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락 교수, 『히브리서 산책』 북리뷰
최승락 교수, 『히브리서 산책』 북리뷰
  • 성경과삶이야기울림
  • 승인 2018.07.20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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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락 저, 『히브리서 산책』 (이레서원, 2018)
최승락 저, 『히브리서 산책』 (이레서원, 2018)

 

1. 서론

‘히브리서 산책’이라는 제목이 주는 편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특히 산책의 경우에서 말이다. 사람 사는 곳에서 답답함 혹은 싫증과 같은 감정 따위가 없다면 그 곳은 세상이 아닌 천국일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이 책은 히브리서라는 곳으로 함께 걸어가자며 은밀한 초청을 한다. 물론 이러한 초청은 은밀하기보다 때로는 대범하기도 하다.

산책에 대한 저자의 초청이 은밀한 이유는 성경 66권 중 히브리서가 차지하는 역할과 분량에 비해 그간 다루어지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범한 이유는 성경 66권이 지향하는 신학이 책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 책 안에 신학이 담겨 있다 하여서 모두가 생각하듯이 어느 특정 학자의 글을 인용하며 복잡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저자 스스로의 주해가 담겨 있다.

2-1. 성취란 무엇인가?

히브리서에 관해 책의 저자가 정의하는 신학은 '성취와 기다림'이다. 그 중 우리는 성취를 먼저 곱씹어 보아야 한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구약의 진술은 지금도 유효한가에 관한 질문이다. 작금의 교회 안에서 선포되어지는 설교를 들어볼 때 과연 우리는 구약의 진술이 유효하다고 말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성취’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목적한 바를 이루어 낸다는 뜻이다.

이루어 낸다는 말을 생각해보라! 과연 이 말이 ‘유효하지 않은 것’ 그러니까 이제는 무효한 것을 의미하는가? 기능적인 면에서 무효해졌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성경 본문의 역할은 그대로 유효하다는 것을 말해 두고자한다. 왜냐하면 구약의 진술은 여전히 예수를 향하고 있으며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선포되는 ‘설교’라는 행위에 따라 여전히 유효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는 설교는 100% 인간의 행위라 말하였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은 결국 설교하기 위해 서 있는 설교자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와 근거는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과 선포하는 행위의 주체가 인간 자신이라는 것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 위에 채색옷 같이 아름다운 옷을 덧입히는 행위를 이끄시는 분은 성령이시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수 많은 설교자들이 간과하는 것이 설교라는 매체를 조작하여 활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종합적인 사고를 지니지 못한 채 단편적인 것만을 추구함으로써 낳게 되는 오류라 판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행위 위에 아름다운 옷을 덧입히시는 행위를 이끄시는 성령에 사로잡힌 설교자가 바로 히브리서의 저자이다. 우리는 본 책을 통해서 위대한 설교자라 불릴 만한 히브리서의 저자로부터 설교를 배워야 한다.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 많은 논쟁이 있으나 이제 우리에게 저자가 누구인지는 많은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는 히브리서의 설교자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 하는지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전체 13장의 분량 중 저자는 각각의 요소들을 부분적으로 다루며 중요한 주제를 다루어 주었다. 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약의 말씀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됐는지 주목한다는 점에서 히브리서는 가히 설교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은 본 책을 구성하는 목차의 구성이다. ① 최종적인 말씀을 받은 우리의 기다림 (1:1-2, 2:1-3) ② 시편 8편의 성취와 기다림(2:8-10) ③ 집에 대한 약속의 성취와 기다림(3:1-6) ④ 안식에 대한 약속의 성취와 기다림(3:12-14, 3:18-19) ⑤ 안식 축제에 대한 성취와 기다림(4:1-2, 4:9-11) ⑥ 대제사장에 대한 약속의 성취와 기다림(5:4-6, 7:11-14) ⑦ 제사장 멜기세덱에 대한 약속의 성취와 기다림(6:19-20, 7:1-3) ⑧ 맹세의 효력과 기다림(6:16-18, 7:20-22) ⑨ 새 언약 약속의 성취와 기다림(8:6-8, 13, 9:11-12, 14) ⑩ 시편 40편의 성취와 기다림(10:1-2, 10:12-14) ⑪ 믿음의 담대함으로 기다림(10:32, 34-35, 39, 11:1-2) ⑫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기다림(11:8-10, 13-16, 11:39-40) ⑬ 훈육과 거룩의 공동체로서 기다림(12:4-8, 12:14-16) ⑭ 시온 산에 다다른 자의 기다림(12:18-19, 22-24, 12:26-28) ⑮ 영문 밖 성도의 예배, 실천 그리고 기다림 (13:9-16)

이상의 목차를 살펴만 보더라도 <히브리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독자들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 모든 말씀의 큰 주제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다. 따라서 히브리서의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설교하고자 구약의 본문을 사용하며 설교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설교 방법은 칼 와호메르(qal wahomer)라는 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본 용법은 낮은 것으로부터 높은 결론을 도출해내는 랍비 전통의 성경해석 방법이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대개 많은 경우 이 방법은 어느 특정 대상과의 대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조하게 된다. 그렇다면 히브리서의 설교자는 본 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과 인물을 비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대중이 어려워하는 가장 난해한 구절은 멜기세덱에 관한 것이리라 판단된다. 성경의 히브리서는 그가 족보도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며 받아들일 때 멜기세덱은 신적인 인물로 비추어질 수 있다. 말 그대로 족보도 없다는 것은 그가 마치 신인 것처럼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 본문의 주해를 충실히 작업해 준 저자를 통해 우리는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은 ‘발화’의 수단으로서 예수를 강조하고자 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신약의 구약 사용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본문을 전개하기 위하여 어떤 성경 번역을 차용하는지를 주목하게 한다. 여러 번역본을 비교하며 설명하는 저자의 수고 덕분에 히브리서에서 사용되는 구약 성경 본문의 상당수가 70인역을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2. 기다림이란 무엇인가?

지면상 전부 다루지는 못하지만 구약의 모든 말씀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어진다는 것은 그저 이 말씀들이 이제는 완성된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좋은 결과만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두 번째로 우리가 곱씹어 보아야 할 것에 관해 본 책의 저자는 성경의 가르침이 구원이라는 결과로서 개인의 구원을 마음 껏 누리라는 자유를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구약으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성경이 지향하는 것은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기다림에 있기 때문이며 이것을 신학은 ‘이미 와 아직’이라는 도식 아래 종말의 신학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기다림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의 성막을 서술하여 하늘의 성전을 기다리도록 인도하고 있다. 결국 기다림은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삶의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가야 할 하늘의 성전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막이라는 모티프가 사용된 것이다. 이것은 성도의 예배를 의미한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언약백성으로서 이제 우리는 더 좋은 제사장과 더 좋은 왕을 모셨다는 것을 설명해 나간다.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교훈하고 있다. 그래서 책의 저자는 히브리서가 설명하는 기다림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은 행위를 수반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만약 이 문장을 읽을 때 행위라는 말에 기분이 언짢다면 성경 본문보다는 ‘신학’을 생각해서 일 것이다. 구원에 관하여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경은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행위’를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원이라는 것이 신적인 은혜에 의해 불가항력적인 은혜로부터 수반된 ‘믿음’으로 가능한 것임을 말한다.

그런데 작금의 교회의 모습은 결과만 생각함으로써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전제를 잊었다. 그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며 개인의 낙오와 성장이 모두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계시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나의 구원만을 생각하며 당장 옆에 있는 지체의 믿음의 연약함을 견인하지 않은 채 오히려 책망하며 상식 없는 헌신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성경이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말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죄송한 말씀이지만 처음부터 다시 성경을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이제 필자는 마음이 무너지고 더 이상 세상에 소망이 없을 것 같을 때에 히브리서를 묵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본 책이 지니고 있는 장점 곧 성경 주해와 더불어 문법적인 설명은 필자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숭고한 것임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3. 갈무리하며

더 좋은 성소 그리고 제사장이며 왕이 되신 예수를 믿는 우리는 ‘성도’라 불린다. 히브리서의 수신자가 처한 상황이 그리 편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성경의 모든 상황이 늘 형통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필자는 우리에게 징계가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사생자가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들에 속함이라는 히브리서 설교자의 말로부터 위로를 얻게 된다. 책의 저자는 징계라는 단어가 훈육이라는 단어로 사용되는것이 바람직하고 말하였다.

필자가 히브리서에 관심을 갖고 레위기에 관한 책을 읽어나갔던 적이 불과 1년 전이다. 당시 레위기에 관한 책을 읽어나가며 레위기 책의 주제가 예배와 거룩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의 주제 역시 예배이며 거룩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全)우주적인 범위를 성막과 비교하여 생각할 때 예수의 죽으심은 우리 모두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것이며 이는 성소 안에 뿌려진 피가 예수의 피라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침과 동시에 성막 안에 있는 지성소에 직접 들어가셨다. 그 곳이 바로 모형의 그림자로서 성막이 본래 있는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성막에 들어갈 때 뜰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스스로 정결한 규례를 지켜야 했던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까다로운 규례가 없더라도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 나라의 뜰 문을 통과할 수 있다. 대신에 이제 정결한 규례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구별된 모습을 보이는 것에 있다. 책의 저자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예배임을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각 개인이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바람직한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여전히 이웃에 대해 배타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로 하여금 믿음의 성장을 위해 견인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수반되는 교회는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할 때 막연한 번영 곧 물질적인 것과 명예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이며 부와 명예가 아닌 가난과 수치임을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나라로서 교회는 최소한의 것만을 지켜가야 한다. 그 이상으로 갈 때 더 이상 그곳은 교회가 아닌 기업이 된다. 더 좋은 본향을 향해 함께 산책함이 바람직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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