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람의 삶(옙 4:17-32)_김병년 목사
새 사람의 삶(옙 4:17-32)_김병년 목사
  • 김병년 목사(다드림교회)
  • 승인 2018.11.11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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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1일 주일설교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당신은 공동체를 갈망하는 사람이다. 

주일날 이렇게 예배에 오는 이들은 하나의 갈망을 갖고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갈망.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갈망은 접신한 사람들에게 있는 갈망이다. 그러나 접신을 하지 않은 사람들도 갈망을 갖고 나온다.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다. 가정도 근본적으로 공동체이다. 예배하는 배우자를 존중하여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 배우자를 따라온다. 믿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나오는 것은 순수한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다. 


이번 주에 수요 성경공부 시간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의 목회적인 이상이 무너지는 말을 들었다. 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인사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식탁에서 누군가 옆에 앉았어도 돌아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혹시 애 밥을 먹이고, 그날의 컨디션이 나빠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래서 조용히 새가족들에게 물어보고, 중고등부 다니는 우리 막내에게도 물어보았다. 리더모임에서도 나누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충격적인 대답들을 들었다. 교회 학교에 다니는 애들조차도 "교회가기 싫다."는 이야기를 한단다. 이유는 다른 친구들과 놀 수가 없기 때문에.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왕따를 당하는 것’이다. 차마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친밀감을 갖고 살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친밀한 사람들이 있어도 적어도 내 앞에 앉은 사람에게 말도 걸고 자신을 개방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다. 거룩함을 이루어갈 때 우리는 하나가 된다. 

 

1. 우리는 지체이다. 

1.1 교회, 지체는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 공동체를 성경은 “서로가 지체가됨이라”(25절) 했다. 지체 같은 몸에 속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들 중에는 “가난한 자에게”(28절)도 있다. 교회 안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도둑놈도 있다. “다시 도둑질 하지말며”(28절). 함께 말을 나누는 대상들이 있다. “듣는 자들”(29절). 서로 돌아보며 험담하는 이들도 있다. “서로” 용서와 용납을 필요로 하는 관계 속에 들어간다. 


우리를 부르신 부름은 하나됨을 추구하도록 하고, 몸을 세우는 일에 헌신하도록 한다. 자기를 세우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속한 몸, 곧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일에 자라고, 연합하고 독립하여 몸을 세운다. 범사에 그리스도를 알아 간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다.  

 

1.2 자신을 내어주라.
교회, 공동체에 속하는 것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서로를 향한 인격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선택해야하고, 복음의 삶을 살라는 부르심에 응답해야한다. 가장 큰 노력은 ‘자신을 주는 인격적인 헌신’이다. 존재가 변화되어 지체가 되면 지체가 속한 몸을 세우는데 힘을 쓴다. 칼라너의 말처럼 “자신을 내어줄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이 된다”고 했다. 오늘날 비인간화가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신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내어주면 잃을 것 같아서 두려워한다. 여기에 큰 도전이 있다. 변화된 존재는 변화된 행동을 요구한다. 


2.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다(17-24절). 

바울은 아주 재미있게 은유하였다. 우리의 삶, 곧 존재가 변화된 사람의 삶을 옷 입는 것에 비유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옷을 갈아입는다. 속옷이든지 겉옷이든지 매일 갈아입는다. 입은 옷은 벗고 세탁한 옷을 입는다. 더러운 옷은 벗고 새 옷을 입는다. 옛날 사람들은 옷으로 자신의 신분을 나타냈다. 입고 있는 옷으로 사람을 차별하였다. 
바울은 옷을 벗고 입듯이 “너의 옛 사람을 벗으라”고 하였다.

NIV영어 성경에는' your old self'라고 하였다. 새 사람은 'new self'이다. 여기에 바울의 인간 이해가 있다. "우리"라고 하는 인간은 옛것이 있고, 새것이 있다. 옛것은 아담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새것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분명히 존재가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아담적인 옛것이 있고 그리스도적인 새것이 있다. 

2.1 옛 사람은 욕심의 옷을 입는다.
옛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서 행동한다. 모든 삶의 동기가 욕심이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습니다”. 죄보다 먼저 마음의 욕심이다. 욕심은 사실 보이지 않는다. 속이는 욕심. 욕심 자체가 속이는 속성도 있고, 유혹이 욕심을 불러온다. 유혹의 욕심은 생각하는 것이 허망하다(17절).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 단풍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낄 줄은 알지만 생각속에 그분이 만들었다는 생각은 할지 않는다. 이것이 허망한 생각이다. 


심지어 그들은 “총명이 어두워지고...무지함과...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적대한다. 굳어짐은 완고함이다. 결국에는 ‘감각이 없는 자가 되어’. 하나님에 무감각하다. ‘모든 것을 더러운 욕심으로 행한다’. 여기 욕심은 하나님 없는 모든 자들이 행동의 동기를 말한다. 최고 욕심은 자기 의이다! 욕심은 도덕적인 탐욕이나 윤리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욕심은 하나님이 없는 삶 자체를 말한다. 

2.2 새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따른다. 
그러나 새사람은 생명이신 ‘하나님을’ 따른다.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본성을 말한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따라서 한다. 옛사람은 자기 본성을 따르지만 새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을 따른다. 심지어 새 사람은 성령으로 매일 창조된다.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여기서 성령님은 우리를 날마다 거룩하게 변화시킨다. 이것을 성화이다. 성화의 주체는 우리들의 의지가 아니고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본받게 하고 그분을 닮아가게 한다. 


새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을 본받고, 예수님에게 배우고, 그리고 매일 성령님이 동행하신다. 삼위 하나님은 우리가 거듭나게 하는데도 동역하시고 우리를 매일 새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데도 동역하신다. 즉 욕심을 따라서 배우는 옛사람이 있다면 새사람은 욕심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서 배운다. 새 창조된 우리는 새 창조의 일군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자녀로 사는 법을 배웠다. 옛사람은 욕심을 따른다. 

2.3 자기연민은 옛사람에게서 나온다.
스캇 솔져가 쓴 리더의 눈물(스캇 솔져. 두란노)이란 책이 있다. 이 책에 팀켈러의 말을 인용하였다. 권위자의 자기 연민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묘사하였다. 다윗의 고백이다. “내가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서 이 한 몸을 불살랐는데 그깟 간통 한번이 무슨 대수인가.... 온 나라의 안정이 내 손에 달려 있어 이 정도는 내가 할 자격이 있어”. 이것이 리더의 자기 연민이다. 


리더가 이런 자기 연민에 빠지면 “특권을 망각하고 자신을 종이 아닌 희생자로, 남들처럼 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법위에 있는 것으로, 자격 없는 은혜의 수혜자가 아니라 자격 있는 자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욕심이다. 연민은 무서운 자기 중심성이다. 지난 수요일부터 오늘까지 이 자기 연민이 날 괴롭혔다. 성도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한다. 리더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한다. 

 

3. 존재가 행동을 지배한다(25-32절).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옷을 매일 입을 수 있을까?. 즉 우리의 존재가 우리의 행동을 지배할 수 있을까?. 먼저 기억할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을 통하여 지체를 세우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몸을 세우기 위해서 취하는 행동이다. 
 
3.1 참된 것을 말하고 거짓말을 버려라(25-26). 
거짓말과 거짓행동을 버리라. 거짓은 지체를 파괴한다. 지체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진실을 말하거나 진실한 행동을 하라.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다. 사단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특징은 거짓말, 거짓행동이다. 말의 진실성은 대단히 중요하다. 


짜증이 바로 분노로 나아간다. 31절을 보라. 악독은 화해를 거부하는 강한 증오이다. 떠드는 것은 고함치는 소리이다. 노함은 말은 하지 않지만 분노가 가득한 표정이다. 부드러운 분노를 보신 적이 있으세요. 회사에서 누군가 조금만 잘못하면 서류뭉치를 던지고, 문을 쾅하고 닫고, 괴성을 지르는 것은 다 죄요, 마귀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분노를 바르게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절제를 요구하는지 아시겠지요. 변화된 존재가 변화된 말을 낳는다. 분노하라!. 그러나 죄는 짓지말라.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 분노는 품고 있을수록 자신을 파괴한다. 다른 이들을 죽인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면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그 의미를 유추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속임을 당하기 아주 쉽다.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이 있다. 국립대는 전부 국가에서 지원금을 주는 곳이고 사립대는 전적으로 민간에서 운영하는 대학이라고 생각한다. 2010년 국립대중에서 정부지원을 제일 많은 받은 대학이 경북대이다. 2126억이다. 그러나 연세대는 정부로부터 2349억원을 지원받았다. 


누군가 이렇게 물으면 사람 참 피곤하다고 생각한다. “명료함은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2018.11.10. 중앙선데이 김영민의 공부란 무엇인가에서 인용). 사람을 정죄한다. 그 사람 되게 따지네 라고. 궁금해서 묻는 것이 졸지에 따지는 것이 된다. 분노하라 그러나 사실을 알고, 죄짓지말고 분노하라. 거짓말을 은혜로 덮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아는 것이 분노하는 행동이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가 변화된 사람의 행동이다. 존재가 변화된 사람은 말에서 나타난다.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고 절제하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3.2 손과 입을 선하게 사용하라. 
지체, 몸을 세우는데 손과 말을  선하게 사용하라고 권면한다. 선한 일을 도모하는 것이 우리들의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받은 존재들이다(2:10). 도둑질하는 손이 있는가 하면 구제하는 손도 있다. 지체로서 남의 것을 훔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제적인 책임을 지는 손도 있다. 이것이 선하게 손을 사용하는 것이다. 먼저 손으로 수고해야 한다. 그리고 수고한 열매로 선한 일을 해야한다. 

말은 덕을 세우고 선한 말을 하고,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분을 낼 때는 마귀가 노리고 있고, 더러운 말을 할 때는 성령님이 근심한다. 즉 우리가 말을 할 때 성령님이 역사하시거나 마귀가 일하고 있다. 우리들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요즘은 네트웍의 사회이다. 내가 가진 것이 없어도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연결해주면 된다. 그러나 여기에 속임수가 존재한다. 우리 목회자들이 걸려 넘어지는 경우이다. 자신의 헌신과 공적인 위임을 혼돈하기 쉽다. 네트웍으로 다른 사람에게 연결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도 수고하고, 희생해야한다. 자신의 희생 없는 네트웍은 남의 것을 도둑질할 위험이 존재한다. 궁핍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사는 것이 거룩한 삶이다. 남의 것을 가져다가 궁핍한 사람을 돕는 것도 좋지만 그 삶에 헌신하는 것이 도둑질 하지 않는 삶이다. 

3.3 일상속에서 하는 행동으로 나의 존재감이 드러난다.
손과 입, 말과 감정을 사용할 때 마귀와 성령이 언급되었다. 마귀에게 기회를 주지말라고 하셨다. 성령은 근심하지 말게 하라고 하였다. 우리가 하는 말이 진실하지 못할 때 마귀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를 짓는다. 성령이 근심한다. 인격적이신 성령님이 근심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마귀의 지배를 받아서 옛사람의 방식으로 살수가 있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을 수 있다. 하와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라고 할 때 이미 사단이 그의 말에 들어갔다. 입을 놀릴 때 자신이 어떤 영의 지배를 받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지만 지체를 세울 수 있다. 

 “하찮은 장소와 하찮은 사람은 없다”. 프란시스 쉐퍼가 한 말이다. 서로를 친절하게,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라.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다. 본당 의자에 앉을 때 먼저 온 사람들이 앞자리부터 앉으면 얼마나 친절해요. 뒤에 오는 성도들을 생각해서. 그러나 꼭 바깥에, 그리고 어중간하게 뒷자리에 앉는다. 뒤에 오는 사람들은 먼저 와서 앉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밀치는 것에 미안해 해야 한다. 그리고 일찍 온다. 그것이 친절이다. 변화된 존재는 변화된 환경을 만든다. 어디서나 변화된 삶을 산다. 

 

나가며 - "나 교회가기 싫어!‘ 
"나 교회가기 싫어!" 아주 어린 다섯 살 아이가 한말이다. 어른들도 외롭다고 하고, 청소년들도 자기들끼리 놀고, 중년도 외롭다고 한다. 도대체 누가 몸에 속한 자들인가. 요즘 직장을 찾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시대가 불안정할수록 점술사들을 찾는다. 점술사들은 사람의 길흉을 알아맞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길흉에 관심을 둔다. 그들은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미신은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도덕적인 삶과 윤리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진짜 종교, 고등종교는 언제나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사회를 개혁하려고 한다.  사람을 바꾸려고 한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개혁하고, 그래도 모자라서 천국에서 완전한 개혁을 약속한다. 고등종교는 인간의 길흉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은 순종하려고 한다. 만일 사람의 변화에 관심이 없는 기독교는 바로 미신으로 전락한다. 미신은 언제나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자신을 신격화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 몸으로 기능이 나타날 때 기독교는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를 바꾸고, 변화된 존재에서 나오는 행동만이 참된 기독교이다. 교회가기 싫다는 아이의 말속에 우리가 다른 이들을 차별하는 엣본성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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