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말론 심층연구 ] 초기 한국교회의 종말신앙 ②
[ 종말론 심층연구 ] 초기 한국교회의 종말신앙 ②
  • 박응규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교회사)
  • 승인 2019.12.06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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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재한 미국 선교사들의 종말론적 특성

II. 초기 재한 선교사들의 종말론: 미국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1. 19세기 말 미국의 선교운동과 전천년주의(Premillennialism)

박응규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교회사)
▲박응규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교회사)

미국의 종말론이 변천된 과정은 대체적으로 청교도들은 전천년설을 따르지만, 18세기 대각성운동을 거치면서 천년왕국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이 땅에 임할 수 있다는 후천년설로 많은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이 신봉하게 되었다.23) 이런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의 변천에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역할이 컸다. 그는 대각성 운동의 기간을 거치면서 <구속사역의 역사>(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라는 저서를 통해 그리스도의 왕국이 복음전파를 통하여 임할 수 있다는 후천년설적인 견해의 토대를 마련하였다.24)

그러나 불란서 혁명을 거치면서, 서구의 기독교인들은 인간성과 그것에 근거한 사회의 진보에 대하여 회의적인 견해를 품기 시작하였다. 더 나아가 인간의 노력으로 이 땅에 천년왕국이 임할 수 있다는 후천년설에 대하여 의심하게 되었으며, 점진적인 진보는 더 이상 가능해 보이지 않았고 묵시론적 기대가 오히려 보다 현실적인 견해로 간주되었다.25)

미국에서도 이런 영향과 함께 남북전쟁을 경험하 면서, 후천년설은 그 영향력이 뚜렷하게 감소하기 시작하였으며, 전천년설이 부흥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북전쟁 이후의 종말론적 변천에 대한 규명이 복잡하긴 하지만, 이러한 변혁적인 시대상황이 전천년설의 부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 할 수 없다.26) 미국에서는 19세기 초엽부터 천년왕국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게 되었으며, 천년왕국사상은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의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27)

후천년설을 신봉하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19세기 후반에 불어 닥친 과학적 자연주의의 영향을 목격하면서 전천년설을 선호하게 되었다. 자연주의를 수용한 세속화된 후천년설은 보다 쉽게 촬스 다윈(Charles Darwin)과 허버트 스펜서 (Herbert Spencer)의 생물학적이며 사회적 진보에 대한 개념을 수용하였으며, 복음주의적 신앙을 유지하려는 자들은 기독교의 역사적 신앙에 대한 거부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위기상황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전천년설을 받아들이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이것은 과학적 자연주의를 거부하고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고자 하는 경향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공백을 1862년과 1877년 사이 북미주를 수차례 방문하여 소개한 다비의 세대주의 신학체계가 후천년설을 신봉 했던 미국의 장로교와 침례교인들 가운데 급속도로 수용되었다.28)

또한 계속 이어지는 이민의 물결과, 특히 로만 캐톨릭 신봉자들의 유입, 그리고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현상은 미국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야기 시켰는데, 이러한 사회의 변화와 전쟁의 참화를 경험하면서 후천년설에 입각한 기독교 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한 꿈은 사라지고 이 세상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가 우세해지고 복음 전도와 선교에 대한 동기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윤리적 선지자적 사상에서 탈역사적 묵시주의로의 경향이 농후해졌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노력과 천년왕국은 더 이상 연속성을 가질 수가 없게 되었으며 역사적 현실과 천년왕국의 소망에는 비연속성이 보다 강하게 강조가 되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전에 와야만 시대 상황과 조화를 이루는 세계관으로서의 전천년설이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 세상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가 우세해 지고, 복음전파도 사회와 문화를 변혁시키는 면보다는 멸망해 가는 세상에서 개개인 영혼을 구해 내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종말론의 변화와 함께, 19세기 말에는 미국에 선교에 대한 열정이 타오르는 계기가 부흥운동과 연결되어 나타났다. 이 때 부흥운동은 천년왕국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전에 베푸시는 마지막 자비의 근거한 役事였던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 시기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부흥운동의 주역이 바로 드와이트 무디(D. L. Moody, 1837-1899)였던 것이다. 미국 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던 시기에, 즉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무디의 부흥운동은 세차게 파급되었던 것이다.

특히 보수적인 미국 기독교인들은, 특별히 젊은 대학생들은 학생자원운동(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향으로 세계 각국으로 선교사로 자원하는 숫자가 점증하였다. 이런 선교운동의 확산의 배후에는 전천년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매우 임박한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죽어 가는 이방민족들을 구해내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사명이라고 간주되었다. 선교의 동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수단이나, 그리스도께서 주신 대 사명을 수행하는 동기보다도, 멸망해 가는 민족들을 건져내야 하는 다소, 감상 적인 면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미국 교회가 이러한 역사적 변혁과 함께 종말론적인 변화를 맞이하고 있을 때, 영국의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 시작된 세대주의가 미국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다비의 세대주의는 그 근본적인 특성이 철저 한 미래주의와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분리라고 할 수 있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며 집회를 인도한 결과 적지 않은 추종자들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사이러스 스코필드(Cyrus I. Scofield, 1843-1921)는 다비의 사상을 미국에 심어놓는데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수많은 신자로 하여금 전천년설과 세대주의를 동일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원래 이 한권의 성경으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신학서적이나 도서관의 도움이 없이도 성경을 이해하고 가르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1909년과 1917년에 영국의 옥스포드대학교 출판사에서 발간하였다.29) 스코필드는 선교적 열정을 관주성경을 통해 선교의 확산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선교의 열정과 함께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20세기의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성경이 되었다.

세대주의는 19세기 후반(1878-1890)에 활발하였던 사경회 및 성경예언 모임을 통하여 널리 파급되어 갔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세워진 대부분의 성경학교들은 세대주의자들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 세계복음화는 그들의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고 성경학교들을 통해 수많은 선교사들이 배출되게 되었다.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인식은 전도와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타오르게 되었다.

다소 비관적인 세계관을 특징으로 하는 전천년설을 신봉하면서도 세계복음화를 위해서는 낙관적인 활동가들로서의 선교사들이 이들 가운데서 많이 배출되게 되었다. 미국에 대한 선민국가의식, 미국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확신하는 18세기의 기독교국가 미국건설을 향한 의지가 종말론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선교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운동에 힘입어 1875년까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괄목할 만한 숫자가 세대주의를 신봉하게 되었는데,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이와 같은 현상은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대주의가 이렇게 약진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세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1843년경으로 예언하여 사회적 물의를 야기했던 윌리암 밀러(William Miller, 1782-1849)의 천년왕국 사상과는 다른 종말론임을 효과적으로 인식시켰으며, 또한 당시의 낙관주의적 세계관의 퇴조는 자연스럽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불 어 닥친 현대주의의 여파는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문자적 성경 해석방법이나, 성경의 권위에 대한 철저한 인정은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호감을 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가 끝나는 시기에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 가장 우세한 종교적인 요인이 되었다.30) 더 나아가 전천년주의야말로 정통신앙을 판가름하는 기준으로써 자리매김까지 되었다.

종말론의 변천은 부흥이나 선교운동의 동기에 있어서도 변화를 야기하였다. 전천년주의자들은 많은 시대적인 현상들을 말세적 징조들로 해석하면서, 현재의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을 지척에 두고 멸망해 가는 것으로 간주하였고, 선교나 전도의 초점은 개인영혼 구원에 모아졌다. 미국의 19세기선교운동에는 이방영혼들을 구원코자 하는 동기가 주요한 동인으로 작용하였다.31)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인식은 선교와 전도에 보다 절박한 자세를 제공하였으며, 전환란적 휴거의 개념은 복음을 지체치 아니하고 수용케 하는 결정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러한 임박한 재림에 대한 인식은 선교적 열정을 타오르게 하였다.

그러기에 세대주의자들은 염세적인 세계관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활동적인 낙관주의자들처럼 보였다. 세상의 미래를 어둡게 바라보는 관점에도 불구하고 세대주의자들은 선교를 후원하는 데에는 어느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구원받지 못한 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선교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열리는 성경 예언모임은 선교적 동기와 함께 진행 되었다. 무디를 중심으로 하는 19세기 중엽과 말엽의 부흥운동은 세대주의와 함께 전진하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미국 교회는 아시아에 대한 선교의 문이 열리자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선교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은 세대주의자들이 맡았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특히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Institute)를 통하여 배출된 수많은 젊은 일꾼들은 새롭게 열린 아시아를 향하여 복음을 들고 나서게 되고 미국은 점차적으로 선교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미국은 남북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이 선교적인 면에서 획기적인 확장이 있게 되었다. 1869년에는 유럽전체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의 숫자와 그리고 영국 선교사들의 약 반 정도와 맞먹다가, 1910년까지 미국은 유럽전체에서 파송한 숫자 보다 두 배나, 그리고 영국을 비로써 추월하고, 1920년대에 이르면 전천년주의자들은 선교운동에 있어서 압도적인 다수가 된다.32)


II. 2. 재한 미국 선교사들의 종말론적 특성

19세기 대부분의 미국 개신교인들의 신앙은 경건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 유산이 공유되어 반영된 복음주의적 신앙이었다.33) 복음주의 신학을 정의하는 것은 미국종교역사 해석에 있어서 가장 난해한 과제중의 하나지만, 대체적으로 다음의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고전적 혹은 청교도적 복음주의(Classical/Puritan evangelicals); 2) 경건주의적 복음주의(Pietistc evangelicals); 3) 근본주의 적 복음주의(Fundamentalist evangelicals); 4) 진보적 혹은 에큐메니칼 복음주의(Progressive / Ecumenical evangelicals).34)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의 신학은 청교도적 신학을 배경으로 보수적이며 복음주의적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35) 그러나 “초기 미국 선교사들의 신학적 경향은 다소 칼빈주의적이라기 보다는 근본주의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36)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학을 복음주의의 유형들을 염두에 두고 정의한다면, 그들은 19세기의 부흥 및 선교운동의 영향 속에서 신학이 형성되기에, 우리는 그들의 신학은 “경건주의적이며 근본적인 복음주의”가 가장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37) 한국에 파송된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신학적 경향은 아주 강한 전도의 열정과 철저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에 대한 복음의 내용이 그 주요 한 특징이었다.38)

미국 선교사들의 종말론적 경향 및 특성을 좀 더 깊이 고찰해 보려면, 그들 의 신학과 선교에의 헌신이 어떤 영향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살피는 것이 필수적 이다. 그들의 배경은 대체로 학생자원운동과 수차례에 걸쳐 모였던 예언모임에서 신앙적 각성과 선교에의 헌신이 이루어졌으며, 그리고 여러 신학교 등에서 그들의 신학과 선교열정이 형성되었다. 이 중에,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이나 아시아, 그리 고 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으로 파송되던 시기인 1889년과 1923년 사이에 무디성 경학교 출신 중에 1143명이 선교사로 헌신하여 파송되었다. 그 중에 818명은 1923년까지 머물며 약 25개국에서 교단 선교부나 독립선교부에서 활동하고 있었으 며 31명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약하였다.39)

한일합방 당시, 한국에 체재하던 선교사들의 숫자가 개신교뿐만 아니라 구교까지 합하여 205여 명이었는데, 그중에 약 3/4인 143명이 미국 선교사들이었다는 보고를 감안한다면, 무디성경학교 출신 31명과 함께 세대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 대다수였다는 사실에 이견이 없을 것 같다.40) 세대주의자들의 선교열정으로 인하여 1920년대까지, 미국 선교사들의 상당한 숫자는 바로 이들에 의 해 주도되고 선교활동이 시행되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면 어렵지 않게 한국에 파송된 미국 선교사들의 신학적 경향이나, 종말론적 특성을 인지할 수 있다. 미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를 오랫동안 지냈던 브라운(A. J. Brown)은 1911년 이전에 한국에 파송된 미국 선교사들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가 있다.

“20세기 초반에 파송된 전형적인 미국 선교사들의 신앙은 바로 청교도적인 삶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은 한 세기 전에 뉴잉글랜드의 조상들이 안식일을 엄수하듯이 지켰으며, 춤이나 흡연, 카드놀이 등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이 해서는 아니 될 것으로 간주하여 죄악시하였다. 그들의 신학적인 입장은 상당히 보수적이었으며 성경비평에 대해서는 위험스러운 이단적인 견해로 여겼다. 그리고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아주 중요한 진리로 받아 들였다.”41)

한국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였던 플로이드 헤밀톤(Floyd E. Hamilton)의 증언을 통해서도 우리는 당시 선교사들의 종말론적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 비록 소수의 무천년주의자나 후천년주의자들이 있었지만,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천년왕국을 핵심적인 신성한 교리로 간주했던 세대주의적 전 천년주의자이거나 전천년주의자들이었다.”42) 또한 소안련(William L. Swallen, 1865-1954) 선교사의 부인이었던, 살리에 스왈론(Salie W. Swallen)은 1894년에 모든 장로교 선교부는 전천년설을 신봉했으며 한국에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파급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이었다고 언급하였다.43)

게일은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동기도 그가 재학 중이었던 토론토 대학교(University College, Toronto)를 방문했던 무디의 감화를 아주 강하게 받았으며, 1888년 한국으로 떠나던 도중인 뱅쿠버에서도 무디를 다시 만나 그의 축복과 기도의 약속을 마음에 소중하게 간직하며 내한했다.44) 체계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고 토론토 YMCA 선교사로 파송되어 활동했던 게일은 훗날 그의 언어적 재질을 수많은 저서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무분별한 신학적 입장으로 인하여, 자유주의 신학이나, 세대주의 신학을 한국에 파급시키는 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한 셈이 되었다.

게일이 언더우드와 함께 <스코필드관주성경> 을 번역 출판을 시도한 것은 당시 장로교 선교사들 중에 얼마나 세대주의의 영향이 컸었는지를 단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한국교회 안에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은 사경회와 성경학교에 가르쳐지는 내용과 여러 권의 세대주의 서적들이 번역되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읽혀졌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종말론적 경향은 한국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분명히 인식 되었다. 박형룡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야말로 당시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에 의해 열렬하게 신봉되어진 종말론적 신앙임을 인정하였다.45) 그리고 한국 전통적인 종교 안에 내재해 있는 이원론적이며 운명론적인 세계관은, 구한말의 격동적인 역사적인 현실과, 일제하의 시련의 상황은, 선교사들이 전해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조우되어 해방 전까지 전천년설은 한국의 장로교회의 확고부동한 종말론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전천년설적인 특징이 선교지에서 일관되게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견해이다. 제임스 패터슨(James Alan Patterson)에 의하면, 전통적인 선교정책에 사회적 관심은 이미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 안에 내포 되어 있었다. 사회복음이 주창되었을 때,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은 당시의 선교지도 자들에게 전통적인 복음을 전하며 행해지는 선교 사업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19세기 미국의 복음주의적 특성, 즉 복음전도의 우선성과 사회적 관심이라는 합법성을 공유하면서 미국과 전(全)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고자 하는 일종의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주요한 교단의 선교지도자들은 사회복음신학에 대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그 특성들을 선별적으로 선교정책에 활용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사회복음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사회적 관심에 대한 것은 수용적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다.46)

부흥운동과 사회개혁과의 연관성에 대하여 심도 있는 연구를 한 티모시 스미스(Timothy Smith)는 그의 저서, <부흥운동과 사회개혁>( Revivalism and Social Reform )에서 복음주의 신학이 내포하고 있는 사회적 관심을 19세기 초엽의 부흥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후천년설과 완전주의적 경향에서 그 근원을 찾고 있으며, 조지 마스덴(George Marsden)도 그러한 경향이 하나님의 도덕정치와 비이기 적인 자애(disinterested benevolence) 개념에서 심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47) 이러한 연구들은 기독교의 사회적 차원에 대한 관심은 사회복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복음주의적 유산의 주요한 요인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48) 미국의 선교운동은 복음전도와 함께 사회적 관심을 병행하면서 전개되었다.49) 1891년부터 1937년까지 미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를 지낸 로버트 스피어(Robert Speer)도 현대 미국 선교운동의 상황에 대하여 일관한 후에 초기부터 사회적 관심은 선교적 과제의 주요한 요인이었음을 결론내리며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였다.

“사실은 무의식적으로나, 진정한 선교정신에는 이미 사회적 원리가 내포되어 있음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나, 선교사들은 인간성에 영향을 주는 모든 영 역에 관심을 갖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현대선교의 창시자들은 그들의 선 교적 과업을 개인회심이라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적 봉사와 형제애 라는 관점에서도 인식하였다.”50)

복음전도와 사회적 관심은 적어도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선교운동 속에 우세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선교방법이나 강조점에 있어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판이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전도의 우선성과 함께 병행되어진 사회적 차원에서의 여러 가지 봉사들은, 세계를 기독교화 한다는 기치아래 활발하게 미국 선교 운동 가운데 추진되었다. 대체적으로 사회복음은 1920년 대 이전까지는 선교운동 에 있어서 분열이나, 논쟁을 유발하는 요인은 아니었다.51) 1920년대의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간의 논쟁은 미국 개신교의 성격을 여러 가지 면에서 변화시킨 사건이었다. 신학적인 논쟁은 신학이나 선교방법에 있어서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임으로 양극화 되면서, 그동안 유지되어왔던 포용성도 선교운동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52)

복음전도를 통한 기독교문명 건설이라는 명제는 사회복음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사회복음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지 않는 전천년주의를 신봉 하는 자들에게서도 발견되어진다. 윌리암 허치슨(William Hutchison)은 언급하기를, 1920년대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선교운동에 있어서 후천년설적인 그리스도의 재림이전에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특징과 재림 전에는 어떤 선한 일 이 일어날 수 없다는 전천년설적인 확신이 균형을 이루어 강조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이 미국의 선교전성기에 발견되어진다고 하였다.53)

현대 미국 선교운동의 절정기는 후천년설적인 특성과 전천년설의 특성을 조화시켜 복음전도와 사회개혁을 전개함으로 세계복음화를 이루고자 하는 열정이 드높았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1920년대를 지나면서 이러한 특성들은 점차적으로 분화되고 나뉘어짐으로 선교운동은 그 열기가 식어졌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한국에서는 1920년대에 독립운동의 실패에 따른 결과로서 한국 기독교회의 신앙적 특성도 민족의 현실에 지대한 관심을 지니면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국면이 내세지향적인 특성이 강하게 표출되었다.54) 이런 변천의 배후에는 한국의 정치적인 현실과 함께 미국 선교사들의 선교 상황이 변천하게 된 요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55)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둘 때에, 한국이라는 선교지에서 나타난 종말론적 특징들도 미국 선교사들의 어느 특정 천년왕국설로만 설명되어질 수 없는 면이 있다.

그리고 선교지 교회의 신앙과 신학형성을 위해서도 어느 한 종말론적 견해로 편향 되는 것보다, 그리고 어느 한 종말론의 특징으로 국한되기보다, 이렇게 균형 있는 조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각기 장단점을 지니고 있고,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의 종말론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의 종말론적 유형들의 변천은 바로 이와 같은 선교사들의 종말론적 배경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그들은 전천년설은 신봉했을지라도 선교초기부터 그 견해에 일관적이고 상응하는 선교정책을 실행하기 보다는, 선교지의 필요도 고려하면서 이미 그들의 복음주의적인 신학 속에 함유 되어있는 사회개혁적인 수단들을 사용했으며, 한국의 개화 및 항일 정책에도 직간접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책들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919년의 독립운동의 실패와 1920년대의 미국에서의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간의 신학논쟁은 결국은 선교지에서도 신학적 차이와 선교방법의 차이를 극명하게 구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1920년대의 한국과 미국의 정치 종교적 상황은 선교사들과 한국 성도들로 하여금 전천년설에 부응하는 신앙적 특징들이 더욱 우세하도록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한국교회의 종말론 형성은 일제하라는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이루어졌다.56)


미주 ) ------------

23) Timothy P. Weber, Living in the Shadow of the Second Coming: American Premillennialism, 1875-1982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13; Cf. Perry Miller, Errand into the Wilderness (Cambridge, Mass.: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56), 217-220.

24) C. C. Goen, "Jonathan Edwards: A New Departure in Eschatology," Church History 27 (March 1959): 25-40. Cf. Brandon G. Withrow, "A Future of Hope: Jonathan Edwards and Millennial Expectations," Trinity Journal 22:1 (2001): 75-98.

25) E. R. Sandeen, "Millennialism," in The Rise of Adventism, ed. E. S. Gaustad (New York: Harper & Row, 1974), 107-108.

26) James Davidson Hunter, American Evangelicalism: Conservative Religion and the Quandary of Modernity (New Brunswick and London: Rutgers University Press, 1983), 26. Cf. R. K. Whalen, "Millenarianism and Millennialism in America, 1790-1880" (Ph. D. diss.,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Stony Brook, 1971).

27) Ernest R. Sandeen, The Roots of Fundamentalism: British and American Millennialism 1800-1930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4-5; Hunter, American Evangelicalism , 26. Sandeen은 19세기 초엽의 미국은 천년왕국 사상에 취해있었다(“drunk on the millennium")고 언급했다.

28) Buss, "Meeting of Heaven and Earth," 14-15.

29) Dana L. Robert, "'The Crisis of Missions': Premillennial Missio Theory and the Origins of Independent Evangelical Missions," in Earthen Vessels: American Evangelicalism and Foreign Missions, 1880-1980, eds. Joel A. Carpenter and Wilbert R. Shenk (Grand Rapids: Eerdmans, 1990), 44-45; Cyrus I. Scofield, ed., Scofield Reference Bibl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09), 스코필드는 일곱 세대로 인류의 구속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1) Man Innocent, 2) Man under Conscience, 3) Man in Authority over the Earth, 4) Man under Promise, 5) Man under Law, 6) Man under Grace, 7) Man under the Personal Reign of Christ (Millennium).

30) 구프린스턴(Old Princeton) 신학자들도 이러한 추세 속에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주장에 동의 하지 않더라도, 그들과 연합전선(a united front)을 형성하면서 현대주의와 자유주의의 도전에 대처 하였다. 이러한 연계성 때문에 구프린스턴 신학자들의 종말론을 전천년설과 근본주의 신학과 동일 시하는 오해가 생겨나기도 했다.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Paul C. Kemeny, "Princeton and the Premillennialists: The Roots of the marriage de convenance," American Presbyterians 71 (1993): 17-30; 졸고, “구프린스턴 신학과 한국장로교회,” 「 신학과 선교 」 8 (2004): 185-204.

31) R. Pierce Beaver, "Eschatology in American Missions," Basileia, Walter Freytag zum 60 Geburtstag, ed. J. Hermelink and H. J. Margul (Stuttgart: Evang. Missionsverlag, 1959), 69-70.

32) William R. Hutchison, Errand to the World: American Protestant thought and Foreign Mission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93.

33) George M. Marsden, "Fundamentaism and American Evangelicalism," in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eds.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on (Downers Grove, Ill: Inter Vasity Press, 1991), 23.

34) 졸고, "From Fear To Hope," 123-124; Max L. Stackhouse, "Religious Right: New? Right?" Commonweal 29 (January 1982): 52-56; Donald Dayton, "The Limits of Evangelicalism: The Pentecostal Tradition," in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lelicalism , 47-48; Timothy P. Weber, "Evangelicalism North and South," Review and Expositor 92 (Summer 1995): 299-317. Cf. Grant Wacker, "The Holy Spirit and the Spirit of the Age in American Protestantism, 1880-1910," The Journal of American History 72 (June 1985): 45-62.

35)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95), 144.

36) 홍치모, “한국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 <신학지남> 51 (1984, 3): 129.

37) Jung Young Lee, "Korean Christian Thought," in The Blackwell Encyclopedia of Modern Christian Thought, ed. Alister E. McGrath (Oxford: Basil Blackwell, 1993), 309.

38) Harriet Pollard, "The History of the Missionary Enterprise of the Presbyterian Church, U.S.A. in Korea with Special Emphasis on the Personnel" (M. A. thesis, Northwestern University, 1927), 26. "The Mission and the Church have been marked preeminently by a fervent evangelistic spirit, a thorough belief in the Scriptures as the Word of God, and in the Gospel message of salvation from sin through Jesus Christ."

39) Weber, Living in the Shadow, 80.

40) 졸고, "From Fear To Hope," 180. Cf. Allen D. Clark, Protestant Missionaries in Korea, 1893-1983 (Seoul: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1987), 3.

41) Brown, The Mastery of the Far East, 540.

42) Floyd E. Hamilton, The Basis of Millennial Faith (Grand Rapids: Eerdmans, 1955), 18.

43) Richard Rutt, James Scarth Gale and His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Seoul: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1972), 64.

44) Ibid., 7.

45) 박형룡, <박형룡박사전집> XIV, 347; Cf. 간하배 (Harvie Conn), “한국장로교에 있어서의 시대주의,” <로고스> 17 (1965, 12): 14-29.

46) James Alan Patterson, "The Kingdom and the Great Commission: Social Gosepl Impulses and American Protestant Missionary Leaders,1890-1920," Fides et Historia 25:1 (Winter/Spring 1993): 48-49.

47) Timothy L. Smith, Revivalism and Social Reform: American Protestantism on the Eve of the Civil War (Baltimore: John Hopkins University Press, 1980); George Marsden, "The Gospel of Wealth, the Social Gospel, and the Salvation of Souls in Nineteenth-Century American" Fides et Historia 5 (Spring 1973): 14.

48) Patterson, "The Kingdom and the Great Commission," 49.

49) Richard V. Pierard, "Social Concerns in Christian Missions," Christianity Today, 18 June1976, 7-10.

50) Robert E. Speer, "The Social Ideals of the Founders of Modern Missions," in The Church and Missions (New York: George H. Doran Company, 1926), 95-96.

51) Patterson, "The Kingdom and the Great Commission," 60; idem., The Loss of a Protestant Missionary Consensus: Foreign Missions and the Fundamentalist-Modernist Conflict," in Earthen Vessels: American Evangelicals and Foreign Missions, 1880-1980, eds. Joel Carpenter and Wilbert R. Shenk (Grand Rapids: Eerdmans, 1990), 73-91.

52) David O. Moberg, The Great Reversal: Evangelism versus Social Concern (Philadelphia: J. B. Lippincott Company, 1972); Gerge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85-86.

53) Hutchison, Errand to the World , 112. Cf. Weber, Living in the Shadow of the Second Coming, 26-36, 81.

54) 양낙흥, <개혁주의 사회윤리와 한국장로교회>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4), 160.

55) Stanley N. Gundry, "Hermeneutics or Zeitgeist as the Determining Factor in the History ofEschatology?"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20 (March 1977): 45-55.

56) 이러한 예는 한국교회의 종말신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길선주 목사의 사상 속에서도 확연 하게 나타난다. 청소년기의 길선주는 그의 시대적 상황과 불우한 가정형편으로 염세적인 성향이 강해지는 성향이 매우 강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추세는 선도(仙道)에 심취하면서 보다 확고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길선주는 쇠락해지고 있는 민족의 재흥은 오직 종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소망을 기독교 신앙 속에서 발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에는 기독교 신앙을 민족의 미래와 독립의 쟁취 등에 연결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옥고를 치르고,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그의 종말사상도 보다 더 내세지향적으로 변천해 갔다. 길진경, <영계 길선주>,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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