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년 목사] 어떤 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당신(아 2:1~9)
[김병년 목사] 어떤 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당신(아 2:1~9)
  • 김병년 목사(다드림교회)
  • 승인 2019.03.26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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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 다드림교회 김병년 목사

 

이미 망쳐서 희망이 없다는 당신에게

아가서를 설교하며 성도들의 반응을 살폈다. 아가서에 나오는 단란한 연인 모습을 찾았다. 노력하는 부부들도 있고 그런 달달한 연인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아가서의 모습과 거리가 있다. 연인이 있어도 깊은 외로움에 빠져 있고, 순결을 잃고 신음하고, 섹스를 하지 않는 sexless 부부도 있고, 폐경기가 지나서 성적인 감각이 무뎌지고 성적인 생각조차 없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성을 혐오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싱글들이 늘어간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는 설교자는 더 곤혹스럽다. 내가 ‘아가서 설교 어때요’>라고 어느 집사님에게 물었더니 아마도 설교자만큼 당혹스러운지 ‘목사님, 언제 아가서 끝납니까?’라고 되물었다. 어떡하죠. ‘아직 두 달이나 남았어요. 조금만 참으세요.’

가정이 망가져서 희망이 없는데 이런 설교가 필요합니까? 노화가 진행되어 더 이상 성적인 매력에 관심도 없는 데 이 설교가 필요합니까? 싱글로 살아가는 데 아가서가 필요합니까? 예, 저는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다. 아가서는 바로 ‘당신을 위한 성경이다’.

나는 신학자이며 작가인 크리스토퍼 애쉬를 좋아한다. 그가 쓴 책 『결혼, 그 아름다운 예배』이 최근에 번역되었다. 그는 이 책을 쓰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자신의 섹스 이력이 깨끗하다며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바리새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는 실패자를 위한 책”이다.

심지어 그는 “결혼한 지 25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성욕은 도덕적으로 혼탁하다. 아내를 향한 건강한 욕구와 다른 사람이나 선정적인 잡지에 이끌리는 건강하지 못한 마음이 뒤죽박죽이다”라며 이 책을 썼다(결혼 아름다운 예배, 30).

복음에는 성적으로 문란했던 사람이 돌아오는 허다한 경우를 우리는 알고 있다. 수가성 여인은 남편이 여섯 명을 두었던 여자다. 그녀가 변했다.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을 아는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그녀는 돌아왔다.

이 아가서의 저자가 솔로몬이라면 상상해 보라. 수많은 여자를 경험했던 솔로몬이 이런 책을 쓰다니!. 과거가 더렵혀진 이들에게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더럽혔던 과거가 깨끗해지고 더욱 순결하게 될 날이 온다!. 그것이 은혜요 복음의 능력이다.

아가서는 성적으로 실패한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회복을 위한 책이다. 아가서를 설교를 들으며 자신이 성적인 존재를 거부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부부로 존재하지만 배우자를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배우자에게 “이쁘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메마른 나무에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듯이 망가진 우리의 삶에도 아직 피지 않은 열매가 있다. 피지 않은 꽃이 있다. “나는 아직 만개하지 않은 꽃이다.”

 

1. 사랑받는 자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연인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향기에 취하고, 아름다움에 취하였다. 서로를 보며 ‘어여쁘다’고 했다. 너는 기쁨이다! 여자는 자신을 꽃이라고 말한다.

이제 여자 자신이 자신에 대하여 말한다. “나는 샤론 평원에서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다”. 1:5에 여자 연인은 자신을 “검으나 아름다워”라고 했다. ‘게달의 장막 같고 솔로몬 성전의 휘장같다’고 했다. 여기에 검지만 아름답다는 말을 번역할 때 우리 성경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라고 검다를 부정적으로 번역했다. ‘비록 검으나’는 긍정적인 표현이 아니다. 햇빛에 거스린 얼굴을 흘겨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을 수선화 꽃으로 백합화로 소개한다. 수선화는 장미로도 번역하였다. 그것도 샤론에 있는 장미다. 샤론은 이스라엘의 평야를 말한다. 북팔레스타인에 있는 가장 넓은 해안평야를 말한다. 오늘날에도 감귤지대가 형성되어 있는 아주 풍요로운 농경지이다.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이 가득한 땅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그 가운데 핀 꽃이다!. 풍요로운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남자도 여자를 꽃으로 안다. “나는 꽃입니다.”라고 말하는 연인을 향하여 남자가 화답한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처럼 여자들 가운데 내 사랑”(2절). 이 문장은 동사가 없다. 가시나무 가운데 핀 백합화라고 말한다. 우리는 가시나무와 꽃의 비교를 이해하기 어렵다. 가시와 꽃을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교를 잘 이해하지 못해도 의미는 분명하다.

남자도 여자를 보며 꽃으로 축복한다. 노래한다. ‘당신은 꽃이다’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꽃이다. 내 꽃이다! 라고 한다. 자신을 꽃으로 아는 사람이 있다. 다른 이들도 꽃으로 안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삶인가. 꽃에 매력적인 힘이 있어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항상 꽃에 비유한다.

꽃의 아름다움은 단지 색깔에서만 나올까요? 아니다. 꽃의 아름다움은 색깔보다 생기에서 나온다. 생기는 colourful 색감을 유지한다. 생동감을 내는 생기가 꽃을 아름답게 한다. 수분이 있어야 색이 화려하고 꽃이 예쁘다. 사람에게 아름답게 꾸미게 하고, 생기가 돌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사람을 생기 돌게 한다. 어떤 꽃에든지 표현되는 생기가 있다!. 사랑은 사람을 어떤 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생기가 돌게 한다.

나태주 선생님이 쓴 <좋다고 하니까 나도 좋다>는 산문집이 있다. 이 책에 ‘미인을 위하여’라는 꼭지가 있다(p.125 인용). 지인 중에 외모가 특출 난 예쁜 여인이 있다고 한다. 가정도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도 높고, 마음씨도 곱고 너그럽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길 잘하는 사람이다.

어느 날 이 여인의 친구가 “너는 말이야. 예쁜 것은 분명한데 너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야. 제가 예쁘다는 것 모르고 예쁘면 더 예쁠 텐데 말이야!”라고 하셨다. 자신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떠벌리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자신을 너무 의식하지 않는 삶이 자연스럽고 자기다워진다는 생각을 말한다.

세상에서는 자신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다.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자의식이 분명하고 더 사랑하는 것이 미덕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영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와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봄에 꽃이 피듯 사랑도 생기를 돌게 하여 사람을 꽃으로 만든다. 사랑은 ‘어떤 꽃에도 생기’ 돌게 한다.

 

2. 사랑받는 자는 사랑하는 자와 온전한 연합을 꿈꾼다.

바르트는 아가서를 창세기 2;25절의 주석이라고 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성적인 존재로 있으면서도 우리들은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전혀 없던 상태로 존재했다. 그러나 범죄 후에 ‘벌거벗었음을 보고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나 아가서에는 그런 부끄러움이 없다. 심지어 상처를 입어도 부끄러움이 없다!. 매우 적극적으로 남자를 찾아간다. 그리움을 나타내고 성적인 갈망을 드러낸다.

성은 우리 삶의 중심이다. 아가서의 묘사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이제 오늘 다루는 본문은 대단히 성적인 묘사가 많다. 아주 직접적인 묘사로서 “그가 왼팔로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다”. 이 6절은 누가 봐도 부부관계를 묘사한다. 안는다는 말 자체가 성적인 의미다. 사과나무는 이 당시의 문화에서 언제나 성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풍요제에 사용하던 건포도 빵도 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은 사랑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하지만 아가서는 처음부터 성경에 포함되어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나누는 사랑의 친밀함이 하나님과 우리들이 맺는 사랑의 관계를 드러내기 때문이 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성은 우리 삶의 중심이다.

내가 대학생 때 거듭나고 처음 접한 책이 가정 결혼 상담 책이 『나는 너와 결혼하였다』는 월트 트로비쉬의 책이었다. 그 책은 아주 독보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월트 트로비쉬 다음으로 기억하는 저자는 양은순 선생님으로 사랑과 행복으로의 초대라는 책이다. 이 책은 모든 사람들이 다 읽었다.

그러다가 리차드 포스트의 『돈, 섹스, 권력』이 있었다. “아가서에는 탐욕이 없는 사랑이 있다...아가서에는 강렬한 사랑, 절제력 있는 사랑, 성숙한 사랑, 영원한 사랑”을 주제로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돈 섹스 권력, p109-11요약). 아가서는 열정적인 사랑이 성적인 갈망으로 나타난다. 연인이 하나 되고자 하는 갈망을 갖고 있다. 사랑하는 자를 찾고, 그를 향하여 달려간다.

성적인 갈망은 온전한 연합을 향한 갈망이다. 사과나무의 그늘 아래에서 여자가 쉬고 , 그 사과나무의 열매를 먹는다. 쉼, 기쁨 안식, 음식으로 즐거움을 누린다. 이스라엘에는 사과나무가 없다. 있다고 해도 별로 맛도 없다. 작고, 시고, 맛도 없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사과나무를 살구나무로 이해하지만 그 나무가 무엇이든지 그늘에서 쉬고, 기뻐하고, 열매를 먹는다.

4절을 보라.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다”. 꼼꼼히 읽어도 의미를 밝히기 쉽지 않다. 깃발은 항상 중앙에 세운다. 즉 그의 사랑이 내 중심이다. 여인의 삶의 중심을 남자가 차지하였다. 남자의 사랑에 단단히 기초를 내렸다. 일상을 지배하는 것이 그 남자였다. 5절은 사랑하다 병이 낫다 보다는 ‘사랑하다 지쳤다’는 것이 의미적으로 맞다. 사랑하다가 지친 이 여자가 자신이 건포도를 먹고, 사과를 먹어서 자신이 쉼을 얻기를 바란다. 이처럼 강렬할 수 있을까요? 하나 되고자 하는 그 열망이. 성적인 연합은 삶의 연합이다. 부부는 다시 이 언약으로 돌아가야 한다.

 

3. 사랑받는 자는 사랑하는 자와 온전한 연합을 언약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관계를 언약이라고 한다. 언약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언약을 맺으면 서로 연합한다. 연합이 깨진 것은 언약이 깨진 것이다. 회복된 언약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로 살아간다. 아가서는 모든 삶을 언약으로 이해한다.

“아가서는 구원의 실제가 어떤 모습인지를 구원받은 자들의 삶의 환경을 설명한다. 거기에는 질문과 대답, 초대와 책임, 약속과 성취등이 포함되어 있다. 즉 말이 새로운 세계를 이끌어내는 실체이다 그것은 말을 하고 말을 들어주는 세계이며 함께 뒤섞여 살아가는 세상이다”(유진 피트슨의 목회오경, p55인용).

섹스는 부부가 언약적인 관계임을 나타낸다. 부부의 삶에 중심에는 섹스가 있다. 부부의 생활의 중심에 섹스가 있다.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6-7절)

아가서 첫 절에 “키스해 주세요,”라든지 오늘 읽은 본문처럼 성행위를 하든지 이 모든 것은 친밀함을 바라는 강렬한 행위이다. 결혼한 관계에서만 성관계를 가지라고 하는 가장 큰 의미는 바로 이 언약 때문이다.

결혼은 언약적인 관계로 맺고 남자와 여자를 초청한다. 그것을 한 몸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많은 부부들이 성관계를 가져도 자신들이 원하는 친밀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섹스를 안해서가 아니라 언약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다. 언약적인 관계를 맺으면 대상에게 집중한다. 사랑으로 상대방을 향한다.

결혼을 했어도 상대방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친밀함은 한번 깨지면 회복되기 어려운 유리잔과 같다. 깨져서 누군가를 상처내고, 자신도 조각나고, 아무것도 담아서 마실 수가 없다. 버려진다. 유리잔이야 깨지면 버리면 되지만 사람은 쉽게 버리지 못한다.

섹스에 대해서도 주님께 솔직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죄성으로 얼룩덜룩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향하는 뒤죽박죽인 충동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안 그런 척 하지만 지나친 순결의식 때문에 약간의 지저분함을 고백하기만 해도 창기가 된 듯한 과민한 죄의식으로 정죄한다. 그래서 아예 그 사람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한다. 외면한다. 또 성적인 문제는 뭔가 경건을 추구하면 할수록 외면하고 싶은 영역이다. 밥 먹고 살면 되지 라고 자기를 기만한다. 자신의 욕구를 속이기에 급급해서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이 반드시 성적인 존재임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예전에 일흔 가까이 되신 장로님이 정욕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진 지금이 참 좋다고 하셨다. 아... 남자들이 이 문제로 참 많이 괴로워하는구나 싶었다. 하나님이 주신 감각인데 기쁘고 즐거운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데 사용되는 게 아니라 .... 남자는 더 강렬하고.. 여자는 은근하게.... 죄를 향하도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데로 끊임없이 악용되는 감각이구나!”(내 친구)

 

나가며 – 하나님의 신비를 깨달았을 때.... (내 친구가 준 글)

‘연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 인간의 품격에서 ‘도러시 데이’의 삶에 깊이 감동한 적이 있다. 이 여자는 청년시절에 급진적인 사회운동가로 전향하면서 반문화의 분위기에 자신을 맡기고 자신의 자유를 격정적인 연애와 문란함으로 표현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깊은 영적 허기를 느낀다. 초월적인 존재를 찾기 전까지는 평온할 수 없다고 느꼈다. 아이를 낳고 가톨릭 신앙으로 전향을 한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포스터라는 남잔데... 무신론자였다.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는 남자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단다. 그녀는 그와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께 마음이 열렸다고 했다. 육체적이면서 영적인, 온전한 사랑을 통해 신을 알게 되었다고. 그러나 하나님을 찾게 해 준 남자를 포기한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하나님의 신비를 깨달을 때. 내가 하는 말이다. ‘연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인간을 사랑한다.’ 이 말이 완성되려면 연인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어야한다. 만약에 그 사랑이 도러시 데이의 사랑처럼 그의 신앙과 함께 할 수 없다면... 고통을 뚫고서 자신을 더 큰 사랑에 굴복시킴으로써 연인을 사랑하던 그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할 수 있다.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마더 테레사 같은 삶을 살았다. 그녀는 자신의 삶의 끝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그분을 간직했다는 게 얼마나 운이 좋은지를 회상하고 감사하였다. 도로시 데이의 삶이 내게 울림을 준 것은 가난한 사람과의 연대, 그 힘겨운 삶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는 데 있다.

또 자기포기, 이후는 그녀가 두려워했던, 어떤 친밀한 육체적인 관계도 없는 삶을 살았다. 애초에 급진주의자들의 표방했던 해방과 자유 대신 순종, 섬김, 자기포기의 삶을 살았다. 모두가 그렇게 살수는 없겠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기포기없이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지옥에 있는 모든 고독과 분노, 증오, 질시와 참을 수 없는 갈망을 다 하나의 경험에 뭉쳐 저울에 올려놓는다 해도, 천국에서 가장 작은 존재가 느끼는 찰나의 기쁨에도 미치지 못한다네...지옥의 모든 불행이 한데 뭉쳐 저 가지 위에 앉아 있는 작고 노란 새의 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지상의 태평양 정도는 분자 하나에 불과하다고 할 만큼 거대한 태양에 잉크 한 방울 떨어진 것처럼 흔적도 없이 흡수되어 버릴 걸세”(천국과 지옥, CS, Lewis, 166).

이 언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의 크심을 늘 기억하게 한다. 치욕스러운 삶도, 강렬한 분노도 찰나의 기쁨에도 미치지 못하기에 버릴 수 있다. 이미 삶이 망가졌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선포합니다. 아닙니다. 어떤 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당신은, 언약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언약 안에 있는 당신에게는 찰나의 기쁨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옥의 총합을 견딜 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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