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이야기] 1. 연재를 시작하며
[한국교회사 이야기] 1. 연재를 시작하며
  • 홍인표 목사(백석대 한국교회사 Ph.D)
  • 승인 2019.09.17 0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인표 목사(백석대 역사신학 Ph.D)
홍인표 목사(백석대 역사신학 Ph.D)는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정리해 최근 『여성과 한국교회』(CLC, 2019. 5)의 단행본을 출간했다. 

한국교회사는 무엇일까요? 한국교회사는 어떤 학문일까요? 한국교회사를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한국근현대사로서의 교회사입니다. 둘째, 역사신학으로서의 한국교회사입니다. 오늘은 먼저 한국근현대사로서의 한국교회사에 대해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한국근현대사로서의 교회사

한국교회사는 크게 볼 때, 한국근현대사의 한 분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한국근현대사에서 한국교회사를 제거한다면 한국근현대사 자체가 성립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긍정적이든 혹은 부정적이든 한국교회가 한국근현대사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선교사가 입국한 것은 1885년 부활절 새벽이었습니다. 이들은 공식적인 선교사 신분, 즉 목사 안수를 받은 목회자 선교사로 들어왔습니다. 장로교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감리교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가 그들입니다. 그러나 사실 두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1884920일, 알렌(Horace N. Allen) 선교사가 먼저 입국했습니다. 그는 선교사라기보다는 의사 신분으로 들어왔습니다. 물론 그의 목적은 선교에 있었지만 말입니다. 저는 선교사들을 통해 기독교가 한국근현대사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크게 세 가지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근대문화 유입에 한국 기독교의 역할이 참으로 지대했다는 점입니다. 알렌이 한반도에 입국한지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은 1884124일 갑신정변이 발생했을 때, 명성왕후의 조카인 민영익(그는 중도개화파의 후원자로서 급진개화파와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이 자객의 칼을 맞고 심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무려 13번에 걸쳐 칼을 맞았습니다. 그 때 어의(御醫)들은 죽어가는 그 앞에서 어떤 의술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외과의사인 알렌이 그를 살려냄으로써 황실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로인해 조선 선교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습니다.

고종이 알렌에게 병원건물을 하사하고 광혜원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했습니다. 이를 시발점으로 선교사들은 고종 황제로부터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허락받 서양의술로 백성들을 치료하고 영어, 수학, 지리 등을 비롯한 서양학문을 가르치게 됩니다. 이는 1889년 한반도에서의 공식적으로 기독교 전파의 자유가 허락 될 때까지 백성들에게 복음을 소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으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이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사실 당시 조선 백성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서양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이 받고 있는 의술과 교육의 시작이 바로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서양문화의 유입이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선교 초기 선교사들은 서양문화의 첨병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둘째, 봉건질서 해체에도 한국 기독교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신앙은 보수적이었습니다(이들 대부분은 미국인들이었습니다). 사회개혁 보다는 복음전파를 통한 영혼구원에 많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개혁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급진적인 사회개혁에 관심을 두지는 않고 복음전파를 통한 개인의 회심에 따른 점진적인 사회개혁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반도에서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한반도에서는 급진적인 사회개혁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봉건질서의 흔들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한반도에서 만연하고 있는 신분 차별, 남녀 차별이 성경에서 볼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의 가르침은 당시 한반도의 사회 질서를 급진적으로 변혁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급진적인 사회 변혁 세력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1898년 한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조선의 (유교) 스승들은 여자가 남자보다 못하다고 가르쳤다. 기독교는 이를 정면으로 부인 함으로써 충돌이 있게 된다. 이들은 어떤 사람은 다른 이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가르치는데 우리는 역시 여기에 동의하지 못한다.

1894년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양반 신분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남겼습니다.

넉 달 전 나는 이 사랑방에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교인들이 모여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나 는 기분이 매우 언짢아 똑바로 편히 앉았었지만, 얼마 후 나도 무릎을 꿇기 시작했는데, 부끄러운 마음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하나님은 나에게 믿는 마음을 주신 것이다. 내 친구 들은 모두 내가 미쳤다고 말하면서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러나 참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 은 미쳐버린 징조가 아니다. 사실 나는 양반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는 양반으로, 또 는 어떤 이는 상놈으로 만드시지 않았다. 인간들이 그러한 구분을 지은 것이다. 하나님께 서는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드시었다.

이 글에는 사랑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랑방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방은 본래 양반 계급의 성인 남자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방에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혁명적인 사회 변화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사랑방 예배 모임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언급된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와 개종한 양반 신분 한 사람의 고백에서 당시 선교사들의 가르침이 한반도에서 급진적인 사회 변혁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과 이들 선교사들에게 배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급진적인 사회변혁 세력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때로부터 시간이 지난 1920년대의 기록이지만 당시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쳤던 미국인 선교사인 사우업(한국 이름)의 글 한 대목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남편과 아내) 이 두 사람 중에 여자가 더 연약하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후로부터 여자 가 남자에게 종의 대우를 받았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본뜻이 아니라, 예수의 복음이 들어가 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 뜻을 깨달아 알고 여자의 지위를 이전보다 높게 대접하였으니, 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퍼지는 결과 가운데 한 가지 큰 결과가 되는 것이니라.

사실 사우업(Charles E. Sharp)이 이 말을 한 1920년대는 19세기 말과 달리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앙이 보수화되던 시기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의 여성인식에 대한 보수성이 대두된 시기였습니다(당시 한국 보수신학의 거두였던 박형룡은 1930년대 초 하나님께서 여필종부의 법칙을 내리셨다라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19세기 말 개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시각에서 매우 고루한 시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한반도의 봉건질서는 이미 무너지고 19세기 말과 비교해 볼 때 여성의 지위가 상당이 발전된 시기였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보편적으로 여성에 대해 진보적인 시각을 가졌지만,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일부는 보수적인 시각을 가졌습니다. 한국교회는 19세기 말 한반도의 봉건질서를 무너뜨리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지만, 1920-30년대에는 교회 내에서 새로운 수직 질서를 세우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셋째, 정치활동에 있어서도 한국 기독교의 역할은 간과할 수 없습니다. 19세기 말 개종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사회의 중심세력이 아니었습니다. 양반 신분 가운데는 권력에서 비교적 주변부에 있는 이들이었고(기득권층이 아니었고), 그 외에는 평안도 지역 중심 자립적 중산층이 있었고, 심지어 사회의 하층민들도 적지 않았습니다(당시 등장하는 여성 지도자들의 경우 사회의 하층민이거나 소외 계층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선교사들과의 교분(交分)을 통해 서양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남성들의 경우 국왕인 고종의 허락을 받아 1886년 6월 8일 설립된 배재학당에서 양반계층 자제들이 입신양명을 위해 근대학문(특히 영어)을 배우기 위해 모였지만(물론 1886년 5월 11일 선교사 언더우드가 고아들을 대상으로 ‘언더우드학교’를 열었습니다. 이는 양반 자제들이 입신양명을 위해 입학한 배재학당과 성격이 매우 달랐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독립운동가이자 유명한 정치 지도자였던 김규식 선생님이 배출되었습니다).

1886531일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에 의해 시작된 이화학당(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 북장로교 선교사 엘러즈에 의해 시작된 정동여학당의 경우 처음 학생들이 고아이거나 과부와 첩 같은 소외계층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학교에서 교육받은 남성들과 여성들은 당대의 지성인으로 성장하였고 이후 한국사회의 지도자로 성장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초기 기독교는 종교 공동체 이상의 역할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일제의 무단통치로 조선 사람들은 종교 조직과 활동 외에는 집회, 결사, 언론 등 기본적인 자유를 모두 박탈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나라 잃은 조선 사람들이 모여서 아픈 가슴을 매만져 주는 곳, 다양한 정보를 교환하는 곳, 일제의 식민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여러 사회, 정치 운동의 모의처가 연락망으로서 기능도 하였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매일 새벽 기도회, 주일 낮 예배와 저녁기도회는 물론 수요일 저녁기도회까지 일주일에 열 차례나 모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외 부흥사경회 모임도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사회, 정치 조직과 활동을 금지 당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예배 및 성경 공부를 목적으로 모인 모임이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정치적 기능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선교사들조차 일제를 골리앗에 빗대고 조선을 다윗에 빗댐으로써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설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선교사들이 그러한 설교를 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일제 식민당국은 한국 기독교 공동체를 반일독립운동의 소굴로 보았습니다. 당시 한 서양인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습니다.

일본 경찰이 교회로 몰려드는 크리스천 무리를 보고 이들은 왜 이렇게 자주 모이고 또 대 체 모여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성가시게 알려고 하였다. · · · 수많은 무리가 모여 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 앞서 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와 같은 찬송가를 함께 부르고, 그리고 난 다음 · · · 선교사 죠지 맥퀸이 뜻이 정당하고 마 음이 순수한 사람은 약할지라도 힘센 자를 능히 이길 수 있다는 전래의 교훈을 강조하면 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이것은 반역적 가르침이라 하여 즉각 식민당국 에 보고되었다. 왜냐하면 맥큔이 다윗이 연약한 조선사람들이고 골리앗이 힘 있는 일본사 람으로 상징화시켜 가르치려 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 · · 조선에 있는 일본경찰은 조 선교회의 엄청난 조직이 반일혁명의 온상이라고 항상 생각하였고, 그래서 방심치 않고 감시하였다. 이른바 1910년과 1911년의 백만구령운동이 이러한 의식을 더욱 더 강화시켜 주었다.

1911105인 사건은 일제가 한국교회를 말살하려고 획책한 유명한 사건입니다. 1910년 북간도(만주 북부지역)에서 독립운동에 힘쓰던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이 독립 운동 자금을 걷기 위해 황해도 재령에 왔다가 밀고로 인해 체포된 일이 있었습니다. 일제는 이 일을 한국교회 말살을 위한 기회로 삼아 거대한 음모를 획책했는데, 그것이 105인 사건입니다. 총독 데라우치를 암살하기 위해 수많은 한국인 지도자들이 연류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제는 이를 내란음모 사건으로 취급하려고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어떤 분은 고문으로 돌아가셨고 어떤 분은 일생 동안 병고에 시달렸습니다. 일제 당국은 105인 사건에 연류된 많은 분들에게 실형을 내렸지만, 곧 이 사건은 조작된 것임이 드러났기 때문에 흐지부지 종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형, 무기 등을 선고했지만, 곧 한 분, 한 분 풀려났고 19152월 까지는 모든 분들이 풀려나왔습니다. 이 사건에 연류 된 분들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일제가 한국교회를 어떻게 인식하였는지 이 사건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1919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3.1 만세 시위를 이끈 중심인물들이 평양 숭실전문, 서울 연희전문, 이화여전 등 선교사들이 설립한 미션 스쿨의 학생들이었음은 물론입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한반도 모든 단체 가운데서 가장 고급 인력을 많이 보유한 단체였고 그만큼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강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외에도 해방 후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할 때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기독교인이었음은 익히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전체 인구 중 기독교인 비율은 높지 않았지만, 정치 지도자들을 비롯한 지식인 계층, 각 사회의 지도 계층에는 기독교인들의 비율이 높았고 그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정치활동에서 긍정적인 역할만 한 것은 아닙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교회는 19세기 말부터 오늘날 까지 한국 정치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말 중에는 정교분리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끊임없이 정치활동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치활동에 일절 무관심 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방향으로 정치참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다음에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한국근현대사에서 한국교회사를 제거한다면 한국근현대사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다양하지만 여기에서 저는 개화기 서양문화의 유입에서 기독교의 역할, 봉건질서 해체에 한국 기독교의 역할 그리고 정치활동에서 한국 기독교의 역할을 대표적으로 언급함으로써 한국 근현대사에서 한국교회사를 소외 시킬 수 없음을 말씀 드린 것입니다. 물론 현실은 매우 소외되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우리 현대사의 굽이굽이마다 큰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현대사에서 온당한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 앞에 놓인 과제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한국근현대사 영역에서의 한국 교회사를 말씀드렸습니다. 여기까지만 언급한다면 사실 한국교회사와 일반 한국 근현대사에는 구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사에는 일반 역사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신학으로서의 교회사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시간에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 홍인표 목사는 충남대학교에서 음악과(성악 전공)을 졸업하고 청주시립합창단 상임단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침례신학대학교 신대원(M.Div)과 일반대학원(Th.M)를 거쳐 숭실대학교 대학원(Ph.D. Cand.)에서 기독교 역사를, 백석대 기독교전문대학원에서 역사신학(한국교회사)을 전공해 장동민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의 논문 제목은 "선교 초기 한국교회 여권의식에 대한 연구: 구한말과 1920년~1930년대를 중심으로"이다. 현재 서울 개혁총회신학연구원 등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며 목회 현장에서 어린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다. 또한 신학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한다는 측면에서 동심과 공통정이 있다고 믿는 홍 목사는 아동문학에도 관심을 갖고 동시 및 동요 노랫말을 창작하며 발표해 왔다.


  • 서울특별시 중구 창경궁로 18-1 401-51호(예관동, 비즈헬프)
  • 대표전화 : 010-7551-3091
  • 팩스 : 0540-284-309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지숙
  • 법인명 :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 제호 :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 등록번호 : 서울 아 05303
  • 등록일 : 2018-06-15
  • 발행일 : 2018-07-01
  • 발행인 : 윤지숙
  • 편집인 : 윤지숙
  •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oshuayoon72@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