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의 죽음] 넷째 마당: 가룟 유다에게 배신 당하다
[나사렛 예수의 죽음] 넷째 마당: 가룟 유다에게 배신 당하다
  • 김인철 목사(예슈아성서연구원 대표)
  • 승인 2019.10.03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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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아성서연구원 김인철 대표
▲예수아성서연구원 대표 김인철 목사

예루살렘 순례자들에게 가장 인기 없는 장소 중 하나는 ‘성 오프리누스 수도원’일 것이다. 베드로 통곡 교회에서 훤히 보일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 이 수도원은, 가룟 유다가 자살했다고 알려진 아겔 다마에 있다.[1] 순례자들이 성지에 오는 이유는 믿음을 확인하고 성스러운 흔적과 정서적으로 하나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가룟 유다가 자살했다고 알려진 장소로 올 이유는 없어 보인다. 순례가 아닌 답사 목적이라 할지라도 선뜻 방문하고 싶지는 않은 장소이다. 게다가 가룟 유다 자살의 직접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래 된 공동묘지와 붙어 있는 이 수도원이 아랍인 마을 가운데 있다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I.  수수께끼의 인물

가룟 유다에 관한 이야기는 수수께끼로 가득 차있다. 우선 그의 이름 앞에 붙은 가룟(이스카리옷)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문이다. 그러니까 그가 어느 지방 출신인지,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세리 출신 마태를 제치고 어떻게 금전 관리를 맡게 되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스승을 배신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왜 은전 30이라는 하찮은 돈에 팔았는지도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스승을 넘겨준 다음 날 무슨 이유로 대제사장에게 돈을 돌려주었는지도 명확히 알 수 없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가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죽음 이야기는 오직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에만 나오며, 그나마 두 문헌의 진술은 많이 다르다.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그는 겟세마네 동산의 배신 이후 자취를 감춘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를 넘겨준 뒤 어디로 갔으며, 왜 세 복음서 저자들은 거기까지만 기록한 것일까?

우선 예수의 열 두 제자 목록에 있는 그의 이름부터 살펴 본다. 제자들의 목록에서 그의 이름은 언제나 ‘가룟 유다’이다.[2] 그의 이름 앞에 ‘가룟’이란 말을 붙인 이유는 유다라는 이름의 다른 제자 즉,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두 사람은 열두 제자 중 맨 마지막 그룹에 함께 속했기 때문에, 혼동을 방지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3]

가룟 유다는 마지막 그룹에서도 항상 마지막에 나오는데, 그가 배신자이기 때문이었다.[4] 제자 목록이 아닌 곳에서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가룟인 아닌 유다’로 부른다.[5] 대조적으로 가룟 유다는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로 부른다.[6]

우선 여기서 가룟 유다의 아버지 이름이 시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몬 혹은 시므온은 1세기 유대 사회에서 가장 흔한 이름의 하나였다. 어쨌거나 시몬 앞에 붙은 가룟은 지명을 가리킬 개연성이 크다. 널리 알려진 통설 중의 하나는 ‘이스카리옷(가룟)’이 남자를 가리키는 ‘이스’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케리옷’의 합성어라는 것이다. 그럴 경우 ‘케리옷 출신 시몬의 아들 유다’가 된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1세기 유대교에 정통한 게자 베르메스는 ‘케리옷’이 그냥 도시를 가리키는 ‘키르야’라는 단어와 가깝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시 남자 유다’라는 의미가 되는 셈이다.[7] 가장 많이 알려진 이론은 라틴어로 암살자를 가리키는 단어 ‘시카리우스’를 히브리어로 테러리스트를 가리키는 단어 ‘시카리’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외에도 아람어로 ‘잘못된 자’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든가, 심지어 잇사갈 지파에서 온 단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반론을 넘어서지 못하는 주장에 불과하다.

야곱의 아들 유다는 넷째로 태어났으며, 요셉을 은전 20에 미디안 대상에 팔아 넘긴 장본인이었다.[8] 공교롭게도 가룟 유다는 예수를 은전 30에 대제사장에게 팔아 넘겼다. 유다 때문에 요셉은 파라오의 측근 중 한 사람인 보디발의 손 아래 들어갔고, 예수는 로마 황제 직속 관할지의 사령관 빌라도의 손에 떨어졌다.

가룟 유다가 등장하기 전 ‘유다(예후다)’는 민족-유대인(예후디)을 상징하는 영광스러운 이름이었다. 다윗 왕국을 있게 한 조상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배에서 돌아온 유대 민족을 셀류오쿠스 왕국의 안티오쿠스 IV로부터 건져낸 유다 마카베오의 이름이기도 했다.

둘째 마당에서 살펴본 것처럼 에돔인 헤롯 왕가에 도전장을 내민 갈릴리 항쟁 주모자 이름도 유다였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등장한 이후, 정확히는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유럽에서 ‘유다’는 배신의 아이콘으로서 반유대주의가 확산되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된다. 로마 제국이 유대 민족에게 가룟 유다의 이미지를 씌어버린 것이다. 유다의 개인적 배신 행위는 유대 민족 전체에 투사되었다. 이후 유대인은 곧 가룟 유다로 취급되었고, 예수의 피 값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몇몇 군중의 외침은 유대 민족 전체의 함성으로 왜곡 되었다.

 

II. 유다의 배신

20세기의 저명한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배신을 ‘두터운 인간관계를 붙인 접착제를 떼어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9] 접착제로 붙여진 두터운 인간관계는 혈연, 친구, 국가 등의 소속 집단으로 표현된다. 배신은 그 집단의 두터운 인간 관계를 공격하여 피해를 입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격과 피해를 통해 일어나는 손상은 신뢰의 상실이다.[10]

그런 점에서 가룟 유다의 행위는 명백히 배신에 속한다. 나사렛 예수의 신앙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신뢰를 잃어버리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성만찬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예수가 배신당했다고 말했다.[11]

유다는 왜 예수를 배신했던 것일까? 이 어려운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 먼저 유다와 다른 제자들과의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두터운 관계를 맺지 못했을 것이다. 지연과 혈연으로 얽힌 제자 그룹에서 유다는 외톨이었다. 그는 갈릴리 사람이 아니었고, 다른 제자들과 친구나 형제 관계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알 수 없는 동기에서 예수를 찾아 왔고, 핵심 제자 중 한 명으로 발탁되는 행운을 누렸을 뿐이다. 그러니까 제자들과의 수평 관계 없이, 예수와 수직 관계에만 속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과 예수의 관계를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인 것으로 인식했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그는 12 제자 중 유일하게 예수의 행동에 대해 토를 달고 나선다. 그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을 때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며 그녀를 책망했다.[12] 그 책망은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은 예수를 겨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스승의 행동을 간접적이지만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유다의 배신을 알기 위해 아비샤이 마갈릿의 모듈성(modularity) 이론을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모듈성 이론이란 양립할 수 없고 정면 충돌하는 관계를, 별도의 모듈로 독자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아내와 애인과의 관계를 모두 유지하려 하는 경우이다. 물론 그는 아내와 애인이 연결되는 일이 없도록 떼어놓기 위해 혼신의 힘을 쓴다. 그러면서 그는 아내와의 관계에 손상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내가 그 사실을 알고 절망에 빠질 때 진정으로 놀라게 된다.[13]

복음서 저자들은 가룟 유다가 돈까지 받아가면서 대제사장과 내통할 때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대제사장이 예수를 이교도인 로마 총독에게 넘겨버렸을 때이다.[14] 유대인을 이교도의 손에 팔아 넘기는 용서 받지 못할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가룟 유다는 예수가 전하는 새 세상과 성전 제도로 상징되는 옛 질서의 두 모듈 사이를 열심히 떼어놓으려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두 개의 모듈을 더 이상 떼어놓지 못하는 시점에 이르러, 예수와 새로운 세상을 포기해버렸을 지도 모른다.

복음서 저자들은 가룟 유다가 배신한 동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마귀의 탓으로 돌렸다.[15] 제 정신으로 행한 일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다의 마음이 언제부터 예수에게서 떠났는지 알 수 없다. 유다의 배신을 마귀의 탓으로 돌린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모두, 마지막 한 주간에 무교절이 시작되기 전 어느 시점에 마귀가 들어간 것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그보다 훨씬 전에 예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 만찬 전에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 대장을 만나 거사를 모의했다. 마태복음은 가룟 유다가 거기서 몸 값을 요구했고, 대제사장들로부터 은화 30을 받았다고 기록했다.[16]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그 자리에서 액수 미상의 돈을 받기로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17]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을 찾아간 이야기 자체를 생략한다. 따라서 돈 이야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빵 한 조각을 예수로부터 건네 받고 사탄이 들어갔으며,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는 말을 듣고 어디론가 나갔다고 한다.[18]

사도행전은 가룟 유다가 받은 돈으로 밭을 샀다고 한다. 은화 30은 노예 한 명을 실수로 죽였을 때 배상해야 하는 액수의 돈이었다.[19] 그러니까 예수는 노예 한 명의 목숨 값으로 대제사장들에게 팔렸던 것이다. 가룟 유다가 그 정도의 작은 액수로 예수를 팔아 넘긴 이유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유다는 대제사장이 보낸 병력을 데리고 겟세마네로 올라왔다. 누가 예수인지 알려 잡아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예수에게 “랍비여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하며 입을 맞추었다.[20] 여기서 입을 맞추는 행위는 가까운 사이끼리 나누는 인사였다.[21] 이로써 유다는 예수에 대한 세 가지 배신 행위를 완성했다. 첫째는 대제사장들에게서 돈을 받고 팔아 넘긴 것이고, 둘째는 함께 빵을 나누던 관계에서 돌아선 것이고,[22] 셋째는 우정의 입맞춤 인사로 예수를 함정에 빠뜨린 것이다.

 

III. 유다의 최후

사도행전에는 가룟 유다의 최후를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고 묘사했다.[23] 교회의 오래된 해석은 가룟 유다의 몸에 들어갔던 마귀가 나오면서 배가 터진 것으로 본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변비를 앓았는데, 사탄이 자신의 창자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24]

피터 스탠퍼드의 인용 글을 소개해 본다. “루터는 반유대주의 소 논문 <알 수 없는 이름>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스가리옷 유다가 목을 매어 죽었을 때, 창자가 터져 나왔다. 어쩌면 유대인들은 하인들을 시켜서 금과 은을 담은 쟁반을 들고 유다에게 가서 다른 보화들과 함께 유다의 창자와 오줌을 받아오게 하지 않았을까? 유대인들이 사람을 꿰뚫을 것 같은 눈빛을 지니게 된 이유도 유다의 창자를 먹고 오줌을 마셨기 때문이다”.[25]

루터는 개신교가 가톨릭의 반유대주의를 답습하도록 이끈 인물이다. 그는 공공연히 유대인들을 박해하도록 독일인들을 부추겼다. 유대 백과사전은 루터가 아우슈비츠 용광로를 점화한 인물로 소개한다. 히틀러가 그의 사상에 크게 고무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의 최후에 대한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의 진술은 차이가 크다. 마태복음에서는 유다가 목을 맸다고 했고[26],사도행전에서는 곤두박질쳐서 창자가 흘러나와 죽었다고 했다. 곤두박질쳤다는 말은 높은 데서 뛰어내려 몸이 부서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우선 가룟 유다가 목을 매어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목을 매어 자살하는 것은 배신자에게 어울리는 죽음이다.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반란을 기획했던 아히도벨은,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고향으로 돌아가 목을 매 자살했다.[27] 그리고 힌놈의 골짜기로 이어지는 언덕 어디쯤에서 몸을 던졌을 가능성도 있다. 나중에 지옥을 가리키는 단어-게헨나로 전용된 힌놈의 골짜기는, 악인이 떨어져 죽을 장소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사도 행전은 자살 장소에서도 약간 차이를 보인다. 마태복음에서는 유다가 목을 맨 장소가 아겔다마인지 분명하지 않다. 사도행전에서는 유다가 아겔다마에서 죽었다고 한다. 가장 큰 차이는 아겔다마 밭을 매입한 인물에서 드러난다.

마태복음에서는 대제사장들이 매입했는데, 사도행전에서는 가룟 유다가 미리 사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아겔다마 매입을 예레미야 예언의 성취로 본 반면[28],사도행전은 다윗의 저주 시편이 성취된 것으로 보았다.[29] 서로 다른 두 예언의 공통점은 배신자의 말로에 관한 것이다. 시편은 배신자 개인의 죽음에 관한 것이고, 스가랴서는 하나님을 배신한 이스라엘의 멸망에 관한 것이다.[30] 그것과 함께 중요한 것은 ‘피 밭(아겔다마)’이라고 부르는 토기장이 밭의 상징성이다.

토기장이의 밭이란 토기장이가 진흙을 뜨는 장소를 가리킨다. 진흙의 붉은 색깔이 피와 닮았기 때문에, 근동 일대의 창세 신화에서 언제나 인간은 진흙으로 만들어진다. 수메르 신화에서 인간은 진흙에 신의 피를 섞어 만들었다. 하트쳅수트 장제전에 새겨진 이집트 신화에서는 크눔 신이 진흙으로 인간을 물레에 얹어 빚고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인간을 빚어 숨결을 불어 넣어 살아있게 만들었다.[31]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은 토기장이이다.[32] 아겔다마는 원래 토기장이의 밭으로서 피 색깔을 띠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가룟 유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뿌려져, 피 밭이라는 이름이 한층 더 부각되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이 가룟 유다가 돌려준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다. 나그네의 묘지란 외국인 거류민을 위한 매장지인데, 유대인들이 시체로 인해 부정해지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이다.

따라서 굳이 비싼 땅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대제사장들이 매입한 토기장이 밭의 가격은 은화 30으로서 일용직 노동자에 지나지 않았다. 토기장이의 밭 값이 싼 이유는, 흙을 파낸 구덩이를 사람들이 쓰레기 매립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여기 저기 쓰레기 구덩이가 있는 땅은 주택지나 경작지로 적합하지 않았다. 아겔다마는 일찍부터 쓰레기 매립과 매장지로 사용되던 힌놈의 골짜기에 있었다. 대제사장들은 거류민 매장지로 가장 적당한 지역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왜 4복음서 중 유일하게 마태복음에만 가룟 유다의 최후가 언급되어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알려진 대로 마태복음은 비교적 후대에 기록된 책이다. 특히 마태복음보다 먼저 씌어진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가룟 유다의 최후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33] 그것은 가룟 유다의 최후 이야기가 비교적 후대에 기독교 공동체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마태복음이 씌어질 무렵 신자들에게, 교회가 가룟 유다의 죽음을 교훈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불행한 죽음을 맞았던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아나니아 삽비라 이야기가, 가룟 유다의 비극적 죽음 이야기에 이어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어쨌거나 복음서가 씌어질 초창기에는, 가룟 유다의 최후 이야기를 잘 몰랐거나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실제로 어떤 최후를 맞았을까? 유대인 학자 데이비드 플루써는 누군가에 의해 암살되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한다.

1세기 유대사회에는 동족을 이교도에게 팔아 넘기는 유대인을 암살할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는 것이다.[34] 플루써의 말대로라면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돈을 돌려준 이후, 어쩌면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있을 시간대에 살해되었을 지도 모른다. 암살자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에선가 죽음을 맞은 후 시신이 힌놈의 골짜기에 던져졌거나, 최악의 경우 자살로 위장한 교수형에 처해졌을 지도 모른다. 배신자 혹은 국가적 반역자에게 해당하는 벌은 죽음뿐이었다.[35]

 

IV. 유다의 왜곡

2006년 4월 6일 성 금요일, 스위스의 메세나 고 미술 재단은 미국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재단과 합동으로 콥트어로 된 소위 <유다 복음서> 사본과 19개국 언어로 된 번역본을 공개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리는 날에 맞추어 파급 효과를 극대화 하려 했던 것이다.[36] 해설은 <성경 왜곡의 역사> 등의 저서로 이름을 날린 초기 그리스도교 전문가 바트 어만이 맡았다.

한국어 판은 동방 그리스도교와 영지주의 전문가 이수민 박사가 고대 근동 전문가 배철현 박사가 공동 감수했다. 원래 이 사본은 1976년 이집트의 골동품 시장에서 발견되었다가,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전격 공개되었다. 총 26쪽 분량의 파피루스로 된 이 책자는 “예수가 유월절을 준수하기 3일 전, 일주일 동안 가룟 유다와 대화하며 말한 계시에 대한 비밀 기록”이라는 말로 시작한다.[37]

원래 기원후 2세기에 헬라어로 씌어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문서의 콥트어 사본은 기원후 4세기의 것이다. 이 책 어디에서도 저자가 유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 문서의 가장 큰 특징은 가룟 유다가 가장 뛰어난 제자이며, 배신자가 아니라 지상과업을 완수하도록 그리스도와 모의하여 로마에 넘겨준 인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영지주의 가인 파에 의해 씌어진 이 문헌에는, 예수가 성만찬을 조롱하며 비웃을 뿐 아니라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유다 복음서>를 포함 영지주의 문헌을 보는 사람들의 관점은 대부분 흑백 논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영지주의 문헌이 원래 기독교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든가, 아니면 기독교를 왜곡하던 초기 이단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자신의 논리를 펼치는데 열중한다. 그런데 영지주의 문헌을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알게 된다.

놀랍게도 영지주의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으며 부활도 없었다고 가르침으로써, 정통 교리가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만약 영지주의 기독교가 원래의 모습이라면, 정통 기독교가 중요하게 여기는 주제 외에도 다룰 것이 많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육체의 부활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1세기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주제였다. 예수와 초기 나사렛 공동체가 모두 유대인이었음을 생각할 때, 기독교의 탄생부터 부활 신앙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오히려 헬레니즘 문화에서 육체의 부활은 낯선 개념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린도 교회 일부 신자들을 가르치느라 애를 먹었다.[38]

따라서 영지주의 기독교는 유대 문화에서 출발한 기독교가 헬라 문화 속으로 들어가면서 생겨난 현상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유다 복음 한국어 판을 감수한 이 수민 박사의 말을 인용해본다. “이러한 몇 가지 설명을 통해 고대 후기에 번성한 영지주의는 그들의 고유한 언어와 상징을 가지고 사색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색이 로마 제국에서 이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매력적이었기에 교부(반이단론자)들이 그렇게도 아우성친 것이다.

신약성경의 공관복음은 아람어에 친숙한 유대-그리스도인들 세계에서 쓰인 글이며,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로마의 이교 교육에 숙달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 작품은 그들이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론을 그리스 철학(특히 플라톤 사상)과 고대 후기의 신화, 그리고 혼합 대중 종교와 과도하게 절충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어 저서들을 통해 잘 알려진 반이단론 교부들(이레네우스, 가명-히폴리투스, 에피파니우스)은 모두 시리아어를 사용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출신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승리한 전통 교의는 아람어-시리아어 전승이었던 것이다”.[39]

유다에 대한 왜곡은 유럽 기독교 역사에서 반유대주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개인 유다의 이미지를 유대 민족에게 덧씌워버린 것이다. 교황 젤라시우스 I(492-96 재위)는 그 짓을 가장 먼저 시작한 인물이다. 그는 이렇게 설교했다. “성경에서는 일부를 지칭하는 명칭이 실제로는 전체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유다가 악마로, 악마의 하수인으로 불릴 때, 유다라는 명칭은 그가 속한 전체 인종을 의미한다.[40]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불가타 역)했던 히에로니무스(347-420)는 유다가 저주를 받았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유다를 통해 유대인들도 저주를 받았을 수 있다. (당신이 본 것처럼)유대인들은 기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도는 죄로 변모했다…… 당신은 유다의 후손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유대인들이다……. 이스가리옷은 돈과 죗값을 의미한다. 유대교 회당은 구세주와 이혼하고 대신에 배신자 유다의 아내가 되었다”.[41]

황금의 입으로 불렸던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47-407)는 아겔다마에서 유다가 맞이한 처참한 최후가 전체 유대인이 향후 처할 운명을 예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마태복음 주해서에서 이렇게 썼다. “신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그 대지를 히브리어로 ‘아겔다마’라고 부르게 하셨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 말을 유대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서 유다가 이런 고통을 받았다면, 이후로 유대인들은 더 큰 고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42]

중세 시대에 가룟 유다는 금융가들을 공격하는 도구가 되었다. 단테는 <지옥편>에서 금융가들을 7층 지옥의 맨 아래에서 세 번째에 배치했다. 당시 교황청은 금융가들에게서 돈을 빌리고 있었다. 청빈한 생활을 강조했던 성 프란치스코의 고향 아시시에는 유다가 그려진 성당이 11곳이나 되는데, 모두 12~13세기의 작품들이다. 당시 금융가들에게 가룟 유다의 이미지를 덧씌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명한 미술사학자 제닛 롭슨은 이 주제에 대한 연구 결과를 이렇게 정리했다. “유다의 이미지를 연구한 결과, 12세기에 37개, 13세기에 65 개에 불과하다가, 14세기에는 자그마치 201개로 크게 증가했다”.[43] 중세 시대 가룟 유다는 미술뿐 아니라 연극의 주제로도 인기가 높았다. 일종의 거리 공연이었던 유다 화형식은 영국 리버풀에서 20세기 후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들을 향한 대중의 증오가 유대인에게로 옮겨간 흔적들이다. 곳곳에서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 박해가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히틀러의 유대인 600만 학살은 갑자기 등장한 이슈가 아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나치와 맞서 싸우던 연합군 측도 종전이 될 때까지 유대인 학살을 적극적으로 막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을 가룟 유다의 이미지를 가지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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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주] 

[1] 아겔다마는 아람어로 ‘피 밭’이라는 뜻이다(행 1:19). 그러니까 이 수도원은 시온 언덕에 있는 베드로 통곡 교회 남동쪽, 기드론 시내와 힌놈의 골짜기가 만나는 비탈길에 세워져 있다. 이집트 출신의 오프리누스가 이곳에 온 시기는 기원후 4세기경이었다. 은둔 수도자였던 그는 평생 나체로 지내며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했다고 한다. 예루살렘 주민들의 공동묘지이자 쓰레기 처리장이어서 숨어 지내기가 용이했을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 형을 받은 후 제자들이 이곳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2] 마 10:4;막 3:19;눅 6:16.

[3] 첫째 그룹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며, 둘째 그룹은 빌립 바돌로매(나다나엘) 도마 마태이고, 셋째 그룹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야고보의 아들 유다) 셀롯인(가나안인 시몬) 가룟 유다이다. 제자들의 목록에서 소속 그룹은 변하지 않으며, 그룹 내에서는 앞뒤가 바뀌기도 한다.

[4]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 10:4),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막 3:19),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눅 6:16).

[5] 요 14:22.

[6] 눅 22:3;요 6:71;13:2.

[7] 피터 스탠퍼드 지음, 차 백만 옮김, 예정된 악인, 유다, 미래의 창, 2016년, 39-40쪽.

[8]

[9] 아비샤이 마갈릿 지음, 황 미영 옮김, 을유문화사, 2017년, 85쪽.

[10] 아비샤이 마갈릿, 앞의 책, 136쪽.

[11] ‘잡히시던’으로 번역한 헬라어 ‘파라디도미(paradi,dwmi)’의 의미는 ‘넘겨주다’ ‘배신하다’이다

(고전 11:23). 이 단어는 가룟 유다의 배신을 묘사할 때 줄곧 사용되었다(마 26:21,25;막 14:18,2142;눅 22:21,2248). 파라디도미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카르(מכר)’ 역시 ‘팔아 넘기다’ ‘넘겨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징계를 묘사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 야훼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면, 주변 민족의 손에 팔아 넘겨(마카르) 종이 되게 한다(삿 2:14). 이스라엘이 먼저 접착제를 떼어내면, 야훼도 접착제를 떼어내 버리는 것이다.

[12] 막 14:5.

[13] 아비샤이 마갈릿, 앞의 책, 186-90쪽.

[14]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마 27:2-3).

[15] “열 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눅 22:3).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조각을 받은 후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 13:27). 고대 세계에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은 마귀 혹은 귀신의 탓으로 돌렸다. 따라서 가룟 유다의 배신에 면죄부를 주기 위한 표현이 아니다.

[16] 마 26:14-15.

[17] 막 14:10-11;눅 22:4-5.

[18] 요 13:26-27. 요한복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하려는 목적으로 씌어졌다(요 20:31). 따라서 유다의 배신도 예수의 통제 아래 있었음을 강조한다. 요한복음에서 유다는 예수와 견줄만한 큰 인물이 아니다. 제자 중 유일하게 사탄에게 조종당하는 자이며, 겟세마네에서 잠깐 나타났을 정도로 비중이 작게 그려진다.

[19]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 죽일지니라”(출 21:32). 수메르어 학자 조철수는 그의 저서 <예수 평전>에서 1세기 물가를 이렇게 소개했다. “예수 시대에 보통 은전 1 쉐켈은 4 데나리온과 같았다. 성전에 바치는 비둘기 두 마리의 값은 1 데나리온이었다….. 황소 한 마리의 값은 100~200 데나리온 정도였으며, 송아지 한 마리는 20 데나리온이었다. 일반적으로 노동의 하루 품삯이 1 데나리온 정도 되었으며 서기(서사)는 하루에 2 데나리온을 벌었다. 한 달 월세는 4 데나리온 정도였고, 작은 빵 하나와 콩 수프, 고기 두 조각과 포도주 두 잔 등이 나오는 한 끼 식사는 1/2 데나리온 정도로 비교적 싼 편이었다. 일반적으로 4~5년 입을 수 있는 보통 옷은 4 데나리온 정도였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대제사장) 예복 값은 1만~2만 데나리온 정도였다”(조철수, 예수 평전, 김영사, 648-50쪽).

[20] 마 26:49;막 14:45;눅 22:48.

[21]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 ‘카타필레오(katafile,w)’에 우정을 나타내는 ‘필레오’가 들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22] 고대 세계에서 식탁 공동체를 배신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식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동맹관계의 확인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동맹자의 배신을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다윗 또한 매월 초하루 사울과의 식사에 불참함으로써 반역자의 누명을 썼다(삼상 20:24-34).

[23] 행 1:18.

[24] Richard Marius, Martin Luther: The Christian Between God and Death(Harvard, 1999); 피터 스탠퍼드, 앞의 책, 287쪽에서 재인용.

[25] Gerhard Falk, The Jew in Christian Theology(Jefferson, 1992); 피터 스탠포드 앞의 책, 288쪽에서 재인용.

[26] 마 27:5.

[27] 삼상 17:23.

[28] 마 27:9-10(렘 32:6-9;슥 11:12-13). 예레미아는 은화 17에 삼촌의 밭을 샀고, 스가랴는 목자의 삯으로 받은 은화 30을 토기장이에게 주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 두 예언을 합성했다. 예레미야가 삼촌의 밭을 산 것과 스가랴가 토기장이에게 은화 30을 준 것이 가룟 유다의 죽음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구절을 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1세기에 많이 사용하던 ‘게제라샤바(유추)’ 방식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느 계명이 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을 합성해서 대답한 것과 같다.

[29] 시 69:25;109:8.

[30] 슥 11:6.

[31] 창 2:7. ‘땅의 흙(아파르 민 하아다마)’이란 표현에서 ‘땅(하아다마)’에는 ‘피(담)’라는 단어가 이미 들어 있다.

[32]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지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은 것이니이다”(사 64:8).

[33] 물론 마태복음보다 늦게 씌어진 요한복음도 가룟 유다의 최후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저 사탄에게 씌어 어둠 가운데로 사라졌다가(요 13:30),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깐 나타났던 것으로만 묘사한다(요 18:5). 심지어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의 저 유명한 입맞춤도 기록하지 않았다.

[34] David Flusser, Jesus, Magnes Press, 2001, 143 쪽.

[35]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집요하게 찾아 다녔던 이유도 반역죄를 묻기 위한 것이었다(삼상 22:8,13). 다윗은 자신의 뜻을 거슬렀던 요압과 반역자 시므이를 죽이도록 솔로몬에게 유언했다(왕상 2:5-6,8).

[36] 한국어 판의 경우 평소보다 10배의 매출을 올렸다고 한다.

[37] 예수와 유다의 밀약 유다복음, 김환영 대표 번역,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판, 2006년, 15쪽.

[38]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고전 15:12-13).

[39] 유다복음, 앞의 책, 168쪽.

[40] Edward A. Synan, The Popes and the Jews in the Middle Ages(New York, 1965); 피터 스탠퍼드 앞의 책 162쪽에서 재인용.

[41] Robert Michael, A History of Catholic Anti-Semitism(New York 2008); 피터 스탠퍼드 앞의 책, 162쪽에서 재인용.

[42] 피터 스탠포드, 앞의 책, 163쪽에서 재인용.

[43] 피터 스탠포드, 앞의 책, 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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