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자녀를 데려가라(창 22:1-19)
네 자녀를 데려가라(창 22:1-19)
  • 김병년 목사(다드림교회)
  • 승인 2019.01.0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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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6일 주일설교
다드림교회 담임 김병년 목사
▲다드림교회 담임 김병년 목사

‘나’를 위한 말씀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먼저이다.

요즘 새벽기도회 때마다 매일 성경의 순서를 따라서 성경을 읽는다. 성경 세장을 읽고 짧게 인도자가 기도하고 개인 기도시간을 갖는다. 혹시 새벽기도회에 오시면 성경만 읽는다고 의아해 하지 마시기 바란다. 교회는 언제나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아는데 힘쓰는 곳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보다 하나님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리신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에 더 집중되어 있다.

여기서 강조는 ‘나에게’에 있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나를 위한 책이 된다. 아니다. 성경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기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먼저 알기 원한다. 이 작은 차이는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왜곡시키고 인생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기보다는 자신을 둘 가능성이 높다.

이런 방식의 성경 읽기는 결국에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감정이나 필요에 더욱 예민한 사람을 만들어 하나님을 왜곡한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 분인가 보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더 예민하게 만든다. 오늘 본문인 창 22:1-19를 읽을 때, 우리 모두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설마, 하나님이 그러실까?’라는 의문을 갖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더 더욱 이해하지 어렵게 한다.

 

1. “그 아이를 모리아 산으로 데려가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다. “이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을 시험하실까? 1절 말씀에 “이 일 후에”라고 분명한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 ‘이 일’은 어떤 일인가? 아브라함은 85세에 사라의 종이었던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가나안에 들어와서 산지 10년 만에 얻은 아들이었다.

아브라함은 본처인 사라에게서 이삭을 얻은 것은 가나안에 들어온지 25년만이었다. 그런데 하갈이 이스마엘을 임신했을 때, 사라는 하갈을 내쫓았었다.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고 있던 하갈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주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하갈과 이스마엘은 이삭이 태어날 때까지 같이 살았다(창 21:18).

그러다 이삭이 태어나자 젖을 떼는 날, 하갈과 이스마엘은 쫓겨난다. 그때 이스마엘의 나이는 15세 이상된 청소년이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난 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더 이상의 언급이 없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삭은 아주 온유하고 관조적인 성품을 가졌다. 이삭의 우물(창세기 26장; 에섹, 싯나, 르호봇)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 이삭은 싸움을 싫어하고 피하면서도 부자가 된 사람이다. 그의 성장 과정이 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렵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적어도 늦게 얻은 아들 이삭을 통하여 평안하게 살았음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이삭을 통하여 도대체 무엇을 시험하시려는 것일까? 120살이 넘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2절),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12절), “네 아들 네 독자도”(16절)를 드리라고 하신다.

창세기 12장에서처럼 “갈대아 우르 하란을 떠나라”는 식의 장소 이동이 아닌 건만은 분명하다.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12:1)는 말처럼 ‘가라’는 말은 동일하지만, 이번에는 “모리아 땅으로 가서 … 내가 네게 일러 준한 산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고 있다. 모리아 땅은 아브라함의 거주지에서 3일 길이면 족했다. 그러나 번제로 드려야 하는 제물이 양이나 염소 같은 짐승이 아니라 아들이다. 아들을 번제로 태워야 한다는 의미다.

자식을 가진 부모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잘 모르는 사람은 이 구절을 읽을 때, 하나님에 대해 분노하기 쉽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하나님이 이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받치라고 하신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한, 믿음에는 언제나 위험이 존재한다. 믿음이 삶의 위험을 이기는 능력이 되지만, 우리가 믿음을 가진 한 우리를 가장 위험스럽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믿음에 참여하는 한 통제권을 상실 당한다(유진 피터슨).

천지창조를 읽을 때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에서도 우리들은 인간사에 얼마든지 있는 일이라고 여긴다. 오히려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기는 하지만, ‘하나님이시니까, 그렇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랫동안 믿음을 따라 살아온 아브라함을 시험하신다. 만약 우리가 “하나뿐인 아들을 드리라.”는 말씀을 접하게 되면 당혹스러울 뿐 아니라, 분노가 일어날 것이다.

아브라함이 평생 하나님을 따랐어도, 하나님은 그에게 요구하셨다. “너의 사랑하는 독자, 하나뿐인 아들을 드려라!”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요구하시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나이가 들수록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젊은 사람들만 순종하는 게 아니다. 평생을 믿음으로 살았어도 하나님은 또 말씀하신다. “네 아들을 모리아 산으로 데려와서 제물로 드려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험 속으로 던진다. 시험이 없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시험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무엇인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노출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다.

유대인들은 이 창세기 22장을 신년에 읽는다. 이삭을 묶는 것을 히브리말로 “아케다”라고 한다. 아들을 묶듯이 신년에 이 본문을 읽음으로 과거에 드린 헌신을 묶는다. 헌신은 어제의 헌신이 아니고 언제나 새로운 응답이어야 한다. 삶의 방식이 늘 “아케다”이다. “희생으로 시험을 받는 믿음이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유진피터슨). 2019년은 믿음의 도전이어야 한다.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현실이어야 한다.

다드림교회라는 명칭에서 ‘드림’은 그 자체가 예배요, 헌신이요, 나눔의 의미를 갖는다. 봉헌송으로 부르는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 주소서!”. 생명을 드리는 것을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음의 성도들은 아까워하지 않았다.

 

2.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칭호를 얻은 이유가 있다.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를 보면, 모세의 이야기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더 길다. 그리고 성경전체를 봐도 모세보다 아브라함의 언급이 훨씬 많다. 왜 아브라함일까?

창세기 22장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온전하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3절). 아브라함은 3일 길을 갔다. 묵묵히 걸었다. 자기 손에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6절). 아브라함의 손에 들린 도구를 보라. 불이 들렸다. 칼이 들렸다. “거기서 그를 번제로 그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그는 말씀대로 순종하고 있다.

이삭이 물었다. “아버지 나무도 있고 칼도 있고 불도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한다.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 아브라함은 알지 못했다. 손을 들어 칼을 내리칠 때까지도 몰랐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참된 순종은 미래의 안전을 담보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믿음은 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 순종한다. 모든 것을 다 알고 드리는 것이 순종이 아니다. 그분이 말씀하셨기에 따르는 것이 순종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경우는 너무도 많다. 대부분 욕심 때문이다. 욕심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불신이 시험의 핵심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할 때는 언제나 율법을 지키길 원하신다. 순종하는지 알고 싶어 하신다.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셨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실 때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시험하리라”(출 16:4). 날마다 거두는 양식을 방식과 양식을 관리하는 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지를 판단하셨다. 일용할 양식을 매일 일정한 양만 거두라고 하셨다. “먹고 남은 것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 공급자에 대한 신뢰로 쌓아두지 말라고 하신다.

아들을 드림을 통하여 하나님이 알고 싶은 것은 단 한가지셨다. “천사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 하나님이 알고 싶었던 것은 아브라함이 자기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알고 싶어 하셨다.

아니, 평생토록 적어도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살았던 40년 가까운 시간동안 “가라.”하면 떠나고, “머물라.” 하면 머물고, “기다리라.” 하면 기다리고, “지키라.” 하면 지키는 일을 수없이 반복됐다. 그런 아브라함의 삶이었는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모르셨단 말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훈련은 혹독하다. 경외는 나이브한 훈련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전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드리는 훈련이다. 그래서 헌신이 무서운 것이다. 헌신 속에는 반드시 시험들만한 요소가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나이가 들수록, 언약의 땅에 살수록 더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알고 싶으셨다. 자식을 잃을 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고 싶으셨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시험받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한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 하시느니라”(약 1:13-14)시험받는 자들은 다 자기 욕심으로 인하여 시험을 받는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지 않는다는 말의 뜻은 우리를 망하도록 하기 위해서, 죄 짓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 이것이 순종의 이유이다. 순종은 이해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순종은 언제나 선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당한다. 아들 이삭이 묻는다. “아빠, 양은 어디 있어요?” 아브라함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한다. 하나님이 준비하셔. 순종은 미래를 아는 도구가 아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모리아이다. 모리아는 여호와가 공급하신다는 의미이다. 여호와 이레도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라”를 의미다. 아브라함은 가장 사랑ㅎ라는 독자 이삭을 드릴 때도 그는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2019년도 한해를 순종하며 공급하실 선하신 하나님을 기대하자.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아니다.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기에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하는 것이다. 내가 준비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삶이다. 단, 순종할 뿐이다.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3. "그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라"

천사가 두 번째 나타나서 아브라함에 말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 하였은즉 내개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시가 크게 번성하여 한날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16-19절).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지만 그 언약이 유지될지 아닐지 늘 위기를 맞는다. 아브라함이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언약이 위협을 당한다.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누군가 아들을 아끼는 자에 의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깨어지기도 한다. 하나님의 언약보다 자기의 혈육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로 인하여 언약은 깨진다.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지금까지 준행했는데 이 순간의 거절은 언약을 깨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긴장 속에서 그 언약을 준행했다. 하나님은 75세의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그는 175세에 죽었다. 무려 100년 동안을 그렇게 살았다. 하나님의 언약이 지켜지는 데는 위대한 어떤 사람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데, 100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훈련 되는데 100년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한순간에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리시는 이유는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 하란에 사는 아브라함을 불렀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 가라면 간다. 아들을 드리라면 아들을 드린다. 가라고 머물고, 드리라고 할 때 취한다. 불순종이다.

17-18절을 보라. 전하 만민이 복을 받는다. 여기에 믿음의 묘미가 있다. 순종은 내가 하고 복은 온 인류가 받는다. 위험은 내가 겪고 다른 이들이 복을 받는다. 나의 헌신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번성한다. 믿음으로 행하는 자들에게는 번성함이 있다.

아브라함의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분을 느껴보라. 이삭의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느껴보라. ‘아브라함아, 네가 순종했구나!’, ‘이삭아 네가 순종했구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났구나!’

 

나가며 –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연약한 우리들을 의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베드로를 의지하시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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