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에게 복종하라"(엡 5:22-33)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에게 복종하라"(엡 5:22-33)
  • 김병년 목사(다드림교회)
  • 승인 2018.11.30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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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5일 주일설교

 

 

▲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들어가며 – 집에서는 남편을 맞이하는 것이지 목사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어요

  어느 목사님의 사모님이 남편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주일 사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을 위해서 늘 한복을 입었다고 했다. 목사님 한복 입은 아내를 좋아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내인 사모님은 남편을 기쁘게 하려고 한복을 입었다. 목사님도 그렇게 맞이하는 아내로 인하여 기뻐하였음이 틀림없다.

  내가 집으로 가서 아내에게 “여보 어느 목사님은 아내가 한복입고 남편을 맞이한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라고 했더니만 아내로부터 바로 답이 왔다. “내가 남편하고 살지 목사하고 사는게 아니어요 집에서 목사노릇하려고요”. 완전히 한방 먹었다. 집에서 나는 목사가 아니고 남편이다. 그러나 살다가 보면 집에서도 목사로 살려고 한다.

  내가 봐도 아내가 한복을 입고 남편을 맞이하는 것은 어색하다. 그러나 남편이 좋아한다고 아내가 스스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이라고 본다. 문화적인 어색함보다 남편을 기쁘게 하려는 아내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부적합하다는 미명하에 마음의 중심을 소홀하게 다루기 쉽다.

 

1. 새로운 사회 – ‘피차 복종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는 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모델이다. 단순히 건물로서 교회가 아니고 성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드러난다. 바울 사도는 이런 관점에서 새로운 사회인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백성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징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세운 권위들에게 복종하라!. 현대인들은 복종이란 단어조차 싫어한다. 복종과 노예를 연관시킨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복종이란 단어를 그리스도와 경외,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복종하라고 권면하고 명령한다. 복종하는 삶속에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삶이 드러난다. 복종이라는 단어를 아내에게 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의 핵심이 바로 복종이다.

  그러나 복종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만든 인간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만일 이 기본적인 관계가 허물어지면 복종이라는 단어가 잘못 해석되어 누군가를 억압하는 정당성을 제공한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을 동등하게 창조하셨다. 남자와 여지, 주인과 종업원, 아이와 어른, 장애인과 비장애인, 환자와 건강한 사람... 동등하게 창조하였다.
둘째, 인간은 상호 돕는 관계로 지으셨다. 서로가 돕는 베필이다. 아내만 돕는 베필이 아니다. 남자도 아내를 돕는 자이다.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다.
셋째,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장과 종업원의 역할은 다르다. 즉 사회에서 주신 직책으로 인한 역할에는 차이가 있다. 
넷째, 그 직책이 무엇이든지 ‘피차 복종하라’는 대전제위에서 복종을 말씀하신다.    


2.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25-32); 그리스도가 교회에 하듯!  

  이 본문의 분량을 보면 아내들이 서운해 할 필요가 없다. 압도적으로 남편들이 할 일들이 많다. 아내들을 위한 것은 딸랑 세 구절이고 남편들을 향한 구절은 무려 7구절이다. 그래서 먼저 남편들에게 권면한다.


  머리됨이 무슨 뜻일까? 의사결정권, 리더십, 통치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에베소서에서 머리됨은 그리스도는 만물의 머리이시다, 교회의 머리이시다는 뜻에서 보듯이 통치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통치력을 의미한다.


  통치의 성경적인 의미는 억압이 아니고 돌봄, 보살핌, 가꿈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경험한 모든 통치는 억압이다.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 통치라고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 바로 머리됨이다. 그리스도가 만물에 어떤 충만을 주었는가. 망가진 만물을 회복하고, 범죄한 죄인들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갈수 있도록 그 길을 여시어 우리에게 당신의 의로 채우셨다.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우리들에게 영생의 길이 열렸다. 그분의 순종으로 우리에게도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열었다. 이것이 머리됨의 역할이다.


  “오직 양육하고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가 교회에 하신 것같이 하나니”.  이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정말 그리스도는 교회를 양육하고 보호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언제 사랑하셨나?. 엡1;6절에 보면 “창세전에”이다. 우리가 형질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리스도가 먼저 사랑하였다.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자신을 주는 것이다. 자신을 준다는 말은 영어로 보면 give oneself up은 자신을 포기하다. 무엇인가에 열중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자신을 포기한다는 말은 나쁜 뜻이 아니다. 사랑해서 포기한다. 자기를 주는 것은 사랑의 핵심이다. 


  사랑과 자기 내어줌. 이 두 가지 속성을 언약이라고 한다. 언약적인 관계는 먼저 사랑하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배우자를 만나기도 전에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말할 수 있어요.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여요. 우리들은 천성적으로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기 전에 누군가를 만나서 이미 사랑했던 추억을 갖고 있어요. 심지어 어떤 부부는 지금 살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어 결혼했다고 공공연히 말해요


  그리스도가 창세전에 우리를 사랑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만나기도 전에 사랑하셨다. 그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하라. 이제 만났으니 언약적인 사랑을 하라.

도대체 언약적인 사랑은 무엇을 말합니까?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교회를 위해서 정결하게 하려고 먼저 물로 씻어주셨다. 물은 우리의 죄를 씻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것을 나타내는 세례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용서를 말한다. 우리가 정결해지는 것은 무어보다 용서받아서이다. 용서가 없이는 청결해질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용서하신 것처럼. 남편도 아내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그것이 언약적인 사랑이다. 자녀들에게도 용서하는 일은 반복이지만 배우자에게도 용서는 반복이다. 어른이 어른을 용서하는 것이 어렵다. 아내를 용서하는 일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내가 환자로 있어서 이런 실수는 안한다. 신혼 초에 구리시가 재개발되기 전에 인창동 언덕에 살았다. 버스를 타려고 하면 수택동까지 내려와야 한다. 어느 날 아침에 출근하는데 아내가 사무실 키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다시 돌아가야 했다. 튼튼한 내가 ‘내가 가서 가져올게 여기 기다려’라고 말하고 달려가서 가져왔다.

  그러나 그 다음날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내가 아주 시무룩해졌다. 기분이 나빴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내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당신도 같이 가”라고 손을 끌고 갔다. 내가 조금 힘들면 나오는 본성이다. 허물을 용서하는 일은 아내를 정결하게 한다. 두려움과 긴장을 내려놓게 한다. 긴장이 없도록 용서가 흐르는 집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유함이 있다.

  매일 ‘거룩하게’ 되도록 한다. 결혼에서 남편이 할 일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 것처럼 아내를 거룩하게 하라. 거룩하게 되는 것은 사랑 안에서 진리 안에서 자라가는 것을 말한다.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것을 말한다.

  거룩함은 일상 속에서 사랑함으로 드러난다. 성화의 핵심은 사랑이다. 성화는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는다. 아내들의 거룩하도록 하기 위해서 남편들이 사랑해야 한다. 아내를 거룩하도록 하는 일이 바로 남편의 사랑으로 일어난다.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기르면서 어려움을 겪는다. 시간을 사용하기 어렵다. 아내가 묵상을 할 수 있도록 남편이 아이를 돌봐야 한다. 그게 바로 아내의 거룩함을 이루도록 한다. 남편의 역할이 뭐냐고요? 문화적인 구분하면 본질적으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은 거의 동등하다고 본다. 출산은 아내의 역할이지만 의사를 결정하는 것은 서로의 신뢰가운데서 사랑으로 허용하며 살게된다. 의사결정을 누구하는 것이 복종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되지 못한다.

  아내를 영광스러운 교회로 하나님 앞에 세운다. 남편들이 아내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지금 여기서 내가 편하기 위해서 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나님 앞에 세운 것처럼 남편들도 아내를 영광스러운 존재로 세우는 것이다. 흠이 없고 거룩함으로. 에베소서1;4절에 우리를 아들 삼으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함이다.    

  결혼의 목적은 여기서 잘 먹고 잘 사는데 있지 않다. 용서하고, 거룩하고, 하나님 앞에 배우자를 세우기 위함이다. 결혼의 목적은 철저하게 아내를 세우는 데 있다. 먹고 사는 데 결혼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헌신하는 남편이 되는 것이 남편을 향한 부르심이다. 종말에 이루어질 그 소망을 갖는다. ‘아내를 세우리라. 거룩한 교회로!!!. 

  너무 길지요. 남편에게 해야 할 말들이 많이 있지만 이제 줄여야 해요. 아, 이제 아내에게 해야해요. 아내들에게 할 말은 아주 단순해요. 간단 명료해요.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말할 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말하고 있음을 잊지 마셔요. 남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한 것처럼, 아내들에게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한 것처럼 하라고 하셔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행동의 방향을 주목해야 합니다.


3.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3.1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볼 때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했는지 말씀하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였다. 순교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느라고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해도 견뎠다.


  당시에 여자들은 가정의 소유물 중 하나이고 재산 목록이었다. 여자들은 가정을 돌보는 책임을 졌지만 남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남편들은 자기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아내를 소중하게 여기기 않았다.

  복종은 자발적인 헌신을 말한다. 물건 취급당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온갖 수치를 당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했던 것처럼. 종은 강요가 아니라 자원하는 헌신을 말한다.

  변기가 고장났다. 남편에게 “여보, 변기 고장났어 주인아줌마에게 전화해서 수리를 부탁해줘”라고 남편에게 말을 했다. 남편이 말하길 “당신이 전화해. 아마도 변기가 우리집만이 아니고 아래층도 다 막혔을거야”라고 응답했다. 아내는 화가 났지만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생각하고 아줌마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하는데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지. 억울함이 밀려왔다. 그래도 이 말씀을 붙잡고 꾸욱 참고 전화를 했다.

  주인 아저씨도 아니고 아줌마인데 아내가 전화하는 게 낫기도 하지요. 우리가 의식적으로 복종하려고 하면 가장 먼저 튀어 올라오는 놈이 바로 자존심이어요. “내가 이것까지 해야되”. 복종이라는 단어보다 더 우리들의 내면에는 반발심이 가득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가득합니다.

  남편의 말에 말씀을 의식하고 순종하는 것이 잘한 일이다. 사소한 일에도 복종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로 가정을 이루어갈 것이다. 
  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까요?.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듯이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다.

  23절을 보라. “아내의 머리 됨이 남편이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으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에베소서에서 머리됨은 통치보다는 공급이요. 채움, 돌봄이다. 에베소서에서 머리 됨은 통치라는 의미보다는 양육 보호의 개념을 더 잘 드러낸다.

  에베소서4;15-16절에 보면 머리 됨은 우리가 자라가야 할 목표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말한다   
  복종하고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이 두 단어는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복종할 때도 “자기를 주어야 한다”. 사랑할 때도 “자기를 주어야 한다”. 같은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가장 친한 배우자를 주님보듯할 수 있을까요?.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는 방식은 주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다. 친밀함을 넘어서 경외함이 가득한 부부관계가 될 때 자란다. 부부가 친밀함만 있고 경외감이 없으면 자기 만족에 빠져서 경건함을 잃는다. 가정은 가장 놀라운 성육신의 장소이다. 그것도 부부 사이에서 삼위하나님이 가장 친밀한 것처럼 부부가 가장 친밀하길 원하신다. 삼위하나님이 가장 거룩하신 것처럼 가정에서 부부가 가장 거룩하길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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