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에 합당한 삶(엡 4:1-16)_김병년 목사
부르심에 합당한 삶(엡 4:1-16)_김병년 목사
  • 김병년 목사(다드림교회)
  • 승인 2018.11.04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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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4일 주일설교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1.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행함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다(1절). 
 
1.1 부르심 그 엄청난 오해
사람들은 부르심을 언제나 직업과 관련해서 물어본다. 부르심을 직업과 이해하도록 하는데 공헌한 사람은 종교개혁자들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했다. 특히 막스 베버에 따르면, 부르심은 노동에 있어 신성함을 부여하는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 부르심을 직업선택의 기준으로 좁혀서 해석하는 바람에 그만 부르심이 직업으로 둔갑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소명을 이야기할 때 가졌던 그 노동의 신성함이 이제는 신성함은 사라지고 돈벌이로만 전락하고 소명은 ‘내게 적합한 일을 찾는 매우 개인적인 취업전략’으로 변했다.  

1.2 부르심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이다. 
부르심은 직업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이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바울 은 이미 그리스도와 단단하게 연합되어 있다. 감옥에 갈 정도로. ‘그러므로’는 에베소서 앞의 1, 2, 3장의 내용과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연관성을 주목하게 한다.

바울은 우리를 아들 되게 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과 이 일을 위하여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드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과 우리를 새 성전으로 삼으시는 성령님이 내주하심에 합당하게 사는 삶이 부르심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일상을 사는 것이 바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다. 


 
2. 연합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다(2-3절). 

2.1 힘써 지키라
바울 사도는 “모든 겸손,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2-3)고 했다. 강력한 권고이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우리의 부르심이다. 부르신 이유이다.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이유이다.  


다른 이들과 먼저 연합하기 전에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라. 겸손과 온유함, 오래참음과 용납, 하나됨 하나님의 성품이다. 겸손은 ‘다른 사람의 진가를 인정한다’. 타인을 인정하는 태도가 겸손이다. 온유함은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성향’이다. 우리는 종종 타인을 인정하지도 않고 권리만 주장한다. 그렇게 자신만 인정하는 태도는 바로 교만이다. 남을 인정하는데 힘써야 한다.


오래참고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라. 오래 참은 환경보다 사람에 대하여 견딘다. 용납은 ‘서로’ 오래 참는다. 용납은 방법과 태도를 허용한다. 우리에 대하여 오래참으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 보라.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되게 하라"(3절)에서 '평안의 줄'은 곧 성령이다. 성령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다. 성령이 주시는 평강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줄이다.  


[적용] 사실 오늘 아침에 오래참지 못하고 분노를 했다. 설교가 있어서 3분만에 끝냈지만 설교가 없다면 아마도 오래했을지도 모른다. 조급해지면 분노가 쉽게 나온다.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다. 아이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오래참지 못했다. 성도들과 연합하라. 연합은 ‘서로’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저 사람이 나를 받아줘야지!’라고 생각하면, 연합은 깨진다. 우리의 성품으로 연합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그리고 연합하려고 애를 쓰라. 노력해야 한다. 

 

2.2 삼위 하나님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근원이시다(4-6절).  

삼위 하나님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근원이시다. 그분은 첫째,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4절)이시다. 성령은 우리를 같은 부르심으로 부르신다. 같은 소망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즉 우리들은 같은 성령안에 있기에 한 몸이다. 

둘째, “주도 한분이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5절)이시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요, 그분과 연합하는 세례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거듭난다. 즉 우리들은 같은 주님안에 있다. 


셋째, "하나님이 한분"(6절)이시다.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만유의 아버지이시다. 여기서 만유는 성도들을 말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위에 있다(통치). 성도들 ‘위에’ 계신다. 즉 성도들을 통치하신다. 성도들을 다스린다. 성도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성도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성도들을 위하신다. 만물 안에 있다(임재)하시는 분이시다. 성도들 안에 동행하신다. 


우리를 다스리고, 위하시고, 동행하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 같은 성령 안에서 부르심의 소망이 하나이고,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이 하나이고, 하나님의 다스림과 동행하심이 한분 하나님으로부터 일어난다.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우리가 추구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부르심에 기초함을 가르친다. 이 연합은 영원한 부르심이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으로 초대는 영원한 부르심이다. 그 기초를 이루시는 분들이 삼위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 사람만 모여도 서로 편이 갈린다. 세 명도 필요 없다. 자기 자신속에서도 몸 따로 마음이 따로다.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는 몸을 항상 욕한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에 따르느라고 수고한 손과 몸에게 감사하다."고 좀 하셔요. 하나님 만이 세분이 함께 계셔도 연합해요. 거룩함은 연합이어요. 우리들은 힘써 노력할 뿐이어요.  


 
2.3 어제 밤에 장로님에게 받은 감동

우리 조 장로님은 몸이 불편하시다. 한자리에 오래동안 앉아 있지 못하신다. 어제 당회를 하는데 언제나처럼 참석하셨다. 오시는 중에 드시는 약을 가져오지 않았음을 아셨다. 이날 대표기도가 장로님이셨다. 그런데 "목사님! 저 기도만 하고 가겠습니다."라고 한마디를 하시고는 정멀 기도하고 가셨다. 이 기도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불편한 몸으로 기다리셨던 것이다.


오늘 밤에 장로님들, 팀장님들, 부서장, 사역자들 모두 모인다. 말은 안해서 저마다 모임에 빠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 마음으로 노력해 주시기 바한다. 그것이 성령이 원하시는 일이다. 권사, 안수집사, 교사가 되어서 교회에서 하는 일에 자꾸 빠지려는 습성은 결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아니다. 한해동안 교사로, 리더로 수고한 모든 분들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게 하신다.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빕니다. 

 

3.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다(7-12절).

부르심에 합당한 또 다른 삶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다. 12절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와 13절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리니”. 15절의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16절의 “그 몸을 자라게 하며”를 주목하라!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그 몸을 자라게 한다. 그 자신이 몸이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한다. 


이 몸을 자라게 하시는 데 주시는 것이 은사이다. 은사의 목적과 동기는 언제나 몸을 세우는데 있다. 은사는 언제나 공동체적인 이유에서 주신다. 공동체를 위해서 주신다. 가끔 당회를 할 때, 아주 ‘(당회원들에게) 듣기 거북한 말씀을 꺼내야 하실 때 장로님들이 자주 사용하시는 말씀 중에 "당회원으로써" 라고 하신다.

무슨 말입니까? 개인적인 측면이 아니라 교회를 생각하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다. 맞다. 당회원들은 담임목사의 눈치를 보면 안되죠. 제가 잘못할 때, 지적하는 이유가 저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사랑하는 동기로 하신다. 몸을 세우기 위해서 그 자리에 있다. 그 은사를 사용해서 몸을 세워야 한다. 

 

3.1 은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다(8-10절). 

9절의 "그리스도가 올라가셨다", "내려가셨다"라는 표현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오르내리심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는 사역이었다.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10절). 그분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풍성함을 허락하였다. 그것이 영적인 하늘의 복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오셨다. 성령은 모든 성도들을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 바로 은사이다. 은사를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사도행전 2:25은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다"고 한다.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의 사역 뒤에 성령을 주심으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다. 예수님의 사역이 없다면 성령도 없고 은사도 없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은사를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3.2 몸을 세우는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에게 가르침의 은사를 주신다(10-12절).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주시는 은사는 다양하다(11절).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 에베소서는 다섯 개의 은사만 언급하고 있다. 에베소서에서는 대체로 가르침의 은사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교회를 섬기는데 가르침의 은사가 중요하다. 


로마서 12:3-8과 고린도전서 12:4-11절에서 은사는 적어도 25개 이상 나온다. 디모데 전후서에 감독자의 직분에는 가르침의 은사를 구하도록 하신다. 은사 중에 가르침은 몸을 세우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몸을 세우기 원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다른 이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은사는 순종의 은사이다. 순종을 통하여 가장 큰 가르침이 일어난다. 배운 것을 그대로 순종함으로 가르침이 일어나는 것 또한 은사이다. 저를 목사로 세운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다. 여러분을 준비시키고, 그리고 봉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봉사는 섬기는 삶을 말한다.

  

3.3 연합하려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야 한다(13-16). 

1) 성숙은 어린아이의 일이 아니고 어른의 일이다. 
아이들이 잘 연합할까? 아니면, 어른들이 잘 연합할까?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금방 친해진다. 그러나 어른들은 친해지는데 아주 오래 걸린다. 어른들이 따지고, 자기 형편이 많고, 자기 나름의 기준들이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근방 친해진다.

그런데 아이들도 가끔씩 놀다가도 싸우기도 한다. 언제? 자기가 원하는 장난감을 갖을 때다. 연합이 깨지는 경우는 대부분 이기심 때문이다.  아이들은 쉽게 흔들린다. 세상 풍조와 간사한 유혹과 속임수에. 14절을 보라. 세상풍조에 흔들리는 것은 이전에 행하던 일들이다. 이는 속임수와 유혹은 내부적인 것들이다.

2) 자라야 한다. 
그러나 어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기(13절) 위해서는 먼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야 한다. 범사는 사소한 일들이다. 어찌보면, 너무 사소해서 가끔씩 우리가 무시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사소한 행동까지를 의미한다.

온전한 사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는 사람은 모든 행동이 사랑과 진리 안에서 행하게 된다. 말 그대로 성숙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일치된 사람이다. 각 지체와 연결되어 있지만 각자의 역할을 잘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다.

자신의 역할만 잘하는 사람은 다른 지체와 연결되어 있지 않는 자는 어린 아이와 유사하다. 자신이 맡은 봉사는 잘하는데 다른 사람과 연결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미숙함의 증거가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몸을 자라게 한다.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유연성을 갖고 있다. 성숙하지 않으면 고집만 생긴다. 성경은 고집을 성숙의 표지라고 하지 않는다. 자람이 없는 요동함이 없는 사람은 똥고집이다.

 
예) 청년 때 다녔던 교회 사경회를 갔다. 그때 지휘하시던 분이 아직도 지휘를 하고 계신다. 그분이 내게 와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는 지금도 신실하게 지휘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건강합니다."라고. 그때 저는 구분에게 "그것은 신실함이 아니고 똥고집입니다. 이렇게 (지휘로) 섬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이제는 좀 자리를 비켜주셔야지요."라고 했다. 미숙하게 보이고 못하는 것 같이 보여도, 일단 봉사를 맡기면 대부분은 사람들은 5년만 지나면 잘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고 나 아니면 안돼 하는 마음, 성숙함이 없는 신실함은 고집이 될 수 있다.   

 

나가며  - 우리의 부르심: 연합과 은사를 사용함

성도와 연합 속에 우리의 부르심이 있다. 각자 주신 은사를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다. 연합이 하나님의 뜻이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사는 삶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하고 그 성품을 이루기 위해서 애써 노력한다. 힘써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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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드림교회 담임인 김병년 목사는 13년째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를 대신해 자녀 양육과 살림 그리고 목회를 병행하는 ‘엄빠’이다. 대학생 때 IVF를 만나 회심 한 후 15년간 IVF 간사로 섬기다 목회의 길에 들어섰다. 저서로는 『난 당신이 좋아』, 『바람 불어도 좋아』, 『아빠, 우린 왜 이렇게 행복하지?』, 『아빠는 왜 그렇게 살아?』, 『묵상과 일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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