에 나타났다. 아내가 방안에 나타난 살모사를 보고 비명을 지르자 내가 달려가는데 예하가 먼저 팡가를 들고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예하의 손에서 팡가를 빼앗아 방으로 들어갔다. 살모사가 아내를 보고 있는 사이, 나는 살모사의 뒤에서 칼로 살모사의 목을 내리쳤다. 살모사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목이 잘린 상태의 살모사는 한참 동안 몸을 움직이며 피를 쏟아냈다. 지금 떠올려도 끔찍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뒤에 있던 예하가 살모사를 보더니 뭔가 실망한 듯이 말했다.

“쪼그마네.”

식은땀을 흘리던 나는 갑자기 맥이 풀렸다. 예하에게는 아프리카의 위기감이 너무 없었다.

 

주변에 병원이 없다 보니 말라리아와 장티푸스로 죽을뻔한 위기를 몇 차례나 넘겼지만 예하는 울거나 속상해하지 않고 엄마와 아빠를 믿어주었다.

“괜찮아질 거야.”

라고 말하면 정말로 그 말을 믿었다. 불안하지는 않아도 아픔은 있을 텐데 별로 내색하지 않았다.

교회에 사람들이 없을 때는 어른과 어린이들이 함께 예배했다. 그러나 교회에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어린이 예배와 어른 예배를 분리했다. 그런데 어린이 예배가 끝나고 나서도 어린이들이 돌아가지 않아서 어른들이 예배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곤란해하자 예하가 주변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엄마,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그리고 예하는 밖으로 나가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아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예배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 예하 덕분에 어른들이 모임을 가질 수가 있었다.

키우던 사슴과 강아지가 죽은 뒤에 묻어 주고, 망고나무에 올라가 망고를 따다 먹고, 강에서 목욕하고, 온몸이 모기 물린 채로 살아가고, 화장실을 만들기 전에는 정글 속으로 들어가 볼일을 보고. 지난 일들이기 때문에 지금 돌이켜보면 좋은 경험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이 경험으로 끝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 총성이 났을 때, 사람들은 내게 "전쟁이 났다,"고 전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와 예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 나름대로는 탈출할 결정을 하고 아내에게 빠져나갈 것을 제안했을 때, 아내는 부르족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예하에게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다.

그 뒤로 총성은 점점 가까워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예하에게 한 번도 탈출에 대한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다. 치열한 전투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한 번도 예하의 의사를 물어본 적이 없다. 그게 너무 마음에 걸린다. 치열한 전투 상황 속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탈출할 때 군인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나가지 못하게 막아설 때에도 예하는 당황하거나 울거나 보채지 않았다. 우리는 그냥 예하가 어른스러운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예하는 트라우마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심리상담사가 우리에게 예하의 상태를 정리해주었다.

“속에 어른이 있어요. 아이가 있어야 하는데. 언젠가 아이가 나올 겁니다. 나와야 하고요. 그 때 잘 받아주세요.”

억압. 예하는 어른스러웠던 게 아니라 ‘아이’가 억압되어 있었던 거다. 아이의 나이에 아이로 지내지 못했다. 지금 우리는 예하의 아이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 한국에 돌아온 지 2년이 되는 요즈음, 조금씩 아이가 나오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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