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이야기] 3. 한국교회사의 “핵심 논의”와 실천
[한국교회사 이야기] 3. 한국교회사의 “핵심 논의”와 실천
  • 홍인표 목사
  • 승인 2019.10.02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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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의 “핵심논의”와 실천
홍인표 목사(백석대 역사신학 Ph.D)는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정리해 최근 『여성과 한국교회』(CLC, 2019. 5)의 단행본을 출간했다. 
▲홍인표 목사(백석대 역사신학 Ph.D)는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정리해 최근 『여성과 한국교회』(CLC, 2019. 5)의 단행본을 출간했다.

오늘은 한국교회사의 핵심논의와 그 실천에 대하여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한국교회사의 핵심논의는 무엇일까요? 저는 한 마디로 “한국교회의 성경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 신앙과 삶의 척도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과 삶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성경을 근거로 노예제도의 정당성을 말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18-19세기 미국 남부의 어떤 신학자들은 성경을 근거로 노예제도를 합리화하였습니다. 물론 점차 그와 같은 성경해석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남부의 일부 보수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성경을 근거로 백인우월주의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근거한 것일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여성 차별”이 성경에 근거한 것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의 성경해석 또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말씀드리기로 하고 저는 먼저 한국교회가 “성경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부터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주로 미국인 선교사들)이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은 성경공부를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겼습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라고 하면 우리는 감정적인 기도와 찬양 그리고 다양한 이적을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부흥운동은 “사경회(일정한 기간 동안 성경을 공부하거나 성경에 대한 강의를 듣기 위해 모이는 교인들의 모임)”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고 가르치는 훈련을 선교사들로부터 받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사경회 때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1]

둘째, 한국 사람들에게 뿌리 깊이 배어있는 경전을 존중하는 마음은 곧 성경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전에 유교의 경전, 불교의 경전을 존중했던 것처럼 성경을 거룩한 책으로 존중하고 읽었을 뿐만 아니라 암기하기까지 하였습니다.[2] 선교사 무어((S. F. Moore)에 따르면 한반도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여서 성서를 반복해서 읽었는데, 그들은 인도자를 따라서 중요한 성서본문을 한 절씩 한 절씩 따라 읽었다고 합니다.[3]

이는 ‘독서백자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으로 요약되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독서법과도 상통합니다. 그것은 글을 반복해서 읽으면 이전에 통하지 않던 뜻이 통하게 된다는 의미로 쓰인 활자 자체나 주어진 본문이 담고 있는 역사적 맥락, 사회적 상황에 대한 관심보다는 본문을 통해 깨닫게 되는 깊은 뜻에 관심을 갖고 글을 읽는 방식입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자신이 읽는 문헌의 본문을 뛰어넘는 초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원리나 이치를 찾으려고 합니다.[4] 쉬운 말로 말하면 유교 경전을 “공자왈, 맹자왈 하며 암기했던 것”처럼 성경 또한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암기하였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유교의 경전을 숭상했던 것처럼 성경 또한 숭상했음은 물론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그대로 읽고 암기할 뿐만 아니라 삶에서 실천해야 할 최고의 권위였습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어떠한 차별도 지지하지 않음을 발견하였기에 봉건질서 훼파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급진적인 사회개혁 세력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성경을 읽고 암기할 뿐만 아니라 그래도 삶에 적용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19세기 말 한반도를 개화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도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국교회의 성경해석이 시대의 변화와 함께 변하였다는 것입니다. 19세기 말과 1900년대 초 한국교회는 주류 유교사회에 도전하는 개혁적 소수였습니다. 그만큼 성경을 읽는 시각도 개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192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사회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수많은 인재들을 거느린 기관으로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한국교회의 시각이 보수화 된 면이 적지 않았고(기득권으로서의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그와 같은 시각에서 읽게 되었습니다(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교회의 주류는 그러하였습니다). 이 때 부터 본격적으로 “여자는 잠잠하라”는 등의 성경본문에 대한 강조가 한국교회 주류의 해석으로 등장합니다.

1950-60년대 숭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셨던 김양선 목사님은 그의 책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에서 1934년 김춘배 목사님이 한국교회의 여권문제를 제기한 사건을 그해 발생한 서울 남대문교회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모세저작 부인 사건’과 함께 “성경의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이 전교회적으로 문제화 된 최초의 사건”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5] 김양선 목사님의 평가는 이후 한국교회 전반에 받아들여짐으로써 여성에 대한 이해가 한국교회의 정통신학과 자유주의신학의 대립 양상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저는 저의 학위논문 “선교초기 한국교회의 여권의식에 대한 연구”에서 이 사건을 김영주 목사님의 “창세기 모세저작 부인 사건”과 묶어서 신학적으로 이해한 것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였습니다. 김영주 목사님의 “창세기 모세저작 부인 사건”은 마땅히 신학의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시금석이 될 수 있지만, 한국교회의 여성이해 문제는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저는 1920-30년대와는 달리 19세기 말 초기 한국교회가 여권에 대해 매우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한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1920-30년대의 여성(여권)에 대해 성경해석에서도 보수적인 견해와 진보적인 견해가 혼재하였음을 언급하였습니다. 저는 19세기 말과 1920-30년대의 한국교회의 성경해석 변화를 한국교회의 사회적 입지변화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여성에 대한 매우 진보적인 기록도 다수 발견됩니다. 대표적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부활사건 기록은 여성에 대한 진보적인 견해를 언급한 대표적인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남성들로 구성된 예수님의 열두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신 후 모두 피신하였지만, 두 명의 여성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겁 많은 남성들과 용감한 여성들을 대비해 준 대표적인 기록”입니다.

신약학자 김세윤 교수님(현 풀러신학교 재직)은 이 사건을 여성 목사안수 불가를 반대하는 대표적인 근거라고 주장합니다. 김세윤 교수님 또한 “여자는 잠잠하라. 가르치지 말라”고 한 바울의 교훈을 만고불변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볼 것이 아니라,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6] 김세윤 교수님은 사실 박형룡 목사님의 사상이 기반 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분이지만 여성 이해에 대해서 박형룡 목사님이 아닌 그가 반대한 김춘배 목사님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논문을 발표할 무렵 제가 속한 교단에서도 여성 목사님들 가입을 허용하였고, 오늘날 몇몇 보수적인 교단 외에는 여성 목사안수를 허용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여성 목사 안수 반대의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인 듯합니다. 여성에 대한 사도바울의 견해를 만고불변의 하나님 말씀이 아닌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해석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상당부분 불식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신학적으로 진보라고 보기 어려운 많은 교단에서 여성 목사안수를 허용하는 것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한국교회의 진보측과 보수측의 차이를 보여주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보측에서는 일부 종교다원주의적 모습을 보이는 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보이고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유연한 마음으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보수측에서 종교다원주의와 동성애에 대한 입장은 단호합니다. 저 또한 이 부분에서는 단호한 편입니다. 그런데 일부 보수측에서 발견되는 신앙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강한 국가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국가나 민족을 차별하고 자신의 국가의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것입니다.[7]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극우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강해왔는데 그것은 한국교회가 일제 강점기에 공산주의자들과의 충돌을 시작으로 한국전쟁을 통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바가 적지 않습니다.[8] 그러나 극단적인 국가주의는 십계명 가운데 제1계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지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가를 신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9]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진보측에서는 한국교회의 국가주의적 성경에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보수측은 종교다원주의와 동성애 문제에 단호한 모습을 보였지만, 국가주의적 신앙 양상을 보여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보측은 국가주의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동성애와 종교다원주의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유연한 입장을 보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습이 과거와 비교해 볼 때 비교적 불식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동성애 문제는 비교적 최근의 양상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서도 보수측과 진보측의 구분이 불식되는 모습을 보일지는 아직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1930년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1930년대 일제의 억압 속에서 한국교회의 보수측과 진보측을 아우르는 안타까운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1938년은 한국교회의 마지막 보루였던 장로교단이 신사참배에 굴종한 해입니다. 그해 9월 제27차 총회에서 장로교 총회는 다음과 같이 공표하며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아등(我等)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수행하고 특히 국가 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국민으로서의 정성을 다하기로 기함[10]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한 말인지, 당시 일본 관료들이 한 말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반 신앙적인 주장으로 보입니다. 사실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이탈리아 무쏠리니 정권과 이해관계가 있는 바티칸 교황청의 지시에 의해 충돌 없이 신사참배에 순응하였고 감리교단 또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순응하기로 하고 1937년 6월 17일에 선교사들과 함께 신사참배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기 때문입니다.[11]

동아기독교(침례교), 성결교, 안식교 등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던 교단들은 재림사상 등 교리상의 이유로 1943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을 당했습니다.[12] 1940년 이른바 “순일본적 지도이념”으로 새 출발을 다짐한 구세군, 성공회 그리고 안식교, 성결교, 천주교 등은 장로교와 감리교 같은 대형 교단에 뒤지지 않는 부일적 행동을 함으로써 일제로부터 환심을 사려고 하였습니다.[13] 물론 장로교단을 비롯, 감리교단, 구세군, 성공회 그리고 안식교, 성결교, 천주교 등에서 개인적 차원에서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은 있었습니다.

이 때 평양신학교를 비롯 숭실전문학교 등 미국 장로교 계열 학교들이 문을 닫았고, 연이어 호남지역과 영남지역의 미국 장로교회 및 호주 장로교 계열 미션스쿨들이 문을 닫았습니다(한국의 장로교단은 신사참배에 순응하였지만, 미국 장로교 선교부는 신사참배에 단호히 거부하고 산하 학교를 폐쇄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때 신사참배를 인정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들은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들과 그 영향을 받은 교회 지도자들 그리고 캐나다 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과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 그리고 일부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들(연희전문 교장이었던 원한경(H. H. Underwood 선교사가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아들이었습니다)이었습니다.[14]

그 결과 살아남은 학교들은 지금 한신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신학교와 감리교신학대학의 전신인 감리교신학교 그리고 일제의 지원 아래 세워진 후평양신학교 등이었습니다. 이를 보면 마치 신학적으로 진보적이었던 감리교단(장로교단에 비해 다소 진보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감리교신학교의 과목 커리큘럼이 평양신학교에 비해 다소 진보적이고 학문적이었습니다), 기독교 장로회(당시에는 야소교 장로회였습니다. 교단 분열이 일어난 1953년부터 기독교장로회가 되었습니다) 등은 신사참배에 순응하고 장로교단의 보수측은 신사참배에 반대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신사참배는 한국교회 전체를 아우른 것이었습니다. 1953년 교단 분열 후 기독교장로회 반대측 사람들은 기독교장로회(조선신학교를 세운)가 신사참배를 하였다고 단죄하였지만 이는 50%만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보수측 장로교단 사람들도 신사참배에 순응하였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1938년 평양에서 열린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사람들은 사실 보수측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 진보측 사람들은 간도와 부산 등으로 밀려난 상태였기 때문에 신사참배 가결에 대한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진보측 인사였던 김재준 목사님과 송창근 목사님 등도 원래는 신사참배에 단호히 반대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후 김재준, 송창근 목사님 등은 1939년 조선신학교 설립을 기점으로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론 저는 이를 비자발적 순응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당시 조선신학교 교수였던 김재준은 총독부에서 반대했던 과목들인 묵시서 등을 커리큘럼에 넣었습니다. 그로 인해 조선신학교는 매 해 재 승인을 받아야 했고, 사실 일종의 학원으로서의 인정 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일제의 후원을 받는 후평양신학교의 교장 채필근 목사님 같은 경우 자발적으로 순응 한 분이기 때문에 후평양신학교는 별 다른 어려움 없이 학교를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 드렸던 것처럼 신사참배는 한국교회 전체를 아우른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한경직 목사님도 신사참배를 하였고, 조선신학교를 세운 김재준, 송창근 목사님도 신사참배를 하였습니다. 물론 김재준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하면서 속으로는 저주를 퍼부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였다”고 말했지만, 이는 다소 변명으로 들립니다. 2005년 기독교장로회 소속 목사인 김승태 교수님이 김재준 목사님의 신사참배에 대해 “어떠한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하며 기독교장로회가 역사 앞에 솔직할 것을 촉구한 적이 있습니다.[15]

이에 대해 한신대학교의 연규홍 교수는 “"역사의 사실과 해석의 진실 : 장공 김재준에 대한 친일 논의를 반박함"이라는 논문에서 김재준 목사님의 신사참배를 변호하였습니다. 그의 글 중에는 당시 신사참배를 하면서도 신앙생활을 영위한 교회가 있다고 하면서 신사참배를 무조건 단죄할 것인가? 라는 질문도 언급되었습니다.[16] 보수측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장로회 측의 신사참배를 일방적으로 몰아서 단죄하는 것(자신들은 깨끗하다고 하면서)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변호로 일관하는 기독교 장로회측 신학자의 태도도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신사참배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일까요? 그것은 한국교회사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수측과 진보즉으로 양분하여 명확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보수측인 이들이 신사참배에 더욱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진보측인 이들이 개방된 태도를 보였지만, 일제의 위협 앞에 보수와 진보를 아울러 대부분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신사참배에 순응하였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순응함(비자발적으로)으로써 그리고 조선신학교를 유지하였지만(이 또한 존경할 만한 모습은 아닙니다), 박형룡 목사님의 경우 해외로 망명하였고(당시 일본 조합교회의 실력자 도미다에게 교섭함으로써), 이후 만주의 봉천신학교 교수로 초빙되었을 때는 봉천신학교 교장인 정상인 목사님이 박형룡 목사님을 대신해서(?) 신사참배를 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신사참배는 다만 교회사적 굴욕만으로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는 국내 민족운동의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입니다.[17]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일제는 한국교회를 항일운동의 온상(溫床)으로 보았습니다. 일제가 왜 그렇게 편집증적으로 한국교회의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나라의 민족독립의지를 완전히 꺾으려는데 있었다고 봅니다. 일제 강점기 한국교회가 사회에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그 만큼 지대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볼 때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모습만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도 많이 있습니다. 당시 독립군 가운데 많은 분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합니다. 1919년 3.1 운동이 끝난 후 독립에 대한 열망이 죽어가고 절망에 사로잡힐 때 한국교회는 한반도는 물론 만주에서도 계몽운동을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었습니다. 3.1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기독 청년들은 독립을 위해서는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민족 경제 활성, 언론 및 출판 등의 문화사업과 농촌계몽 둥에 힘을 쏟았던 것입니다.

박형룡 목사님의 경우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에 학생 지도자 격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에 일제에 의해 8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였습니다.[18] 목포 양동교회에서 “천(天)의 검(劍)”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것[19]이 일제가 볼 때 교인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어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은 대략 “조상 숭배로 우상 숭배한 죄악의 대가로 일제라는 검을 하나님께서 보내셨으니 회개함으로서 하나님께서 검을 거두어주셔야 한다”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한국교회에는 부끄러운 모습도 있었지만,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쳐 우리 민족에게 소망을 주는 많은 역할도 하였습니다.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마치 자신이 재판장이 된 것처럼 글을 쓰는 분들도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어두운 면을 주로 들춰내면서 한국교회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글을 쓰면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교회사 연구를 할 때 자신이 한국교회의 구성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의 어두운 면을 단죄하기 이전에 자신이 그런 교회를 세우는데 일조한 죄인임을 잊지 말고 눈물로 한국교회를 개혁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특히 자교단의)의 밝은 면만 드러내어 호교론적 입장을 가져도 안 됩니다. 각 교단의 한국교회사 교수님들 중에 자 교단 우월적 입장을 표명하는 분들로부터 그런 경향이 보입니다. 그런 분들은 자교단을 선으로 타교단을 악으로(특히 보수와 진보의 양진영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자세입니다.

우리는 왜 한국교회사를 공부해야 할까요? 바로 우리가 한국교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눈물로 개혁하며 지고가야 할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국교회의 어두운 과거를 반성하고 밝은 과거는 계승함으로써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로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타임머신을 한참 뒤로 돌려 1960-70년대에 이르면 한국교회의 보수측과 진보측의 서로 다른 활동이 발견됩니다. 먼저 진보측은 도시산업선교회로 대표되는 노동자 인권 기구를 만듦으로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도시산업선교회의 주요 인물로는 1954년 한국에 들어온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오글 목사님(G. E. Ogle 한국 이름 오명걸)이 있습니다. 오글 목사님은 약 20년 동안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다가 1974년 인혁당 사건에서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피해자들을 위해 활동하던 그해 12월 정부에 의해 추방을 당한 인물입니다.

오글 목사님을 만나 노동운동에 평생을 헌신한 감리교의 조화순 목사님은 노동자들의 대모로 잘 알려진 분입니다. 제가 조화순 목사님을 만났을 때 그분으로부터 들은 농담(?)은 자신은 “감옥에 가는 게 특기”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도시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다가 “용공분자”라는 말도 되지 않는 명목으로 여러 차례 수감생활을 한 것입니다. 근래 1980년대 까지만 해도 노동자의 인권을 위한 활동은 “용공활동”이라하며 탄압을 받았습니다. 1960-70년대 진보측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변을 돌보지 않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껴안고 품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수측 그리스도인들은 어땠을까요? 이들은 해외선교와 캠퍼스 전도 등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비전을 주고 복음을 듣지 못하는 많은 민족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한 대학생 선교단체의 표어는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였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딱히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보수측 그리스도인들과 진보측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충실히 이 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활동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활동이 바르다고 본 것입니다. 이제 과거 보수측 그리스도인들과 진보측 그리스도인들의 선교 및 전도활동은 통합되어 실천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가 모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가족간의 유대와 사랑, 근면한 삶 등은 보수적 가치이지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 전쟁이 아닌 평화를 지향하는 사회, 찰별 없는 인권의 존엄성 등은 진보적 가치인 것입니다.[20] 한국교회는 그동안 보수와 진보로 양분되어 왔고 여전히 학계에는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물론 악에 대하여는 단호하게 대항하여야 하지만, 서로 보완되어야 하는 다름에 대해서는 겸허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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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주]

[1] 장동민,『대화로 풀어보는 한국교회사 1권』(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3), 203-204.

[2] 장동민,『대화로 풀어보는 한국교회사 1권』, 204.

[3] S. F. Moore, “The Revival in Seoul,” Korea Mission Field (1906), 116. 이명미, “한국 선교 초기 성서 해석이 여성의 지위에 끼친 영향,” 한국 선교 초기 성경 해석과 그 파급력: 여성의 지위에 끼친 영향을 중심으로,“ 「성서학 학술세미나」 2007년 5월: 525에서 재인용.

[4] 이문장, 『한국인을 위한 성경연구-원리편』 (서울: 이레서원, 2003), 80-81.

[5] 김양선,『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1956), 178.

[6] 김세운,『하나님이 만드신 여성』(서울: 두란노, 2004), 58-87.

[7] 장동민,『우리 시대를 위한 십계명』(서울: 대서, 2017), 35.

[8] 이데올로기적 신앙은 자칫 색깔론으로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1951년 7월 장로회 고려파에서는 자신들을 쫓아낸 장로교총회를 표적 삼아 국회의원 22명의 명의로 한국의 장로교회는 용공(容共)단체라고 독언(毒言)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김양선 목사님은 “선(善)도 악(惡)에 이용되면 의(義)가 아니고 악인 것을 출옥성도들(고려파의 지도자들)은 알았어야 할 것이었다”라고 하며 탄식하였습니다. 김양선,『한국 기독교 해방 10년사』, 153.

[9] 장동민,『우리 시대를 위한 십계명』, 35-36.

[10]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편,「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27회 회록 부록」(서울: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1938), 9.

[11] 이덕주·서영석·김흥수,『한국 감리교회 역사』(서울: 기독교감리회 출판국, 2017), 328.

[12]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Ⅱ』(서울: 기독교문사, 2000), 306-309.

[13]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Ⅱ』, 318.

[14] 신사참배는 전 교단을 아우른 것이었지만, 전 교단적으로 결사적으로 반대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장로교단의 안이숙 선생, 한상동 목사, 주기철 목사 같은 분들과 감리교의 신석구 목사, 강종근 목사, 최인규 권사 같은 분들이 대표적입니다.

[15] 김승태, “과거사 청산 안했기에 사회 신뢰 잃어," 2005년 6월 22일 뉴스엔조이 https://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2284 2018년 9월 21일 오후 1시 44분에 접속.

[16] 연규홍, “역사의 사실과 해석의 진실 : 장공 김재준에 대한 친일 논의를 반박함," 「신학연구」48(2006): 265-286.

[17]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Ⅱ』, 302.

[18] 장동민,『박형룡: 한국 보수신앙의 수호자』(서울: 살림, 2006), 54-55.

[19] 장동민,『박형룡의 신학연구』(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54.

[20] 장동민,『대화로 풀어보는 한국교회사 2』(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5),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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