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학 목사] 새 계명(요 13::31-38)
[김상학 목사] 새 계명(요 13::31-38)
  • 김상학 목사(성경제일교회)
  • 승인 2022.01.0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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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성경제일교회 김상학 목사
▲안산 성경제일교회 김상학 목사

 

들어가는 말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법을 좋아하십니까?” 저는 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법의 구속력 때문일 겁니다. 법을 위반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법은 정의롭게 집행되어야 하는데, 법을 쥔 인간이 정의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오고, 힘 있는 자의 “내로남불”이라는 희한한 말도 생겨서 법 집행에 모두가 “억” 소리를 낸다고 하지요. 억울하지 않은 죄인이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 법의 민낯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합니다. 

시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하나님은 법을 주시되, 사랑의 법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뒤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 아래에서 종살이했던 이스라엘을 홍해를 갈라 통과케 하심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제 새 시대의 새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먼저 사랑으로 구원하셨고, 이제 다시는 죄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안전한 울타리로 율법을 주신 게지요. 그래서 이 율법을 가리켜 사랑의 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율법의 본래 가치를 잊고 문자적으로만 이해함으로써 옭아매고 죽이는 법으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법 이면에 있는 자기를 희생하는 따뜻한 사랑이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 율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을까요? 그것도 죄 많은 인간이 율법을 집행했을 때, 유전무죄, 무전유죄, 내로남불이 얼마나 많이 작동했을까요? 법을 집행하는 자가 더 큰 죄인이요, 먼저 죽어야 하거늘 자기가 죽지 않으려니 남을 죽이는 겁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 대하여 율법의 잣대를 자꾸만 들이대는 사람은 죽이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의·정의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도 죽고 상대방도 죽게 만든다는 게지요. 세상은 정의로워야 하지만, 인간은 절대적으로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상대적 정의를 추구하는데, 결국 그 정의란 이긴 자의 정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를 죽이는 자가 ‘정의’라는 말이지요. 

 

1. 가룟 유다의 배신

그런 의미에서 가룟 유다는 자신의 법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절대 선’이신 예수님을 자신의 법으로 정죄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게 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고 하였는데, 가룟 유다의 마음은 돈통이었고, 그는 돈을 신으로 여겼던 사람이었지요.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돈을 얻고자 했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려보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급기야는 예수님을 은 30세겔(숫양 1마리에 2세겔)에 팔아넘긴 게지요. 결국은 자기도 죽고 예수님도 죽인 죄인이 되고 만 겁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이 기준이 되어 예수님 조차도 정죄했으니 가룟 유다 앞에서 살 수 있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에게 잡히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을 죄인이 생명의 주인을 죽인 꼴이 된 게지요. 

만일 이런 사람이 세상 권력을 잡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돈 때문에 죽고 죽는 사회가 되고 말겠지요. 안타깝게도 자본주의의 정의가 사실 따지고 보면 가룟 유다의 정의인 겁니다. 결국, 돈의 논리에 의해서 죽고 사는 사회가 되어 버린 게지요. 그렇다고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낫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상향의 이념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운영하는 통치자가 죄인이기 때문에 백성을 속이는 통치수단일 뿐이지요. 무섭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 정치에서 편을 갈라 싸우는 모습은 죽고 죽는 일밖에는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 정점에 대한민국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가룟 유다에게서만 아니라 베드로의 모습에서도 발견됩니다. 

 

2.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룟 유다와 정 반대편에 있는 제자가 베드로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요, 베드로는 끝까지 충성하는 자로 나타납니다. 

36~37절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베드로의 성품이 잘 나타나 있는 말이지요? 전승에 따르면 그는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한 제자입니다. 하지만 그도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역시 ‘누가 높으냐?’에 관심이 있었을 것이고, 자기 살 궁리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이니까요. 다시 말해서 얼마든지 예수님을 떠날 수 있는 그런 속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게지요. 예수님은 그가 세 번 부인할 것이란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3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자기가 살기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죽이는 자요, 그렇다면 그에게서 어떤 생명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가장 영악한 가룟 유다, 가장 충성스런 베드로, 제자들의 양극단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시작과 끝 단락에 위치시킨 것은 나머지 제자들도 충분하게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게지요. 그리고 실제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높으냐?’를 두고 서로 다퉜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지상의 가장 이상적 공동체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의 공동체의 실상입니다. 그렇다면 지구촌의 모든 공동체는 두말할 것도 없겠지요. 여기에는 죽음만 있을 뿐입니다.

 

3. 새 계명

그래서 예수님은 새 계명을 가르치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계명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이 아니면 어떤 공동체도 생명을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게지요. 예수님은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배신 사이에 새 계명을 말씀하심으로 그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십자가에 자기를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 그 그림만으로도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고난의 십자가, 저주의 십자가, 죽음의 십자가입니다. 그런 십자가임을 알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떨어지도록 기도하셨지요.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으면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 기도는 십자가에 대한 순종 여부를 놓고 기도한 것이고, 십자가를 잘 견딜 수 있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예수님만의 사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나가실 수 있었던 것은 그 사역이 곧 영광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31~32절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를 지기 전인데, 아직 부활 승천하시기 이전인데 본문은 이미 영광을 받은 것으로 ‘과거형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의 부활 승리는 반드시 일어난다는 확신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확신으로써 십자가로 나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나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율법은 드디어 그 온전한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율법은 사랑의 율법이요 생명을 심는 율법이었던 것입니다. 정의, 공의의 법만으로는 서로를 죽일 수밖에 없으나 사랑과 용서의 법은 모두를 살리는 법임을 십자가로 친히 보여주신 게지요. 

34~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것이 바로 살리는 법입니다. 생명의 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고 이 계명을 지키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이며, 제자는 이 계명으로 모두를 살려야 한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나가는 말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율법의 원 의미를 깨닫게 해 주셨고, 예수님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죽었을 때 예수님의 강림과 십자가 사랑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사랑의 속성만이 내가 살 수 있고 서로가 살 수 있음을 증명한 게지요. 

이것이 바로 완전한 율법, 새 계명인 게지요. 원래도 율법이 완전한 것이지만, 인간이 잘못 이해하고 해석했던 것을 예수님이 율법의 원 의미를 다시 가르치셨다는 사실에서 완전한 율법, 새 계명이라고 한 겁니다. 

국가가 바로 서려면, 자기 자신을 내어주겠다는 마음을 가진 이가 정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사실에 회의적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나가는 첫 단추가 자신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셨지요. 일곱 교회 중 책망받는 불완전한 교회가 있지요? 그러나 주님은 사랑의 율법으로써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완전케 하셨습니다. 반면에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칭찬받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칭찬하시고 격려하시면서 완전한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생생한 십자가의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새 계명의 공동체입니다. 모두를 살리는 사명을 가진 주님의 몸입니다. 가정 역시 교회라 말씀드렸죠? 지상의 가정도 역시 불완전하여 깨지고 상처난 모습이 있지만, 예수님의 새 계명은 주님의 몸으로써의 가정으로 회복시킬 것입니다. 

이것이 실현 가능한 공동체는 예수님의 공동체, 예수님의 몸인 교회밖에는 없습니다. 교회에도 세속의 물결이 흘러 누가 높으냐를 놓고 다투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의 공동체에 새 계명을 주심으로 주님의 제자요, 주님의 몸임을 나타내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대개 십자가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나만 죽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로 나아가면 내가 살고, 네가 살고, 이웃이 삽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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