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국 교수 『묵상과해석』 북리뷰
정성국 교수 『묵상과해석』 북리뷰
  • 박진기 기자
  • 승인 2018.07.02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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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과 해석 그 사이에서의 고민이 여실히 드러나
△정성국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묵상과설교
△정성국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묵상과설교

『묵상과해석』 이라는 책을 접하며 먼저 묵상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묵상에 관해 히브리단어는 '읊조린다'고 표현한다. 단어의 개념만을 생각할 때 묵상은 내게 주어진 텍스트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만 같다. 그저 정적인 개념으로 멈춰있는 것만 같다. 그렇지만 히브리 단어의 표현대로 읊조리는 것을 생각할 때 묵상은 늘 반복되어져야 하는 습관이 될 수 있다. 정적인 개념이 동적인 개념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서론: 묵상과 해석, 나는 왜 묵상하는가?

최근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한국 교회 안에는 이미 큐티 운동 곧 말씀 묵상에 관한 문화가 어느새 정착해있다. 그러나 나의 큐티가 성서에 대한 올바른 해석으로부터 온 적용인지 대답해 줄 성경교사는 많아 보이지 않는다. 왜 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은 큐티에 관한 우리의 오해로부터 온다. 모두에게 들려져서 읽혀져야 할 성서가 아직도 읽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큐티 곧 말씀 묵상은 설교자의 일방적인 선포에 의해 좌지우지 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회중은 단 한 편의 설교를 말씀 묵상으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 점이 바로 말씀 묵상에 관해 우리가 갖는 오해이다. 한 편의 설교는 말씀 묵상에 한 종류에 속할 수 있다 하겠다. 그러나 말씀 묵상을 통해 A.D. 1세기의 말씀이 21세기의 나에게 오는 작업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큐티를 하는 것이다.

본래 '큐티'라는 것은 '경건의 시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에 목적을 두나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경우 시간과 장소가 변동 되는 것은 독자의 마음이다.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설교자는 주어진 본문을 석의하여 설교를 작성해 나간다. 이러한 작업을 해석학적 작업이라 한다. 이제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그 누가 됐든지 간에 말씀의 의미를 찾아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학적 작업을 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묵상과 해석, 나는 무엇을 오해하는가?

말씀을 묵상할 때 흔히 부딪히게 되는 어려움이 있다. 낯선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울 경우가 이러하다. 먼저 이러한 고민은 "신학 수업을 받지 않은 일반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저자는 말한다. 신학을 공부했다 할지라도 본문에 대해 오용하고 남용하는 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필자는 어렸을 적 빌립보서 4장 12절의 말씀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구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나의 경우 무엇을 오해했던 것일까? 저자의 글을 따라 읽어 나가다보면 내가 가졌던 오해는 ‘자기중심적’해석의 오류이다. 이러한 오류는 무엇에 잘못이 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저자는 "해석학의 방법보다 해석학의 목적이 잘못 된 전제를 가질 때 이러한 오류를 가져온다."고 줄 곧 말한다.

필자가 좋아하던 빌립보서 4장 12절의 말씀에 대한 이해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주체가 나 자신에게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은 빈궁에 처하기도 하며 매 맞기도 하는 상황과 같은 짐작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게 됐다. 또한 무엇이든지 가능하게 하는 주체가 내가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나는 ‘자기중심적’인 목적에 함몰되어 성경을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과 비슷하지만 자기중심적이지 않았던 경우의 예화를 저자는 소개한다. 본회퍼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가 타국에서 교수로 강의하고 있던 시기 읽었던 말씀, "너는 겨울 전에서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그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딤후 4:21)은 그로 하여금 조금 이른 시기에 조국으로 돌아와 히틀러를 암살하는 것에 앞 장 서도록 하였다. 본문의 문맥과 상관 없는 해석을 한 것이다.

그렇지만 본회퍼의 말씀 묵상이 잘못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에 있어서 이미 그 자신을 뛰어 넘어 세계의 안전을 위해 진보해 있었기 때문이다. 본회퍼의 경우를 볼 때, 말씀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서 방법이 잘 못 된 것이 아닌 목적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한다.

지금까지 필자가 빌립보서 4장 12절의 말씀을 이해했던 것과 본회퍼의 경우의 해석 방법은 순전한 상상력에서 기인한 ‘알레고리’라 할 수 있다. 말씀 묵상에 목적이 개인의 이익과 욕망을 위한 것이라면 알레고리는 지적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사를 살펴볼 때, 알레고리가 무조건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해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적어도 신자 개인의 이익과 욕심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 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사용되어졌던 해석 방법이기 때문이다.

 

묵상과 해석, 바로 알자!

올바른 말씀 묵상을 위해 먼저 우리에게 들려진 성서가 어떤 책인지 알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의 네 가지 경우 곧 틀을 나열한다. 첫째, 성서는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이야기’라는 도구를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우리 내 삶도 마찬가지로 이야기가 주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향하신 그 크신 사랑이 비로소 그리스도라는 이야기로 함축되어 마침내 인류를 향한 선교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라는 메타-내러티브를 통해서 인류는 구원에 대상이며 구원이 어떻게 완성되어져 가는지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성서는 예수의 자서전적 이야기이다. 저자는 이러한 이야기를 예수님을 가리키는 이야기로 묵상하기로 서술하였으나 필자는 성서 자체가 예수의 자서전임을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내러티브는 ‘예수’라는 인물을 부곽시키거나 주목해 나가기 시작한다는 것은 성서를 한 번 쯤 읽은 독자라면 공감할 만한 사실이다. '예수의 자서전적 이야기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의 자서전적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인간 삶의 문제와 본질에 부딪히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불완전하기에 오해와 불화로부터 오는 금간 관계를 회복해 나가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는 예수의 자서전적 이야기로부터 회중이 배울 것을 요구한다.

셋째, 성서는 지금 여기에 임한 미래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라는 것이다. 위 사안을 이해하기에 일반 성도들은 멈칫 할 수 있다. 종말에 대한 오해가 만연했던 시기를 지났기 때문에 지금의 시대는 종말에 대한 가르침이 확연히 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그러나 아직 이라는 종말의 도식은 하나님께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체성을 확립해준다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첫 백성이 되신 예수께서도 이러한 이유에서 제자를 위시하여 수 많은 사람들을 증인으로 부르신 것이다. 따라서 종말론적인 삶은 내일이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마지막이라는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있을 앞 당겨 사는 윤리적 토대를 마련해 나가는 것이다.

넷째, 성서는 신앙공동체의 이야기로 묵상을 요구한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앞 당겨서 사는 성도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따라서 어느 개인에게만 적합한 말씀으로 해석 될 것이 아닌 공동체로서의 해석을 요구하게 된다. 이는 곧 보편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과 내 옆에 있는 성도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 가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해결은 혼자 할 것이 아닌 함께 해야 하는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신앙공동체의 이야기는 성도의 삶의 문제를 읽어내야 하며 더 나아가 사회의 문제를 해석해나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도는 성서의 이야기를 나의 이익과 유익을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닌 신앙공동체의 이야기를 써 내려 감으로써 함께 회복되고 세워져 나가야 할 문제임을 알도록 한다.

이상의 해석의 틀을 통해 우리는 성서의 이야기가 예수의 자서전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에게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으로부터 해결되어진다. 저자가 줄 곧 이야기 해 온 알레고리의 해석학적 변명은 목적이 잘 못 된 해석을 지적하며 목적이 순수한 알레고리를 감상하는 것에 있었다. 또한 해석에는 중립이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어느 누구에 해석이든 비판할 자격은 없다. 다만 본문에 원래 의미를 간과하여 해석하고 있다면 올바른 해석을 지향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성경 교사의 일이며 공동체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결론: 성경과 삶의 연결 다리는 교회이다.

1세기에 취합 된 성서의 이야기가 21세기로 넘어올 때 성서의 저자들의 서술한 원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성경 교사가 필요한 것이다. 앞 전의 글을 시작하며 필자는 말씀 묵상의 방법이 여럿 있다고 말하며 한 편의 설교도 말씀 묵상의 하나임을 말하였다. 그렇지만 본 책  『묵상과해석』 을 통해 저자가 줄 곧 말한 것은 올바른 말씀에 대한 이해를 지향하기 위해 다양한 해석 방법을 동원하되 목적을 분명히 하라는 것으로 결론 지어진다.

모세의 가르침으로 시작한 율법에 대한 묵상은 유대인에게서 머물지 않고 우리에게로 넘어 온다. 하지만 정작 현실은 말씀을 묵상하기에는 너무나 각박하게도 분주하다. 대게 많은 경우 말씀 묵상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한 변명은 시간이 없어서.. 바빠서 못한다는 것이 대다수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을 이들은 숨키고 말하지 않는다. 성서의 큰 그림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비유 중 천국에 관한 비유가 있다. 그 중 천국은 마치 감추인 보화와 같다 말한 것이 문득 생각난다. 이와 같은 비유는 성서 안에 담겨 있는 보화를 찾게 될 때 그 기쁨이 배가 된다는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물론 이 비유가 말씀 묵상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큐티에 관해 수 많은 비판이 있었던 한 때 그리고 지금도 필자는 여전히 큐티 자체에는 성실하지 못하다. 그러나 수 많은 말씀 묵상에 방법 중 한 가지라도 성실히 이행하지 못하는 성도라면 큐티를 권하고 싶다. 또한 교회는 이러한 성도를 외면하지 않고 성서의 큰 그림을 제공해 줄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 성도가 됐든 신학수업을 마친 사람이 됐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묵상하며 배워야 할 지적 성실성을 수반한다.

성서를 묵상하는 것이 보화를 캐내는 것과 같은 이유는 그 안에 담긴 보화를 맛 보게 될 때 비로소 말씀 묵상의 풍성함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말씀 묵상이 올바른 해석을 함축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면 가까이에 있는 성경교사를 찾아 가도록하라! 성경교사는 반드시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성서 각 권에 개론서와 같은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은 초보자의 경우 더 깊은 은혜를 사모 하도록 한다. 그렇기에 받은 은혜를 공동체 안에서 누리는 것 만큼 기쁜 일은 없다! 결국 성도의 삶과 성경을 이어주는 연결 다리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더 넘어서서 볼 때 이 연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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