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강해9] “깨어라!” (계 3:1-6)
[요한계시록강해9] “깨어라!” (계 3:1-6)
  • 김상학 목사
  • 승인 2019.07.01 14: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산 성경제일교회 김상학 목사
▲안산 성경제일교회 김상학 목사

들어가는 말

신년 첫 시찰회가 “예하는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시찰회의 막내 목사인 김** 목사는 20년 동안 선배 목사님들을 통하여 받았던 은혜를 설교를 통하여 회고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교회 개척 때에 계단에 설치한 대형 거울을 늘 보게 된다면서 그 거울을 보면 자신의 외모뿐만 아니라 기증해 주신 선배의 마음을 알기에 자신의 마음까지도 성찰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모든 목사님들이 지난 시간을 회고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의 거울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말씀 묵상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기도를 통해서든지 자신을 돌아다 볼 수 있어야지요.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다면 도둑같이 임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늘 깨어 근신하며 경성하는 주의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1. 사데 교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데”는 3가지로 유명합니다. 첫째는 ‘팩톨루스’라는 금이 흐르는 강이 있습니다. 둘째는 삼면이 절벽인 곳에 성을 세웠기에 외적을 방어하기가 용이한 천연 요새입니다. 셋째는 ‘위대한 어머니 신인 ’시벨레‘를 모신 도시입니다. 이만하면 부러울 것이 없는 지상낙원 아닌가요?

그런데 그 유명한 것 때문에 무너진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됩니다. 그것 때문에 안주하고 나태에 빠진 게지요. 결국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알렉산더에 의해서 또 다시 점령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지진으로 인해 도시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금이 흐르는 강도, 천연 요세도, 시벨레 여신도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게지요. 이들의 게으름과 죄악이 심판을 가져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데의 도시 상황 가운데 복음은 저들에게 구원의 희망으로 자리 잡았을 겁니다. 전쟁으로 무너졌던 경험,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던 경험이 기독교 복음이 뿌리 내릴 수 있었던 단초가 된 것이지요.

지금 히말라야 산맥을 끼고 있는 네팔은 활발하게 복음이 전파되어 수도 카트만두에는 20%의 성도가 있을 정도라고 할 만큼 복음이 확산된 상태입니다. 그 이면에는 일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던 2015년 4월에 있었던 네팔 지진으로 선교사의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된 것과 그들의 믿던 에베레스트(초모랑마, 세계의 여신) 신이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겠지요.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일제의 식민 통치와 6.25 사변이라는 토양이 있었지요. 그 잿더미를 토양으로 하여 복음이 꽃을 피웠던 것입니다. 희망의 복음이 되었던 게지요. 사데에도 이런 상황이 복음을 뿌리 내리게 하였겠죠?

그렇지만 여기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악한 영이 반드시 역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데 도시에 뿌리 박혀 있는 악한 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는 부요하다. 나는 안전하다”는 안일하고 나태한 생각입니다. 그것 때문에 망했었지만 여전히 그 사고방식을 털어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 악한 영은 사데 교회에도 그대로 작용했습니다. 도시의 악한 영이 교회에도 작용하는 것입니다.

부요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건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에 안전한 건가요? 혹시 착각이라는 생각은 안 해 보았나요? 축복의 착각, 구원의 착각을 확신으로 잘못 알면 이는 굉장히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어떤 결과입니까?

3:1 하반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죽은 자”라고 선언하신 겁니다. “죽은 자로다”라는 의미를 살펴보면 더욱 더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죽은 시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름’으로 번역된 ‘오노마’는 ‘명성’, ‘평판’이란 뜻인데, 살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 명성이 한순간 추락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지요. 생명의 복음을 가졌으나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눈에 보이는 명성과 부요와 안일함에 빠져 있으면 점차 죽어가는 것이지요.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항상 깨어서 항상 성찰하며 회개하는 삶을 사는 자가 산 자요, 구원 받은 자인 겁니다. 구원받았다고 안전하다고 하면서 안주하는 사람은 죽은 자라는 겁니다.

 

2. 남은 것

그렇지만 다행스럽게 사데 교회가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어서 그나마 ‘남은 것’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3: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남은 것”이란 사데의 풍요나 안일함에 빠지지 않고 그들의 신앙을 지킨 그루터기와 같은 신앙인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신앙상태가 ‘온전치 못 하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지요(엡 4:13).

그러나 저들의 성장은 멈췄습니다. 아니 그 신앙이 급격히 퇴보, 추락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있는 그 신앙을 굳건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3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처음에 복음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첫 사랑을 잃었던 에베소 교회와 같은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남은 자”중에는 4절의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도 있습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다닐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흰옷은 어떤 옷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입니다. 우리에게 흰옷이 어울린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야 거룩하신 분이기에 당연히 흰옷이 어울리지만 우리는 죄인입니다.

어른들이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지런해야겠다.” 무슨 뜻입니까? 쉬이 더러워지니 빨래를 자주해야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아무나 흰옷을 입지 못 합니다. 부지런해야 그 흰 색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게을러도 김치 국물이 튄 자국, 볼펜 자국, 친구의 손 때… 금방 더러워지지요.

그런데 옷만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질도 더러워집니다. 누가 조금이라도 때를 묻히면 째려보게 되고, 짜증 부리게 되고, 싸우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닌 우리가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항상 깨어 있어서 자신을 성찰하여 회개하여 예수님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가 없어서 흰옷이 아니라 회개함으로 흰옷을 입는 것이지요.

그 ‘남은 자’들이 자신들이 처음 받았던 복음을 늘 묵상하면서 자신을 지키며 회개하며 깨어 있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옷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리고 혹시 더러워졌을 때에 얼마나 신속하게 자주 그 옷을 빨았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래야만 흰옷을 입을 수 있는 겁니다. 만일 자신이 깨끗하다고 여기면서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기를 게을리 한다면 이내 때에 찌들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자’란 항상 깨어 회개하는 자라야 되는 것입니다.

 

3. 깨어라.

3:3 하반절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주님은 사데 교회에 도둑같이 이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데 도시가 망했던 것도 도둑같이 침입했던 고레스나 알렉산더로 말미암아 무너졌지요. 급기야는 지진도 예고 없이 밀어닥쳤습니다. 천연 요새라고 믿고 있었던 삼면이 절벽이었던 도시였지만 그것만 믿고 깨어있지 않으면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천연요새에서 깨어 경성하였다면 고레스가 아니라 알렉산더가 왔더라도 무너뜨리지 못 했을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이 되었다면 그야말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성이었겠지요. 그러나 천연 요새라는 사실만 믿고 풍요를 즐길 때에 그 절벽에서 길을 찾아낸 적에 의해 뚫리고 만 것이지요. 그 어떤 절벽이라도 길은 있게 마련이니까요?

인수봉을 언뜻 보면 못 올라갈 절벽인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클라이머들이 길을 찾아서 올라가고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고요. 지금도 절벽을 볼 때마다 길을 찾는 습관이 제게 있습니다. 산악인들에게 제일 중요한 루트 화인딩(Route Finding)을 먼저 하게 되는 겁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도둑같이 이를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는 사데 절벽에 도둑처럼 길을 찾아 넘어와 사데를 무너뜨렸던 옛적의 뉘앙스가 깔려 있습니다. 그렇게 무너진 것처럼, 너희가 깨어 근신하여 경성하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깨어서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고, 혹시 더러워졌더라도 바로 깨닫고 세탁할 수 있습니다. 영적 부지런함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정말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죽은 자였었구나!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산 자가 되었구나!” 이전에 자신이 산 자인 줄 알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내 회개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은 자에서 산자가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게지요. 이런 사람이 이기는 자요. 이런 사람이 흰옷을 입기에 합당한 자입니다.

 

나가는 말

사데교회는 자신들이 가진 자랑이 오히려 자신들을 교만하게 했고 나태하게 했습니다. 도시의 악한 기운이 그대로 교회에 스며든 것입니다. 사데가 망했던 이유가 교회가 심판받는 이유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풍조에 같이 흐른 결과이지요. 썩은 고목은 세상 조류를 따라 같이 떠내려가지만 그 조류 속에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려 치고 올라갑니다. 심지어 폭포도 치고 올라갑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데 교회가 주는 교훈입니다.

3장 1절 서두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보좌 앞의 어린 양이십니다(계 5:6) 그리고 일곱 영은 보좌 앞의 일곱 등불, 즉 성령님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성부 하나님과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일곱 영이신 성령님의 장엄한 자리에서 흰옷을 입은 자와 더러운 옷을 입은 자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복을 입은 자와 입지 않은 자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인 게지요.

그때에 1절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하신 것처럼 일곱 등불의 빛 아래 모든 사람들의 상태는 여실히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에 흰옷을 입은 자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늘 말씀 앞에서 깨어있어 회개하며 자신을 지킨 자는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그 이름을 시인할 것이라고 하지요? 이 얼마나 큰 은혜 입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 구원 받은 줄 알고, 축복 받은 줄 알고 안일과 나태에 빠져 있는 자들의 이름은 그 생명책에서 지워질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상태를 잘 아십니다. 일곱 등불로써 우리를 살피십니다. 우리의 상태는 어떤지요? 우리 역시 온전치 못하지요? 하나님의 기준에 못 미치지요? 그렇다면 “깨어라” 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입니다.

우리가 받은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고 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데이트하는 주의 백성들입니다. 주와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죽은 자이나 실상은 산 자라고 하는 은혜를 누리는 주의 성도들이 되길 축원 합니다. 

 

-------------------------------

*김상학 목사는 백석신학교와 백석신학연구원을 졸업하고 안산 성경제일교회를 개척하여 23년째 섬기고 있다. 목회 10년차에 안산전도학교를 설립하였고 미자립교회 네트워크를 통해 안산시 복음화에 힘썼다. 목회 15년차, 교회 분열의 시련기를 거치면서 "암 발병과 함께 모든 사역을 내려놓고 기도하던 중, 한국교회의 교회성장운동의 폐단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서 성경강해설교학(MA) 과정을 거쳐 현재 일반대학원 신약신학(Th.M)을 전공하며 후반기 목회의 사역에 기쁨으로 매진하고 있다.


  • 서울특별시 중구 창경궁로 18-1 401-51호(예관동, 비즈헬프)
  • 대표전화 : 010-7551-3091
  • 팩스 : 0540-284-309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지숙
  • 법인명 :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 제호 :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 등록번호 : 서울 아 05303
  • 등록일 : 2018-06-15
  • 발행일 : 2018-07-01
  • 발행인 : 윤지숙
  • 편집인 : 윤지숙
  •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oshuayoon72@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