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의 죽음] 첫째 마당: 죽음과 기억(1)
[나사렛 예수의 죽음] 첫째 마당: 죽음과 기억(1)
  • 김인철 목사(예슈아성서연구원)
  • 승인 2019.09.0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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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원문 대조와 네러티브 읽기의 유익을 설명하고 있는 김인철 목사(예슈아 성서연구원 대표)
▲ 예슈아 성서연구원 대표 김인철 목사

 

첫째 마당-죽음과 기억

죽은 자를 기억하는 행위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가치이다. 죽은 자는 단순히 없어진 사람이 아니라 생존자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을 기억할 수 있고, 그 기억을 확산시킬 수 있다.

 

I. 기억의 탄생

누군가의 죽음은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의 시작이다. 개인의 삶이 종결되는 순간, 그에 대한 기억이 시작된다. 그 기억은 추모 공간과 의례를 통해 공적으로 탄생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억은 지인들의 의식을 활동 공간으로 삼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기억은 대부분 사라지지만, 때로 전혀 낯선 사람들의 뇌리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생전에 영향력이 컸던 인물들에 대한 기억이 살아남는 방식이다.

그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확대 재생산된다. 개인의 기억을 넘어 집단적 신념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운 좋게 저술가나 화가의 관심을 끌면, 더 오래 생명력을 이어갈 수도 있다. 책이나 미술품의 형태로 형상화 되기 때문이다. 일단 형상화 된 기억은 복제와 저장 수단을 통해 상당 기간 생명을 이어 간다.1) 대중 매체나 교육 기관을 통해 확산 속도를 높여 갈 수도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사후에도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처럼 지중해 일대에 살았던 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죽음보다 두려워했던 것은 사후에 무 존재-잊혀진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은 단지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겨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사후 세계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고분 벽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컨대 그들은 사후에도 맛있는 음식-제물을 먹거나, 부부가 함께 ‘세네트’ 게임을 즐기고 있다.2) 파라오나 귀족들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부장품 ‘샤부티’는 사후 세계에도 종들을 부리며 살 수 있다는 관념을 보여준다.3) 사후 세계의 삶을 위해 시신을 미이라로 만드는 관습은, 그런 이유에서 통치자뿐 아니라 모든 이집트인에게 해당되었다. 사후 세계의 재판정에 있는 괴물 ‘암무트’는 유죄 판결 받은 영혼을 잡아 먹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죽은 자는 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죽은 다음 잊혀지는 것에 대한 공포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스라엘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사람이 죽어 지하세계-스올에 내려가더라도 여전히 삶을 이어간다고 믿었다. 뼈만 남은 채 약하게나마 숨 쉬고 말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지하세계에 내려간 자들의 삶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은 다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 하리로다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4)

죽은 자의 가족은 스올에 있는 고인이 굶주리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음식을 제물로 바치거나, 사후 세계에 필요한 부장품-식기, 램프 등을 무덤에 넣어 주어야 했다. 그런 이유로 고인을 공양할 아들은 반드시 필요했는데, 자손이 없다는 것은 끔찍한 저주를 의미했다.5) 죽은 자가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지 못할 뿐 아니라, 잊혀진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무덤에 돌멩이를 올려놓는 오늘날 유대인의 관습도,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상징한다. 무덤을 방문한 자들이 고인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악인에 대한 저주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악인이 받아야 할 형벌은 현세에서 당사자나 가족이 겪을 불행에 그치지 않는다. 다윗이 쓴 저주 시에는 악인을 향한 온갖 저주가 들어 있는데, 그 중 압권은 ‘잊혀진 존재’가 되게 해달라는 기원이다.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6) 

다윗보다 오래 전에 살았던 모세 또한 아말렉 민족에 대한 저주를 명령으로 남겼다.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7) 악인에 대한 저주와 반대로, 칭송 받아 마땅한 자에 대한 축복은, 오래도록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게 해달라는 기원으로 나타난다. 저명한 시편 저자 중의 한 사람인 고라 자손은 왕에 대한 축복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8) 또 다른 시편 저자는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의인을 이렇게 축복했다.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9)

 

II. 기억의 방식

예수에 대한 평가는 그의 죽음을 전후로 극명하게 갈렸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성전 권력자들은 예수를 로마의 반역자로 낙인 찍었다. 그렇게 낙인 찍는 것이 예수를 살해한 자신들의 속내를 감추는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무덤 순례를 시작하지 못하도록 군대를 동원했다. 그들이 총독 빌라도에게 무덤 경비를 요청했던 표면적 이유는 시신 탈취 방지였다. 그의 제자들이 시신을 탈취한 다음 예수가 부활했다고 선전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10) 그들은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무덤을 봉인하고 무장 병력을 배치했다.11)

하지만 성자의 무덤을 순례하는 유대인의 관습으로 볼 때, 그들의 의도는 예수에 대한 대중들의 기억 행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하니나 벤 도사의 무덤을 비롯 약 50여명의 랍비 및 예언자의 무덤을 순례한다. 대표적인 예가 랍비 시메온의 무덤 순례이다. 지금도 하시딤-종교적 유대인들은 라그 바오메르 명절에 갈릴리 북부 쯔파트 인근 메론에 있는 랍비 시메온 벤 요하이의 묘소를 찾는다.12)

라그 바오메르란 오순절 33일째 되는 날로서13), 바르 코크바의 군대가 로마 군대와의 전투에서 최초로 승리를 거둔 날이다. 당시에 봉화를 올려 승전 소식을 알리던 것을 기념하여, 이날 이스라엘 전국에서 불놀이 행사가 거행된다. 하시딤들은 랍비 시메온의 묘소를 참배하며, 3살 된 아들의 머리칼을 잘라 불에 던지고 남자 옷을 입혀 아빠의 어깨에 태운 후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이 날부터 그 아이는 남자로 취급 받는다.

무덤 순례의 또 다른 예로서, 티베리아에 있는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의 무덤을 들 수 있다. 그곳은 하시딤들의 순례로 언제나 북적거린다.14) 20세기말 뉴욕 브루클린에서 세상을 떠난 루바비치의 레베 무덤 순례도 빼놓을 수 없다.15) 메시아로 추앙 받던 그가 죽자, 일부 유대인들은 3일 만에 부활할 것을 믿으면서 무덤을 지키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무덤은 미국의 하시딤들이 즐겨 찾는 순례지이다.

대부분 갈릴리 출신인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자 겁에 질렸다. 장례도 산헤드린 대 공회 의원이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의 도움을 받아 겨우 치렀을 정도였다. 예루살렘에 머무는 무교절16) 기간이기도 했지만, 제자들은 갈릴리로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있었다. 스승의 시체를 탈취한다든가 하는 시도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더구나 예수의 시신은 안전한 곳에 매장되어 있었으며, 성전 권력자들이 보낸 무장 병력들이 무덤 돌문을 지키고 있었다. 예수의 시신에 향을 더 뿌리기 원했던 여인들도 그 점을 걱정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라고 말했었다.17)

복음서에 기록된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예수의 무덤은 나사렛 파 유대교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었을 것이다. 극적인 사건이란 매장된 지 사흘 만에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는 채 발견된 것과, 다시 살아난 예수를 만났다는 다수 목격자들의 증언이 줄을 이었다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제자들도 갈릴리로 돌아가기 전 다시 살아난 예수를 집단적으로 목격했다고 기록했다. 갈릴리로 돌아간 이후에도 제자들은 예수의 현현을 경험했으며, 함께 식사하거나 그를 경배하기도 했다. 여기서부터 생전의 예수를 기억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전개된다. 더 이상 무덤은 예수를 기억하는 장소가 될 수 없었다. 그가 죽음을 이기고 무덤에서 걸어 나와 버렸기 때문이다. 무덤은 잠시 머물렀던 장소였을 뿐, 예수는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어야 했다.18)

예수를 기억하는 최초의 소박한 방식은 빵과 포도주로 그의 죽음을 기리는 것이었다.19) 여기서 빵은 예수의 살을, 포도주는 피를 상징한다. 성찬이라고 부르는 그 예식의 실천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집단의 기억이 공유되고 확산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탁월한 전도자였던 사도 바울은 그 예식의 본질이 기억의 전달에 있음을 설파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20) 

반 세기도 채 되기 전에, 도그마화 된 예수 죽음의 기억이 세대와 공간을 넘어 확산되고 있었다. 여기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뚜렷이 구별되는 부분은, 창시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이다. 불교의 창시자 싯타르타나 이슬람교의 창시자 모하메드의 죽음은 그들 종교의 교리 체계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죽음을 말하지 않아도 종교적 진리를 전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을 빼버리고 기독교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이 4 복음서에서 예수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 분량적으로 1/3 이상이나 되는 이유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복음서는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씌어진 책들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반복적으로 예고 했으며, 죽음과 관련해서 그에게 일어난 일들은 모두 메시아 예언의 성취로 해석되었다. 나사렛 예수의 죽음을 정교한 필치로 소개한다는 점에서, 4 복음서가 빵과 포도주의 예식보다 훨씬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마도 4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죽음 관련 기록들은 성찬 예식 때 육성으로 선포되던 내용일 것이다.

 

III. 기억의 왜곡

기억은 어떤 동기에서든, 어느 방향으로든 왜곡될 수 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기억의 왜곡에는 분명한 동기가 작용한다. 예를 들어 영지주의 문헌은 예수의 죽음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기억한다. 그 문헌들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처형된 자는 예수의 대리인이었거나, 그리스도의 영에 씌었던 예수라는 인물이었을 뿐이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의 죽음을 부정했던 것은, 모든 인간을 신 플라톤주의에 입각한 이원론의 관점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부 지식인들은 영지주의 관점이 기독교의 원류였던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문헌도 영지주의 기독교가 원류였음을 입증하지 않는다.21) 오히려 대부분 영지주의 문헌들의 기록 연대는 복음서보다 후대의 것이다. 그런데 영지주의 기독교에서 핵심적 위치는 예수가 아니라 신비한 영적 지식 체계이다. 거기에서 구약의 메시아 예언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예수의 죽음 또한 육체에 대한 영혼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해프닝이다. 어쨌거나 영지주의 문헌들이 묘사하는 예수는 영지주의적으로 해석된 예수의 기억일 뿐이다.

<베드로 복음서>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외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를 영지주의적으로 해석한다. 예수의 가현적 육체가 그리스도의 영을 향해 “나의 영이시여, 나의 영이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친 것으로 설명한다.

<베드로 묵시록>은 십자가에 달린 가현적 예수와 신적 존재인 예수를 구분한다.

“너는 나무에 매달려 기뻐하며 웃는 자를 보느냐, 그는 살아있는 예수니라. 그러나 저들이 못을 박은 두 손과 발을 가진 이 자는 그의 육체 부분이니, 이 자는 수치를 당하는 대리적 존재이며, 모습이 닮은 자니라. 그와 나를 보라”

<마리아 복음서>는 예수의 부활을 영적 환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막달라 마리아는 영적 직관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를 본 것으로 설명한다.

나그 하마디에서 발견된 <부활론>은 한 영지주의 교사가 그의 학생 레지노스에게 보낸 편지인데, 부활이 환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어떤 것이고, 오히려 이 세상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부활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의 드러남이며....새로움으로의 변형(metabole)이다.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영적으로 생동하게 된다. 이것은 당신이 지금 곧바로 죽음으로부터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활론>에 의하면 부활은 언제나 이미 부활한 것의 드러남이다(9:3-4). 그런 의미에서 “너는 이미 부활했다(10:15)”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살아있는 몸의 지체들은 눈에 보이는 몸의 지체들 속에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빌립 복음서>에는 사후의 부활을 믿는 견해를 비웃고 있다.

“먼저 죽고 난 다음에 다시 살아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틀렸다....죽고 나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부활해야만 한다”

<가룟유다 복음서>에는 유다가 예수를 배반할 일에 대해 예수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너는 그들 모두를 능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나를 옷처럼 둘러싸고 있는 그 남자를 희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은 유다가 예수를 팔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인류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영지주의자들에 의하면 십자가는 천상계와 지상계를 가로지르는 심판대이다.

즉, 예수의 육체라고 할지라도 쓸모 없는 것이기에 죽음의 심판을 통해 벗어버려야 했다면, 일반 사람들의 육체는 더욱 쓸모 없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룟 유다는 예수 육체의 가치 없음을 드러내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하다고 한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기억의 왜곡은 유대교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로마 제국은4세기에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꾸준히 유대인들을 박해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예수는 자신들을 박해하는 기독교의 창시자일 뿐이다. 왜곡된 기억의 하나는 <예수의 생애>(Toledoth Yeshu)라는 책자에 나온다. 이 책자에 의하면 예수는 종려나무 줄기에 매달려 죽었으며, 무덤에 매장된 후 한 동산지기가 그의 시체를 옮겨서 수로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제자들이 스승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고 부활을 선포했으나, 랍비 탄추마가 그 시신을 발견하여 속임수를 폭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랍비 탄추마가 활동했던 시기는 5세기이며, 이 책자가 만들어진 시기는 15세기이다. 나사렛 예수보다 400년 가량 늦게 산 인물이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것부터 역사적 신빙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이 책자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했다고 하기 보다, 15세기 유대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편이 낫다.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증오는 저주로 표출된다.

예수의 히브리어 이름은 ‘예슈아ישוע))’인데, ‘예슈즈(ישוז)’라고 바꾸어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시 109편 13절을 가지고 만든 이 말은 ‘그의 이름과 그의 기억이 사라지게 하소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마흐 쉐모 뵈 지크로’라는 문장의 네 단어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말인 것이다.22)

기억의 왜곡은 공관 복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23) 예컨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반 유대주의(anti-Semitism)적 표현이 공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 중에서 마태와 마가는 누가보다 더 반 유대주의적 성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마태와 마가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모독한 사람들에 군중과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시킨다.24) 그러나 누가는 종교 지도자들이 모독할 때, 군중들은 그저 지켜보았다고 기록했다.25) 누가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도한 군중들이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고 썼지만, 마태와 마가는 생략했다.26)

마태와 마가는 백성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신 포도주를 주며 조롱했다고 썼지만, 누가는 군인들이 한 짓으로 묘사했다.27) 그러나 누가복음도 반 유대주의 성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풀어 주라고 외친 사람들에 백성을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28)

공관복음에 나오는 반 유대주의적 표현의 강도가 약간씩 다른 이유를 데이비드 플루서(David Flusser)는 저작 시기의 차이에서 찾는다. 이를테면 예수의 추종자들이 유대 사회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할 무렵에 씌어진 마태복음이 가장 반 유대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29) 그의 가설이 타당하게 보이는 것은, 가장 마지막에 씌어진 요한복음이 가장 반 유대주의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반대자들을 특정 부류가 아닌 ‘유대인’으로 통칭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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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평화의 소녀 상은 일본군 성 노예로 끌려갔던 한국인 여성들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특이하게도 이 소녀 상은 아직 소수의 생존자가 있는 동안에 설치되었다. 일본 정부의 적극적 방해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소녀 상은 미국을 비롯 세계 곳곳에서 전시 혹은 설치 중이다.

2) 체스처럼 판 위에 놓인 도구들을 가지고 겨루는 게임이다.

3) 샤부티는 ‘대답하는 자’라는 뜻이며, 사후세계에서 주인 대신 일해야 하는 종들의 목각인형을 가리킨다.

4) 사 14:10-11. 여기서 스올은 지하 세계를 가리키며, 지렁이와 구더기는 제물을 받지 못한 자가 먹어야 할 음식이다. 이 예언은 스올에 내려간 바벨론 왕이 잊혀진 존재가 될 것을 보여준다.

5)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사후에 자신을 기억해줄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며 생전에 스스로 비석을 세웠다(삼하 18:18).

6) 시 109: 13,15.

7) 신 25:19.

8) 시 45:17.

9) 시 112:6.

10) 1세기 로마 제국 곳곳에는 무덤 도굴꾼들이 판을 쳤다. 5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시체를 훔치는 등의 도굴 행위에 대해 사형을 언도한다는 칙령이 새겨진 명문이 1878년 나사렛에서 발견되었다.

11) 마 27:62-66.

12) 랍비 시메온 벤 요하이는 바르 코크바 항쟁(132-135)의 정신적 지주였던 랍비 아키바의 제자였으며, 미쉬나 편집자였던 랍비 유다 하 나시(135-220)의 스승이었다.

13) 히브리어 철자 라메드(ל)의 숫자 값은 30이며, 기멜(ג)의 숫자 값은 3이다. 이 둘을 합쳐서 ‘라그(לג)’라고 부르는 것이다.

14)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제사 중심의 유대교를 율법 연구와 실천의 유대교로 전환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랍비이다. 그는 로마와의 항쟁을 반대하여 베스파시아누스 장군과 협상을 시도했으며, 율법 실천을 위한 가르침에 힘을 쏟았다. 유대인들은 종종 그를 마사다 결사항쟁 지도자 엘레아자르 벤 야이르와 비교하며, 누구의 길을 따르는 것이 옳은가를 토론하곤 한다. 역사적으로 그는 변절자 취급을 받았으며, 그런 이유로 업적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15) 본명은 메나헴 멘델 슈니어손(1902-1995)이며, 그가 태어났던 백 러시아의 마을 이름을 따라 루바비치의 레베라고 부른다. 레베는 이디쉬어로 랍비를 가리키는데, 그는 선교에 초점을 맞춘 하시딤 집단인 하바드(Chabad) 공동체의 7대 레베였다. 그는 생전에 약 8만 시간의 강의를 했으며, 2,100개의 소 논문을 편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Yanki Tauber, The Inside Story, vol I Genesis, Meaningful Life Center, p24). 그의 대표작은 모세 오경에 대한 주석의 일종인 5권짜리 <Chumash>, kol Menachem, 2003-8이다.

16) ‘하그 하마쪼트’라고 부르는 무교절은 유대인의 삼 대 명절로서, 일주일 동안 발효시키지 않은 빵을 먹는다. 그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 날이 ‘페싸흐’라고 부르는 ‘유월절’이다. 이 날에 모든 유대인은 성전에 와서 어린 양을 잡고, 집에 가져가서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 이 풍습은 70년 성전 파괴와 함께 사라졌다. 공교롭게도 유월절 양 잡는 시간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기 때문에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부른다.

17) 막 16:1-3.

18) 어떤 성자나 종교 창시자의 무덤을 성역화하는 이유는 그곳이 삶을 마감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잠시 머물렀거나 통과했던 장소까지 크게 기념하지는 않는다.

19) 놀랍게도 예수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자신을 기억하는 의식으로서의 성찬을 제정했다(눅 22:19-20).

20) 고전 11:26.

21) 1898 옥시린쿠스에서 발견된 ‘예수의 어록’이나, 1945년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도마복음서’는 영지주의 관점에서 재해석된 예수에 관한 기억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예수가 살았던 1세기 유대사회의 통념이나 인식과 매우 동떨어진 것이다. 그 문헌들이 고대 이집트 지역에서 발견된 것도, 신 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의 활동 무대가 알렉산드리아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22) 이마흐(ימח) 쉐모(שמו) 뵈(ו) 지크로(זכרו)의 첫 글자를 따서 읽으면 ‘예슈즈’가 된다.

23)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을 공관복음(synoptic Gospel)이라고 부른다.

24) 마 27:39-42;막 15:29-31.

25) 눅 23:35.

26) 눅 23:48.

27) 마 27:47-49;막 15:35-36;눅 23:36-37.

28) 마 27:20-26;막 15:6-15;눅 23:13-25.

29) David Flusser, “The crucified one and the Jews”, in the Judaism and the Origins of Christianity, Magnes Press, Jerusalem, 1988, pp 575-87; 김인철, 알기 쉬운 복음서의 난제들 101, 그리심, 2016, 63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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