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문명연구소, 금석학과 고대 로마의 역사서술(1)
고대문명연구소, 금석학과 고대 로마의 역사서술(1)
  • 윤지숙 기자
  • 승인 2023.02.1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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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 교수(전북대학교 사학과 조교수, 고대로마사 전공)

고대문명연구소는 1월 14일  이지은 교수(전북대 사학과 조교수, 고대로마사 전공)를 강사로   <금석학과 고대 로마의 역사서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가졌다. 다음은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Res Gestae Divi Augusti)>은 로마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자서전적 서술로 서사적 기록보다는 행정문서를 나열하는 방식에 가깝다. 원로원을 의식하고 기록되었으며 로마 인민 전체가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을 기리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주로 속주의 신전 안에 비치되어 그들의  충성심(황제숭배)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텍스트로 볼 수 있다. 그런면에서 저자의 의도나 사용자의 의도가 달랐을 수 있다. (질의응답 부분)

고대문명연구소 정기포럼(2023.01.14) 금석학(epigraphy)과 고대 로마의 역사서술영상캡쳐: https://www.youtube.com/watch?v=H-0snFUfM3M
▲고대문명연구소 정기포럼(2023.01.14) 금석학(epigraphy)과 고대 로마의 역사서술
영상캡쳐: https://www.youtube.com/watch?v=H-0snFUfM3M

 

Ⅰ. 금석학의 정의

옥스포트 영어사전에 따르면, 금석학(Epigraphy)은 명문(inscriptions)을 분류하고 해석하는 학문분야이다. 명문이란 내구성 있는(durable) 단단한 물질의 표면에 새긴 문자나 글이다. 동전에 새겨진 것은 화폐학(Numismatics), 보석에 새겨진 것은 보석학(Gemology), 파피루스에 새겨진 파피루스학(Papyrology)을 하는 분들이 명문을 분류하고 해석하면서 협업을 하고 있다.

  

Ⅱ. 로마의 금석문 관습(Roman Epigraphic) 

Ramsay, MacMullen, “The Ephigraphic Habit in the Roman Empire,” American Journal of philology, 102, 1982의 사료에 따르면, 이전 시대의 금석문 자료가 발견되지 않던 서부 지역에서 1-2세기에 금석문(주로 묘비명)이 점차 증가하다가 3세기에는 금감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로마 황제 칼리쿨라가 로마 시민권을 주면서 명문이나 금석문을 제시하지 않아도 됐다는 이론도 있지만 학자들의 아직까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화정에서 1인 체제의 제정으로 바꾼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의 지배의 다양한 정책 안에서 금석학에 영향을 주었다는 학자들의 제안이 있어왔다.

 

Ⅲ. 현대 금석학 연구의 발전 (CRL/금석문 총서)

17세기 초 얀 그루터(Jan Gruter)과 요제프 스칼리거(Joseph Scaliger)이 12,000여점을 모아 집대성한 <하이델베르그 컬렉션>이 유명하다. 이후 테오도르 몸젠은 이전의 금석문을 수집하고 <금석문 총서>( 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 CIL)를 만들어 로마 제국의 속주 연구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역사가이다. 1853년부터 베를린 과학 학술원의 지원 아래 몸젠과 유럽의 여러 학자들이 고대 로마 세계의 라틴어로 새겨진 모든 명문들을 수집하여 편찬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계속 증보되고 있으며 약 400,000개 명문이 수집, 출간 되었다. 

2007년부터 온라인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하고 있다. (http://cil.bbaw.de/dateien/datenbank.php, https://cil.bbaw.de/ ) 로마사대의 명문들을 접근하기 위한 디지털화된 온라인 데이터 베이스 네트워킹 프로젝트는 오픈소스를 연결해 여러 데이터베이스를 결집시켜 학자들에게 제공하려고 하고 있다. FAIR Epigrahy AHRC-DFG Project (2022-2025, Mainz-Oxford), (Findable, Accessible, Reusable), http://www.csad.ox.ac.uk/fair-epigraphy

 

Ⅳ. 금석학과 로마의 역사서술

1. 스키피오 가문의 묘: 비문(epitaph)과 가문의 기억

 

Sarkophag des Scipio Barbatus사진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iranesi-TombaScipioBarbatus.jpg
▲Sarkophag des Scipio Barbatus
사진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iranesi-TombaScipioBarbatus.jpg

 

기원전 298년에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Luciys Cornelius Scipio  Barbatus)의 석관(바티칸 박물관 단지 내 Pio-Clementine 박물관의 Vestibolo Quadrato에서 발견됐다)은 312년 아피아가도 (Via Appia)의 건설 직후 조성됐으며 두 개의 묘실로 구성됐다.  

CIL VI. 1284 & 1285

[L(ucius) Corneli]o(s) Cn(aei) f(illius) Scipio
(괄호) 안은 빠진 글자들을 후대에서 채워넣었다는 표시이다.


CIL VI. 1284 & 1285

cornelius Lucius Scipio Barbatus Gnaivod patre/ 

prognatus fortis vir sapiensque quoius forma virtutei parisuma/

fuit consol censor a<e=l>idillis quei fuit aqud vos Taurasia Cisauna/

Samnio cepit subgit omne L{o}ucanam o<b=p>sidesque abd{o{ucit

<꺽쇄>는 오자나 소실된 글자를 학자들이 복원 가능한 글자로 넣어 따로 표기해 두었다. 

 

스키피오 가문의 묘는 로마사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서사적인 것이 아직 발전되지 않을 때, 개별적인 기록들이 있었다. 라틴어는 키케로 시대의 고전 라틴어와는 다른 철자가 쓰여있어, 기원전 3세기 라틴어 철자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 4개 줄로 되어 있는 명문은 아버지의 이름이 있어 그나이우스의 아들이라는 표기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나란히 적고 있는 것은 로마식 표기법의 특징이다. 자신의 덕(덕성, 성품)과 외모, 업적의 탁월함을 연결해서 기록하고 있다. 로마 공화정의 최고의 관직인 집정관을 역임했던 인물이며, 인구조사(로마 시민 명부)를 작성하는 중요한 임무(감찰관)를 맡았고, 로마 시의 공공사업을 관장한 인물이다. 쌈니오 지역의 타우라시아과 키사우나와 루카나라는 지역을 평정하고 포로들을 데리고 왔다는 군사적 성취도 공적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의 아들 석관의 묘비도 가문에서 대를 이어 훌륭한 인물이었음을 나타내 로마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2.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Res Gestae Divi Augusti)>

(1) Res Gestae 35.2

subquadrigis quae mihi ex s.c. positae sunt censuit. Cumscripsi haec annum agebam septuagensumum sextum.
"내 나이 76세가 되던 해에, 나는 이 모든 것들을 기록했다."  

76세부터 기록한 것인가, 76세때 그간의 기록들을 정리한 것인가의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원문출처: https://www.perseus.tufts.edu/hopper/text?doc=Perseus%3Atext%3A1999.02.0127%3Asection%3D35

(2) 로마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2-3세기)의 기록

14년에 사망한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네 가지 문서들은 ①자신이 직접 작성한 장례절차에 관한 지시사항이 담겼다. ②다음 황제직을 수행하게 될 티베리우스와 로마인민들에게 남긴 아우구스투스가 수행했던 모든 일들(Res Gestae)에 대한 기록과 청동판에 새겨 본인의 영묘(발견되지 않음) 앞에 세우라는 지시가 있다. ③군사문제, 재정, 공적 지출 등 제국 운영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④티베리우스와 로마 인민에게 남긴 유언(Cassius Dio, Historiae Romanae 56.33.1)이다.

▲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의 일부사진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es_Gestae.jpg
▲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의 일부
사진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es_Gestae.jpg

 

Res Gestae 34.2.


Quo pro merito meo senatus consulto Augustus appellatus sum et laureis postes aedium mearum vestiti publice coronaque civica super ianuam meam fixa est et clupeus aureus in curia Iulia positus, quem mihi senatum populumque Romanum dare virtutis clementiaeque et iustitiae et pietatis caussa testatum est per eius clupei inscriptionem. 


“이와 같은 내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 원로원의 결의로 나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가 수여 되었다. 내 집의 문간 기둥은 공식적으로 월계수로 장식되었고, 시민의 관(corna civica)이 문 위에 부착되었다. 그리고 덕목을 새긴 황금방패(clipeus virtutis)가 쿠리아 율리아(Curia Iulia)에 걸리게 되었는데 여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이 나타내듯이 그것은 나의 용기(virtus), 자비(clementia), 정의(iustitia) 그리고 경건(pietas)를 기념해서 원로원과 로마 인민이 내게 수여한 것이다.”

원문출처: https://www.perseus.tufts.edu/hopper/textdoc=Perseus%3Atext%3A1999.02.0127%3Asection%3D34

<업적록>의 원본인 아우구스투스의 영묘(Mausoleum)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소아시아 속주에 남아있던 자료들을 복원한 내용이 평화의 제단(Ara Pacis) 박물관 벽면에 새겨져 있다. 튀르키예,  앙카라에 건설된 여신 로마와 아우구스투스 신전(Temple of Roma and Augustus), 내부 벽면에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되어 있다. 아우구스투스 통치 초기인 기원전 25년, 로마와 아우구스투스 숭배의 건축물로 갈라티아 속주의 새로운 도시로 창건돼 로마와의 새로운 관계 형성을 위해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3) 프랑스 남부 아를르에서 발견된 아우구스투스의 덕목의 방패(clipeus virtutis augustus) 

▲아우구스투스의 덕목의 방패(clipeus virtutis augustus) 사진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arble_copy_of_the_Clipeus_Virtutis_of_Augustus_(honorific_shield)_found_in_Arles,_dating_from_BC_26,_Moi,_Auguste,_Empereur_de_Rome_exhibition,_Grand_Palais,_Paris_-_14651082125.jpg
▲아우구스투스의 덕목의 방패(clipeus virtutis augustus) 
사진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arble_copy_of_the_Clipeus_Virtutis_of_Augustus_(honorific_shield)_found_in_Arles
,_dating_from_BC_26,_Moi,_Auguste,_Empereur_de_Rome_exhibition,_Grand_Palais,_Paris_-_14651082125.jpg

 

POPVLVSQVE ROMANVS IMP(eratori) CAESARI DIVI F(ilio) AVGVSTO CO(n) S(uli) VIII DEDIT CLVPEVM VIRTVTIS CLEMENTIAE IVSTITIAE PIETATIS ERGA DEOS PATRIAMQVE

“The senate and the Roman people give to Augustus, son of the divine Caesar, in his 8th consulate, the shield for virtue, clemency, justice, and piety towards the gods and his native land”.

"원로원과 로마 인민은 8번째 집정관이었던 신 카이사르의 아들 아우구스투스에게  그의 용기(virtus), 자비(clementia), 정의(iustitia) 그리고 경건(pietas)의 방패를 바칩니다."

       
로마 중앙에서 이루어졌던 것들이 속주에 전달 됐으며 속주의 명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변형해서 자신들의 입장에서 확립해 나갔다. 

 

<계속>

한편 고대문명연구소는 2008년 4월 동아시아출토문헌연구회를 기반으로 2020년 8월 설립됐으며 심재훈 교수(단국대 사학과)가 소장으로 역임하고 있다. 현재 선사시대와 고대 문명, 유전학과 디지털 전문가들과 함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인도, 지중해 등 인류 문명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순수 학문적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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