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의 죽음] 셋째 마당: 가야바의 미움을 사다
[나사렛 예수의 죽음] 셋째 마당: 가야바의 미움을 사다
  • 김인철 목사(예슈아성서연구원 대표)
  • 승인 2019.09.2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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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원문 대조와 네러티브 읽기의 유익을 설명하고 있는 김인철 목사(예슈아 성서연구원 대표)
▲예슈아 성서연구원 대표 김인철 목사

예루살렘 순례자들이 대부분 방문하는 장소 중 하나는 ‘베드로 통곡 교회’이다.[1] 이 교회가 그토록 유명한 이유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저택 자리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마당에서부터 기드론 시내로 이어져 있는 돌계단은, 나사렛 예수가 겟세마네에서 끌려 올 때 밟았던 통로로 추정된다. 지하에는 감옥 시설로 보이는 방이 여럿 있는데, 가야바에게 심문 받기 전 예수가 거기 갇혀 있었을 것이다.

가야바는 본디오 빌라도의 직전 총독이었던 발레리우스 그라티우스에 의해 기원후 18년에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기원후 6-15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있던 안나스의 사위가 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올랐지만,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가 빌라도를 면직하던 기원후 36년 함께 면직당했다. 권모술수에 능했던 그는 안나스와 함께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으며, 사도들을 박해하는 데도 앞장섰었다.[2] 로마 정부의 후원을 업고 종교 권력의 정상에 있는 가야바가 갈릴리 예언자 나사렛 예수와 예루살렘에서 만났다.

I 성전과 대제사장

1세기 예루살렘 성전은 규모와 화려함에서 지중해 일대의 어느 신전보다 뛰어 났다. 기원전 20년 헤롯 대왕 재위 시절에 시작된 공사는, 나사렛 예수가 방문했던 기원후26년에 이르도록 진행되고 있었다.[3] 비록 장식과 세부공사이긴 했지만, 기원후 66년 알비누스 총독 시절까지 성전은 화려하게 꾸며지고 있었다. 가로 480m 세로 300m(축구장 20개) 높이 45m 크기의 외관은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맨 아래 기초석 하나의 크기가 12mx3m에 무게 570t이나 되었다. 성전 지대는 석회석 담으로 둘렀고, 수백 개의 대리석 기둥을 세우고 붉은 색 지붕을 덮어 주랑을 만들었다. 기둥의 높이는 8미터나 되었고, 남자 세 명이 두 팔로 안아야 될 정도로 굵었다고 한다. 성전 담벼락과 본체 외벽에는 금으로 장식을 해서 태양 빛에 반사되게 만들었다. 남쪽 입구를 통해 지하 통로로 마당에 올라서면, 쏟아지는 햇볕에 눈을 뜨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갈릴리의 작은 건물들만 보아온 예수의 제자들이 성전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질렀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4]

성전은 오늘날 유대교 회당이나 교회처럼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닌 삶의 중심 기관이었다. 예를 들어 아기를 출산한 여인은 제물을 바쳐야 성전 출입이 가능했다.[5] 남아가 장남이면 대속 제물까지 바쳤다. 또한 성전은 본토와 해외 유대인이 명절에 함께 모여 축제를 벌이는 공간이었다. 유월절이 되면 숙박시설이 부족해서 예루살렘 성 바깥에까지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볐을 것이다.

그리고 성전은 각종 명목의 동물 제사가 연중 드려지는 곳이었다. 제수용 동물 매매로 상인들이 거둔 수익금 일부가 성전 금고에 채워졌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매년 바치는 성전 세는 성전 수입의 극히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채소와 향신료 수확의 십일조까지 정확히 계산해서 바쳤다.[6] 대제사장이 전국적으로 방대한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던 것도 성전의 은행 기능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 총독들은 성전 금고에 막대한 자금이 있는 것을 알았고, 틈만 나면 구실을 만들어 사용하려고 했다.

또한 성전에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위한 방이 있었다. 최고 의결기관이었던 그 공의회는 사형을 언도할 수 있었다. 대제사장이 판결을 주도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성전 종사자들은 대제사장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조직의 일부였다. 전국에 흩어져 살던 제사장들은 24개 그룹으로 나뉘어, 일 주일씩 일 년에 두 차례 성전에 올라가 봉사해야 했다. 한마디로 대제사장은 성전 종사자들의 우두머리였으며, 사법 기관의 수장이자 성전 금고의 관리자였다.

대제사장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성전 제도의 특수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대제사장의 통치를 허용했다.[7] 헤롯 대왕에게 권력이 이양되기 전, 제사장 가문이었던 하스모니안 왕가는 130 년 동안 유대를 통치했다. 가장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했던 요한 히르카누스(기원전 134-104년)는 예언자, 통치자, 대제사장으로 자처했다.

그의 뒤를 이은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기원전 103-76년)는 통치자 대신 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대제사장 통치의 역사는 모세로까지 올라갈 수 있다. 모세는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기까지 통치자, 대제사장, 예언자의 직임을 맡았다. 왕정 제도를 세운 사무엘은 제사장, 예언자, 통치자였다.[8] 제사장 통치의 대표적인 예는 멜기세덱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전설적 인물인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자 엘 엘리욘(지극히 높은 엘 신)의 제사장이었다. 그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했다.[9]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 멜기세덱처럼 제사장으로서 영원히 통치할 인물을 보내실 것이라고 노래했다.[10] 신약 성경의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 통치자가 나사렛 예수라고 해석했다.[11] 그의 승천을 대제사장이 하늘 지성소에 들어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12] 1세기 유대인들은 참된 성전이 넷째 하늘에 있으며, 모세가 그것을 본떠서 지상에 성막을 지은 것으로 보았다.[13]

제사장 통치에 대한 예언은 구약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야훼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라고 일러주었다.[14]

스가랴는 먼 훗날 제사장이 통치하는 시대가 올 것을 이렇게 예언했다.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15] 쿰란에서 살았던 제사장 공동체는 3 종류의 메시아-아론의 메시아, 다윗의 메시아, 그 예언자 메시아를 믿었다.[16] 흥미롭게도 그들은 제사장 메시아가 다윗의 메시아보다 서열이 앞선다고 보았다.

물론 1세기 대제사장의 권한은 성전 제도 안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헤롯 대왕은 종신직이었던 대제사장의 임기를 1년으로 바꾸어버렸다. 그는 사두개 파의 성전 장악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바리새 파가 정한 제의 법을 따르게 했다. 헤롯이 죽고 나서 대제사장은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되었다. 종교 권력이 여전히 세속 권력 아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은 유대인의 정신과 삶을 지배하는 실제적 통치자였다. 성전이 유대인의 삶의 중심이었고, 막대한 자금이 전 세계로부터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II 눈엣가시 예수

대제사장 가야바는 나사렛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했다. 그에게 씌울 죄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성전 제도를 공개적으로 성토한 것으로 충분했다. 가야바는 일찍부터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갈릴리에 있는 자신의 토지와 선박 관리인에게 명령하면 어떤 정보든 수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예수의 12 제자 중에도 대제사장과 가까운 사람이 있었다.[17]

가야바는 예수가 예루살렘 인근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렸을 때 공공연히 동조자들을 선동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18] 저 유명한 가야바의 논리이다. 이때 벌써 가야바는 예수를 로마인들에게 넘겨주어 살해할 음모를 드러냈다. 그는 갈릴리 예언자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권력에 도전한다고 판단했다.

남은 일은 선제적으로 그를 공격한 다음 요식 절차를 거쳐 처형하는 것뿐이었다. 그에게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없었다. 오늘날 부와 명에를 세습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한국의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가야바보다 못한 것은 사법권이 없다는 것인데, 이마저 교회 법이 세상 법 위에 있다는 논리로 맞선다.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한 주간에 예수가 행한 일은 가야바에게 눈엣가시와 같았다. 그는 성전을 정결하게 한답시고, 제수용 동물 파는 상인들을 성전에서 쫓아냈다. 무슨 권위로 그런 일을 하는지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이 성전을 헐면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는 수수께끼만 남겼다.[19] 무엇보다 대제사장 일가의 몰락을 상징하는 악한 농부의 비유는 치명적이었다.[20] 이 세가지 행동은 가야바가 예수를 더 이상 살려둘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그냥 예수를 내버려두면 민심이 대제사장 일가로부터 걷잡을 수 없이 돌아설 수 있었다.[21] 왜냐하면 셋 다 성전 제도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가축 상인들을 쫓아낸 사건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관점의 차이를 보인다. 먼저 공관복음은 예수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도둑(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2] 이것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한 인용으로 본 것이다.[23]

여기서 도둑의 소굴은 파괴되어야 마땅한 장소를 가리킨다. 예레미야는 최초의 성막이 있었던 실로처럼 성전이 폐허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스가랴 예언에 대한 인용으로 본 것이다.[24]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예수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실 메시아’로 소개하고 있다. 어쨌거나 4 복음서는 모두 예수가 역기능적인 성전을 고발하는 분으로 묘사한다.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고 한 예언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요한은 예수의 수수께끼가 자신의 육체를 성전에 비유한 말이었다고 해석했지만[25], 듣기에 따라서 문자대로 새 성전을 세우는 메시아의 선언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 중에는 예수를 사마리아인으로 비하하기도 했다.[26] 아마도 그리심 산 성소를 고집하면서 예루살렘 성소를 부정하는 사마리아 신학을 예수가 따르는 것으로 오해했을 수도 있다. 바벨론 유배에서 돌아온 뒤 새로운 성전 시대가 열릴 것을 예고한 대표적 글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성전도 재건하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기까지는 그 성전을 예전 것만큼 훌륭하게는 짓지 못할 것이다. 때가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와 예루살렘을 찬란하게 재건할 것이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대로 하나님의 성전도 그 곳에 세울 것이다” (토비트 14:5).

“지존자의 왕궁이 그의 영광스러운 광채 속에 건축될 것이며, 온 세대를 거쳐 영원할 것이다” (십주 묵시록 에녹 I서 91:13).

“하나님의 성전이 너희 지역에 세워질 것이며, 마지막의 것(성전)이 처음 것보다 더 영광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열두 지파가 모일 것이며, 지존자가 그의 구원을 독생한 예언자의 방문으로 보내 주실 때까지 모든 이방인이 모일 것이다” (12 족장의 유언 중 베냐민 유언 9:2).

위에서 인용된 외경과 위경은 이사야를 비롯한 구약의 종말론적 예언에 기초하여 씌어진 것이다. 그런데 토비트 14:5은 헤롯의 성전이 마지막 때 하나님이 세우시는 성전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십주 묵시록은 이 세상의 역사를 10주 단위로 보는 유대인의 연대기를 따라 씌어진 것으로, 에녹 I서는 8주 째에 해당된다. 여기서 종말론적 새 성전이 지어질 것에 대한 예고는, 헤롯의 성전 아닌 새 성전에 대한 기대감을 반영한다.

이 뿐 아니라 쿰란에서 발견된 성전 두루마리에는 헤롯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물은 사악한 것들이며, 예루살렘에 세워질 새 성전에서 참된 제사장들이 참 희생제사를 드릴 것이라고 되어 있다. 새 성전을 사흘 안에 짓겠다는 예수의 발언은 자칫 군중들의 종말론적 기대감에 불을 지를 수 있었다. 가야바 일파가 내심 두려워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악한 농부의 비유는 역기능적 성전 제도에 대한 최후의 일격이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악한 농부들은 성전 종사자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포도원 주인-하나님께 드려야 할 몫을 가로챘다. 그리고 일을 바로 잡으려는 종들-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살해했다.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는 일반 제사장들의 몫이었지만, 가야바 일파는 그 모두를 가로챘다. 그 결과 다른 수입원을 가지지 못했던 일부 제사장들이 굶어 죽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 비유의 클라이막스는 악한 농부들이 아들을 살해하고 나서 몰살 당하는 대목이다.[27]

대제사장 일파도 그 비유가 자신들을 겨냥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28] 비유의 주인공인 예수 또한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번은 헤롯 안디바가 자신을 살해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29] 베드로가 저 유명한 신앙 고백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30]

 

III 예수를 심문하다

예수는 유월절 전 날, 목요일 밤에 체포되었다. 대제사장 일파는 유월절에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을 보면 신고하도록 조치해 놓았다. 하지만 백성들이 그를 따르는 탓에 공개적으로 체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를 처형하고 싶었지만, 소요사태가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 명절 이후로 미루었다.[31] 가야바의 하수인들은 서로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라며 아쉬워했다.[32]

만약 가룟 유다의 배신이라는 극적 사건이 없었다면, 예수를 처형하기는커녕 체포조차 못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어 가야바의 저택으로 끌려왔다.[33] 밤 늦도록 심문을 했지만 동원된 증인들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았다.[34] 그러다가 예수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

처음에 예수는 그 고소 건에 대해 침묵했다. 대제사장은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지 맹세할 것을 강요했다. 예수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구름 타고 오는 인자’ 예언을 인용해서, 자신이 그 종말론적 존재라고 밝혔다.[35]

대제사장은 그 말이 신성 모독에 해당한다며, 즉시 옷을 찢고 더 이상의 증인은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모인 무리들은 예수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제 예수는 대제사장 가야바 일파에 의해 산헤드린 법정에 정식 기소되었다. 하지만 새벽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산헤드린 법정이 있는 성전은 새벽이 되어야 문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새벽이 되었다. 베드로는 새벽 닭 울기 전에 부인하리라던 예수의 경고를 기억하고 가야바의 집 밖으로 나가 통곡했다. 대제사장 일파는 예수를 끌고 성전으로 가서 산헤드린 법정에 세웠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두개파와 바리새 파의 71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의장이 캐스팅 보트 권한을 가졌다. 그런데 예수를 재판하던 공의회가 정족수를 채웠는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체포가 급작스럽게 이루어졌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숙소로 흩어진 공회원들을 다음 날 새벽에 제대로 소집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가야바는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해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 주기로 결정했다.[36] 그들의 재판에는 두 가지 중대한 하자가 있었다. 하나는 극형에 처해야 할 중죄인을 야간에 심문한 것이다. 또 하나는 명절을 앞두고 중죄인에 대한 재판을 서두른 것이다.

최고 권위의 사법 기구가 스스로 법을 어긴 경우였다. 어쩌면 가야바는 토의 과정에서 이의와 반대마저 묵살했을 지도 모른다. 나중에 예수의 장례를 위해 자신의 무덤을 선뜻 내어준 아리마대 요셉은 그 재판에서 반대표를 던졌었다.[37]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파 의원들은 요셉처럼 반대표를 던졌을 가능성이 높다. 니고데모는 평소에도 예수를 변호하다가 동료들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다.[38]

바리새파는 부활과 천사의 존재와 기적에 대해 예수와 신학적 입장이 같았다. 바리새 파는 사두개 파와 달리 초기 나사렛 파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39] <예수 평전>의 저자 조 철수는 이 날 재판이 23 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소 산헤드린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수에 대해 최종 판결을 내리지 못한 채 빌라도에게 넘긴 이유를 찬반이 팽팽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마도 산헤드린에서 마지막 판결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찬반 사이의 두 표를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컨대 찬성 12표 반대 11표로 갈렸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 파 쪽에서 예수의 처형에 찬성한 재판관들은 샴마이 학파 출신들이었을 것이라고 한다.[40] 샴마이와 쌍벽을 이루었던 힐렐 학파의 가말리엘이 나사렛 파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개연성이 크다.

IV 가야바 유골함

1990년의 마지막 날 예루살렘 남동쪽 탈피옷 인근 평화의 숲 공사장 지하에서 납골함 열 두 개가 발견되었다. 그 중 눈에 띄는 하나에는 화려한 문양과 함께 ‘가야바의 아들 예호셰프(예호셰프 바르 카야파)’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41] 그 유골함의 이름은 요세푸스 글에 나오는 가야바의 호칭과 같았고, 장소 또한 요세푸스가 안나스의 묘비가 있다고 말한 곳과 그리 멀지 않았다.[42]

함께 발견된 다른 유골함에서도 가야바라는 이름들이 발견되었다. 이스라엘 유물청은 이곳이 가야바의 가족 무덤이며, 6번 유골함의 주인이 안나스의 사위였던 대제사장 가야바의 것으로 판단했다. 그의 유골함은 박물관으로 보내졌고, 시신은 다시 가족 묘지에 재 매장 되었다. 잠시 햇볕 아래 나왔던 가야바를 생각하며 시 한 수를 적어본다.

<가야바의 귀환>

                                     김 인철

예호셰프 바르 카이아파스

꽃무늬 유골함의 이름으로

깜짝 나타났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머저리들아

종교는 권력이야

보이는 것 외에 아무것도 믿지 마라

한 사람이 죽어 민족이 망하지 않는 게

모두가 죽는 것보다 낫지

유골은 다시 올리브 산에 묻히고

가야바의 논리는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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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주]

[1] 라틴어로 ‘갈리칸투(Galliantu)’라고 하는데, ‘닭 울음 소리’라는 뜻이다. 베드로가 닭 울음 소리를 듣고 통곡한 장소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마 26:75). 기원후 5세기에 세워진 이후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복구를 반복하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2]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 4:6-7). 안나스는 가야바가 면직된 이후 자신의 아들들을 대제사장 자리에 앉혀 성전이 무너지던 해까지 영향력을 이어갔다. 그들의 횡포가 어찌나 심했던지, 유대인들로부터 “하난(안나스) 가문 때문에 내게 화가 있도다. 그들의 중상모략 때문에 내게 화가 있도다(바벨론 탈무드, 페사힘 57)”라는 원성을 들을 정도였다(김인철, 알기 쉬운 복음서의 난제들 101, 그리심, 2016년, 65쪽에서 재인용).

[3]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요 2:20).

[4] 막 13:1.

[5] 남아가 태어나면 40일 후, 여아는 80 일 후 성전 출입이 허용되었다(레 12:1-8).

[6] 마 23:23.

[7] 왕정이 시행되기 전 종교 기관의 수장이 통치하는 것은 고대 근동의 오랜 관습이었다.

[8] 삼상 7:3,15,17.

[9] 창 14:18-19.

[10]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4).

[11]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10).

[12]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 6:20).

[13]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은 것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게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14] 삼상 2:35.

[15] 슥 6:13.

[16] 김판임, 비블리아아카데미아, 쿰란공동체와 초기그리스도교, 136-7;김인철, 포로기 이후, 그리심, 2016년, 307쪽에서 재인용.

[17] 요 18:15.

[18] 요 11:50. 가야바의 논리는 기존의 구전 가르침을 교묘히 변형시킨 것이다. 원래의 가르침은 “만약 이교도가 동족 한 명을 살해하려 하면 우리가 그를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가 살인 죄를 지었다면, 우리는 그 한 명을 내어주고 다른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이다. 가야바는 이 가르침의 맥락과 상관없이 예수를 로마인(이교도)에게 넘겨주어 살해할 의도를 드러냈다. 예수는 살인 죄로 기소될 수 없었다.

[19] 요 2:13-19.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수수께끼를 던지는 예언자이다. 수가 성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를 약속한다든가(요 4:14),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식으로 대답한다(요 3:3). 자신을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라고 한다든가(요 6:41), ‘너희가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요 16:16)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20] 마 21:33-46;막 12:1-12;눅 20:9-18.

[21]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죽인 대제사장 안나스 II(기원후 62년)는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22] 마 21:13;막 11:17;눅 19:46.

[23] 사 56:7과 렘 7:11.

[24]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장사하는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슥 14:21하).

[25] 요 2:19-22.

[26]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요 8:48).

[27] 기원후 70년에 파괴된 후 성전은 재건되지 못했다. 제사장 제도도 함께 사라졌다.

[28] 마 21:45.

[29] 눅 13:33-34.

[30] 마 16:21.

[31] 마 26:3-5.

[32] 요 12:19.

[33] 마태복음은 곧바로 가야바에게로 끌고 갔다고 하며(마 26:57), 요한복음은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다가 가야바에게로 보냈다고 한다(요 18:13,24). 그 해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으므로, 안나스의 심문은 예비 절차와 같은 성격이었을 것이다.

[34] 마 26:59-60.

[35] 단 7:13-14.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씌어진 다니엘서의 이 부분은 아람어로 되어 있다. 따라서 예수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바르 에나쉬)’라고 자신을 소개하면, 종말론적 존재인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이 되는 것이다.

[36] 막 15:1.

[37] 눅 23:50-51.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38] 요 7:50-52.

[39] 행 5:34-39;23:5-10. 이때 사도들을 옹호한 가말리엘은 샴마이 학파와 쌍벽을 이룬 힐렐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40] 조철수, 예수 평전, 김영사, 2010, 674-75쪽.

[41] 가야바는 성이고, 예호셰프는 이름이다.

[42] 김인철, 복음서의 난제들 앞의 책 65쪽에서 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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