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강해10] 열린문 예수 그리스도(계 3:7-13)
[요한계시록강해10] 열린문 예수 그리스도(계 3:7-13)
  • 김상학 목사
  • 승인 2019.07.0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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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성경제일교회 김상학 목사
▲안산 성경제일교회 김상학 목사

 

들어가는 말

몇 달 전, 아프리카 선교지 방문을 위한 노회 선교부의 미팅이 있었습니다. ‘누가 갈 것인가?’ ‘선교지를 방문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선교지를 잘 도울 수 있을까?’ 라는 주제로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누가 갈 것인가?’를 따지자면 시간이 더뎌질 수밖에 없기에 우선 가기로 했던 최소한의 인원, 노회장과 나, 두 사람만이라도 먼저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현지 선교사가 짜 놓은 일정에 맞추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선교지를 잘 도울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선 여비는 각 교회에서 지출하기로 했고, 선교헌금은 노회의 예산과 찬조헌금으로 충당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구체적인 준비사항은 제가 선교사와 연락하면서 추진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사실 아프리카 방문은 제일 약한 사람 둘이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의 건강 문제도 변수가 많지만 노회장도 나만큼이나 골골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아프리카에서 오라고 손짓하는 선교사의 손은 분명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기쁨으로 진행 했던 것이지요. 더구나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입니다. 성도들의 삶도 그리 부요한 형편이 아닙니다. 사백만원 정도의 여비를 지출한다는 것이 자칫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게지요. 그럼에도 전 제직이 기도로써 함께 하니 하나님이 하시고 계시다는 확신과 함께 담대하게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작은 능력을 가졌느냐?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을 우리 주께서 행하실 줄 믿습니다.

 

1. 빌라델비아 교회(8절)

빌라델비아는 사데에서 동남쪽으로 약 40km 거리에 있는 도시입니다. 다른 소아시아의 도시보다는 작지만 ‘동방의 관문’이라고 불리는 교통의 요충지로 상업이 매우 발달한 도시입니다. 상업이 매우 발달했다는 것은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상인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정기적인 우상숭배도 필수적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협동조합이나 우상의 신전은 당시의 대부분의 도시가 공유하는 공통분모이지요.

그런데 이곳도 사데와 마찬가지로 AD. 17년에 있었던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때에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가 빌라델비아를 다시 재건하였는데 이를 기념하여 도시의 이름을 ‘새 황제’를 뜻하는 ‘네오-가이사리아(Neo Caesarea)’로 바꾸게 됩니다. 결국 황제를 신격화하는 계기가 된 것이지요. 지진에 모든 우상의 신전이 무너졌는데 황제는 도시를 다시 세우고 황제 신전을 세웠으니 황제의 위상이 높아진 게지요.

뿐만 아니라 빌라델비아에도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우상숭배를 면제받는 혜택을 누리기도 했지만 면제받지 못할 때에는 도시의 우상숭배 축제를 국가 의례 정도로 여기면서 참여하곤 했었지요. 이와 같은 변질된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나 교회의 핍박자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숭배에 단호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눈엣 가시가 된 것이지요. 스스로를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이는 것에서 견딜 수 없었던 겁니다. 사실 빌라델비아의 사람들보다 유대인들의 핍박이 더 극심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처한 상황도 다른 도시의 교회와 다를 바 없었던 게지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빌라델비아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리 작은 능력의 교회였다는 사실입니다.

8절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8절 말씀을 원문대로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왜냐하면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작은 능력을 가졌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헬라어로 “미크란~ 뒤나미”로 쓰였는데 “능력이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빌라델비아 시민들과 비교해 볼 때, 교회는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입니다. 성도들도 많지 않았고, 도시의 하층민으로 구성되어 그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는 미미한 교회였던 게지요.

이런 힘없는 교회인데 상인들의 협동조합, 신전 축제, 유대인들의 핍박에 따른 삼중고를 겪고 있는 게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의 말씀을 지키고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신앙의 지조를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다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시험의 때에 그 시험을 면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10절을 읽어 볼까요?

10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이 시험은 심판입니다. 심판 뒤에는 영원한 지옥 형벌이지요. 하지만 주님은 인내의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열린 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원의 문인 게지요. 그 문을 통하면 하나님 나라,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새 예루살렘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모든 믿는 성도 앞에 열린 문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문을 열어 놓으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2. 자칭 유대인들(9절)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9절을 읽어 볼까요?

9절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유대인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자존감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은 변질되고 왜곡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하나님을 대적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회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잔멸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죄 위에 죄를 더하고 있었던 게지요.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들을 향하여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란 유대인이 아니란 뜻이지요. 주님은 그들을 사탄의 회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복음 13장 23-30절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눅 13장 28-30 “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여기에서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자들로 알고 있었지요. 그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든 선지자들의 후예라고 자처했지만, 마지막 때, 종말의 끝에는 하나님 나라 잔치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 즉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들이 되고 만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자손, 유대인이 아닌 사탄의 종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를 볼 것이나 그들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중 되었던 사람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룬 성도들이 그 잔치 자리에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이런 사실 앞에 유대인들은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교회 앞에 나와 엎드려 절하게 될 것입니다.(9절)

우리가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먼저 된 자들이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당연히 구원받은 자라고 하지 마십시오. 유대인들처럼 될까봐 심히 두렵습니다. 우리의 자세는 “나는 아주 미미한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왔습니다. 나를 받아 주소서”라는 겸손으로 주님의 열린 문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3. 빌라델비아 사람들

한편 빌라델비아의 사람들은 교회를 어떻게 보았을까요? 저들의 눈에도 교회의 모습은 정말 미미한 것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거대한 신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 신전을 비롯하여 갖가지 우상 신전, 그리고 황제 신전은 눈에 보이는 위용을 자랑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부족할 것이 없었던 그들은 그야말로 환락의 도시에서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교회란 미천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대부분 교회당을 가지고 있기에 눈에 보이는 것이 있고 세상적 가치로도 뒤지지 않지만 당시에는 그런 교회당 건물이 없이 가정에서 모였기 때문에 빌리델비아 사람들의 눈에는 더 미미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유대인들에게 핍박받는 교회의 모습, 도시에는 그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은 그들의 안중에도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시민들에게는 한 가지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AD 17년에 있었던 대지진입니다. 그 지진이 한 번만 일어나고 만 것이 아니라 계속된 여진의 공포로 그들은 조금만 지반이 흔들려도 성 밖으로 도망쳤고 진정되면 다시 돌아오곤 했습니다. 신전은 다 허물어졌고 도시는 비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그 어떤 신도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했던 게지요. 이때에 로마의 테베리우스 황제가 도시를 다시 건설했고 도시의 이름을 ‘새 황제’라는 뜻의 ‘네오-가이사리아’로 바꾸었습니다. ‘신 도시’가 그들의 지진 트라우마를 치료했을까요? ‘꾸릉’ 소리만 나도 뛰쳐나가야 하는 불안감은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떠했을까요? 본문 12절을 읽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기는 자, 다시 말해서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한 성도”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된답니다. 하나님의 성전 앞에 디오니소스 신전, 황제 신전이 설 수 있습니까? 그것들은 산산이 부서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지요. 그들은 꾸릉 거리는 지진 소리만 들어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성문 밖으로 뛰어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미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었음을 보고 있습니다. 가장 안전한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 땅에 지진이 와도 담대할 수 있는 게지요. 그렇기에 12절 하반절에서 “그가 결코 (성 밖으로)나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사탄의 회당이요, 빌라델비아 사람들 역시, 술 귀신, 디오니소스, 황제 신전의 종들로서 심판을 면치 못하지만, 교회는 “열린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게 되고,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새겨진 새 예루살렘의 시민권을 받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새겨진 영원한 그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나가는 말

말씀을 맺겠습니다. 7절 서두에 주님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나님의 성전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웅장한 신전을 짓고, 로마 황제 신전을 드나들어도, 또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회당을 드나들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아무리 열린 문이라도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빌라델비아 성도들 같아야 합니다. 그들은 정말 미미한 존재였습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세상의 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의 은혜를 입어 열린 문으로 들어가 주님과 하나 됨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미미한 존재로 볼 것입니다. 요즘 같은 때에는 그 정도가 아주 극심합니다. 교회를 조롱하고, 성도를 모욕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분명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붙잡아야 합니다.

11절에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라고 하였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성전의 기둥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시험의 때에 성 밖으로 뛰쳐나가도 우리는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의 새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은 영원한 성이요, 안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의 모퉁이 돌,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금은 완전하지 않을지라도 장차에는 완전한 주님의 몸을 이룰 것이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할 지라도 열린 문 되신 주님께 들어가 완전한 주의 형상을 가진 성도로 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열린 문 되신 주께 들어가 주와 하나 된 모습으로 씨에라리온을 향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모습으로 삶의 현장으로 나가십시오. 그럴 때 세상을 능히 이길 줄 믿습니다. 세상이 우리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ㅊㅊ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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