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의 죽음] 둘째마당: 갈릴리의 예언자
[나사렛 예수의 죽음] 둘째마당: 갈릴리의 예언자
  • 김인철 목사(예슈아성서연구원)
  • 승인 2019.09.16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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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원문 대조와 네러티브 읽기의 유익을 설명하고 있는 김인철 목사(예슈아 성서연구원 대표)
▲예슈아 성서연구원 대표 김인철 목사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은 대개 갈릴리를 낭만적으로 상상하게 된다. 산으로 둘러 싸여 넓게 펼쳐진 호수1),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 천명이 배불리 먹은 뱃새다 들판, 정신질환자에게서 나간 귀신에 씌어 호수로 내달은 수 백마리 돼지 떼… 그런 상상을 일으키는 데는 몇몇 찬송가나 복음성가 노랫말도 한 몫을 한다. 하지만 갈릴리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다. 갈릴리 사람이란 말은 종종 차별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 말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는 ‘촌뜨기’를, 로마 총독들에게는 잠재적 테러리스트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예수가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쳤을 때 유대인들이,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며 놀라워한 사실을 들 수있다(요 7:15).2) 갈릴리 사람들이 토라를 모른다고 얕잡아 보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총독 빌라도는 성전에서 제사 드리던 갈릴리인 몇 명을 무참히 살해했는데, 갈릴리에서 왔다는 이유가 전부였다.3)

 

I. 빛을 잃은 땅

기원전 8세기에 활동했던 예언자 이사야는 갈릴리 지역의 미래를 이렇게 노래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4) 

기원후 1세기에 이르러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활동한 것을 이사야 예언의 성취로 보았다. 갈릴리 지역이 빛을 잃었다는 것은, 디글랏 빌레셀(티클랏 필레셀) III(B.C.E. 745-727)가 기원전 732년 이 지역을 앗수르(네오 앗시리아) 영토로 편입시킨 사건을 가리킨다. 그 이전까지 갈릴리 지역은 아셀,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지파에게 할당된 이스라엘 영토였다. 네오 앗시리아가 속주로 편입시킨 이후 갈릴리는 빛을 잃었다.

한 번 외국에 빼앗긴 갈릴리를 이스라엘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기까지 500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기원전 536년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다음에도 여전히 주변 강대국의 소유였다가, 기원전 2세기 마카베오 가문이 실권을 잡은 이후에야 조금씩 주권을 회복하게 되었다.5) 이 과정에서 갈릴리는 여러 민족이 함께 사는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곳 주민들은 외침을 자주 겪으면서,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 갈릴리인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정체성을 가지게 된 데에는 지리 역사적 특성도 한 몫을 했다. 예컨대 유대 지방의 유대인에게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처럼 북 이스라엘 왕국이었던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었다. 다만 사마리아인처럼 혼혈 족이 아니라, 강제 이주된 유대인들이라는 점에서 조금 낫게 취급되었을 뿐이었다.

지형적으로도 이스르엘 골짜기를 중심으로 갈릴리 산악 지대는 남쪽 지역과 구분된다.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는 예수에 대한 평가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예수의 숨은 제자였던 니고데모는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라며, 동료 바리새인들의 편견을 지적했다.6) 그때 그들은 니고데모마저 싸잡아 비판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7) 갈릴인들을 업신여긴 예는 탈무드에도 나온다.8)

갈릴리는 북쪽 레바논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넉넉한 자체 강우량으로 물이 풍부한 곳이다. 게다가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현무암이 풍화되어 비옥한 농토까지 형성되었다. 그 결과 밀, 올리브, 포도와 같은 작물들을 재배했고, 주변 국가에 농산물을 수출할 수 있었다. 양과 소를 기르는 목축업도 성행했다. 갈릴리 호수에서 잡히는 생선들은, 막달라(믹달)에 세워진 가공공장을 통해 외지로 수출되었다.

무엇보다 갈릴리는 페니키아나 수리아에서 유대나 애굽으로 가는 국제적 무역로가 있어서, 여행자들과 대상들에게서 받는 통행세 수입도 많았다. 갈릴리에서 걷히는 연간 세금은 1,500,000 데나리온(약 1,200억원)이나 되었다고 한다. 예수 당시에 갈릴리에는 약 350,000 명의 인구가 있었다고 생각되며, 많은 수의 노예들과 함께 유대인들이 100,000 명 가량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심한 빈부격차로 소수의 부자 외 대부분의 갈릴리인들은 가난했다. 상류층은 대 토지를 소유한 귀족9), 무역상인과 납세임차인들이었다.10) 중간층은 수공업자, 소상인, 소 농민, 어부들이고, 하층은 소작농, 일일 노동자, 종, 거지, 병자였다. 어업에 종사하는 자영업자들은 그나마 유족했지만, 소 농민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했다. 밀 농사를 짓는 소 농민의 경우, 7인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년에 217 데나리온이 필요했다.11)

하지만 실제 벌어들이는 금액은 150 데나리온 정도였다고 한다. 이 정도 수입으로 의복과 가재도구를 구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일 노동자들의 경우, 안식일과 절기를 제외한 노동일을 다 채운다고 해도 일년에 200 데나리온을 벌기 어려웠다. 그나마 사회단체에서 주는 구제 빵으로 연명할 수는 있었지만12), 노동할 정도의 에너지는 공급받지 못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외국의 디아스포라로 떠났는데, 1세기에 약 100만 명만 본토에 있었고, 600만이 해외에서 살았다고 한다.13) 예수의 설교에 자주 나오는 소작농과 과수원 주인 이야기는 당시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II. 이어지는 항쟁

갈릴리 가말라
▲갈릴리 가말라  ⓒ김인철

유대의 역사는 갈릴리 사람들의 저항 정신을 잘 보여준다. 기원전 4년 헤롯이 죽었을 때 가울라니티스에 살고 있던 가말라14) 출신 유다가 항쟁의 횃불을 들었다.

세포리스 수로 ⓒ김인철
▲세포리스 수로 ⓒ김인철

유다는 세포리스에 있는 왕궁 병기고를 습격해서 무기와 재물을 약탈했고, 왕위에 오르기 위해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요세푸스는 그를 호전적인 율법학자(유대전쟁사 II 17:8)로 소개하고, 사도행전은 갈릴리 사람 유다라고 부른다.

그는 기원전 47년 헤롯 대왕이 갈릴리 총독으로 부임하자 마자 재판도 하지 않고 죽여버린 혁명가 히스기야의 아들이었다. 유다는 로마의 진압군에 체포되지 않고 도망쳤다가, 기원후 6년 수리아의 새 총독 구레뇨(퀴리니우스)가 조세 목적으로 인구조사를 결정했을 때 다시 일어났다. 그때는 예루살렘의 바리새인 사독의 후원까지 받았다(유대전쟁사 II 8:1). 요세푸스는 열심당의 출현 시기를 이때로 잡는다(유대고대사 XVIII 1-6).15)

유다는 출애굽 시절의 비느하스(민 25:6-13)를 표방하면서 스스로를 '열심당(젤로타이)'라고 불렀다. 유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사도행전은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행 5:37)고 말한다. 유다의 아들 야곱과 시므온은 기원후 46-48년 총독 알렉산더에 의해 십자가 형에 처해졌다(유대고대사 XX 5:2). 또 다른 아들 므나헴은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로 기대했지만, 예루살렘을 점령한 폭도들의 지도자와 대결하다가 살해되었다(유대전쟁사 II 17:9).

유다의 마지막 아들 야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야일의 아들 엘르아잘은 기원후 66년 1000여명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유다 광야 마사다 요새로 가서 지도자가 되었다(유대전쟁사 II 17:9).16)(마사다 사진) 그는 기원후 74년 로마 장군 실바가 마사다에 진입하기 하루 전날 모두에게 서로 죽이게 하고 자살했다. 살아 남은 자에게 가해질 가혹한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였다.

이튿날 로마 군대가 찾아 낸 사람은 지하에 숨어 있던 두 여인과 다섯 어린이였을 뿐, 953명이 모두 자결로 생을 마쳤다. 유다와 별개로 로마에 저항했던 지도자는 요트파타의 요세푸스이다. 갈릴리 사령관이었던 요세푸스는 요트파타가 함락될 때 다른 사람에게 자살을 명령하고, 자신은 살아남았기 때문에 변절자로 낙인 찍혔다.

갈릴리 사람들의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12 제자 가운데 하나인 열심당 시몬이다. 기원후 39년 가이우스 칼리굴라 황제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황제의 입상을 세우려 했을 때, 갈릴리 주민들이 모든 유대인들과 함께 디베랴로 찾아가 단호하게 죽음으로 반대하여 무산시킨 일도 있다.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으로 책봉된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 사람들의 저항정신을 경계했다. 그가 세례자 요한을 목 베어 죽인 것도, 폭동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17) 같은 이유로 그는 예수마저 죽이려 했다고 전해진다.18) 실제로 죽이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여러 번 예수를 직접 보고 싶어 했다.19)

안디바의 두려움을 뒷받침하는 책이 기원후 6-30년 사이에 다시 씌어진 것으로 보이는 <모세의 승천기>이다. 그 책에는 헤롯의 아들들이 아버지처럼 오래 통치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분봉왕이었던 아켈라오가 이미 폐위되었고, 빌립이 이방인 지역을 다스리던 상황에서 그것은 안디바의 몰락을 의미했다.

 

III. 나사렛 예수

예수의 출생 연도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헤롯의 사망 연도와 동방 박사들이 보았다는 큰 별의 정체를 두고, 기원전 4년 혹은 7년이라는 가설로 압축될 수 있을 뿐이다.20)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21) 정혼한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살다가, 인구조사에 응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갔다가 출산했다고 한다. 예수의 가족은 유대인의 관습대로 출산 후 40일째 되던 날 성전에 올라가 장남의 대속예식과 산모의 정결예식을 치렀다.22)

그 후 얼마 못되어 그들은 멀리 애굽(이집트)23)으로 달아났다. 동방 박사에게 속아 분노한 헤롯 대왕이 베들레헴의 남아들을 몰살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가족이 정결예식까지 치르고 나서도, 왜 나사렛으로 돌아가지 않고 베들레헴에 남아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때문에 일부 비평학자들은 예수가 나사렛에서 태어났을 것이라는 다소 과격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요셉은 꿈에 천사의 지시를 받아 가족을 애굽으로 피신시켰다. 지금도 이집트 카이로 구 시가지에는 유대인 회당이 있는데, 한때 카이로 지역(레온토폴리스)에는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 오니아스 IV가 프톨레미우스 VI의 허락을 받아 세운 성전이 230년 동안 서있었다. 신앙심 깊었던 예수의 가족은 아마도 오늘날 카이로 지역에 머물렀을 것이다. 이집트 콥트 기독교회에 의하면 예수의 가족이 나일 강을 따라 난 도시들을 차례로 방문했다고 한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가족이 떠난 직후 베들레헴에는 헤롯 대왕이 보낸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때 헤롯의 명령에 따라 두 살 이하의 남아들이 모두 학살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베들레헴 영아 학살 사건은 모세의 탄생 설화와 비슷하다. 출애굽기를 보면 바로 왕의 명령에 따라 나일 강에 띄워 보낸 이스라엘 남아 중 모세만 목숨을 건졌다.

홀로 목숨을 건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낸 것과, 홀로 목숨을 건진 베들레헴 출신 예수가 백성의 구원자가 된 것이 닮았다. 같은 관점에서 마태복음은 예수가 애굽에서 돌아온 것을 제 2의 출애굽 사건으로 평가한다.24) 베들레헴 영아 학살의 자료를 마태복음 저자가 어디서 얻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도 탄생 기념교회의 일부인 가톨릭 성당 지하에는 그때 학살당한 영아들을 위한 제단이 모셔져 있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예수의 가족은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1세기 나사렛은 약 600가구 규모의 작은 마을이었다. 나사렛 주민들이 예수 가족의 이름을 모두 알았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25) 그러니까 나사렛은 구약 시대에 존재하지 않던 마을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으로 돌아온 다음 자녀들을 더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고향 이름을 앞에 붙여 부르던 관습을 따른 것이다.

이를 테면 '막달라 마리아' '아리마대 요셉' '구레네 시몬'으로 부르는 식이다. 사람들이 그를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군중들은 예수가 베들레헴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 같다.26) 그런데 나사렛 언덕은 남쪽으로 유서 깊은 이스르엘 골짜기를 굽어보면서, 북쪽으로 갈릴리 호수 서쪽 막달라와 연결되는 곳에 있었다. 소년 예수는 나사렛 언덕에서 뛰어 놀며, 이스르엘 골짜기에 얽힌 걸출한 지도자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나사렛 언덕 아래로 펼쳐진 이스르엘 골짜기에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울의 최후 전장이었던 길보아 산, 기드온이 삼 백 용사를 선발했던 하롯 시내, 여선지 드보라가 하솔 왕 야빈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다볼 산, 엘리사가 죽은 소년을 살렸던 수넴 마을의 모레 산이 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정체성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하면, 민족을 구원하는 지도자로서의 자아상은 이 무렵 싹트기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소년 예수는 토라를 배우는 일에도 열심이었을 것이다. 열 두 살 되던 해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토론해서 놀라게 했다고 한다.27)

 

IV. 갈릴리인들이 따르다

예수의 별명은 간단히 '그 예언자 혹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예언자’였다.28) 하지만 그의 활동 무대는 나사렛이 아닌 가버나움이었다.29) 나사렛은 소년 시절을 보낸 고향이었을 뿐이다.30) 가버나움은 세관과 수비대와 2층짜리 회당이 있는 큰 도시였다. 예수가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수제자 베드로가 거기에서 살았기 때문이다.31) 예수의 일행이 북쪽의 페니키아와 동쪽의 데카폴리스32) 지역을 순회할 때, 출발지와 종착지는 언제나 가버나움이었다.

남쪽으로 사마리아와 유대를 다녀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출발지이자 종착지로서 가버나움에 머무는 시간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기에, 복음서에 더 자주 언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33) 나사렛에서 자라났던 예수가 가버나움을 활동 무대로 삼게 된 데는, 고향 사람들의 배척이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것을 것이다.34) 나사렛 주민들은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예수를 예언자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예수도 미련 없이 나사렛을 떠났다.35)

복음서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예수가 약 30세쯤 되었을 때 세례자 요한을 찾아 갔다. 그가 요한에게 세례 받고 물에서 나올 때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하늘이 쪼개지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내려와 임하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사랑하는 자”라는 음성을 들은 것이다.36) 이 체험은 이사야의 예언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는데, 예수가 공 생애를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었다.37)

그 체험 이후 예수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40일 금식하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다.38) 마귀는 예수에게 ‘돌로 빵을 만들어 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라’ ‘내게 절하면 천하를 주겠다’는 세 가지 시험을 했다. 예수는 그때마다 신명기 말씀을 암송하며 유혹을 뿌리쳤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할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39) 

시험을 통과한 예수는 광야를 벗어나, 갈릴리 호수 주변을 다니며 제자들을 모으고, 군중들을 가르치고, 기적을 일으켰다. 그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통과한 것은, 광야에서 시험에 빠졌던 출애굽 이스라엘 군중들과 대조된다. 심지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아닌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려 했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모세와도 비교된다.40)

갈릴리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예수를 예언자로 믿고 따랐던 것일까? 그 대답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여행할 때 일어났던 에피소드에 들어 있다. 예수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제자들에게 물어 보았다. 제자들의 대답은 대충 이렇게 요약되었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41) 이들 세 사람의 공통점은 죽음으로부터 환생했다는 것이다.

일부 군중들이 예수를 환생한 세례자 요한으로 본 이유는 자명하다. 예수의 제자들 중 일부는 한 때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 그리고 예수가 요한처럼 세례를 베풀었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다. 헤롯 안디바 또한 예수를 세례자 요한의 환생으로 보았다.42) 사람들이 예수를 환생한 엘리야로 보았던 이유는 말라기 예언에 근거한 것이다.43) 

엘리야가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갔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가 반드시 다시 올 것을 믿었다. 그런데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누구를 가리켰는지 분명하지 않다. 어쩌면 엘리사를 가리켰을 수도 있다. 엘리사와 예수는 여러 면에서 닮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엘리사와 예수 모두 죽은 소년을 살렸는데, 엘리사가 기적을 일으킨 수넴 마을과 예수가 기적을 일으킨 나인 마을은 지척간이다.44)

그리고 엘리사가 기적적으로 음식이 많아 지게 했는데, 예수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 천명의 군중들을 먹였다.45) 예수가 일으킨 기적의 음식을 먹은 군중들은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확신했다.46) 그 선지자는 단순한 메신저가 아니라, 모세와 견줄만한 권위의 통치자를 가리킨다. 기적의 음식을 먹게 되자, 조상들이 모세를 통해 먹었던 만나를 떠올렸던 것이다.

예수에 대한 기대는 세례자 요한, 엘리야, 엘리사, 모세를 넘어서고 있었다. 격정적이고 직선적인 갈릴리인들의 관심이 한 사람에게 쏠리고 있었다. 흥분한 일부 군중은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려고까지 했다.47) 갈릴리인을 위한, 갈릴리인에 의한, 갈릴리인의 왕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열심당의 창시자 유다를 대신해서 갈릴리를 다스릴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예수는 갈릴리의 예언자에 불과했다. 모세가 약속한 민족 전체의 예언자로 인정 받으려면 예루살렘에서 검증되어야 했다. 하지만 갈릴리인들의 절대 지지를 받는 것 만으로도 권력 집단의 견제를 받기에 충분했다.

 

V. 갈등이 예상되다.

군중들의 지지를 받는 갈릴리 예언자는 두 가지 이유에서 권력 집단에게 환영 받을 수 없었다. 하나는 예언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갈릴리인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이유이다. 후자의 의미는 앞에서 갈릴리 항쟁주모자들의 예와 함께 생각해보았다. 전자의 경우는 보다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할 소지가 있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예언자들은 기존 권력과 맞섰기 때문이다.

때로 그들은 정권을 무너뜨리는 촉매 역할을 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의 경우, 엘리사는 예후를 부추겨 요람 왕을 죽이고 왕이 되게 했다. 그 과정에서 이세벨과 남 유다 왕 아하시야가 함께 살해되었다.48) 남 유다의 예언자들이 정권 전복을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왕가와 성전 권력자들을 향해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둘을 싸잡아 비판한 이유는,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에 함께 결탁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부자들이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야훼의 이름으로 맹 비난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49) 예레미야는 한 술 더 떠서 성전은 마땅히 파괴되어야 하며, 유다 왕국은 바벨론에 순순히 항복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내가 실로50)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51)

“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나 그의 목숨은 전리품 같이 되리라”.52) 심지어 예레미야는 장차 언약궤가 필요 없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다.53) 언약궤는 야훼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기구로서 성전의 핵심이었다. 바벨론에서 활동했던 에스겔은 유배 이후 새롭게 될 왕궁과 성전에 대해 긴 지면을 할애했는데, 난해할 정도로 이전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54)

예언자들은 권력 구조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물리력을 동원해서 사회를 변혁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대중 설교와 집필 활동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경향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패망 직전 더욱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는 여전한 살해 위협에도 대중 설교를 이어갔고, 여러 해 설교가 기록된 두루마리가 불태워지는 것을 보았음에도 집필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55)

물론 사회 비판적인 예언자들 말고도 친 정부적인 예언자들이 있었다. 수적으로는 그들이 더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성전 종사자들이었다. 그들은 부와 권력을 세습할 수 있는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전세가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에게서 벗어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 예를 들어 예언자 하나냐는 성전에서 대중들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되돌려 오리라 내가 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6)

물론 그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하나냐도 대중 설교와 함께 집필 활동을 했을 지도 모른다. 다른 친 정부적 예언자들도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예레미야나 에스겔의 기록 중 일부로 소개될 뿐 문헌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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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남북의 길이가 20km, 동서 폭이 12km 정도 되는 하프 모양의 담수호이며, 해수면 보다 200미터나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 서쪽으로 병풍처럼 산들이 둘러쌌고, 동쪽의 산은 급경사로 되어있어 수심도 최대 60m 나 되며, 매년 헬몬 산의 녹아 내린 물이 흘러 들어 수위를 조절된다.

2) ‘배우다’ ‘글을 알다’는 말은 단순히 읽는 법을 안다는 뜻이 아니라, 읽는 내용을 해석하고 논리적으로 토론할 능력을 갖춘다는 의미이다. 학문적 계보를 중요시했던 유대인들은 예수가 어떤 학파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3) 눅 13:1.

4) 사 9:1-2.

5) 네오 앗시리아가 빼앗은 이후 갈릴리는 바벨론, 페르시아, 마게도냐, 프톨레미(애굽), 셀류키드(시리아)가 차례로 지배했다. 그 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이주해서 살게 되었다. 기원전 165년 마카베오 항쟁 때 요나단이 시리아의 데메트리우스와 싸워 게데스 납달리를 되찾았고, 기원전 163년 마카베오 가문의 시몬이 유대인들을 갈릴리로 강제 이주시켰고, 기원전 104-103년 마카베오의 아리스토불루스가 유대인들을 이곳에 재 이주시키기도 했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유대 땅을 점령한 이후 갈릴리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최종적으로 이 지역을 유대인들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게 된 것은 기원후 40년 헤롯 대왕이 로마 제국에 의해 유대 왕으로 임명되면서부터이다.

6) 요 7:51.

7) 요 7:52. 그런데 북 이스라엘 왕국의 예언자였던 요나는 갈릴리 가드헤벨 출신이었다(왕하 14:25). 니고데모의 동료들이 요나를 몰랐을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갈릴리에서 날 수 없다고 말한 예언자는 모세가 약속한 '그 예언자' 즉, 문맥상 백성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로서의 예언자를 가리켰을 것이다(요 7:40). 나중에 예수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이 처음 빌립의 증언을 들었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라고 말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메시야 예언이 기록된 구약 시대에 나사렛이란 마을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8) 탈무드에 나오는 다음의 이야기는 예루살렘 유대인들이 갈릴리 유대인들의 발음을 조롱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번은 갈릴리 사람이 예루살렘 시장에 와서 아마르(amar)를 달라고 하자 사람들이 그를 비웃기 시작했다. “이 멍청한 갈릴리 놈아, 네 놈이 원하는 게 타고 다닐 거(chmâr 나귀)냐? 마실 거(chamar)냐? 입을 거(‘amar 양털)냐? 아니면 제사에 쓸 거(immar 양)냐?”(게르트 타이센 지음, 손 성현 옮김,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2010년, 255쪽). 분명코 갈릴리 사람들은 히브리어의 다양한 후음(guttural sound)을 구별해서 발음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예로부터 갈릴리는 이방 지역으로 분류되었으며(사 9:1), 구약에서 메시야의 출현 예언과 관련이 없는 지역이라는 것(요 1:46, 7:41-42)도 유대 지방의 유대인이 그들을 멸시하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9) 빌리 발트뵈젠의 책 <예수 시대의 갈릴래아>(황 현숙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98,303-04쪽)에 의하면, 원래 프톨레미우스 왕조에 속했던 큰 땅들이 헤롯 가문으로 소유 이전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기손 협곡에 있는 대토지는 헤롯 아그립바 II의 여동생 버니게(베르니케)의 소유가 되었다. 그 외에도 갈릴리 북쪽과 서쪽의 거대한 땅들이 헤롯 가문의 소유로 바뀌어졌다. 대지주가 된 귀족들은 헤롯 가문이거나 헤롯이 신뢰하는 대제사장 가문 사람들이었다.

10) 납세임차인들은 헤롯 안디바에게 일년 치 정액 세금을 대납하고 세금 징수권을 얻었다. 이들은 세리를 고용해서 특정 지역, 상품, 인력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고 차익을 챙겼다.

11)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12)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예수 그리스도가 ‘빵 부스러기가 버려지지 않게 하라’고 명령한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라는 의미이다.

13) 빌리발트 뵈젠, 앞의 책, 309쪽.

14) 가말라는 낙타라는 뜻인데, 산이 낙타의 등처럼 삼각형으로 솟아 있는 요새였다.

15) 열심당이 일부 바리새인의 후원까지 얻게 된 것은 인구조사에 반대한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다윗이 임의로 인구조사를 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는데, 이방 통치자의 인구조사 명령에는 더욱 응할 수 없다며 항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16) 유다 광야 남쪽에 있는 마사다 요새는, 사해 수면에서 434미터나 높은 곳에 위치하고 폭이 110미터에 길이가 620미터이면서 사방이 절벽인 천혜의 요새이다. 배처럼 길쭉하게 생긴 정상부의 면적은 7만 평방미터이며, 75만 리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저수조와 수천 명이 몇 년간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저장할 저장고를 갖추었다.

17) 요한은 안디바가 아내를 버리고 형수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안디바는 요한의 말에 자극 받은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김인철, 세례자 요한, 그리심, , 쪽).

18) 눅 13:31.

19) 눅 9:9; 23:8.

20)기원전 4년 가설은 헤롯 대왕이 죽은 해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헤롯 대왕이 살아 있을 때 예수가 탄생했다면, 늦어도 그 때보다 늦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원전 7년 가설은 큰 별의 정체와 관계된 것이다. 천문학자들에 의하면 큰 별은 초신성이 아니라 기원전 7년에 일어난 바 목성과 토성이 겹쳐 보이는 현상이었다고 한다.

21)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 탄생 기념교회는 맨 처음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친 헬레나 황후가 세운 것이다. 기원후 614년 파르티아 군대가 이곳을 침공했을 때, 벽에 걸린 동방 박사의 복장이 자신들의 것과 같기 때문에 교회당을 파괴하지 않았다고 한다.

22) 눅 2:23-24. 유대인들은 남자 아이가 태어난 지 40일째 되는 날, 산모의 정결을 위한 예물과 장남일 경우 대속물까지 함께 바쳤다.

23) 이집트를 한글성경에서 애굽이라고 부르는 것은 헬라어 이름 ‘아이귑토스’를 음역한 것이다. 헬라어 철자를 사용하는 이집트어를 ‘콥트 어’라고 하거나, 이집트 기독교를 ‘콥틱 기독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24) 마 2:14-15.

25) 마 13:54-56.

26) 요 7:37-43.

27) 눅 2:41-47. 열 두 살 유대인 소년은 성인으로 인정 받았다. 지금도 유대인 성인식은 열 두 살 혹은 지역에 따라 열 세 살에 치른다.

28) 요 7:40; 마 21:11. 그는 모세와 견줄만한 예언자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 18:15,18;행 3:22-23참조).

29) 마 4:13.

30) 히브리어로 그리스도인을 부르는 말은 ‘나사렛 파’라는 의미의 ‘노쯔림(נוצרים)’이다.

31) 가버나움은 성지순례자들에게 놓치지 말아야 할 장소이다. 베드로의 집으로 추정되는 유적지 위에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건물이 세워져 있다. 그 옆으로 빼곡히 들어선 가옥들은 ‘인슐라’라고 부르는데, 성경 시대 유대인들이 ‘아버지의 집(베트 아브)’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음을 보여준다. 가버나움 회당에서는 화려한 석회암 지상 구조물 아래, 1세기에도 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 현무암 기초를 볼 수 있다.

32) 스키토폴리스(고대 벳산)를 비롯한 열(deca) 개의 헬라 식 자치 도시(polis)들을 묶어서 부르는 용어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 지역을 의미했다.

33) 나딘 라바키 감독이 만든 영화 <가버나움>은 시리아 난민 소년 자인이 레바논의 베이루트 길거리 생활을 하면서 겪는 체험을 줄거리로 한다. 그 영화와 관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스라엘 가버나움 유적지로 들어가는 길 옆 벤치에는 <노숙자 예수(homeless Jesus)>라는 실물 크기의 조형물이 놓여져 있다. 아마도 영화 시나리오 작가나 조각가 모두 기적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었던 예수 당시 가버나움의 빈민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34) 눅 4:28-30.

35) 갈릴리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아르벨 언덕에서 내려다 보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가는 약 30km 거리의 옛 길 일부가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 일행은 골짜기를 따라 꼬불꼬불 이어진 비포장 도로를 거의 하루 이상 이동했던 것이다.

36) 마 3:16-17; 막 1:11; 사 42:1 참조. 유대인 학자 데이비드 플루서(David Flusser)에 의하면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종종 구약 성경 구절을 음성으로 듣는 신비한 체험을 했었다고 한다(David Flusser, Jesus, Magnes Press, 2001, p 42).

37)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42:1).

38) 예수가 금식하며 시험 받은 장소는 여리고 광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요한에게 세례 받은 장소가 여리고 근방이 아니라면, 시험 받은 장소 또한 다른 장소일 수 있다(김인철, 알기 쉬운 복음서의 난제들 101, 그리심, 2016년, 19-21쪽 참조할 것).

39) 신 8:3; 6:16, 13.

40) 민 20:12.

41) 눅 9:19; 막 8:28; 마 16:14.

42)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자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막 6:14,16).

43)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5). 유대인들은 지금도 엘리야가 오기를 기다리며, 유월절에 엘리야를 위해 의자를 준비하고 문을 열어둔다.

44) 왕하 4:32-36; 눅 7:11-16. 엘리사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은 묘하게 닮아 있기도 하다. 열왕기는 무덤에 장사된 엘리사의 뼈에 닿았던 시신이 살아 났다고 하는데(왕하 13:21), 마태복음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운명할 때 무덤에 장사되었던 다수의 사람들이 살아났다고 전한다(마 27:50-53).

45) 왕하 4:42-44; 막 6:35-44.

46) 요 6:14.

47) 요 6:15.

48) 왕하 9:1-38.

49) 사 1:12-13.

50) 실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최초로 성막을 설치했던 곳이다. 엘리 제사장 시절 언약궤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빼앗긴 이후 이곳은 더 이상 종교와 정치 중심지로서의 수도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51) 렘 7:14-15.

52) 렘 21:9.

53) 렘 3: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54) 겔 43:1-46:24; 48:8-22.

55) 렘 36:20-29. 비록 예수가 집필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설교는 대중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것 만으로도 성전 권력자들과 로마 정부의 대리인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56) 렘 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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