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요셉 목사] 부르족 사람들 (4) - 이방에서 온 여인, 모니
[권요셉 목사] 부르족 사람들 (4) - 이방에서 온 여인, 모니
  • 권요셉 목사
  • 승인 2019.03.19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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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선교사의 치유적 글쓰기
여전도회 모임 중인 모니. 오른쪽 분홍색 옷.
▲여전도회 모임 중인 모니. 오른쪽 분홍색 옷.

나는 그녀를 "모니카"라고 불렀다. 모니 뒤에 독특한 아프리카 발음이 오는데 ‘ㅋ’발음과 비슷했다. 그녀가 자기 이름을 소개할 때면, ‘모닠’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하면 묵음에 가까웠다. 나는 그 발음을 할 수 없었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발음할 때면, 그녀는 키득키득 웃곤 했다. 그 이름의 뜻은 '햇살'이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침햇살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아침햇살 같지 않았다.

모니는 부르족 여인이 아니었다. 이방에서 온 여인. 그래서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다.

모니의 부족에서 여자의 정절은 중요했다. 남수단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부르족 출신의 모니의 남편은 전쟁이 끝나고 부족으로 돌아가는 길에 모니의 부족에 들렸다. 그리고 모니를 겁탈했다. 모니의 부족에서는 여자의 정절을 중요하게 여겼던 터라 자기를 겁탈한 남편을 따라서 부르족으로 왔다. 남편은 모니에게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모니의 얼굴 생김새는 부르족 여인들과 조금 달랐다. 부르족 여인들은 신체가 크고 이마와 광대뼈가 돌출했다. 그러나 모니는 비교적 아담하고 이마와 광대뼈가 나오지 않았다. 모니는 부르족 남자들에게 신비롭게 보였고, 소유욕을 불러일으켰다. 모니는 남편이 없는 사이 겁탈을 당했다. 겁탈을 당하는 도중에 남편이 현장을 발견했고, 남편은 모니를 겁탈한 남자를 죽였다. 부르족에는 강간죄나 간음죄가 없고, 결혼과 상관없이 성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모니를 겁탈한 남자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그 남자를 죽인 모니의 남편만이 살인죄를 적용받아 4년 투옥과 자녀 한 명을 피해자 가족에게 종으로 주어야 하는 형을 받았다.

남편이 투옥되자, 모니는 생활이 막막해졌다. 부르족은 부족 내의 장애인과 독거 노인, 과부와 고아들을 위한 공동 식량을 운영했다. 그러나 모니는 부족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혜택을 받을 수 없었고, 남편의 친척들이 조금씩 도와주는 것으로 먹고 살았다. 다른 부족민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수시로 남자들에게 겁탈을 당했다. 내가 그녀를 만났을 즈음에는, 다른 부르족의 여인들처럼, 겁탈당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어린 아기를 키우고 있었다. 그 아기가 젖을 떼고 나면, 남편에게 죽은 남자의 집에 종으로 보내야 했다.

그녀는 원래의 자기 부족에 있을 때, 천주교회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 갔을 때, 나를 "신부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냥 "요셉"이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계속 신부님이라고 불렀다. 아주 나중에서야 "요셉"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어른으로서는 6번째 성도였다. 매우 적극적으로 예배에 왔고 나를 매우 의지했다. 나로서도 천주교를 경험한 그녀가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성가대장과 여전도회장을 맡겼다. 그녀는 처음에는 "부족민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수락한 뒤로는 매우 적극적으로 역할을 감당했다. 교회 안에서 부족으로부터 받았던 소외감과 어려움들을 해결했다. 교회 활동을 통해 친구들도 많이 생겼고 남자들이 겁탈하려 할 때 거절하는 것도 배웠다.

교회가 옥수수 가루를 지원하는 제도를 시행했는데 모니가 그 첫 수혜자였다. 사실, 옥수수 가루 지원하는 제도를 만든 이유가 모니 때문이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부족에서 도와주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러나 모니는 계속 구걸을 해야 했기 때문에, 교회가 어떻게든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서 옥수수 가루 지원 제도를 만들었다. 아기가 말라리아로 아플 때도, 장티프스로 아플 때도 우리에게 달려왔다. 그녀가 무언가를 요청해 올 때마다 우리는 거절하지 않고 도왔다.

모니는 우리가 부족에 들어가고 나서야 행복을 되찾았다. 어린아이들처럼 매일 교회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어린이 모임과 예배 시간에 우리를 도우려고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우리는 그렇게 하라고 시킨 적이 없었다. 그냥 모니의 선택이었다. 어떻게든 우리에게 보답하고 싶어 했다. 설교 시간에 눈이 가장 빛나는 성도였다.

그리고 전쟁이 났다. 전쟁이 나자 그녀는 꽤 먼 거리를 걸어서 우리 집에 찾아왔다. 우리가 떠날까 봐 두려웠으리라. 마치 우리를 감시라도 하듯 하루 종일 우리 집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말 상대를 하며 응대해 줬는데, 아예 갈 생각을 안 해서 나는 그냥 내 볼일을 봤다. 그러다가 해질녘이 되어서야 안심하듯 돌아갔다.

전쟁이 나고 두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릴 때, 나는

“저는 떠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곳에 있겠습니다. 주님이 이 자리에 우리와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이 끝나자 다른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는데 그녀는 울었다. 나와 아내를 번갈아 안아주며 엉엉 울었다. 내 말을 듣고 그녀는 안심했으리라. 다시 외로워지기 싫었을 것이고, 다시 배고프기 싫었을 것이리라.

그리고 이틀 뒤, 나는 남수단을 도망쳐 나왔다.

내가 도망나온 걸 알고 그녀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갔을까?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있을까? 남편은 감옥에서 나왔을까? 혹시 아직도 기다리지는 않을까? 모니는 지금까지도 마음을 가장 무겁게 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남수단에서 나오고 몇 주 뒤, 윌리엄과 통화할 때, 윌리엄은 부르족의 부상자들과 사망자들을 주욱 말해주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윌리엄이 말해준 사람들의 명단에 모니의 이름은 없었다. 그 이름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모니의 이름은 들리지 않았다.

“저기...”

나는 모니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었다.

“왜요? 목사님?”

윌리엄이 내게 되물었지만 나는 물어보지 못했다.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안녕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물어보고 나서 잘 못지낸다는 말을 들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만, 매월 돈을 보낸 뒤 윌리엄에게 꼭 말해두었다.

“20달러(2만원)는 옥수수 가루 사서 모니에게 전달해줘.”

기도한다. 배고프지 않기를. 겁탈당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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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요셉 목사는 서울예술대학교(극작과)와 경기대학교(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 석사와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총회 소속 목사로, 현재 인천 더함공동체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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