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이야기] 4.-아편·러일·청일전쟁이 한반도 복음전파에 미친 영향
[한국교회사 이야기] 4.-아편·러일·청일전쟁이 한반도 복음전파에 미친 영향
  • 홍인표 목사
  • 승인 2019.10.10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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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은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입국하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한 마디로 이 시기는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은 시기였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조선의 중화주의가 무너지고 오랜 시간 한반도를 지배해온 유교 이데올로기의 모순이 여러 방면에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1. 19세기 말 한반도의 사회적 상황과 한국교회

: 아편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청일전쟁이 한반도 복음전파에 미친 영향

이 단락에서는 중화주의 해체와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한반도 침략에 대해서도 함께 언급하려고 합니다. 즉 아편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청일전쟁이 한반도 복음전파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말씀 드리려는 것입니다. 

1) 중화주의 해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영국과 청나라는 1840년~1842년과 1856년~1860년 두 차례에 걸쳐 아편전쟁을 치렀습니다. 이 전쟁에서 오랜 동안 세계의 중심이며 가장 거대한 제국이라고 인식되어온 중국(청나라)의 패배한 것이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미쳤을 충격은 대단하였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두 가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첫째, 중화주의적 세계관에 회복될 수 없는 금이 가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둘째,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아편전쟁 이야기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영국을 노략질하는 도적의 나라로 인식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아편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대륙을 준(準) 식민지로 만든 영국은 그 여세를 몰아 극동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통상을 하려고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1832년에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로드 엠허스트(Lord Amherst)호가 황해도 장산곳과 충청도 고대도에 나타나서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배에는 우리나라를 방문한 첫 개신교 선교사인 귀츨라프 목사가 타고 있었습니다.[1]

뿐만 아니라 1845년에는 영국 군함 사미랑(Samirang)호가 제주도와 전라도 해안을 탐사하고 떠났습니다. 이와 같은 군함의 출연은 명백히 군사침략 행위였습니다.[2] 그 외에도 수차례 프랑스의 군사적 위협이 있었는데, 우리에게는 1866년 병인양요가 가장 유명합니다.

미국과의 군사적 충돌은 1871년 신미양요입니다.[3] 1864년-1865년 러시아의 통상요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조선 정부를 경악하도록 했던 사건은 1869년 독일인 오베르트의 남현군묘(대원군의 부친) 도굴 사건이었습니다. 더욱이 천주교 신부들과 교인들이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것이 밝혀짐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박해의 대상이었던 천주교도들은 더욱 참혹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4] 독일인 오베르트는 오래된 보물을 손에 얻으려고 하였고 당시 한반도의 신부들과 교인들은 획득된 보물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선교의 자유를 얻으려고 하는 이해관계자 상호 맞았던 것입니다. 참 근시안적인 생각입니다.

이보다 조금 전인 1801년에는 이른바 황사영 백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조선의 천주교인 황사영이 북경에 있는 프랑스인 주교에게 보내려고 했던 서신이었습니다. 이 서신에는 당시 조선 정부에서 분노할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 있었는데, “청국 황제를 움직여 그 명령으로 조선이 천주교를 용납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 천주교 국가들을 움직여 군한 수백 척에 정병, 5, 6만을 승선 시키고 대포 등 병기를 싣고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천주교 선교 승인을 요구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그 서신의 마지막에는 ”우리나라가 망하여 없어져도 성교(聲敎)의 표식은 남아 있어야 한다“며 경악스러운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서신이 발각됨으로 황사영이 능지처참되고 그의 가족들이 유배되었음은 물론, 이 사건으로 순교한 천주교인의 수가 3백이 넘었다고 합니다.[5]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한 19세기 말 조선의 반서양, 반기독교 역사 상황을 엮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는 1876년 결국 일본과 개항한 후 서양 여러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것은 당시 조선에 영향력을 증대하고 있는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청나라의 외교적 노력에 따른 것이었습니다.[6]

사실 미국이 처음 조선에 접근했을 때는 조선에서의 영향력 상실을 우려한 청나라가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침탈이 본격화 되고 한반도 침탈 또한 가시화 되자 조선이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수립하도록 함으로써 조선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물론 청나라가 조선에 영향력을 끼침으로 미국과 우호관계를 갖도록 하기는 하였지만, 이미 금이 간 중화중심 세계관은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미국과 조선의 우호관계에 대해서는 다시 말씀 드리고 여기에서는 중화중심 세계관 해체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894년-1895년의 청일전쟁은 중화중심 세계관이 깨어지는 결정적인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왜놈’이라며 무시했던 일본이 대국(大國) 청나라를 물리친 이 전쟁의 결과가 결국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조선 입장에서도 중국에 대한 희망과 환상이 여지없이 무너졌음은 물론입니다.

 

2) 두 차례 전쟁과 한국교회 성장

여기서 말하는 두 차례 전쟁은 1894년-1895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1905년의 러일전쟁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청일전쟁의 결과로 조선 지식인들의 중화중심 세계관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리고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세계를 경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러일전쟁 발발 당시 러시아의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던 어느 미국신문에 수록된 풍자화입니다.

러일전쟁 발발 당시 러시아의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던 어느 미국신문에 수록된 풍자화
▲러일전쟁 발발 당시 러시아의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던 어느 미국신문에 수록된 풍자화

이 그림에는 중국(청나라)은 강대국 대열에서 오래전 떨어져 나가 비참하게 멀리서 구경하고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서양 열강들은 러시아의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서양 열강은 경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반도에 영향을 끼치려고 했던 청나라와 러시아를 몰아내고 일본은 마음껏 자신들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 백성들이 의지할 수 있는 나라는 훌륭한 기독교국가로 알려진 미국 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미국인 선교사들은 조선 백성들을 동정과 사랑으로 대하였기 때문에 조선 백성들의 미국 선교사 인식과 미국 인식은 동일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욱이 청일전쟁에서 보여준 의료선교사들의 모습을 통해 조선 백성들은 선교사들에 대한 우호적 감정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 조선 백성들의 서양인들에 대한 적대감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1888년 6월에 일어난 이른바 “영아소동(Baby Riot)”은 서양인들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잘 말해주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선교사(서양인)들이 조선 어린이들을 유괴하여 외국에 팔아 버리거나 실험 대상으로 쓰고 심지어 남색(男色)을 즐기기까지 한다”는 유언비어였습니다. 이를 통해 선교사들의 활동에 큰 방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변마저도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조선 정부가 “고시문”을 붙이는 등 직접 나섬으로써 해결되었습니다.[7]

그러나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청일전쟁을 통해 선교사들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청일전쟁의 주요 격전지였던 평양에는 전투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쌓였습니다. 그로인해 불결한 위생에 노출된 조선 백성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심지어 가족 중에 병을 앓는 사람이 생기면 전염을 우려하여 길바닥에 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인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전쟁에서 다친 부상자들과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결국 그로인해 목숨을 잃는 선교사들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선교사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이 가장 유명합니다.[8]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겪는 가운데 선교사들은 이 땅의 백성들에게 든든한 보호자로서의 역할 또한 하였습니다. 청일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평양에서 교회는 피난민의 수용소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 번에 걸친 외세간의 투쟁 속에서 민중들은 목숨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방도로 교회를 택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교회는 서양인들의 소유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전쟁 당사자인 일제의 입장에서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즉 교회가 치외법권 영역으로 인식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평양을 점령한 일본군이라 해도 “교회의 재산만은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교회와 병원 등은 전쟁 중에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보증수표처럼 여겨졌습니다.[9]

결국 두 번의 전쟁을 통해 한국교회는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18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조선 개신교는 급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로교인만 해도 1890년경 불과 수 백 명에 불과했지만, 1905년이 되어서는 9천명으로 늘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세운 선교학교도 1886년 아펜젤러가 세운 배제학당, 언더우드가 세운 언더우드 학당(경신학교) 그리고 스크렌턴 부인이 세운 이화학당 등 세 학교에 불과했고 1887년에 엘러즈가 세운 정동여학당 한 곳이 세워졌고, 1888년과 1889년에는 한 곳도 설립되지 않았지만, 1894년부터 1904년까지는 해마다 한 곳에서 네 곳씩 선교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10]

물론 두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개신교를 서양인들의 힘의 종교로 생각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교회 성장을 그런 측면에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전쟁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확고해졌다는 사실에서도 또 다른 성장 요인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 지방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막론하고 하나님께 의존하는 신앙이 깊어졌다는 사실 또한 전쟁 후 교회 성장의 기틀이 되었습니다.[11] 그것은 선교사 마펫(S. A. Moffett)의 증언에서 확인됩니다.

교인과 그 가족들, 구도자들, 그리고 하나님이나 예수의 이름을 들어 본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자들은 박해와 그에 따른 형벌을 목격하고, 또 그 같은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교인들의 모습을 본 후 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예수 교리의 소식을 전했다. 교인들이 정착하는 마을 마 을 마다 자기네 가족들을 모아 기도회를 가졌다. 전에는 냉소하며 교인이 되는 것으 저주했던 부모, 아내와 자녀들도 이제는 말씀 전하는 것을 경청했고 하나님께 구해 달라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릎 꿇고 기도했다. 그 중 상당수는 교회로 들어오기를 원했고 거의 대부분은 전도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12]

그리스도인들 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의 신앙이 견고해졌고, 평양에서 황해도 및 평양 밖의 평안도 등으로 피난을 갔던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광범위한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고 교인이 늘었던 것입니다.[13]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한 한국교회의 성장은 한 가지 요인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대략 정리해 본다면 첫째, 전쟁 속의 위기의식에 따른 조선 백성들의 기독교 귀의. 둘째, 의료 및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준 선교사들의 헌신에 따른 서양인에 대한 불신 해소. 셋째, 평양을 비롯한 도시 그리스도인들의 피난 속에서의 전도활동. 넷째, 조선 백성들의 서양국가와 교회에 대한 동일한 인식(힘 있는 국가) 등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다섯 번째의 경우 교회를 통해 목숨과 재산을 보호받고 싶어 했던 민중계층의 입교 동기도 되었지만, 두 전쟁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한반도를 잠식하는 일제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낀 지식인들의 입교 동기 또한 되었습니다.[14]

한반도에서 벌어진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은 한국교회 성장에 큰 요인으로 작용되었고 러일전쟁 직전인 1903년에 원산에서 시작되어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본격화 된 한반도의 대 부흥 운동은 한국교회 성장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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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주]

[1] H.A. Rhodes, "The First Protestant Missionary to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 Vol, 27, No, 11, Nov, 1931, 223-228.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 Ⅰ』(서울: 기독교문사, 1999), 113에서 재인용. 황해도 장산곶에 잠시 내린 귀츨라프는 조선 사람을 만났으나 복음을 전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성경을 건네주려고 할 때 그 조선 사람은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나라에서 금하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고 합니다. 귀츨라프 목사는 로드 암러스트호의 선목(船牧)이자 선의(船醫)로 승선하였는데, 장산곶에 잠시 정박했을 때 주민들에게 감자를 재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떠났다고 합니다.

[2]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 Ⅰ』, 113.

[3] 1866년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서 좌초되고 조선관군에 의해 많은 선원들이 죽은 사실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로저드 제독이 군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에 들어와서 군사적 침공을 거행한 사건입니다. 조선과 미국의 군사충돌로 인해 미군은 사망 4명, 부상 19명이 발생하였고 조선군은 사망 50명(조선군 추산) 혹은 350명(미군 추산). 부상 20명이 발생하였고 미군은 청나라로 퇴각하였습니다.

[4]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 Ⅰ』, 118.

[5] 민경배,『한국 기독교회사』(서울: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3), 74.

[6] 박정신,『근대한국과 기독교: 그 만남, 물림 그리고 어긋남의 사회사』(서울: 민영사, 1997), 20.

[7]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 Ⅰ』, 247-248.

[8] Sherwood Hall,『닥터 홀의 조선회상』김동열 옮김 (서울: 좋은씨앗, 2006), 170-173.

[9]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 Ⅰ』, 255-256. 당시 마펫 선교사의 증언은 청일전쟁 당시 교회가 평양 백성들의 피난처 역할을 하였음을 알도록 해줍니다. “전투는 9월 15일에 벌어졌다.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남아 있던 불쌍한 한국인들은 놀랐고 그 중 반은 죽거나 도망쳤다. 평양에 남아 있던 교인들 대부분은 예배당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함께 주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했다. Samuel. A. Moffett's letter to Dr. Ellinwood, Nov, 1, 1894.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 Ⅰ』, 255 재인용.

[10] 박정신,『근대한국과 기독교: 그 만남, 물림 그리고 어긋남의 사회사』, 24-25. 박정신은 그의 책에서 1887년에는 선교학교가 한 곳도 설립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1887년에는 장로교 선교사 엘러즈에 의해 정동여학당이 설립되었습니다.

[11]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 Ⅰ』, 257.

[12] Samuel. A. Moffett, “The work of sprit in North Korea," MRW, Sep., 1894, 833.

[13]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 Ⅰ』, 257.

[14]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 Ⅰ』,259-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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