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원 목사] 욥기는 의인이 받는 고난의 문제인가?(34)
[황대원 목사] 욥기는 의인이 받는 고난의 문제인가?(34)
  • 황대원 목사
  • 승인 2019.08.2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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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의 주장을 최종 정리합니다.
▲팟캐스트 타브의 '바이블코어'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황대원 목사
▲팟캐스트 타브의 '바이블코어'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황대원 목사

[본문연구] “모든 사람의 손에 표를 주시어”(욥 37:7)의 의미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엘리후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 독특한 말을 한다. 그 구절은 다음이다.

“그가 모든 사람의 손에 표를 주시어(חתם) 모든 사람이 그가 지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욥 37:7).

이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손에 어떤 표식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손에 주신 표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런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표를 주시어”라는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표를 주시어”는 히브리어 ‘חתם(하탐)’을 번역한 결과인데 ‘חתם(하탐)’은 일반적으로 ‘봉인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חתם)”(욥 9:7).

“주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חתם)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욥 14:17).

‘חתם(하탐)’을 봉인하여 찍은 직인의 의미에서 “표”라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욥기 37:7의 다른 번역본들을 확인해보자.

<개역한글> “그가 각 사람의 손을 봉하시나니 이는 그 지으신 모든 사람으로 그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공동번역개정> “사람 손을 모조리 묶으시고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보게 하실 때”

욥기 37:7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어떤 특별한 표식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손을 봉인하셨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손을 묶으시다’ 정도가 적절한 번역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손을 묶으신 이유는 무엇일까? 손을 묶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능력을 제한하셨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37:7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능력에 한계를 두셔서 세상을 다스리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도록 하신다는 의미이다.

 

(4) 보응을 넘어서는 훈계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초월하여 교훈하신다. 설사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에게 동일한 시련의 훈계과정을 두신다고 하여도 이는 하나님의 높으신 경륜이기에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권능으로 높이 계시나니 누가 그 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누가 그를 위하여 그의 길을 정하였느냐 누가 말하기를 주께서 불의를 행하셨나이다 할 수 있으랴”(욥 36:22~23).

엘리후는 여태까지 이야기했던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 엘리후는 두 번째 변론에서 하나님께서 보응으로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이야기했다. 이는 욥과 세 친구들의 주장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엘리후가 같은 보응의 신학을 가지고 있는 욥과 세 친구들을 비난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아니다. 욥과 세 친구들의 보응의 신학과 엘리후의 보응의 신학은 차이점이 있다. 욥과 세 친구들은 보응이 결과로 세상에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보응의 섭리가 결과가 아니라 목적을 위한 방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감싸고 도시며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그는 땅과 육지 표면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시느니라 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하여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욥 37:12~13).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지 않도록 하셔서 가뭄으로 인해 인간에게 기근이 닥쳤다면 욥과 세 친구들은 그 인간이 어떤 잘못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주셨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지 않으신 이유가 인간의 잘못에 대한 심판의 결과로만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잘못을 깨우치기 위한 훈계일 수 있다. 이를 “징계를 위하여”라고 언급하였다.

또한 “땅을 위하여”라는 말은 세상의 질서를 위해서라는 의미로 보인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앞에서 예를 들었던 가뭄의 경우 인간의 입장에서는 생산물을 얻을 수 없는 좋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거듭된 작황에 지친 땅을 쉬게 하시려는 방편이실 수도 있다. 아니면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질병이나 해충의 번식을 막는 처방일 수도 있다.

이는 토지에 있어서 한 예를 들어 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데 있어서 인간의 지혜가 닿지 않는 영역은 너무도 많다. 그러하기에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데 보응의 단편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안녕과 조화를 고려하여 섭리하신다고 한 것이다.

“긍휼을 위하여”라고 한 말은 “징계를 위하여”의 반대 개념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다스림에는 “징계”와 같이 벌이나 훈계를 주시는 목적도 있다. 악인을 징계하시면 그 악인에 의해 고통 받던 이는 평화를 얻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다스림에는 “긍휼”에 의한 인애와 사랑의 결과들도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징계, 땅, 긍휼이라는 수단과 목적과 동기적인 다양한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한 개인이 섣부르게 단정 지을 수 없이 다양하고 오묘하다.

 

(5) 결론 : 엘리후가 이해한 욥의 고난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보다 자신이 의롭다고 한 점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욥의 의를 전면적으로 부인한 것은 아니다. 욥에게 의가 있지만 그것은 자기 행위의 온전함으로 이룬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엘리후가 말하고자 하는 의는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가 아니고 대속물에 의해 인정받는 의이다.

여기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고난은 인간을 깨우치고 돌이키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 깨우침의 핵심은 인간 스스로의 행위가 아닌 대속물에 의해 하나님 편으로부터 주어진 의가 인간에게 적용된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엘리후는 인간의 흥망성쇠가 보응의 결과로 여겨진 기존의 패러다임을 깨고 하나님께서 고난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고난은 악인과 의인 모두에게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통해 악인들은 멸망할 것이고, 의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게 될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우주적 주권으로 어떤 이는 징계하기 위하여, 어떤 이는 긍휼을 베풀기 위하여 고난조차 수단으로 삼아 다스리신다. 이는 인간에게서 참된 신앙을 이끌어내시고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것이다.

이상으로 엘리후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보았다. 다음 시간에는 욥기에서 이해하기 힘든 내용 중 하나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살펴보고 그 의중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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